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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몽롱탑
“아무래도 요택 쪽으로 회군하지 않겠는가?”
연개소문의 명으로 뒤늦게 발해만을 돌아 요하에 상륙한 고정의는 상류인 요동성 북쪽과 하류인 요택 진입로를 두고 어디로 상륙할지에 대해 부하들과 첨예하게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이세민이 요하에 당도하기 전에 요택을 넘으면서 건너왔던 다리를 모두 부수고 배수의 진을 선언하였다 들었습니다.”
“그 험난한 늪지대를 설마 제 발로 다시 기어 들어가려 하겠습니까?”
“두 분 욕살(褥薩)의 말씀대로이옵니다. 상류로 가시지요!”
남부욕살 고혜진과 북부욕살 고연수가 의견을 냈고 뇌음신이 동의했다. 고정의는 이세민이 추격군을 피해 가까운 요택으로 빠져나갈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했으나 부하들의 완강한 의견에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그대들의 뜻이 그렇다면 별 수 없구려.”
고정의는 무예가 뛰어난 장수라기보다 뛰어난 지략으로 전략을 세우는 연개소문의 측근이었다.
그렇게 부하들의 의견대로 상류 쪽으로 배를 대고 상륙하자 요동성에서 몰려온 군사들과 마주쳤다. 고정의는 그들이 요동 지역에서 도망치는 당나라 패잔병들인가 싶어 급히 칼을 빼 들려 했으나 아군이었다.
“어, 어르신!”
“대인께서 어찌 이곳으로 오셨습니까?”
함께 도성에서 출정식을 거행한 소부손과 말갈 출신 생해였다.
“빌어먹을! 내 이곳이 아니라고 거듭 말했지 않소?!”
그때 뒤에서 눈살을 찡그린 고돌발이 뒤늦게 잘못 짚었다는 걸 깨닫고는 기마대를 몰고 서둘러 하류 쪽으로 움직였다.
* * *
“여봐라! 이곳은 요택으로 가는 길이 아니냐?”
“폐하! 지금은 돌아서 갈 수 없사옵니다! 북쪽의 요동성은 적들에게 포위되어 있고, 남쪽에는 개소문이 와 있사옵니다!”
황제를 보좌하는 장손무기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낯빛이 어두워진 이세민은 그보다 깊은 요택의 늪을 바라보았다.
“내가 저곳을 넘으면서 요택의 다리를 모두 끊어 버렸거늘, 어찌 내 발로 저 늪지대를 다시 건너간단 말이냐?”
“송구하옵니다! 폐하. 흐흑.”
그럼에도 저곳으로 가야만 하는 냉혹한 현실에 이세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윽고 요택 초입에 이르자 자신이 고구려 정벌을 천명하며 배수의 진을 치겠다는 명목으로 끊어버린 다리가 맞이했다. 이 안에는 평탄한 평지란 없고 살얼음이 뒤덮인 진흙 구덩이만 있을 뿐이었다.
끼이이잉!
험난한 늪지대는 말이고 사람이고 한번 빠지면 누구나 헤어나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이세민은 그 앞에서 이곳을 넘기를 주저했다. 그가 타고 온 백마와 함께 넘는 것도 어려웠기에 말을 버려야 할 수도 있었다.
“말에서 내리시옵소서!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셔야 하옵니다.”
“서두르셔야 하옵니다!”
“오랑캐들이 오고 있사옵니다. 시간이 없사옵니다!”
신하들의 간언에 말에서 내린 이세민은 발이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어서 가시옵소서!”
“어서 가셔야 하옵니다! 폐하.”
“내가 천하의 무리를 거닐고 도망을 가는 신세라니,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어찌!”
장손무기와 손이랑의 재촉에도 이세민은 계속해서 아쉬운 듯 안시성이 있는 방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그닥! 다그닥!
그런 주저함 속에 뒤에서 기마대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북쪽에서 오는 놈들입니다! 고돌발의 추격대와 말갈 기병이옵니다! 폐하.”
추격대의 정체를 확인하고 돌아온 장손무기의 보고에 이세민은 고구려군의 위세가 두려워 팔을 부들부들 떨었다.
안시성에서부터 수도 없이 올려다본 놈들의 삼족오 깃발이 다시 보이자 이세민에게 적지 않은 자극을 주고 있었다.
그러던 중 멀리 고돌발의 목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당의 황제가 도망간다! 어서 쳐라!”
스가각! 샤샥!
으아아아아!
그런 황제와 마찬가지의 기분을 느끼는 건지, 사기가 땅에 떨어진 중원의 군사들이 고구려 기마대의 창과 화살에 먹이가 되고 있었다.
때마침 후방을 신경 쓰던 이세적의 요동도행군이 도착했다.
“무공!”
“여긴 신에게 맡기시고 먼저 가시옵소서!”
“그대에게 맡기겠네. 무리하지는 말게나. 반드시 살아서 중원에서 만나세.”
“신은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황제 폐하.”
이세민이 등을 보이며 허겁지겁 요택으로 진입하려 하자 고돌발이 소리쳤다.
“이세민이 도망간다! 요택에 들어가기 전에 어서 잡아라!”
“어림도 없다! 이 고구려 놈들!”
칭챙챙!
이세민이 완전히 늪지대에 들어가기 전에 잡으려는 고돌발과 생해가 이끄는 말갈의 기마대가 창검을 휘두르며 달려갔고, 그런 그들을 막기 위해 이세적의 요동도행군이 극렬히 저항했다.
늪지대 초입에서 벌어지는 백병전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끼이이잉!
철버덕!
기마대가 늪에 빠지며 허우적거리기 일쑤였고, 칼 한번 휘두르다 넘어지는 병사들이 다분했다.
“빌어먹을! 당의 황제가 저 앞에 보이고 있거늘, 이대로 놓친단 말인가!”
고돌발은 대수성책의 마지막 장에 적힌 삼공자의 전언을 떠올렸다.
-적의 수괴는 멀고 쉬운 길보다 가깝고 어려울 길을 택할 것입니다. 혹여 요동성을 먼저 수복한다면 이를 유념하십시오.
그것의 정답은 이세민의 퇴각로에서 가장 가까운 요택이었다.
십여 일 남짓 백암성에서 격전을 벌인 계필하력과 당에 귀속한 거란의 군대가 성을 넘지 못해 물러가고, 평양과 말갈의 군사와 합류해 요동성을 수복하고 이렇게 출정할 수 있게 되었다.
과연 이세민은 안시성 공략에 실패하고 퇴각하고 있었으니 이곳 요택에 이르게 된 것이다.
-내 생각은 다르오. 처려근지.
-나도 그렇소! 이세민은 요택이 아니라 이곳으로 올 것이외다.
하지만 고돌발은 박작성 성주 소부손(所夫孫)과 말갈계 대장이자 대막리지 휘하인 생해(生偕)와 소통 문제가 발생했다. 이세민이 스스로 다리를 자른 요택을 넘지 않고 편한 길목인 상류 요하로 올라와 요서 지방의 영주로 갈 것이니 그곳에서 매복하자는 설득에 그만 넘어가 버린 것이다.
“내 삼공자의 말을 끝까지 믿었어야 했거늘...!”
고돌발은 허벅지를 탁 치며 안타까워하고 있었지만 이미 후회해도 때는 늦었다.
이세적의 요동도행군이 시간을 버는 사이 당의 황제는 벌써 늪지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기서부터는 기마대를 끌고 추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폐하를 지켜야 한다!”
거기다 방패로 무장한 채 원진을 펼치며 전술을 구사하는 이세적의 요동도행군을 뚫는 것도 만만치 않다.
당의 진법 훈련은 이런 위기 상황에도 발휘하고 있었다.
고돌발의 창끝이 이세적에게 향했다.
“무공 이세적, 황제 대신 네놈의 목으로 대신하겠다!”
“오너라! 이 오랑캐 놈!”
칭챙!
늪지대 한복판에서 이세적과 고돌발의 일기토가 벌어졌다.
칼과 창을 든 두 맹장의 사투가 한 10여 합을 넘을 때쯤 아래에서 쫓기듯 도망쳐 오는 강하왕 이도종이 소리쳤다.
“개소문의 군사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이만 피하셔야 합니다! 대총관.”
“알겠네! 폐하께서 무사히 요택에 진입하셨으니 우리도 이만 가지!”
황제의 시야가 보이지 않자 이세적은 슬슬 물러서도 괜찮을 것이라 판단했다.
“웃기지 마라! 어딜 꽁무닐 빼느냐?!”
고돌발이 즉각 창을 들며 그들을 잡으려 했으나, 때마침 말이 늪에 빠져버렸다.
끼이이잉!
“젠장, 빌어먹을!”
도망치는 적장들을 보며 고돌발은 피가 나올 때까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다잡은 당나라의 무장들을 이렇게 어이없이 놓치게 된 것이 원망스럽고 또 분통했다.
* * *
“고구려를 침탈한 당나라 놈들을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아아악”
지휘관들을 잃은 당나라 군사들은 저마다 요동 지역 곳곳에 퍼져 있었고, 추격하는 고구려 군사들이 발견하는 족족 처리하고 있었다.
“무기를 들고 투항하지 않는 자는 목을 베어라!”
안시성 인근에서 연수영이 가장 크게 호령하며 당나라 병사들의 목을 차례차례 베어 나갔다.
그녀가 착용한 비늘갑옷과 환두대도에는 적들의 피가 하염없이 뿌려져 흘러내렸다.
고국 고구려를 침범한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하겠다는 그녀의 의지는 확고했다.
안시성의 그 사내와 어린 핏덩이가 가까이 있는 까닭에 더 분주하고 있었다.
토산을 점령한 안시성을 보고는 그녀 자신만이 고생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사, 살려!”
연수영이 환두대도를 휘두를 때마다 스걱! 하며 당나라 병사의 목이 계속해서 떨어졌다. 조금 전 선언과는 달리 무기를 버린 적들마저 베어버리고 있던 것이다.
“!”
불현듯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연수영이 큰 동작으로 환두대도를 휘두르자 챙 하며 누군가의 칼과 충돌했다.
그쪽으로 칼을 든 손을 뻗자 익숙한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놈들은 이미 무기를 버렸어. 싸울 의지가 없는 놈들을 베는 건 수영이 네 취향이 아니잖아?”
익숙한 목소리에 연수영이 대도를 내렸고, 그 앞에는 생채기투성이의 찢어진 비늘갑옷을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이었다.
“하아...”
연수영은 이제 다 끝났다는 듯 칼을 바닥에 떨구고 쓰러지려 했고, 양만춘이 서둘러 달려와 부축했다.
그녀는 이곳 안시성으로 달려오기 위해 모험을 감행하며 10배가 넘는 장량의 수군을 괴멸시키고, 건안성에 있는 장검의 이민족 부대를 날려버리며 안시성까지 쉴 새 없이 달려왔다.
사내가 해도 지쳐 떨어질 수 있는 치열한 사투를 수차례나 벌였다. 여인의 몸이었던 그녀의 심신이 지치는 것은 당연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양만춘이 말했다.
“네가 고생이 많았다.”
“고생은 무슨, 당신도 만만치 않았잖아.”
두 사람은 서로를 걱정했다.
이번 전쟁뿐만 아니라 그 오랜 모진 세월 못 나눈 이야기를 단 몇 마디로 짧게 나누었다.
권력을 둘러싼 투쟁과 끊임없이 견제하는 귀족들, 그리고 고립된 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지며.
양만춘의 품에 안긴 연수정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 아인 만난 거야? 안시성에서?”
양만춘은 말없이 비녀를 보여주었고, 연수영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 * *
“이세적의 깃발이 포위가 된 것이냐? 어찌 아무런 소식이 없는가!”
“무공은 무사할 것이오니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폐하.”
이세민은 요동성 남쪽에서 요수(遼水)를 건넜다. 이백리 요택에서는 풀을 베다 길을 메우고 수레로 다리 삼고 건넜고, 바람과 배고픔으로 죽어가는 군사들이 많았다.
이세민은 직접 군사들과 잡초를 베어 수렁을 메우고 잡목을 베어 도랑을 메웠다. 그 과정 중에 비참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쓰러졌다. 도처에는 해골들이 가득했다.
“내 몸소 흙을 나르고 군사들의 상처를 입으로 빨아주기까지 하며 전쟁을 진두지휘했지만 실하고 말았다. 이 패배를 장차 어찌 한단 말이냐?”
“폐하!”
“흐흑.”
자신이 직접 거닐었던 30만의 6군 가운데 지금 이 자리에 남아있는 이가 불과 수천이었다. 평양으로 진격한 30만의 별동대를 잃은 수양제의 마음이 이와 같을 것이다.
함께 중원을 호령하던 군사들의 부재에 이세민이 울먹였다.
“위징이 만일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 원정을 하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십팔사략》
이세민은 후회를 거듭하며 가까스로 유성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죽은 군사들의 해골을 모아 재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
황제가 가슴 아프게 울자 눈물을 줄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 * *
“이세민이 요택을 완전히 빠져나갔다 하옵니다!”
“그 많은 군사들의 목숨을 희생하였으니 살아 돌아가지 않을 수야 없겠지.”
요하 앞에 다다른 연개소문이 온사문의 보고를 받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요동성과 안시성에 이어 요하 인근과 요택에 이르기까지 당나라 병사들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황제 하나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수십만의 목숨을 걸었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몹시 지친 당나라 병사들이었지만, 제 깐에 성군이랍시고 지킨다고 목숨을 아끼지 않는 적의 병사가 적지 않았다.
그 탓에 추격의 시간은 지체되었고 심지어 일부는 퇴각하면서까지 방진과 소진, 원진을 구사하며 진법을 행하고는 시간을 벌었으니 이세민 밑에서 철저히 훈련받은 정예들이었다.
“적의 수괴를 놓친 것이 분하옵니다! 대막리지.”
“분하옵니다! 대막리지.”
“분하옵니다! 대막리지.”
“분하옵니다! 대막리지.”
온사문과 고돌발, 생해, 고정의가 아쉬운 마음에 그렇게 토로하며 고개를 숙였으나 연개소문의 시선은 여전히 서쪽에 머물러 있었다.
“나 연개소문에게 도전장을 내민 이세민이가 온전히 장안에 당도하게 내버려 두겠느냐?”
고구려 무장들은 연개소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가 준비한 조의들이 이미 중원 깊숙한 곳까지 숨어들어 이세민의 목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도 모른 채 말이다.
* * *
“고구려의 조의들이옵니다! 어서 옥체를 피하시옵소서! 폐하.”
“개소문이 나를 죽이려고 이 중원에 자객들을 풀어놓다니!”
보름 후 중원에 도착한 이세민은 쫓겼다. 장안으로 가는 길목마다 변복한 조의들의 습격을 받아 길을 돌았으나 그곳에도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자객들이 숨어 있었다.
다그닥! 다그닥!
그는 홀로 정신없이 남쪽으로 말을 몰았고, 산둥반도 아래 남경 지역의 염성에 이르렀으나 바다에서 왔는지 고구려군의 추적은 멈출 기세를 몰랐다.
이윽고 수풀에 들어가 말을 보내고 물이 마른 우물을 발견해 몸을 던져 숨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지하로 숨었는데 때마침 그곳 우물 위에 거미가 가렸다. 연개소문의 군사가 와서 보니까 거미줄이 있어서 가버렸다.
‘내 살아서 장안에 돌아간다면, 이곳에 탑을 쌓아 하늘에 빌 것이다. 이것이 몽롱하여 고구려 놈들이 보지 못했으니 몽롱보탑((朦朧寶塔)이라 지을 것이야.’
이세민은 홀로 그런 생각을 하며 고구려 자객들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 * *
나는 강소성 염성에서 보았던 연개소문과 관련된 고구려 전설에 관한 꿈을 꾸었다.
그곳 관리인의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중원 동쪽에 연개소문이 있었는데 그는 전쟁을 일으켜 중원을 공격했습니다. 그가 중원을 공격할 때 당황(唐皇) 이세민이 그를 추격했는데, 이곳까지 추격하다가 연개소문에게 도리어 쫓기게 되었죠.
우물에 숨어 살아남은 이세민은 그곳에 기념비인 탑을 세워주고 몽롱탑(朦朧寶)이라 지었다. 지역의 이름마저 보탑현이 되었다.
그곳의 주민들이 하나같이 사실처럼 말하는 이야기. 그 지역 사람들은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고구려 연개소문이 실제로 그곳까지 왔다고 믿고 있다.
산동과 강소성 곳곳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구체적인 기록만 없을 뿐, 전설은 그곳에서 사실이었다. 그저 전설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게 아닐까. 어쩌면 그것이 중원에서 한참 벌어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머리가 지근지근 욱신거릴 무렵,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파앗 하며 실눈을 떴다.
“남산이 네가 어찌 이 어미를 속이고 그 먼 요동 땅에 간 것이냐?!”
누군가 했더니 그 여인의 목소리였다.
왠지 낯이 익은 기분. 의식을 차리자 이곳에 처음 왔을 때가 떠올랐다.
그야 첫날에 만난 원화 부인과 신녀가 다시 시야에 들어오면서 똑같은 레퍼토리를 반복하고 있으니까.
설마, 이거 회귀한 거 아니겠지?
나는 원화 부인이 내 싸다구를 날리지 않을까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보다 이 짓을 반복해야 할지도 모를 불안감 속에 몸을 움츠러들었다.
“이 어미를 알아보겠느냐? 흐흑.”
가만, 원화 부인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이 아무래도 회귀는 아닌 거 같은데...
나는 그녀의 다음 말에 주목해야 했다.
“남산이 너를 보자고 궁 안에서 손님들이 오셨다.”
손님...?
잠시 후 폭신한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자 정말 내 처소에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들을 둘러싼 눈부심에 눈이 좀처럼 떠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형태만 보고도 박물관에서 보고 기억한 것들을 유추할 수 있었다.
고구려의 전유물인 금속 형태 관고리에 유리구슬, 은팔찌, 금제&은제 장신구와 유물로 치장한 귀족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들 가운데는 분열을 일삼는 간악한 무리들은 물론 연개소문의 아들들을 서로 이간질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일조한 매국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정신이 드는 게냐?”
“삼공자를 뵙사옵니다.”
“삼공자를 뵙사옵니다.”
“삼공자를 뵙사옵니다.”
대막리지의 아우 연정토를 비롯해 연개소문의 책사를 자처하는 선도해, 왕족 고요묘, 제가회의 수장 부기원 등 역사에 추악한 이름을 남긴 이들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막상 이렇게 귀족들을 마주하자 한 가지 사실 만큼은 분명히 깨달았다.
나는 앞으로, 이 자들과 정치를 해야 한다.
고구려의 운명을 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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