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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역습
폭우 속에 벌어지는 고구려 수군의 습격에 당나라 수군은 광루섬, 장자섬, 소장산섬, 해양섬 등 장산군도 일대에 포진한 섬 곳곳으로 흩어졌다. 사실상 흩어진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도망친 것이었다.
평양도행군대총관 장량은 총관 방효태와 그 아들들이 지휘하는 전선 170여 척 남짓만을 이끌고 장산군도 내 꽤 큰 규모에 속하는 대장산섬에 대피해 와 있었다.
“빌어먹을 고구려 놈들의 습격에 아군의 피해 규모와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구나. 내가 그 계집에게 당하다니, 수치로다!”
“빗물이 잦아드니 곧 날이 풀리겠사옵니다! 날이 풀리는 대로 소장과 자식들이 직접 정탐선을 띄어 알아볼 터이니 너무 심려하지 마시옵소서! 대총관.”
방효태가 눈치껏 안심시키고 있었지만, 장량은 사흘 전 벌어진 연수영의 습격으로 여전히 께름칙했다. 이 섬 곳곳에 고구려 수군이 어느 정도 있는지 규모조차 파악하고 있지 못해 답답했다.
“닻을 올려라!”
이윽고 날이 개자 방효태가 정탐선 6척을 보내 대장산섬 인근의 동태를 살피라 일렀고, 정오가 되지 않아 모두 돌아왔다. 그런데 정탐선의 보고를 받은 방효태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이냐? 아군의 배를 찾았느냐?”
“대총관, 그것이...”
장량의 물음에 방효태는 뜸을 들였다.
“어서 말을 해보거라!”
방효태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장량의 재촉에 이내 보고받은 내용을 뱉었다.
“정탐선이 발견한 인근 섬마다 우리 전선 갑판의 잔재나 병장기들이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다 하였사옵니다.”
“뭐야?! 그게 사실이냐?!”
“.....예에. 그 잔재의 수가 자그마치 100여 척은 넘은 것 같다고도 하였사옵니다!”
방효태는 정탐선을 타고 간 자식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며칠 전 폭우 속을 뚫고 습격하는 고구려 수군의 공포를 다시 보고 온 것처럼 혈색이 어두웠다.
“이 모든 게 계책이었구나! 풍파 속에 습격해 우리 함대를 쪼개어 일거에 소탕하려 했던 것이다!”
폭우가 사흘간 계속되면서 대장산섬에 발이 꽁꽁 묶인 장량은 다른 섬에 매복한 고구려 군사들에 의해 아군의 전선이 차례차례 침몰당하는 것을 눈 뜨고 구경만 하게 된 셈이었다.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장량이 눈을 치켜떴다.
“잠깐! 주변 섬에서 그리되었다면, 고구려 놈들이 이 주변에 포진해 있다는 게 아니겠느냐?!”
“그, 그것은...”
그 말이 신호가 되었는지 대장산섬 주변으로 멀리서 뭔가가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었다.
“저, 적선이옵니다! 앞뒤로 적선이 몰려오고 있사옵니다!”
“이러다 완전히 포위당하겠사옵니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옵니다!”
앞뒤로 적의 대장선을 포함한 고구려 전선의 출현에 방효태와 그 부자들이 소리쳤고, 장량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더 이상의 풍랑은 없다! 대체 뭐가 두려워 도망친단 말이냐! 당장 닻을 올리고 진형을 갖춰라! 나 장량이란 말이다!”
장량은 군사들의 사기를 독려하기 위해 입에 거품을 물면서까지 호령했으나, 앞뒤로 몰려오는 고구려 전선의 위협에 군사들은 좀처럼 안정되지 못한 기색이었다.
그렇게 당나라 수군이 당황하는 사이, 고구려 수군과의 거리는 점차 좁혀졌고 이내 환두대도를 뽑은 연수영이 외쳤다.
“지금이다! 대석을 쏴라! 오랑캐들을 모조리 섬멸하라!”
“당나라 놈들의 배를 한 척도 남기지 마라!”
“오랑캐들을 쓸어버려라!”
연수영의 명에 신호 깃발이 올라가자 좌우로 포진한 흑벌무와 연수진이 가담했고, 장산군도의 물결 위로 엄청난 무게와 힘을 실은 돌덩이가 당나라 전선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날아갔다.
파가각!
콰아앙!
으아아아아!
전투가 개시된 지 일각(一刻)이 조금 넘을 무렵, 일곱 척이 넘는 당나라 전투선이 격침되었다.
“여기서 반드시 승기를 잡을 것이다!”
연수영은 이 전투에서 그간 배 안에 실은 모든 돌덩이를 소모할 작정이었다.
* * *
날이 밝자 당나라 대군이 토산 앞에 모였다.
요동 남단의 먹구름으로부터 잔비가 내리고 있었고, 여름 더위를 가시게 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선봉에 선 강하왕 이도종이 토산을 향해 호령했다.
“가교(架橋)를 내려라!”
지이이잉, 부복애와 토산 책임자들이 선봉대가 토산에 오를 수 있도록 튼튼하게 만든 다리를 내렸다.
수천의 병사가 오고 갈 수 있는 널찍한 나무다리가 토산에 오를 수 있게 세워졌다.
스르릉, 출정 준비를 마친 이세민이 칼을 뽑아 올렸다.
“가라! 안시성을 넘어라!”
와아아아아아아!
명이 떨어지자마자 거대한 함성이 퍼지며 당의 황제가 자랑하는 6군의 정예병들이 가장 먼저 앞다투어 토산에 오르고자 했다.
“가즈아아아!”
“성을 넘자아아아!”
“고구려 놈들을 도륙하자!”
안시성을 포위한 지 어느덧 석 달째를 맞이한 당나라 군사들은 그동안 이곳이 지겨웠고, 하루라도 빨리 저 조그마한 성을 넘어 고구려 원정을 끝내고 싶었다.
황제를 따라 중원에서부터 북쪽의 돌궐과 비단길을 휘저으며, 천하를 호령하던 6군의 정예들은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안시성에서 치러지는 계속되는 공성전에 지치며 성벽 하나 제대로 넘지 못하는 모습에 무력을 느꼈고, 정신마저 피폐해졌다.
“성을 재로 만들어버릴 테다!”
“성 안에 사내란 사내는 다 죽여주마!”
“재물과 노예는 다 내가 가질 거야!”
“가축은 내 거다! 건들지 마!”
“성에 진귀한 음식은 내 배에 들어갈 거야!”
그들은 그간 안시성에서 당한 것이 뼈아플 정도로 사무친 나머지,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승리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끓었다.
-토산이야말로 저 안시성을 넘을 유일한 계책이다!
이세민은 그런 군사들의 마음을 역이용했고, 자신이 직접 수레를 끌고 흙을 퍼 나르며 독려했다.
그렇게 시작되어 무려 50만 명이 동원된 대공사.
마침내 토산이 완공되자, 군사들의 마음은 그간의 고생과 고통이 씻겨가듯 해방되었다.
이제 고구려 성벽보다 더 높은 저곳에 오르기만 하면 된다.
“폐하께서 토산만 쌓으면 안시성을 넘을 수 있다고 하셨다!”
“지긋지긋한 놈들, 이번에야말로 끝장이다!”
“다 죽여버릴 거야! 모조리! 전부 다!”
난공불락의 안시성을 부술 수 있는 토산, 모든 당나라 병사들은 오직 이날만을 벼르고 있던 것이다.
끼잉, 하며 굉음을 내는 온갖 공성무기가 6군의 정예들을 뒤따라 토산의 정상을 향해 오르고 또 올랐다.
그중 가장 눈여겨볼 것은, 수천 명이 잡아당기며 오르는 대형 투석기의 존재였다.
이세민은 대형 포차를 저 토산 위에 올려 안시성을 초토화시킬 작정이었다.
그간 경사진 곳이 많아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포차를 반듯한 토산 위에서 안시성을 내려다보며 쏠 계획이었다.
명중률 역시 성 아래에서 쏘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을 것이었다.
“전군─!”
“자, 잠깐만 멈추시오! 강하왕.”
이제 막 토산 위에 올린 포차의 발포 준비만을 남겨둔 상황, 이도종이 칼을 뽑아 든 순간에 이세적이 다가가 급히 멈춰 세웠다.
“무슨 일입니까? 대총관.”
“저길 보시구려. 안시성 놈들이 이상하지 않소이까? 우리 군사들이 저리 올라가고 있는데 화살을 쏘는 놈이나, 포차를 날리는 놈들이 없소이다!”
이세적의 말에 이도종의 시선이 안시성 성벽으로 향했다. 과연 이상할 정도로 놈들의 성벽 쪽이 조용했다. 이 사거리라면 화살도 일부 사거리에 닿을뿐더러 치에 설치해둔 고구려의 투석기는 이루 말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우리 군사들의 움직임을 놈들이 아직까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을 터인데?’
잠자코 지켜본 이도종이 불쑥 생각해냈다.
“혹 놈들의 화살이 바닥이 나거나 포차에 쓸 대석이 다 떨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치고는 아무래도 좀 이상하외다! 느낌이 좋지 않소.”
숱한 전쟁 경험이 치른 이세적은 토산에 아군의 군사들이 올라갈 때, 안시성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움직임을 포착했다.
‘좌측 성벽에 있는 놈들의 병사가 빠졌어!’
저들의 눈이 토산으로 향한 것은 틀림없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나, 폐하의 명이 떨어진 이상, 이 강하왕 도종. 오늘 내로 안시성을 넘을 뿐입니다!”
이세적의 염려에 이도종은 어딘가 찝찝했지만, 이미 군사들의 대부분이 토산 위에 올랐기에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전군 발포 준비를 하라!”
그가 즉각 깃발을 올리며 토산에 올라선 포차 부대에 신호를 보낼 무렵이었다. 성에 오른 운제와 사다리 부대도 모든 준비를 마치며 명만을 기다리는 상태였다.
토산 꼭대기에서 안시성의 성곽까지는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아 사다리와 운제를 대는 것만으로 성에 진입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게 와아아아아아─! 하는 천지를 울릴 함성과 함께 당나라 대군이 일제히 안시성에 오르려 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일순 토산이 일렁였다.
“!”
“!”
“!”
“!”
“!”
갑작스러운 진동에 당나라 진영은 일반 군사들과 지휘관을 가리지 않고 당황하며 일순 싸해졌다.
“?”
이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자 고개를 갸웃한 이도종이 재차 호령하려 했다.
“전군─! 공격하...”
재차 쿵! 하며 내려앉는 토산에 이도종이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감지했다.
“토, 토산이... 토산이 이상합니다! 대총관.”
“서, 설마?!”
이세적 역시 마찬가지의 불안을 느꼈고 이내 진동했다.
쿠구구구구!
토산의 지면이 크게 흔들리자 동물적 본능을 지닌 말들이 먼저 끼이잉 하며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토, 토산이 무너진다!”
토산이 가장 잘 보이는 막사 주변에 있는 군졸의 외침에 장손무기가 이세민을 급히 불렀다.
“폐하! 토산이 무너지고 있사옵니다!”
“토산이 무너지다니?!”
어이없는 상황에 토산을 향한 이세민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쿠구구구구!
눈앞에서 정말 토산이 흔들리며 무너지고 있는 것이었다.
“당장 군사들을 물려라! 당자아앙!”
으아아아아아!
부랴부랴 호령하는 이세민의 명이 채 전달되기도 전에 무수한 공성무기가 그가 자랑하는 6군의 정예 5만의 비명과 함께 구덩이 속 아래로 매장당하고 있었다.
“토산이 무너지다니...! 내, 짐의 군대가 토산과 함께 무너지다니...!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이냐! 어찌...!”
“폐, 폐하!”
“어서 폐하를 뫼셔라!”
이세민은 거의 뒷덜미를 잡고 쓰러지려 하고 있었고, 장손무기와 이세적이 부축하며 물러갔다.
뿌우우우우─!
“퇴각하라! 어서 퇴각하라!”
하늘 높이 뿔나팔 소리가 울리자, 토산 아래 준비돼 있던 당나라 대군이 무너져가는 사토의 흙먼지를 삼키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 * *
“토산이 무너진다!”
“당나라 대군이 무너진다!”
성벽 위에서 외치는 양만춘과 마로의 목소리에 내가 만든 원시 다이너마이트가 제때 터졌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살짝 눈물이 나려 했다.
이세민이 자랑하는 선봉대가 토산 위에 올라 안시성을 공격하기 직전이 바로 토산이 무너지는 최적의 시기였다. 그걸 맞추려고 몇 날 며칠 전부터 굴 안에 숯을 덕지덕지 붙이고 폭죽을 터뜨리려 없는 고생은 다 했다.
그 때문에 얼굴이 숯탄이 되어 나온 것은 덤이고.
옥소와 마로, 걸걸중상 일행들이 서로 로테이션을 돌며 계속해서 바깥소식을 전달해 주며 힘을 써 준 것도 한몫했다.
부지런히 목탄과 필요한 것들을 구해다 준 안시성 주민들과 군사들의 노고도 빼놓을 수 없었다.
또 내가 지시한 대로 심지에 불을 붙이고 굴에서 허둥지둥 빠져나온 안시성 내 가장 빠른 사내였던 사물이라는 청년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원시 화약을 다루는 게 보통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덕분에 선량한 안시성 사람들의 희생 없이 무사히 굴을 폭파하는 데 성공했다.
혹여 폭파가 성공해도 토산이 무너지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토산 공사가 허술한 부분이 있어서 토대를 이루는 기초에 어느 정도의 충격만으로도 무너져버린 거 거나 혹은 불완전한 경사의 영향일 가능성도 있었다.
평지인 요동성과 달리 안시성의 경사와 비탈길은 놈들의 포차마저 위력을 반감시켜주고 있었으니까.
그러므로 비뚤어진 경사에서의 토산은 어쩌면 작은 충격만으로도 쉽사리 꺾여 무너지는 모래성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물론 그 아래 굴이 파 있지 않았다면. 그마저도 무너뜨리기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터러러럭!
안시성보다 더 높게 지었던 흙산이 무너지며 사토가 첨퍼덩 하고는 이내 안시성 성벽에 쏟아졌다.
“캑캑! 흙이 여기까지 내려왔습니다!”
면적이 넓은 흙이 성벽을 덮친 나머지 가까운 치에 있던 걸걸중상과 그 일행이 흙먼지를 흡입하며 움찔했다.
그 영향으로 토산과 안시성이 완전히 연결되어버린 것이다.
적의 대군이 한순간에 전멸한 것은 잠시, 우물쭈물하고 있다간 재정비를 갖춘 당나라 군사가 이번에는 토산을 통해 곧바로 안시성의 성벽에 오를 수 있는 상황이다.
이제 안시성은 반드시 토산을 점령해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나와 마찬가지의 판단을 내린 양만춘이 눈빛을 바꾸며 환두대도를 뽑아 들었다.
“지금이다! 토산을 점령하라!”
꼼짝없이 수성만 하던 때에 마침내 역습의 시간이 찾아왔다.
와아아아아아!
양만춘의 명에 안시성은 성을 지키는 최소한의 군사들을 제외하고 기다리고 있던 주력 부대가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모조리 토산과 연결된 성벽을 타고 넘었다.
그들이 토산에 이르자 간신히 생존한 일부 당나라 병사들의 낯빛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주변에 있던 아군 수만이 전멸했고, 싸울 병장기는 모조리 산 아래 매장되었으니 그럴만한 반응이었다.
“사, 살려!”
“아악!”
“끄아악!”
토산 위에 전의(戰意)를 상실한 적들을 소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와아아아아아!
당나라 군사들이 두려워할 안시성의 함성이 끊임없이 울렸다. 그날 밤, 당나라 6군의 사체가 깔린 반파된 토산에는 삼족오 깃발이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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