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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회유
이세민이 이끄는 당나라군이 안시성 방면으로 몰려오면서 바깥이 한참 소란스러울 무렵, 나는 성안 옥(獄)에 갇혀 있는 흰 전포를 입은 사내를 위해 급식 배달을 하는 중이었다.
원래라면 옥소나 걸걸중상 일행, 아니면 안시성의 보초를 시켜도 됐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조금은 정성을 들여보기로 했다.
“여기 오늘 끼니 가져왔소. 거참 어제 끼니는 거르셨구려.”
두어 사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에는 발에 쇠고리와 사슬 같은 족쇄가 연결되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설인귀가 두 눈을 감고 묵념한 채 명상하고 있다.
나는 그가 손도 대지 않은 바구니를 열어 안에 들어 있는 멀쩡한 주먹밥을 빼서 내 입에 물고는 새 음식으로 교체해 주었다.
“냠냠. 고구려말을 못 알아듣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아무 말도 없으시오?”
“가져가거라! 나는 당나라의 병사다! 내 이곳을 빠져나가면 황제 폐하와 당나라를 우롱한 네 이 영악한 것의 목에 화살을 쏠 것이다! 그러니 더는 날 욕 보이지 말고 어서 죽이거라!”
어린아이에게 속아서 포로가 된 제 모습이 어지간히도 부끄러운 모양이다. 뭐 지금 안시성으로 한걸음에 달려온 당 태종만 하지는 않겠지만, 꽤 쪽팔릴 테지. 이 안시성을 이세민에게 바쳐 크게 출세할 기회를 내가 빼앗은 셈이기도 하니 분하기도 할 테고. 근데 그 말도 안 되는 기회를 준 것도 나야 이 아저씨야.
그럼에도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이 자를 한번 회유해보기로 했다.
설인귀가 원하는 것이 정말 출세라면, 그것이 반드시 당나라로 귀결된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어서 썩 물러가래도!”
성질부리는 거 보면 먼저 화부터 풀어주는 것이 순서겠지만 말이다.
“그런 말 마시오. 그대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부귀공명(富貴功名)을 이루라는 안 주인께서 그 말을 듣는다면, 크게 실망하시겠소! 사내가 한 번 태어났으면 큰 뜻을 펴 봐야지 이런 곳에서 죽어 봐야 초라하오. 개죽음이라는 고구려 말도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에 설인귀가 갑자기 달려 나와 감옥 철창을 부러뜨릴 듯 세게 붙잡았다. 휘라락─! 하며 나온 족쇄가 그의 발을 당겼다.
“네, 네놈이! 내 부인을 어찌 아느냐?!”
가족을 건드리는 건 취향이 아니지만, 내가 아는 설인귀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훗날에 밝혀진 설인귀의 역사와 미래 설인귀를 직접 만나게 되는 배신자 연남산의 기억까지 모두 동원해서라도.
“당나라 사정을 살피던 중 우연히 그대와 그대 아내 유 씨에 대한 소식도 듣게 되었습니다. 설인귀 당신은 북위의 명장 설안도의 6대손으로 탁발선비족 출신이나, 이곳 안시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온 용문(龍門) 사람이 아닙니까?”
“네, 네 어린 것이, 나에 대해 꽤 자세히 알고 있구나!”
당황했음을 숨기는 듯 소리치는 설인귀를 보며 나는 내가 아는 미래의 자취와 연남산의 미래를 종합하여 한 가지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안시성 전투가 벌어지기 전, 느닷없이 출현한 설인귀라는 인물의 정체와 행보에 대해.
조선왕조 때 왜곡되어 전해 내려오는 경기도 어딘가 에 발굴된 설인귀굴, 그리고 이민족 출신인 그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를 통치하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수장이 되어야만 했던 결정적인 이유.
어쩌면, 설인귀는 고구려 출신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다.
나는 새로 가져온 음식을 꺼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 고집 그만 부리고 어서 드시오. 오늘은 특별히 어제 잡은 양으로 만든 꼬치니까.”
“아, 안 먹는대도!”
모닥불 피어오르듯 흩날리는 김에 침을 꿀꺽 삼키며 고기에서 급히 시선을 피하는 설인귀.
심지어 저 입에서 고구려 말까지 유창하게 나오니, 점점 더 확신이 든다.
“나는 황제 폐하를 모시겠다고 이 한목숨 바쳐 세상에 나섰다! 그런 내가 한낱 적이 주는 음식 따위에 유혹당해 먹을 성 싶으으...”
나는 고기 한 점을 들어 올려 특제 소스 장에 푹 찍고는 설인귀의 코에 가져다 대보았다.
“부귀공명(富貴功名)이 어디 당나라에만 있답니까? 천하는 이 고구려에도 있소!”
아마 이 말을 가장 사랑하는 이는 연개소문일 것이다.
어쩌다 연개소문의 사상을 푼 셈이지만, 설인귀를 설득하기 이보다 적당한 말은 없었다.
“웃기지 마라! 내 밖에서 떠드는 소릴 다 들었느니라! 황제께서 노하시어 대군을 이끌고 이곳 안시성에 왔으니 이제 이 성안에 있는 사내란 사내는 갓난아이일지라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임을 당할 것이다! 바로 네 이 어리석은 놈이 꾸민 짓 때문에!”
포로 주제에 태도며, 말하는 발성하며, 과연 고구려를 멸망시킨 선봉대장다운 기백이다.
그러나 나는 질 수 없듯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내기하시겠소?”
“내, 내기라고?!”
내 제안에 설인귀의 콧구멍이 벌렁벌렁해졌고, 동공이 큼지막해졌다.
“나와 인생을 건 내기 말이오.”
“무슨 소리야?!”
“나는 이곳 안시성과 고구려가 승리할 거라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설인귀가 썩소를 날렸다.
“이까짓 작은 성쯤이야 폐하께서 이끄시는 정예 6군이 진두지휘(陣頭指揮)를 맡는다면 반나절도 못 넘길 것이다!”
나는 뻔뻔한 표정으로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대가 믿는 당의 황제가 이 작은 성 하나 넘지 못한다면, 그대가 따를 위인이 아니라는 말이 되지 않겠소?”
“그, 그건...”
서서히 흔들리는 설인귀를 보자 조금만 더 하면 완전히 넘어올 것 같았다.
“대막리지의 아들인 내가 이 작은 안시성을 걸고 직접 이세민과 맞붙고자 하니, 내가 이기고 고구려가 이긴다면, 그대는 하늘에 걸고 나와 고구려를 따를 거라 약조하십시오! 그러면 그 귀한 목숨을 보존할 것이며, 그대와 그대 아내가 원하는 대로 부귀공명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폐하께서 네놈 따위에게 질 리가...!”
“그러니 맹세해도 상관없는 약조가 아닙니까? 어차피 그대가 믿기에 황제가 반드시 이길 거라 하였으니.”
설인귀는 이내 끙 하며 더욱 크게 반응을 내보였다.
내가 말을 이었다.
“나는 급한 볼일이 있으니 이만 가보겠소. 여기 식사하시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시구려.”
할 말은 이제 다했다.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줄 겸 나는 천천히 옥에서 빠져나왔다.
* * *
“천자께서 진다고?! 그것도 이 작은 성에 저까짓 꼬맹이한테...?!”
남산을 만난 설인귀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의 천자는 직접 전투를 지휘해서 단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는 불패의 사내. 북방의 돌궐마저 무릎을 꿇고 그를 천자(天子)와 가한(可汗)을 합쳐 천가한(天可汗)이라 인정했다.
오랜 전쟁 경험은 물론이요, 중원 백성과 이민족들마저 모두가 칭송하고 인정하는 천자를 상대로 이겨보겠다니, 마치 정신 나간 고구려 꼬맹이가 아닌가.
수나라마저 무너뜨리지 못한 요동성마저 친히 지휘하여 함락시킨 이가 다름 아닌 황제였다.
‘그런데 이런 작은 성에서 천하를 호령한 천자의 군사를 막겠다고?!’
산과 흙으로 덮인 성의 험난함을 첫째로 보더라도 안시성에서 직접 본 외성과 내성 내 병사의 수는 요동성의 반의반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설인귀는 이내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텅 빈 요동성 하며, 안시성에 있는 요동성의 백성들 하며.
거기다 이번에 놈의 벌인 기이한 술책까지.
‘마치 천자를 이곳 안시성으로 유인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병법(兵法)의 병(兵) 자도 모르는 이조차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위해?
또 저 꼬맹이가 어디서 그런 대담한 꾀를 생각해낸 거지?
“따지고 보면 폐하도 속았고, 나도 속은 거잖아!”
묘한 불안감이 엄습했고, 설인귀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의심이 솟구쳐 올랐다.
“제기랄!”
물론 그런 걸 생각하기에 앞서, 당장의 가장 큰 유혹은 눈앞에서 식어가는 양고기였다.
꼬르륵. 사흘을 굶은 나머지 설인귀는 지금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짧게 결심한 그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래! 그 내기 받아주마! 이 빌어먹을 꼬맹이...!”
내기를 받든 말든, 어차피 승리는 정해졌다.
천자께서 반드시 이곳 안시성을 무너뜨리고, 나를 구출해 주리라.
설인귀는 그렇게 믿으며 화를 참고 꾸역꾸역 양꼬치를 목구멍에 쑤셔 넣었다.
* * *
“삼공자! 언제 이 안시성까지 오신 겁니까? 대막리지와 원화 부인께서 삼공잘 얼마나 찾고 계신지 아십니까?”
안시성에는 때마침 연개소문이 보낸 온사문(溫沙門)이 와 있었다. 바보 온달 이야기에 나오는 그 온달(溫達)의 손자이자, 연개소문의 제자였다.
아무래도 연개소문이 재촉해 내 행방을 이 잡듯이 수소문하다가 결국 이곳 안시성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모양인데, 그리 좋은 타이밍이 아니다.
“저는 이곳 안시성에서 당나라와 맞서 싸울 겁니다. 그러니 아버지와 어머니께는 그리 전해주십시오.”
“무모합니다! 당의 황제가 그 휘하의 50만 대군을 몰고 100리밖에 와 있거늘, 전쟁이 장난으로 보이십니까?”
한참 고생한 온사문이 나를 꾸짖었고, 고개를 돌리자 옥소와 걸걸중상 일행이 나를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다.
옆에 정색한 얼굴로 서 있는 양만춘 역시 마찬가지인 상황.
‘이거 들킨 건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무래도 일행들이 여기까지 오면서 지어냈던 내 얘기들이 모두 거짓임을 눈치챈 모양이다.
연개소문의 명이 아니라 내가 자처해서 요동까지 오게 되었다는 걸 말이다.
신분을 이용해 벌였던 지난 일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흑역사로 스쳐 지나갔지만 별 수 없다.
여기까지 온 거 어차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내가 온사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안시성에 남아야만 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이곳까지 오게 된 경위를 온사문에게 간략하게 설명했다. 당의 다음 목표를 백암성에서 이곳 안시성으로 돌린 이유까지 상세히.
“그럼 당의 황제를 이곳 안시성으로 부르신 것이 삼공자님이란 말씀이십니까?”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온사문이 짧게 감탄했다. 겨우 8살짜리가 당의 황제가 점령한 요동성에 단신으로 가서 그런 계교를 벌였다는 게 놀라면서도 한편으론 도무지 납득이 안될 터였다.
말로 하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게 더 확실한 법이니, 나는 위를 가리켰다. 성벽 돌출부인 치(雉)에 설치된 수성기를 확인한 온사문이 내려왔다.
“백암성에도 비슷한 걸 보았습니다! 고돌발이 성주가 된 것도 그렇고, 이 모든 게 삼공자께서 벌인 일이셨군요. 대단하십니다!”
“제가 돌아가면 안시성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질 겁니다. 제가 여기 있어야 그들이 목숨을 걸고 당의 황제와 맞설 것이니, 아버님께는 그리 전해주십시오. 대막리지의 막내아들이 안시성과 함께 고구려를 위해 싸울 것이라고.”
“안 됩니다! 삼공자. 그것은 절대로...!”
와아아아아아!
온사문이 채 끼어들기도 전에 부관 마로를 포함한 안시성의 군사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그 짧은 시간에 정이 들었는지 사서에서 기록된 것처럼 안시성 사람들의 파이팅 넘치는 모습이었다.
당나라 놈들에게는 그토록 혐오하는 모습이겠지만.
-나의 목숨은 안시성과 함께 할 것입니다.
정오 무렵 안시성은 멀리 이세민의 황색 깃발의 등장에 잠시 두려움에 떠는 이들이 몇몇 있었으나, 그들의 눈에 한없이 작아 보이는 나의 말에 결심이 선 것이다.
-내 평생 살면서 이런 음식은 처음 먹어봅니다!
-덕분에 온 식구가 배불리 먹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작은 막리지!
물론 그들이 나를 가장 원하는 건, 내가 새롭게 재편한 식단인 고기와 영약식이겠지만 말이다.
설마 내가 고대 시대까지 와서 요리나 하게 될 줄이야...
일순 현타와 함께 어색한 분위기 속에 내가 온사문과 거리를 두자 양만춘이 다가왔다.
“평양에서 일부러 너를 데리러 왔거늘, 어찌 돌아가지 않는 것이냐? 성이 포위가 되면 남산이 너는 이제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
“저는 안시성과 함께 여기서 싸우겠다 했습니다.”
“여기 있으면 죽을 수도 있다. 너는 어린 것이 겁도 없는 것이냐?”
그 물음에 내가 씩 웃으며 걸걸중상 일행과 옥소를 번갈아보며 대답했다.
“제가 내뱉은 말에 책임은 져야죠. 아참, 저거 어린 너희들한테도 해당하는 말이야. 목숨이 아깝거든 저기 저 풀 죽어 있는 아저씨 장군하고 당장 평양으로 돌아가도 좋아. 성이 포위되기 전에 말이야.”
얼굴이 붉어진 걸걸중상 일행이 발끈하듯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저희는 삼공자님과 함께 안시성에 남아 싸울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보단 공자님께서 더 어리십니다!”
새해 막 15세가 된 걸걸중상은 고대 시대에 성년이었다. 여전히 앳된 모습이나, 패기 넘치는 기백은 정말 고구려 사내다웠다.
그 밑에 다른 녀석들도 용기만큼은 가상하다.
“.....거짓말이셨군요.”
한편, 옥소는 내가 설득했던 애기들이 전부 거짓인 걸 알고는 실망하는 눈치를 내보였다.
뒷덜미를 긁적인 나는 하는 수없이 두 손을 꼭 모으며 사과했다.
“너희를 속인 건 미안해. 하지만 나는 요동의 백성들을...”
“저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옥소의 말에 고개가 갸웃했다.
“...뭐?”
옥소와 걸걸중상 일행이 성내에 머무르는 백성들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안시성 사람들의 도움으로 저마다 오두막집을 지으며 적응해가는 이들의 모습이 선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들을 눈여겨보는 옥소의 눈망울이 글썽거렸다.
“요동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그리하셨다는 걸요.”
* * *
연개소문이 보낸 온사문이 돌아가고, 이틀이 지났다.
나는 그와 짧게 연개소문의 계획을 교환했다.
요동성이 함락되자 급해진 연개소문은 기동이 빠른 말갈의 기마대를 시켜 당나라 후방에 있는 설연타의 왕 진주칸에게 재물을 먹였다고 했다.
이세민이 이곳 안시성에 나타난 지금, 본격적인 연개소문의 외교가 발동하고 있었다.
또 내가 의도했던 대로 섣불리 대군을 움직이기 보다 소수의 조의선인들을 활용해 군량미 차단에도 힘을 쓴다고도 했었다.
이곳 사정을 들은 온사문에게 나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서찰 하나를 쥐여주며, 남쪽의 석성을 들러 평양으로 귀환하라고 했다.
이세민의 6군은 나름 빨리 안시성에 도달했으나 포위는 그렇게 서두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신중함에 매복이 있는지 주변의 동태를 살폈을 것이다.
없어진 주필산 전투로 말미암아, 조용한 연개소문이 필시 염려도 될 테고.
“옵니다!”
시력 좋은 마로가 전방을 보며 외쳤다.
이날 오후가 될 무렵, 이세민의 6군은 이세적과 강하왕의 요동도행군의 후송부대가 합류한 뒤에야 성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원역사보다 먼저 시작할 안시성 싸움. 이게 어떻게 흘러갈지는 지금부터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앞에 백암성 함락과 주필산 전투만이 없어진 점이 내가 아는 역사와 유일한 차이였다.
아아, 희생을 줄이고 요동의 백성들도 지켜냈으니 그것도 다르다고 할만하려나.
치와 성벽 모퉁이 부분마다 고정형 투석기를 설치했으며, 나와 함께 조립을 함께한 걸걸중상 일행이 안시성 군사들과 함께 각자 정해진 자리에서 수성기 한 대씩을 맡았다.
이처럼 수성에 대한 만반의 준비는 갖추었지만, 눈으로 보는 수적 열세는 너무나도 압도적이다.
황색의 거대한 흙먼지 바람이 이제 불과 수백 미터 전방에서 불어왔다.
10배, 아니 100배의 격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십만 대군이 이곳 안시성으로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고동쳤다.
이런 상황이 올 것을 미리 예상하고 벌인 일이었음에도 막상 역사의 한 획을 그은 파란만장한 현장에 내가 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나는 양만춘의 등을 은근슬쩍 쳐다보았다.
믿어도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양만춘이 문뜩 내게 말을 걸었다.
“반반이 아니구나.”
“...예?”
“반이 아니라 9할이 이 안시성으로 왔어.”
아 그 뜻이었군.
그러고 보니 이세민을 유인하면서 백암성의 부담이 10배 이상 줄어들었다.
이러려고 벌인 일은 아닌데, 안시성으로 다 몰려올 줄은 나도 몰랐다.
젠장, 하다못해 10만 명 정돈 빠질 줄 알았거늘.
사서에 기록된 위징 사후 이세민이 그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살짝 이용한 것뿐인데 그게 단숨에 이런 결과라니.
양만춘이 살짝 눈치를 주는 통에 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모르는 척 스르릉, 진왕보검을 칼집에서 뽑았다.
그저 겉멋이 아니라 막상 당나라 군대를 마주하자 긴장도 깰 겸 크게 한마디 하고 싶었다.
중국 왕조들은 늘 우릴 동이족 오랑캐라 부르며 업신여겼으니, 이곳에서 그것을 꼭 되돌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
저 이세민도 이 전쟁이 끝날 때쯤, 어찌나 분개하며 고구려를 향해 오랑캐 소릴 해대는지 기록에도 여럿 남을 정도였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연개소문이 품은 고구려의 천하관을 곱씹으며 칼을 높이 하늘로 뻗어 목청껏 소리쳤다.
“서토(西土)의 오랑캐들을, 쓸어─버리자─!”
그 포고에, 나를 일제히 주시하는 안시성 군사들.
와아아아아아아─!
이내 거대한 함성 소리가 성 밖을 향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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