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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창업이냐, 수성이냐
“사항계일지도 모르옵니다! 폐하.”
“사항계라?!”
이세적의 말에 이세민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사항계(詐降計)』
쉽게 풀어쓰면, '거짓 항복'이다.
손자병법에 등장할 만큼 유서가 깊으며 가장 유명한 활용 예시는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에게 거짓 항복 밀서를 보낸 오나라의 황개가 방심한 위나라 수군을 상대로 화공으로 승리를 이끌었을 때였다.
“무공(懋功)께서 염려가 지나치십니다!”
“그렇습니다! 개금의 막내아들이야 아직 10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입니다. 그 어린놈이 대체 무엇을 얻자고 폐하께 거짓 항복을 한단 말입니까?”
이도종과 손이랑의 말에 이세민의 허리가 꼿꼿이 폈다.
“강하왕(江夏王)과 우무위대장군(右武威衛將軍)의 말대로다! 개금의 막내아들이 뭐가 아쉬워서 짐의 요동성까지 와서 그런 일을 꾸민단 말인가? 오히려 짐에게 요동 백성들을 살피라 좋은 얘길 하였고, 안시성이 편히 항복할 수 있도록 고구려 말을 할 줄 아는 군사들을 내달라는 것이 전부였거늘, 무공은 고작 그것들을 위해 일을 꾸몄다고 말하고 싶은 겐가?”
“하오나...”
“무공께서 너무 걱정이 지나치신 모양입니다!”
“그렇습니다! 사흘, 아니 삼일이면 안시성에서 연락이 올 것이니 조금만 기다려보시지요.”
황상과 휘하 지휘관들의 말에 이세적은 어딘가 찝찝함을 가지면서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요동에서의 고생이 요동원정군의 고삐를 느슨하게 잡게 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머릿속에는 한 사내의 시가 기억에 남았다.
『與隋將于仲文詩(여수장우중문시)』
「그대의 신기한 전략은 하늘의 이치를 알았고
기묘한 계책은 땅의 이치마저 통달했네
싸움에 이겨 공이 높았으니
만족한 줄 알았거든, 이제 그만 멈춤이 어떠하냐.」
과거 고구려인에게 당한 유일한 사항계(詐降計)가 낳은 시.
수나라 때 100만 대군이 요동성을 넘지 못해 30만 별동대를 가지고 평양으로 진격한 우중문(于仲文)은 거짓 항복을 한 을지문덕(乙支文德)과 만났다.
이후 마찬가지로 거짓된 패배를 반복하며 이 같은 시를 남겼고, 살수(薩水)에서 괴멸을 당했다.
‘무혈(無血)로 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제일이라 했거늘, 내가 폐하에 대한 걱정이 너무 과한 거겠지...’
요동 관아에 연남산이 다녀간 뒤로 어딘가 불편해진 이세적이었다.
* * *
안시성에 이르자 과연 성문이 열려 있었다.
성문 앞에서 안시성의 병장기를 수거하기 위해 수레를 맡아 기다리는 보초를 제외하고 나와 설인귀를 뒤따라 고구려말을 할 줄 아는 당나라 군사 10여 명이 차례차례 외성 안으로 진입했다.
때마침 안시성 성주 양만춘이 미리 마중 나와 맞이했다.
내가 입을 열기 전부터 공을 세워 하루라도 빨리 출셋길을 열고 싶어 하는 설인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러 온 설인귀(薛仁貴)라 하오. 그대가 안시성 성주요?”
“그렇소. 나는 양만춘(楊萬春)이라 하외다.”
양만춘과 인사를 마치자마자 사위를 두리번거리는 설인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성안 군사들의 무장이 모두 해제되었는지 우리가 직접 살펴보아도 괜찮겠소?”
“그러시오. 하나 그대들이 내성 안으로 들어간다면 성주민들이 겁을 먹을 수 있으니 무장을 하지 말고 들어가주시오.”
“내 고려해보겠소!”
설인귀는 좀처럼 내키지 않아 하는 눈치였지만, 그런 까닭에 황제가 자신을 지칭하여 안시성에 보낸 것이니 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기민하게 외성 안에 무장해제가 된 고구려 병사들을 하나둘 살피는 한편, 내가 양만춘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일렀다.
“계획대로 하되, 저 흰색의 사내는 꼭 생포해 주십시오.”
“저자가 누구길래?”
“스스로 설인귀라 밝히지 않았습니까? 몰락한 가문의 한미한 출신이나 무예가 출중하니 당의 황제가 믿고 맡긴 겁니다. 그러니 저 자를 생포하는데 각별히 유념하십시오.”
안시성 혈전에 앞서 주필산에서의 활약으로 단숨에 출셋길에 오르는 설인귀의 일화는 유명하다.
주필산에서 황제에게 일부러 눈에 띄기 위해 흰 전포를 입고 활약하며 발탁되고는, 이후 안시성 전투에서 공을 세워 당의 유격장군(遊擊將軍)이 되었다.
그러니 안시성을 위해서라도 저 자는 절대로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
‘내가 개입한 이상, 이세민이 지었다는 주필산이라는 이름조차 역사에 남을지는 모르나. 저 설인귀가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 고구려의 후환(後患)이 되어 돌아오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나는 조그마한 주먹을 움켜쥐었다.
당나라 병사들이 서로 나눠서 외성을 살피는 중에 더 자세히는 전할 수 없었으나, 양만춘은 일단 알았다고 답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와 거리를 두었다.
혹여나 설인귀의 눈에 띄어 내성에 발을 들이기 전부터 의심을 사봐야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는 모두 무장을 해제했습니다!”
“이쪽도 마찬가집니다! 이만 내성에 들어가도 되겠습니다!”
외성에 위장으로 배치한 안시성 병력 800여 명의 무장해제를 확인한 당나라 병졸들이 설인귀에게 보고했다.
“무기를 들고 내성으로 들어갈 순 없소이다.”
내성에 진입하기 전 양만춘이 재차 설인귀와 당나라 병졸들의 무장해제를 요구했지만, 설인귀가 불현듯 품에서 꺼낸 녹색 천으로 착용한 칼집을 덮었다.
“이러면 칼이 보이지 않으니 괜찮지 않겠소? 성도 작으니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듯하고. 빨리 들어갑시다! 이 인원으로 안시성의 병장기(兵仗器)들을 다 꺼내오자면 날을 새도 부족할 듯하니.”
설인귀를 따라 마찬가지로 저마다 천으로 무구(武具)를 가리는 당나라 병졸들. 설인귀의 저런 철두철미한 면은 괜히 당나라에서 명장이 된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살짝 이를 갈았지만, 내 두 눈 똑바로 뜨고 있는 한, 저들이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시도 눈을 떼지 않은 채 설인귀의 행보를 주시하는 양만춘 역시 언제든 내성에 신호를 보낼 준비를 마친 듯 보인다.
이윽고 성벽을 따라 내성으로 진입하는 설인귀와 그 졸개들. 먼저 안으로 들어선 양만춘이 뒤따라오는 그들을 인지하며 정해진 위치에서 검지를 허공에 찔렀다.
퍼더덕
그러자 위에서 미리 준비하고 있던 그물이 휙 하며 떨어졌다.
“으아아악!”
“이게, 대체?!”
설인귀를 포함한 서너 명이 겹겹이 싸인 그물에 걸렸고, 뒤따른 나머지 병졸들이 칼을 뽑아 대항하려 했으나, 품에서 먼저 단검을 꺼낸 양만춘에게 제압당했다.
“이 고구려 놈들이, 감히 황제 폐하와 우릴 속여?!”
얼굴이 귀까지 새빨개진 설인귀가 그물 안에서 허우적거리며 칼을 뽑아 들었고, 놀라운 괴력으로 이중 삼중으로 쳐진 그물을 갈라내려 하고 있었다.
쩌, 쩍!
“미친!”
하나씩 찢겨 나가는 그물을 보자 나와 양만춘은 물론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설인귀에게 감탄했다.
웬만한 무구(武具)나 도끼로도 갈라내기 어려운 저 두꺼운 그물에 끼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포박 상태에서 겨우 저 얇은 칼 하나로 빠져나오려 하고 있었으니까.
칭챙!
내성 안에 숨어 있던 옥소와 걸걸중상이 막으러 달려갔으나 몇 합 부딪히지도 못하고 튕겨 나갔다.
지지직─
설인귀의 괴력으로 그물이 서서히 찢기려 하자 나는 단숨에 비도를 설인귀의 다리를 겨냥해 날렸다.
휘익─!
푹!
“끄윽!”
다닥 하며 일순 무게 중심이 무너지는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가는 안시성 성주.
퍼퍽! 이내 양만춘의 발차기로 무릎을 꿇은 설인귀와 그를 따르는 병졸들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네, 네놈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성싶더냐?!”
푹, 나는 그의 종아리에 박힌 비도를 뽑아 목을 겨누었다.
“이세민은 안시성(安市城)을 넘지 못할 것이다.”
“네, 네 어린놈이 속였구나! 요동성에서 황제 폐하와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 부총관(副摠管), 그리고 우리 모두를...!”
눈에 실핏줄이 터지며 발악하는 설인귀가 딱해 보였지만, 나는 일부러라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거 놔라! 이놈들.”
내성 안에 숨어 있던 안시성의 군사들에게 연행해나가는 설인귀를 보며 고구려의 골칫거리 하나를 처리했음을 확인했다.
* * *
“폐하! 저희가 속았사옵니다!”
“속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여기 이걸 보시옵소서! 연남산을 따라 안시성에 간 저희 병사가 홀로 살아남아 가져온 것입니다.”
“이리 가져오너라!”
이세민이 강하왕 이도종이 가져온 서찰을 낚아채 펴자 가장 위에 큼지막한 글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創業易守成難(창업이수성난)]
“업(業)을 이루기는 쉬우나, 지키기는 어렵다?”
화들짝 놀란 이세민이 아래 적힌 글자들을 순차적으로 읽어보았다.
[너의 신생국 당나라가 600년 사직을 이어온 고구려를 침범하니, 수나라 때의 과오를 또다시 반복하려 하는구나! 자고로 제왕은 역경 가운데서 천하를 얻었다가 안일함 속에서 천하를 잃지 않은 적이 없으니, 이루어 놓은 것을 지키기란 마땅히 어려운 것이 아니겠는가!]
“이, 이놈이! 대체 어느 놈이 이따위 글귀를 써 보내온 것이냐?!”
낯빛이 붉어지며 소리친 이세민은 마치 위징이 살아 돌아와 꾸짖는 듯한 글귀를 보며 성냈다.
[自古帝王(자고제왕), 莫不得之於艱難(막부득지어간난), 失之於安逸(실지어안일] 《十八史略(십팔사략)》
그도 그럴 것이, 서찰에 적힌 내용이 과거 조정에서 ‘창업(創業)’과 ‘수성(守城)’에 대한 주제로 위징과 방현령 등 신하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던 중 수성이 더 어렵다고 말한 위징의 주장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위징이 버선발로 달려온 것도 아니고,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이보게, 부총관! 폐하 앞에서 지금 말을 하는가?”
“소, 송구하옵니다! 폐하.”
이세적의 호령에 이세민의 눈치를 보며 이도종이 급히 사과했다.
위징 사후 당나라 조정에는 하지 말라는 것을 하려 할 때는 ‘위징이 버선발로 달려온다’라는 말이 나돌고 있었고, 장안 시내에도 노인들이 어린아이들을 다그칠 때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유명한 말이 되어버렸다.
“시끄럽다! 누가 이런 걸 보냈는지, 짐이 어서 말하라 하지 않느냐!”
현무문의 변으로 형제들을 죽이고 태자가 되어 황제가 오른 이세민. 그런 이세민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은 위징은 장차 죽을 뻔하였으나, 오히려 중용돼 당대 최고의 재상이 되었다.
이세민은 사사건건 걸고넘어지며 간섭하는 위징을 증오했다. 643년 죽기 전까지 고구려 원정을 하지 말라 하며 숨을 거두었으나, 막상 그가 죽자 성대히 장례를 치러주었다.
-짐과 이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제 놈을 위한 간언이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가 사관에게 수시로 자신의 말을 기록에 남기게 하였으니, 사후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한 위징의 의도를 알아챈 이세민은 격분하듯 고구려 원정을 감행했다.
“왜 말을 않는 게야?! 안시성 성주라더냐?”
“저, 전해 받은 병사에 따르자면, 개금(蓋金)의 막내아들이라 하였습니다! 폐하,”
그 말에 이세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게 사실이냐?! 내가, 짐이, 그따위 어린아이에게 속아 넘어갔다? 이런 글귀나 받으며?!”
뒤늦게 머리에 팍 꽂힌 이세민의 속에서 불같은 화가 끓어올랐다.
“내, 내, 저 안시성을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리라!”
“폐,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폐하. 이는 폐하를 유인하기 위한 술책이옵니다. 일단 안시성보다는 먼저 백암성을...”
이세민에게 다른 이의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그는 이성을 잃었다.
“출정이다! 강화 도종에게 동쪽의 백암성을 맡기고, 우리는 날이 밝는 대로 전군 안시성으로 진군한다! 개금의 막내아들을 내 찢어 죽이리라!”
“폐하! 백암성은 신에게 맡겨 주시옵소서!”
관아 안으로 급히 들어선 이는 고돌발의 창에 찔려 낙마한 계필하력이었다.
“그대는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 않지 않았는가?”
계필하력이 가슴을 툭툭치며 말했다.
“보시옵소서! 이제 다 나았사옵니다! 신이 백암성의 성주에게 빚이 있으니 부디 신에게 맡겨주시옵소서!”
그 말에 이세민이 수긍했다.
“알겠다! 보병 2만과 포차 10대, 그리고 이번에 참전한 거란의 대하아복고가 이끄는 유목민 기마대 3000기를 내어줄 터이니 백암성을 넘으라!”
“예! 이 계필하력, 반드시 폐하께 고돌발의 목과 함께 백암성을 바치겠사옵니다!”
* * *
“당나라군이 요하 방어선을 기습적으로 돌파하여 현도성(玄菟城), 개모성(蓋牟城), 가시성(加尸城), 요동성(遼東城), 비사성(卑沙城) 등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고 하옵니다!”
전령의 소식에 고연수, 고혜진이 발끈했다.
“당의 황제가 남하하여 안시성으로 향하고 있다는 첩보입니다!”
“안시성마저 당의 수중에 떨어지면, 다음은 압록강 이북의 오골성(烏骨城)과 박작성(泊灼城)이고 그다음에는 여기 평양입니다! 이제 신라만 신경 쓸 겨를이 아닙니다! 대막리지.”
노장 고정의와 이기우가 수긍했다.
“그렇사옵니다! 다른 첩보에 의하면 백암성의 성주 손대음이 당의 황제와 내통을 하였으나, 남산 공자와 고돌발이 이를 막았다는 소식도 들었사옵니다! 백암성과 안시성에 구원병을 보내시옵소서!”
“저희가 서둘러 군사를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태왕 폐하.”
일리 있는 주장에 태왕이 나섰다.
“그렇소! 우리가 너무 남쪽만 신경 쓰다가 요동에 대해 안일하게 생각했던 듯하오. 수나라 때처럼 요동성에서만큼은 반드시 막을 수 있을 거라 보았거늘, 그 짧은 시일에 그토록 많은 성을 빼앗기다니...”
“천만다행인 것은 빼앗긴 성들의 백성들이 사전에 신성과 백암성, 안시성, 건안성 등 후방으로 이주하여 큰 피해가 없었다는 전갈이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대막리지.”
보장왕의 물음에 전갈을 가져온 검모잠이 대신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태왕 폐하. 백암성에 간 말객 온사문이 전해온 소식에 따르면 남산 공자께서 퍼뜨린 동요에 요동 백성들이 상당수 그곳 성들로 피난했다고 하옵니다.”
“어찌 된 건지 자세한 사정은 모르나, 참으로 다행이오! 백성들이 당나라 놈들의 포로가 되었다면, 분명 큰 수모를 당했을 것이 분명하거늘. 백암성 일도 그렇고, 대막리지께서 막내 아드님을 요동에 보내신 이유가 있으셨습니다그려! 허허.”
“황공하옵니다! 폐하.”
태왕의 칭찬에 연개소문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손대음 건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어떻게 버티는 성들만 골라서 그런 동요를 퍼뜨린 건지, 남산에게 직접 따져 물어보고 싶은 건 그 자신이었다.
어찌 됐건, 연개소문에게 슬슬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다.
신라의 김유신이 다시 북상할까 염려하는 태왕이 자신의 친정만은 적극 만류를 하고 있지만, 그는 여차하면 자신이 직접 올라가 이세민과 상대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문제는 당의 수군인가.’
다만, 장량이 이끄는 당의 수군이 비사성을 점령하며 기세를 얻었고, 고구려의 제해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수나라의 내호아(來護兒)가 그랬던 것처럼 언제든 평양을 향해 직접 상륙 작전을 감행하는 것도 가능해진 셈이다.
그 때문에 섣불리 움직이기도 애매한 상황이다.
‘수영이 녀석은,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게야?’
고구려 재해권의 마지막 보루는 석성(石城)을 중심으로 고구려 전선이 모여 있는 벽류하(碧流河) 일대였다.
이곳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서야 남산이가 일러준 대로 장량이 이끄는 수군은 대동강으로 들어오기 어려울 것이다.
“어찌해야겠습니까? 대막리지.”
태왕의 말에 고연수 고혜진을 비롯한 욕살들이 연개소문을 바라보고 있다.
손때가 탄 종이와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는 연개소문.
자그락, 선택의 시간 속에 연개소문은 남산이 적어준 종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육로가 아니라, 막내 놈이 말한 대로 바닷길을 이용해야 하는가 하고 고심하며.
이세민은 틀림없이 압록강 이북으로 북상하는 고구려 구원군의 대비책을 세워두었을 것이 분명하다.
고연수, 고혜진 두 패기 넘치는 젊은 욕살은 기마대를 이끌고 말갈군과 함께 육로로 가길 희망하지만, 연개소문이 선뜻 정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육로로 오는 지원은 당나라의 백전노장들이 철저히 대비하고 있으니 요동으로 함부로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삼가야 하며, 병서와 해류에 밝은 경험 많은 욕살(褥薩)로 하여 군대를 지휘하게 하고, 해로를 이용한다면 저들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겁니다.
남산의 주의와 당부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일리가 있는 것이, 도성 평양을 지키기 위해 정예병을 온전히 그들에게만 내어 줄 수 없는 노릇이고, 그러면 농사를 짓는 농민들을 징발해야 하는데 그저 수를 늘리기 위한 것일 뿐,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은 그들이 당나라 정예군과 맞서 싸운다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대막리지!”
“저희가 선봉에 설 수 있도록 윤허해 주십시오!”
고연수 고혜진을 비롯해 태왕과 궁 안 모두가 연개소문의 입에 주목했다.
연개소문이 심사숙고 끝에 결정했다.
“지금은 물러났어도 남쪽의 신라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사옵고, 비사성에 주둔한 장량의 수군이 언제든 평양에 상륙할 수 있사옵니다! 지금은 전선(戰船)을 축조하고, 때를 기다려야 할 줄로 아뢰옵니다! 태왕 폐하.”
결심을 굳힌 연개소문은 철옹 같은 안시성을 믿고 있었다
그 자신이, 안시성을 무릎 꿇리기 위해 직접 성문을 열고자 했으나 실패했으니까.
‘이세민이도 마찬가지의 고통을 겪으리라!’
그곳에 묶여 놈들의 군량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지칠 때가 바로 남산이가 가리키는 반격의 적기였다.
* * *
“당나라군이옵니다! 요동성에 있는 당나라군이 이곳 안시성으로 몰려오고 있사옵니다!”
성벽 위. 화창한 날씨라 그런지 제법 멀리서 엄청난 기세를 몰고 달려오는 먼지가 얼핏 보이기 시작했다.
현대에서는 당나라 군대라고 하면 오합지졸로 생각하고 말하지만, 가장 현대적이면서 체계적인 군사법을 배운 놈들이 바로 이 시대의 당나라 군대였다.
요동성에서 본 것과는 차원이 다른 기분이다.
막상 저 떼놈들과 이 작은 성에서 맞서 싸울 생각을 하니, 긴장되기도 하고.....
설마 이렇게 빨리 저 대군을 몰고 올 줄이야, 내가 벌인 짓이 어지간히도 이세민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나 보다.
“후우.....”
그럼에도 나는 숨을 깊게 들이시고 내쉬며 안심하고 있었다.
그야 내 옆에는, 비장한 표정의 양만춘이 묵직하게 서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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