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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정관의 치 vs 작은 막리지 (5)
“당나라 놈들이 다시 밀려옵니다! 그 수가 많습니다! 성주.”
안시성 내 시력이 남다른 마로가 멀리 당나라 진영을 보며 소리쳤다.
“이쪽에는 사다리가 또 저쪽에는 수레도 여럿 보이옵니다!”
멀리 어렴풋이 보일까 말까 한 거리조차 알아보는 걸 보니 초원에 사는 몽골인 부럽지 않은 시력인 모양이다.
양만춘이 비장한 표정을 지었고, 내가 마로에게 따로 물었다.
“포차나 당차도 보입니까?”
“모르겠습니다. 다만, 앞에는 그것보다 더 큰 게 옵니다. 작은 막리지.”
더 큰 거라고?
잠시 후, 나는 성벽 위에 고개를 비스듬히 내밀어 상황을 주시했다.
과연 안시성의 성벽만큼이나 높고 큼지막한 망루 여러 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또 당나라 군사들이 수레에 뭔가를 실은 채 분주한 모습도 시야에 포착됐다.
경사가 진 데다 비탈길도 많은 이 안시성 벌판에 저런 큼지막한 것들을 조립하고 운반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벌써 한 달 가까이 이곳에 죽치고 앉아있는 이세민과 그 휘하 무장들이 급해진 모양이다.
나는 동쪽을 바라보았다.
연개소문에게는 안시성이 포위될 때가 군사들을 움직일 적기라 밝혔지만, 사실 조금 더 늦게 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백암성의 고돌발만 잘 버텨준다면, 연수영의 제해권 사수와 더불어 당나라는 이 이상 고구려의 성 하나도 취할 수 없을 테니까.
내가 온사문에게 전해주었던 대로 연개소문은 이제 저들이 지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격을 날려주기만 하면 된다.
내가 굳이 재촉하지 않아도 연개소문은 내심 설연타로부터 답신을 받을 때 움직일 것이다.
어찌 됐건, 그때까지 저 무지막지한 공성무기들을 상대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겠지만, 이쪽도 그에 합당한 대비를 다 해놓았다.
“도련님! 새 발석거(發石車)가 완성되었답니다.”
치 뒤 모퉁이에 설치된 새로운 수성기를 확인하고 보고하는 옥소였다.
사다리처럼 만들어진 설치형 개량 발석거는 고정된 상태로 열 근 이상의 무게를 들어 올리며 지렛대의 원리와 이심(離心) 작용으로 조금 더 정확하게 목표를 향해 날릴 수 있다.
얼핏 보면 당의 포차인 포행거와 별반 차이가 없는 일반 투석기처럼 보이지만 모래나 돌 등으로 무겁게 만든 추를 매달아 놓아서 그 추를 놓을 때 반대쪽의 투석구를 빠르게 들어 올려 돌을 던지도록 설계된 중세 유럽의 투석기 『트레뷰셋』의 원리를 따랐다.
새 수성기의 시범 발사를 확인하는 사이 성 밖이 난잡하고 시끄러웠다.
드르르르륵
다라라라락
당나라는 이번에 비루(飛樓)와 포차(抛車), 당차(橦車) 말고도 수레형 사다리인 운제(雲梯)와 바퀴가 여덟 개에 차대 위에 다락을 만들어 놓은 팔륜루차(八輪樓車)까지 총동원했다.
그 외에도 처음 보는 수레형 기구들이 이곳 안시성을 향해 굴러가고 있다.
당나라는 이곳 안시성에서 모든 공성무기를 다 때려 박을 작정이다.
나는 성벽과 치 곳곳에 설치된 다른 발석거의 훼손된 부분이 없는지 신속하게 살폈다.
저 어마어마한 숫자의 공성무기에 이만한 발석거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성벽 전체가 손상될 수 있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슬슬 시간이 되었고, 준비를 마친 당나라 군대가 큼지막한 공성무기부터 밀어 넣으려 했다.
“안시성을 올라라! 가장 먼저 성에 오른 이에게 폐하께서 비단을 내리신다 하셨느니라!”
와아아아아아─!
동기부여를 확실히 시키는 이세적의 호령에 놈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긴 사다리와 커다란 비루를 달고 오는 당나라 군사들이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던 것이다.
포차가 먹히지 않으니, 인해전술로 성벽에 오를 작정이다.
나는 적들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가장 크게 눈에 들어온 것은 응당 수백 명씩 부대를 짜서 들고 오는 비루(飛樓)와 운제(雲梯)였다.
저것들이 성벽에 닿는 순간 수백 명씩 일제히 성벽을 타고 올라올 것이다.
나는 놈들의 의도대로 호락호락 그렇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다.
목표가 크니, 발석거의 시험 상대에 아주 적합한 상대이기도 하니.
“지금 쏘라 명을 내릴까요?”
다가오는 커다란 비루와 운제에 침을 꿀꺽 삼킨 걸걸중상이 재촉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니다. 조금 더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려라.”
트레뷰셋을 모방한 발석거의 사거리야 최대로 쳐도 500미터 남짓. 물론 대석의 크기에 따라 그 반에도 못 미칠 수 있다.
그러니 명중률을 생각했을 때 저들이 온전한 사거리 안에 들어설 때까지 인내해야 한다.
혹여나 놈들의 공성무기가 성벽에 너무 근접하여 발석거가 닿지 못할 위기의 순간에는 공방에서 종일 쇠창살과 철쇄를 손질한 양만춘이 활약해 줄 테니 그를 믿고 맡겨도 될 듯하니.
“작은 막리지!”
“조금만 더!”
걸걸중상이 재차 재촉해왔다.
안시성에서 쏘는 화살의 평균 사거리가 200미터 남짓, 돌의 크기를 계산했을 때 거기에서 100미터 안팎에서 움직여야 한다. 그간 투석의 사거리를 관찰해둔 효과를 톡톡히 보여줄 테다.
“지금이다!”
그 명에 걸걸중상 일행이 부랴부랴 던져넣을 바위를 반대쪽 되는 지레 부분에 무거운 물건을 올려놓아서 성 밖으로 내던졌다.
쿠르르릉!
콰앙!
“명중했습니다!”
대석을 맞고 쿵 하며 바닥으로 엎어지는 비루를 보며 걸걸중상과 안시성 군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럴 만한 게 단 한발에 정확하게 목표를 향해 명중시켰기 때문이다.
일반 투석기에서는 서너 대가 동시에 목표를 노려야만 간신히 명중시켰던 반면, 무게추를 이용한 트레뷰셋 발석거는 일반 투석기의 대석보다 속도도 정확도도 모두 챙길 수 있는 그야말로 화약과 화포가 개발되기 전까지 최고의 공성병기였다.
“기뻐하기는 아직 일러! 다음 목표다!”
내가 서둘러 다음 타깃을 가리켰다. 수십 대의 비루와 운제말고도 아직 부숴야 할 적의 공성병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안에 저것들을 다 부숴야 해. 손이 남아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라고.”
“생각보다 아프지 않사옵니다!”
“저희들의 손은 염려 마시옵소서!”
수성시 담당 안시성 군사들의 혈색이 밝았다.
인력식과 무게추를 동반하면서 수성기 부대의 부담을 조금은 줄여줄 수 있었다.
“저기! 놈들의 비루가 다가온다!”
그때 반대편 성벽에 거의 다다른 비루를 보며 안시성 병사 하나가 소리쳤고.
카라라라락!
곧 쇠와 나무가 부딪히는 굉음이 들렸다.
“밀어라!”
“으랏차차!”
“넘어가라아아앗!!”
쿠쾅!
양만춘과 그 휘하 군사들이 일제히 쇠창살을 날려 고함을 지르며 운제 하나를 밀어 쓰러뜨렸다.
그들이 일순 대단한 장사(壯士)처럼 보이는 순간이었지만, 지형의 경사를 이용한 놀라운 재치였다.
저 큼지막한 망루인 비루가 성벽 앞 그 경사에 진입할 때까지 양만춘은 때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 * *
“비루가 무너진다!”
“운제가 박살났다!”
이세적의 요동도행군은 고구려군의 수성책에 크게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안시성의 대처를 보며 이세적은 그만 고전의 이유를 알아버렸다.
안시성의 경사진 지형은 포차뿐만 아니라 다른 공성무기의 한계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조그마한 충격에도 순식간에 무게중심이 흐트러지며 커다란 공성무기들이 곧바로 땅바닥에 구르는 나무쪼가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굴곡진 비탈길에 오히려 성안에서 쏘는 적의 투석이 더 위협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이세적은 땀을 뻘뻘 흘리고는, 준비한 공성무기를 차례차례 투입했지만 투입하는 족족 성벽에 오르기 전에 무너졌다.
“대총관! 이러다가 우리가 준비한 것들이 하루 만에 다 작살나겠습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어찌 물러선단 말인가? 폐하께는 기대하고 계시거늘!”
쿵 하며 재차 바닥에 뭉개지는 비루를 보며 이도종이 재촉했다.
“대총관 일단은 물러나야 합니다!”
“큭...! 내 강하왕이 아니었다면, 기어이 끝을 보았을 것이요.”
물론 그 끝의 결과는 좋지 못할 것이다.
고개를 떨군 이세적이 서둘러 퇴각 신호를 보냈다.
* * *
성벽 하나 넘지 못하는 장졸들의 처량한 모습에 이세민의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장량은 대체 무얼 하고 있길래 아직도 건안성 하나 접수하지 못했다는 게야?! 보급품이 벌써 이 안시성에 도착했어도 한참 전에 이르렀을 시각이 아닌가!”
“송구하옵니다! 황제 폐하.”
“송구하옵니다! 황제 폐하.”
“송구하옵니다! 황제 폐하.”
한 달이 넘도록 안시성 성벽 하나 오르지 못하는 6군과 요동도행군의 지휘관들을 바라보며 실망감이 가득한 이세민이 이제는 아군의 지원을 탓하고 있었다.
첫 시작인 신성에서부터 막히면서 고구려 원정이 급속도로 꼬여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해상의 주요 거점인 비사성과 고구려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요동성을 점령했고, 이 기세만 이어간다면 요동 장악은 시일이 해결해 줄 거라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런 이세민의 믿음은 불과 한순간뿐이었다.
“내가 천하의 무리들을 이끌고 왔거늘, 저깟 작은 성에 이리도 막히다니!”
안시성 앞에서 지체되는 시일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보급 문제가 시급해진다. 요동성과 개모성, 현도성에서 얻은 얼마 안 되는 양곡이야 이미 다 쓴 지 오래다.
이 상태라면 요동에서 석 달도 못 버틴다.
해상이 여의치 못하다면 영주의 곡창지대에서의 수급만이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그마저도 요하 일대에 매복한 고구려 놈들의 눈을 피해 조달받고 있는 위급한 상황.
“어찌 평양의 개금은 군사를 일으키지 않고 있는가?”
“남쪽의 신라가 염려되어 그런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비사성에 장량도 있으니 함부로 군사를 빼는 것이 어렵겠지요!”
황제의 물음에 장손무기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세민은 어딘가 찝찝했다.
지난번 요동성에 나타난 오골성의 성주 추정국의 5천의 기마대 말고는 후방의 국내성과 부여성에 있는 수만의 고구려 군사들의 움직임이 뚜렷하게 포착되지 않고 있다.
압록강 이남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개소문이 마음만 먹는다면 10만의 대군을 일으켜 한참 전 요동으로 보냈을 시간이다.
장손무기의 말처럼 당장은 신라가 고구려의 후방을 쳐서 묶어놨을지는 모르나 시일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다.
“어찌 말들이 없는가? 저 안시성을 무너뜨릴 뾰족한 수가 없느냐 말이야!”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옵소서!”
“신이 선봉을 서겠나이다!”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안시성을 넘어 개금의 막내아들과 그 성주의 목을 폐하께 바치겠나이다!”
이세민의 물음에 이세적, 이도종, 아사나사이가 앞다투어 다시 한번 선봉에 서겠다 선언했고, 그 말이 못 미더운 이세민이 혀를 찼다.
“쯧쯧. 그렇게 맡겨도 적들의 사기를 올려주는 그대들이 무슨!”
씩씩거리는 이세민의 고심이 깊어지자 우무위대장군 손이랑이 나섰다.
“폐하! 우리가 이런 변방에서 머무는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즉시 군사를 돌려 오골성을 치시옵소서!”
“.....안시성을 버리고 오골성을?”
이어서 좌무위장군 우문달이 동조했다.
“그렇사옵니다! 오골성과 박작성을 취한다면 요동은 고립이 될 것이요, 저절로 폐하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옵니다!”
그때 이세적과 장손무기가 강하게 반발했다.
“북쪽의 신성과 아래 건안성, 그리고 남쪽 해안 지대의 고구려 수군 병력까지 합하면 족히 10만에 달하옵니다! 그들을 무시하고 남쪽으로 내려간다면 우리의 후미가 어찌 되겠사옵니까?”
“퇴로가 끊기겠지요! 우무위대장군과 좌무위대장군께선 수나라가 어찌 패배했는지 벌써 잊으셨단 말이오? 30만이 저 살수에서 죽어간 걸 잊으셨는가 말이오!”
“아, 아니! 내 말은 우선 압록강 이북의 오골성과 박작성을 취하고...”
“크흠!”
“우리가 그리 움직일 때, 저 성안에 있는 놈들이 가만히 있는답니까?! 그러다 개금이 움직이면 퇴로가 끊겨 사면초가(四面楚歌)가 되는 것입니다!”
막사 안에서 서로 언성이 높아지자 이세민이 중재했다.
“시끄럽다! 개소문의 막내아들이 저 안시성에 있거늘, 어찌 뒤에 적을 두고 도망간단 말이냐? 다행히도 신라가 제때 움직여 주어 평양의 발목이 묶인 듯하니 하루라도 빨리 저 안시성을 넘을 궁리나 하라!”
“본부 받들겠사옵니다! 황제 폐하.”
“본부 받들겠사옵니다! 황제 폐하.”
“본부 받들겠사옵니다! 황제 폐하.”
* * *
그날 밤 이세민은 장손무기와 함께 막사 밖을 나와 거닐며 안시성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 큰 요동성도 우리가 준비한 포행거의 대석에 무너졌거늘, 어찌 안시성은 저리도 멀쩡하단 말인가?”
“안시성은 요동성과 달리 포차로 성벽을 부숴도 흙과 산으로 되어 있어 소용이 없사옵니다. 폐하.”
장손무기의 말을 놓치지 않은 이세민의 동공이 커졌다.
“처남이 지금 뭐라 했는가?”
“안시성은 흙으로 덮인 산성인지라...”
“흙과 산이라고?!”
“그, 그렇사옵니다! 황제 폐하.“
마침내 안시성의 정체를 알아낸 이세민이 흙과 산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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