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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반격
“으아아아아아악!”
토산 아래 황색 깃발 밑에 백마에서 떨어진 이세민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혈흔이 짙었다.
황제의 왼쪽 눈에 양만춘의 화살이 박혀 있는 것이다.
“폐하아아!”
“어서 폐하를 뫼셔라! 어서!”
“빨리 어의를 불러라!”
갑작스러운 사태에 장손무기와 이세적, 이도종이 한걸음에 달려왔고 황상의 상태를 보며 진땀을 빼고는 서둘러 지시했다.
“뭣들 하느냐! 어서 폐하를 뫼셔라!”
“당장 폐하를 보호하라!”
이세적과 이도종의 호령에 방패를 든 호위대가 머리카락 하나 들어올 수 없을 만큼 빼곡히 황제의 사위를 막아섰다.
주변의 혼란스러움에 이내 정신을 차린 이세민이 손을 저었다.
“물러서거라! 이따위 화살에 짐이 쓰러질 성싶은가!”
푸직! 빠각!
“폐, 폐하?!”
“!”
“!”
“!”
눈에 박힌 화살을 직접 뽑아 부러뜨린 이세민을 보며 이세적과 장손무기를 비롯한 신하들이 당황했다.
아무리 강건한 풍채를 지닌 황상이라도 눈에 박힌 살촉은 치명상이었다.
그런데 황제는 그걸 대뜸 뽑아 피를 철철 흘리며 안시성을 주시하고 있다.
“스친 것뿐이다!”
그 말을 하며 혈흔이 그의 왼쪽 눈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으나 물러서려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폐하! 여긴 신들에게 맡기시고 어서 환부(患部)를 치료하시옵소서!”
“그렇사옵니다! 상처가 깊사옵니다!”
“어서 막사로 들어가시옵소서!”
이세적과 이도종, 장손무기의 재촉에도 이세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군사들이 피로해 지쳤거늘 짐이 여기서 물러난다면 토산을 영영 넘을 수가 없느니라. 이 짐의 토산을 저 작은 오랑캐들에게 영영 빼앗기는 것이란 말이다!”
이세민은 눈을 콕콕 찌르는 극렬한 통증보다도 저 토산을, 안시성을, 그리고 고구려를 넘지 못하는 것이 분했다.
“천하 아래 나 이세민에게 복종하지 않는 나라가 없거늘, 어찌 이대로 물러설 수 있단 말이냐!”
주군의 마음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신하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떨구었다.
성 하나에 100일 가까이 시일을 쏟아부어 공성전을 하는 전례는 중국 역사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 정도로 찾아보기 힘들다.
전장에서 무패의 신화를 이룬 황제에게 이런 좌절은 눈알을 파고든 살촉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여봐라! 저것이 무엇이냐?!”
실눈으로 토산 아래까지 흘러들어온 뿌연 연기를 발견한 이세민이 물었다.
“개금의 어린 아들이 던진 검은 돌덩이에서 나온 연기가 이곳까지 내려오고 있는 듯싶사옵니다!”
“일단 옥체를 피하시옵소서! 저 연기를 마신 우리 군사들의 호흡이 이상해졌사옵니다! 폐하.”
이세적과 장손무기의 말대로 토산을 오르려는 군사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멎었다기보단 몸이 둔탁해졌으며 눈에서는 눈물이 나고 코에서 콧물이 흐르며 입으로는 저마다 기침을 해대고 있었다.
“대체 개소문의 아들이 무슨 짓을 벌였길래 내 군사들이 눈을 뜨지 못하는가!”
이세민의 호통에 토산 중턱까지 올라갔다 내려온 돌궐계 아사나사나이가 보고했다.
“신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저 연기에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이 자취를 숨기고는 폐하께 화살을 겨냥해 쏜 것입니다!”
“이런 빌어먹을! 천인공노할 일이로다! 감히 폐하께 이런 짓을...!”
“그 개금의 어린 자식과 안시성 성주 양만춘이 합심하여 폐하의 목숨을 노린 것이옵니다!”
아사나사이의 말에 장손무기와 이세적이 대신 분노했다.
“저, 저놈이 아니냐?!”
이세민의 검지가 허공을 가리키고 있었다. 때마침 토산에서 그 당사자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서토의 수괴 이세민이 쓰러졌다! 보아라! 너희들의 주인이 쓰러졌다!”
흙산 정상에서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연남산이었다. 그는 칼을 휘저으며 안시성과 토산 아래를 향해 번갈아 외치고 있었다. 한 번은 고구려 말로, 다른 한 번은 당나라 군사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중원말까지 더하면서.
그 소식에 안시성은 사기가 올랐는지 성안에 지친 군사들마저 앞다투어 성벽을 타고 토산으로 내려왔고, 불어나는 적들의 수에 당나라 군사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이어서 불이 붙은 수레바퀴가 멈출 기세를 모르고 내려왔고, 고구려 궁수들의 솜씨에 중간을 가보지 못하고 쓰러지는 이가 부지기수였다. 운이 좋아 토산 정상에 당도했다면 참호에 숨은 창병들에게 무참히 도륙을 당했다.
“저놈이?! 어서 저놈을 잡아라!”
자신이 누구한테 당했는지 알게 된 이세민은 충격을 먹은 듯 휘청거렸다. 거기다 녀석이 소유한 칼은 과거 중원에서 연개소문에게 빼앗긴 자신의 보검이었다.
“폐, 폐하!”
“지금 연기가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사옵니다!”
“어서 옥체를 피하시옵소서! 어서 폐하를 뫼셔라!”
부하들의 재촉에도 이세민은 억지로 균형을 잡으며 완강하게 뿌리쳤다.
“물러나지 않는데도! 이 수치를 용납할 수 없다! 내 오늘 밤 저 토산만이라도 되찾는 걸 보고 들어갈 것이야! 저 토산만이라도!”
그로부터 계속되는 이세민의 고집에 쩔쩔매는 신하들이었지만 그런 황제조차도 불현듯 급습해온 고구려 기마대를 보며 시선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와아아아아!
“큰일이옵니다! 배후에서 고구려 수군과 건안성의 군사들이 다시 몰려오고 있사옵니다!”
“강하왕은 저놈들을 여태 막지 못하고 무얼 했단 말이냐!”
“송구하옵니다! 황제 폐하.”
이세민의 시선에 이도종이 고개를 숙였다. 수천의 고구려 기마대는 전원 찰갑을 두르고 있어 보통의 화살로는 뚫을 수 없다. 저들을 대항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철갑 능력에 특화된 세형 화살촉뿐인데 토산이 무너지면서 화살촉이 상당수 매몰되었고 또 이미 안시성을 향해 사용하면서 대부분을 소모했다.
“저기 저 앞에 있는 고구려 장수는 사내가 아니라 계집이 아니더냐?”
그때 당나라 병사 수십을 단숨에 유린하는 고구려 장수의 모습에 흰자위를 씰룩거린 이세민이 깜짝 놀랐다. 마치 젊은 연개소문의 무예를 보는 듯했다.
“개금의 누이라 하옵니다! 황제 폐하.”
“개금의 누이? 장량이 거느린 짐의 수군을 무너뜨린 이가 정녕 저 계집이란 말이냐?!”
“기다려주시옵소서! 신이 그 목을 당장 폐하께 바치겠사옵니다!”
황상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강하왕 이도종이 부랴부랴 요동도행군 기병을 이끌고 추격했으나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다그닥! 다그닥!
고구려 기병은 하나하나 말을 탈 때 발을 고정시키는 등자가 있어서 일시에 군사를 빼면 떨어뜨리기 만만치 않았다. 거기다 온갖 무구를 던져대며 날뛰니 같은 기마대로 대응한다 해도 속수무책으로 나가떨어졌다.
“이, 이놈들이,,,! 그토록 성 밖으로 나올 생각도 안 했던 것들이 이제야 성 밖으로 나와 짐을 우롱해?!”
연수영의 습격에 토산에 오르려는 군사들이 번번이 방해받자 이세민이 재차 칼을 뽑아 들려 했다.
“폐하! 제발 어서 들어가시옵소서!”
“놈들은 신들이 상대할 터이니 폐하께서는 어서 막사로 들어가시어 치료를 받으시옵소서!”
“분하도다! 분하다!”
신하들의 재촉에 못 이긴 이세민은 결국 피눈물을 흘리며 몸을 움직였다.
* * *
“당나라 황제가 성주의 화살에 쓰러졌다!”
“오랑캐의 수괴가 땅에 떨어졌다!”
“놈들이 물러간다!”
내가 잠깐 칼을 뽑아 들고 설친 것만으로 안시성은 다시 살아나 있었다.
그것에 확신을 더해주듯 북쪽에서 또 한차례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말갈의 원군이 왔다!”
주필산 전투에서 이세민의 손에 무참하게 매장을 당한 북흑수말갈의 기마대와 고구려의 영향 하에 있던 백산 부족과 걸걸중상의 고향인 속말말갈족의 기병과 보병마저 속속들이 이곳 안시성과 요동에 도착했다.
“저희 아버님께서 오셨습니다! 작은 막리지.”
“저희 형님들이 보입니다!”
“이제 다 살았습니다!”
지친 기색을 잊듯 환희에 찬 소년들의 미소가 그간의 고생을 씻겨주는 듯했다.
안시성에서 나와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운 걸걸중상과 그 아우들의 소식이 말갈까지 전해진 것이 틀림이 없었다.
거기다 동쪽과 남쪽에서 끊임없이 교란을 해주는 연수영과 건안성의 기병들 덕분에 토산에 배치된 군사들이 간만에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남은 것은 평양의 원군만 도착하면 저 토산 아래 설쳐대는 떼놈들과 전면전을 해도 할 만하다.
이제부터는 군사의 수 문제가 아니라 누가 더 병장기를 갖추고 기동력이 더 살아 있으며 보급이 원활한지에 대한 싸움이 될 테니까.
사기를 잃고 보급품이 떨어진 데다 지쳐버린 이세민의 30만의 대군보다 모든 것이 완비된 사기 충만한 10만의 군사가 더 무서운 법이다.
동북쪽에서 불어오는 진격의 바람이 내가 예상한 대로 흘러간다면 이세민은 이제 고구려에게 완전히 포위되는 형국이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는 병서에 능한 이세민 그 자신일 것이다.
이제 그가 선택할 남은 길은 오직 하나뿐.
그러니 나는 그의 퇴로를 생각해야만 했다. 당나라의 고구려 원정 의지를 완전히 꺾을 길은 고구려를 정복하겠다는 목표를 가진 적의 수장을 제거하는 길밖에 없다.
내가 이곳에서 치르는 안시성 혈전은 앞으로 있을 긴 고당 전쟁의 서막에 불과하다. 이세민은 고구려에서 겪은 치욕을 두고두고 기억하며 고구려를 고립시키려 들 것이고 물량전에서 소모전으로 변경하여 소규모의 병력으로 지속적으로 국지전을 시도하며 우리의 국력을 소모시키려 할 것이다. 가뜩이나 궁핍한 고구려의 민생은 더욱 큰 혼란이 일어난다.
백암성에 전한 대수성책에 그 마지막 메시지를 고돌발이 보았을까. 그가 동쪽의 원군과 함께 요동성을 수복하고 내 메시지를 온전히 이해했다면 내가 기억하는 이세민의 퇴로를 끊을 수 있다.
또 그것만 믿고 있을 수는 없으니 내가 직접 가야 한다.
“깨셨습니까?”
당나라 군사가 물러가자마자 선 자세로 곧바로 잠이 든 양만춘이 의식을 차렸다.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조금 과했구나.”
“전혀 과하지 않았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 맹렬한 사투를 벌이고도 양만춘은 불과 1시간 만에 눈을 떴다. 토산을 점령한 이후로 좀처럼 눈도 붙이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뭐냐?”
“아까 일부러 이세민의 눈을 노리신 겁니까?”
“보았느냐?”
“예.”
잠시 허공을 바라본 양만춘이 이내 씩 웃으며 말했다.
“그 보이지도 않는 황제의 눈을 여기서 어찌 노리겠느냐? 머리를 노렸으나 여의치 못해 눈에 닿았으니 그 목숨을 끊어내지는 못했거늘. 그마저도 네가 던진 번개탄에서 나온 안개에 시야가 가렸으니 스쳐 지나가기라도 바라며 활시위를 당긴 게다.”
그 말을 조용히 되새긴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 토산 위에서 저 아래 머리만 보이는 이를 노려 두 번씩이나 눈에 맞춘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물론 그는 한 번밖에 기억하고 있지 않겠지만 말이다.
이걸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
“구원병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습니다.”
“그래. 조금 전에 들었다.”
“곧 아버님께서 대병을 몰고 이곳까지 오실 것입니다.”
“그렇겠지.”
“아버님과 함께 싸우실 수는 없는 것입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양만춘이 연개소문에게 앙금을 가지고 있다는 건 요동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사실이다.
그렇게 양만춘이 얼마간 말을 아꼈고, 어느새 내 머리를 문지르며 짧게 대답했다.
“나는 고구려인이고, 안시성의 적은 하나다.”
* * *
오골성 성주 추정국과 박작성 성주 소부손, 그리고 연개소문이 보낸 말갈계 장군 생해가 이끄는 동북쪽 숙신의 군사와 합류한 백암성의 고돌발은 자신 있게 출정을 감행하며 태자하를 따라 요동성을 포위했다. 불과 반년 만에 정반대의 상황이 된 것이다.
“네 이놈 계필하력아! 백암성을 넘겠다고 자신만만하게 오더니 이 요동성 안에 틀어박혀 낮잠이나 자는 게냐?”
“시끄럽다 이 오랑캐 놈! 성안에 투석기를 배치하는 비겁한 놈이 감히 누구한테 큰소리냐?!”
요동성에 흐르는 태자하가 동쪽의 백암성까지 흐르며 그 가파른 절벽과 암석에서 대패를 당한 계필하력은 분통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계필하력의 심정을 아는 고돌발이 제안했다.
“순순히 투항이나 하거라! 그럼 그간 싸운 연을 생각해서라도 내 특별히 포로로서 예를 다하며 목숨만은 보존케 해줄 것이다!”
“웃기지 마라! 어서 덤벼라!”
요 며칠 사이 놈들이 요동성의 성곽 보수를 한 모양이지만 성을 둘러보는 고돌발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애초에 당나라는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온 군사가 주력이다. 수성(守城)에 ‘수(守)’ 자도 모르는 이들이 무슨 수성을 하겠다는 것인가.
“공격하라!”
고돌발은 백암성에서 가져온 투석기를 앞세워 대석을 요동성을 향해 날렸다.
이제 역으로 이쪽에서 반격할 순간이 온 것이다.
그러는 한편, 고돌발은 남산 공자가 남긴 대수성책에 적힌 마지막 문구에 꽂혀 있었다.
-적의 수괴는 멀고 쉬운 길보다 가깝고 어려울 길을 택할 것입니다. 혹여 요동성을 먼저 수복한다면 이를 유념하십시오.
고돌발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것이 대체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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