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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사항계
“도련님께선 제정신이십니까? 저희가 있던 요동성이 무너졌습니다! 이미 적의 본거지가 되었단 말입니다!”
“사, 사지(死地)로 홀로 가시겠다니요? 아니 되십니다! 작은 막리지!”
뒤를 돌아보자 막사 밖에 있던 옥소와 걸걸중상이 뛰쳐 들어왔다.
전날 성 밖에서 했던 말로 어지간히 신경들을 쓴 건지, 오늘 나와 양만춘의 대화를 일부 엿들은 듯하다.
아무래도 설명이 필요한 건 양만춘뿐만이 아닌 모양.
두 사람을 뒤로한 채 내가 양만춘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요동성을 차지한 이세민은 이제 그 여세를 몰아 동쪽의 백암성을 공격할 겁니다. 처려근지의 용맹함을 믿지만, 수적으로 열셉니다. 그러니 이세민이 이끄는 당의 6군을 분산시켜 이곳 안시성으로 끌어들인다면...”
“그것도 반반이로구나.”
“...예?”
“놈들의 위세마저 반으로 쪼개질 테니까. 적의 군사가 두 개로 나누어졌으니 수성이 성공할 가능성도 올라갈 테고.”
말을 중간에 끊으면서 핵심을 바로 찾다니 역시 양만춘이다.
“그렇습니다.”
“하나 그게 네가 단신으로 요동성에 가 이세민과 만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양만춘의 물음에 옥소와 걸걸중상의 시선도 함께 내게 모였다.
포인트는 결국 그 부분일 테니까.
하지만 이래 봬도 동양사를 공부하면서 당 태종 이세민에 대해 뼛속까지 연구한 몸이다.
황제가 되기 위해 형제의 피를 뿌렸으나,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 중 하나로 꼽히는 인물.
여담으로 당을 건국한 이연의 조부가 선비족 출신이고, 어머니 역시 선비족이기에 자세히 분석하면 한족 역사라 하기에는 다소 애매하지만, 이세민은 항복한 자에게 비단을 내리고 지위를 보장해 주는 것으로 아주 유명한 군주다.
그런 까닭에 북방 이민족에 속하는 거란이나 돌궐 출신의 용맹한 자들도 저마다 이세민을 흠모하며 진심으로 따르고 있는 자가 나오는 것이다.
‘대표적인 당의 이민족 출신 무장들로는, 설인귀, 아사나사이, 계필하력 등을 들 수 있겠지.’
설인귀야 역사 기록에서 한족처럼 나오지만, 선비족의 피가 흐르는 데다 북방이나 고구려 출신이라는 전승 역시 적지 않다.
그것도 가능하다면, 가서 한번 확인해볼까?
생각을 정리한 내가 대답했다.
“당의 황제는 큰 성을 얻어 잠시 기쁘겠지만, 이내 전리품이 없다는 걸 알고는 크게 실망했을 겁니다. 이때 제가 나아가 안시성의 성문을 열어두고 양곡과 가축을 내어주겠다 한다면 어찌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그런 이세민에게 가서 안시성 성주를 설득해 항복하겠다고 한다면 과연 그는 어떻게 나올까?
지금 빈 강냉이 같은 요동성을 취해 한참 실의에 빠져 있을 당나라 군사들을 보며 말이다.
“!”
“!”
“!”
내 계책에 관심이 생긴 건지, 막사에 있는 일행과 양만춘이 하나같이 깜짝 놀라는 눈치다.
나는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차근차근 설명하려 한다.
* * *
“폐하! 군사들의 사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옵니다! 기껏 이 요동성에 들어왔는데, 성은 홀라당 다 타버린 흉가가 되어 있고, 전리품이라곤 기껏 쌀 몇 톨 받아 가는 것이 전부라니요?!”
“거기다 지난번 살아남은 고구려 놈들이 성안에 모두 불을 질러 얼마 안 남은 양곡마저 상당수가 먹을 것이 못 되옵니다!”
“틀림없이 고구려 놈들의 술책이옵니다! 안에 있는 성주민들과 가축들을 모두 빼낸 것도 모자라 스스로 성안에 불을 지르다니!”
“다른 성도 그래서 혹시나 했는데, 설마 이 요동성까지 이런 짓을 저지를 줄은 몰랐습니다!”
“지난번 남문으로 대피한 계필하력이 고돌발의 습격을 받아 부상을 당했으니, 요동성이 함락될 것을 이미 예상한 움직임이 아니겠습니까?”
이세적, 아사나사이, 장손무기, 손이랑, 이도종을 필두로 시체들만 깔린 텅 빈 요동성에 입성한 당의 대표 무장들이 하나같이 불만을 토해냈다.
탁탁, 지휘관들의 불평에 이세민이 칼집으로 바닥을 여러 차례 내려쳤다.
“그만, 그마아아안! 짐이 어찌 장졸들의 실망을 모르랴! 하나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하느니.”
겉으로는 품위를 잃지 않으며 외치는 이세민이었지만, 실상은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짜야만 했기에 불편함을 애써 감추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원래라면 요동성을 함락하고 주변의 성들에 항복을 권유할 예정이었으나, 호전적으로 나오는 백암성 성주를 보자 고민이 깊어졌다.
거기다 강화군왕 이도종의 말대로 정말 고구려는 마치 요동성이 떨어질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뿐만 아니라 성 내에도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고구려 잔당 때문에 어지간히도 애를 먹은 게 아닌가!
요동성에 입성하면서 기세가 오른 당나라군에게 치명적인 피해는 아니었지만, 허를 찌르는 통에 성을 취하고 나서도 낙마한 계필하력을 비롯해 1000여 명의 추가적인 사상자가 발생하는 둥 사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떨어진 분위기 속에 이세민과 그를 따르는 장수들의 낯빛 역시 밝지 못했다.
“폐하! 안시성에서 항복을 하겠다 하옵니다!”
그러던 중 밖에서 들려온 뜻밖의 희소식에 이세민의 눈이 번뜩 트였다.
이세민은 전날 영류왕(榮留王)이 보내준 고구려 전도(全圖)인 봉역도(封域圖)를 가리키며 전령의 보고를 받은 우무위대장군(右武威衛將軍) 손이랑에게 물었다.
“저 안시성에서? 그게 사실이냐?!”
“예 그렇사옵니다! 폐하. 그곳으로 피난 간 요동성의 백성이 수천이요, 비축된 양곡도 족히 10만 섬이 넘는다 하오니 군사들의 사기를 올리는데 그만한 전리품이 없을 것이옵니다! 폐하.”
“알아서 굴러들어오는 월병(月餠)이로구나!”
권유를 하기도 전에 알아서 항복을 하겠다니, 안시성에 무혈입성한다면 그야말로 떨어진 사기를 단숨에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거기다 영주 도독과 장검의 이민족 부대가 한참 공성 중인 안시성 아래 건안성까지 점령한다면, 해안로가 크게 뚫리게 될 터이니, 평양도행군대총관 장량이 점령한 비사성 해안 지대와 더불어 요동 바닷길 7할 이상이 모두 당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것이다.
북쪽 천리장성인 신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건 계획에 없었지만, 아래 현도성, 가시성, 개모성, 요동성, 비사성 등 고구려의 주요 요충지를 점령했다.
가까운 동쪽 백암성을 별개로 두더라도 여기서 안시성까지 손에 넣는다면, 고구려의 도성을 향해 달려갈 직할 교두보가 뚫리는 격이었다.
“그래 누가 왔다더냐? 성주가 직접 왔느냐?”
“그것은 아니옵고.. 아, 그것이...”
기쁜 마음을 애써 숨기며 말하는 이세민의 물음에 소식을 가지고 온 전령이 선뜻 대답하지 못했고, 이세적과 손이랑이 대신 호통쳤다.
“어허! 대체 누가 왔길래 폐하 앞에서 그리 뜸을 들이는 게냐?!”
“빨리 말씀 올리거라!”
화들짝 놀란 전령이 이내 눈치 보며 대답했다.
“개, 개금의 막내아들이라 하옵니다!”
“!”
“!”
“!”
예상치 못한 인물의 정체에 요동 관아 내 황제를 포함한 당나라 무장들이 모두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귀한 손님이 오셨구나! 참으로 귀한 손님이 왔어!”
주인이 바뀐 관아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마중 나와 반갑게 웃으며 손을 꽉 잡는 이세민. 또 언제부터 있었는지 내 옆에는 반짝이는 금빛 비단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예상은 했으나 이 정도로 환대를 해줄 줄이야. 이래서 고구려에 손대음 같은 매국노들이 나왔나.
그나저나 우선 인사를 받았으니 예에 답을 해주어야겠지.
“황제 폐하의 환대에 소인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또박또박 말하는 나를 보며 감탄하는 이세민.
“호오, 네 어린 것이 중원 말도 할 줄 아느냐?”
“예에. 아버님께서 중원에서 활약하는 폐하를 말씀하셨으니 그것을 더 깊이 알고자 어찌 중원 말을 배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세민이 내 세 치 혀에 재차 감탄한다.
“오호라, 개소문이 네게 나에 대한 얘기를 했다? 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하구나!”
이세민의 관심에 나는 어린이 특유의 애교 섞인 웃음을 더하며 말했다.
“아버님께서 이르시길, 중원을 유랑하며 꿈을 크게 가지셨으나, 폐하의 우렁찬 모습을 뵙고는 그것이 다시 고구려로 돌아가야겠다 마음먹게 된 계기라 하셨사옵니다.”
“흐하하! 개금이 쫄아서 도망간 게 아니겠습니까?”
“폐하의 위용을 보고 겁이 난 게지요!”
그 얘기에 저마다 기뻐하는 당의 무장들. 낄낄거리며 웃는 저들의 모습을 보니 연개소문과 이세민의 인연을 꺼낸 것이 제법 효과가 있는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굳은 표정을 짓는 이세민을 보자 입술이 바짝바짝 탄다.
“네가 비록 어리나, 이는 자칫 아비를 배신하는 일이 될 수 있느니라. 네가 혹 그걸 모르고 이곳에 온 것이냐?”
호오, 처지까지 생각해 주신다? 십팔사략(十八史略)에 전해오는 이야기들이 거짓은 아니구나.
그 물음에 나는 자신했다.
철저히 제왕의 교육을 받아온 이세민, 그것이 장차 당신에게 큰 화근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실은, 아버님께서 소자를 버리셨사옵니다!”
“개소문이 너를 버렸다?”
“예에. 아버님께서는 큰형님만을 어여삐 여기시고 저와 남건 형님은 안중에도 없으시옵니다. 어머니를 문전박대(門前薄待)하는 것은 물론, 저를 내치셨으며 큰형님께서는 저를 죽이려 하십니다. 하오니 제가 이곳에 온 것은 배신이 아니요, 제 보잘 것 없는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지요. 황제께서는 인덕이 풍부하시어 백기를 들면 이처럼 큰 상까지 내린다 하였으니 천하 내 고구려 백성 중 어느 누가 그 인품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흐음... 어쩐지, 그래서 네 어린 것이 미리 요동에 와 있던 게로구나.”
나는 이세민의 저 말을 놓치지 않았다. 내가 요동에 있었음을 사전에 알았다는 뜻이니까.
고구려나 당나라나, 서로가 서로에게 주목하고 있으니 도처에 세작들이 깔려 있어도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폐하! 아무래도 이상하옵니다.”
나와 이세민의 대화에 모두가 긴장을 풀고 있을 때, 이의를 제기한 인물은 이세민의 오른팔 요동도행군대총관 이세적이었다.
“무공(懋功), 그대는 뭐가 이상하다 말하는가?”
“파렴치한 개금의 아들이 아니옵니까? 저 어린 것이 놀리는 세 치 혀를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알아본 바로, 안시성의 성주와 그 성주민들은 개금의 말을 따르지 않을 만큼 드세다고 하였사옵니다! 한데 저 어린 것이 어찌 안시성에...”
“이걸 보고 말씀하시지요.”
나는 기다렸다는 듯, 이세적의 말을 툭 끊어 안시성 성주의 서찰을 이세민에게 건넸다. 풍채가 큰 이세민이 서찰을 받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 서찰에 쓰인 대로라면, 안시성 성주 양만춘이 성문을 활짝 열고 짐을 맞이하겠다고 하는구나! 하나 성의 주민들이 불안해하거나 두려움에 떠는 이들이 적지 않으니, 개소문의 막내아들을 따라 당나라 군사 일부를 성 내에 들여 먼저 위협이 없음을 보인 후에 사흘 후 성문을 열고 맞이한다고 한다.”
“역시 이상하옵니다! 항복을 하면 항복을 하는 것이지, 무슨 시일이 필요하다 저런답니까?”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는 이세적을 보자 쉽게 속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 여겼다.
하지만 사람은 그 나이 때에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했다.
어릴 적 누구라도 한 번쯤은 듣는 말.
다만, 그게 당나라 황제 앞이 될 줄은 누가 알았겠나.
인생 오래 살고 볼 일이지.
나는 과장될 정도로 큰 목소리로 말했다.
“성안에는 요동성에서 온 백성들도 적지 않사옵니다! 고향이 모두 불에 탔다 한다면, 어느 요동 백성이 기꺼이 성문을 열고자 하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짐방이지성치천하(朕方以至誠治天下)라 하셨습니다. 지성을 가지고 천하를 다스린다 천명하신 폐하께서 그들의 처지를 헤아려 주십시오!”
“네 어린 것이 참으로 기특한 말을 하는구나.”
이세민은 안시성이 이미 손에 들어온 듯 흡족해하며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였다.
“하오나 폐하!”
“하오나 폐하!”
이세민이 반발하는 이세적과 장손무기를 다그쳤다.
“시끄럽다! 군의어국(君依於國) 군의어민(國依於民)이라 했다! 자고로 군주는 국가에 의지하고, 국가는 백성들에게 의지한다 하였느니, 요동 백성이 곧 짐의 백성이요, 그들을 의지할 것이니 그대로 시행토록 하라!”
나는 씩 웃으며 납작 엎드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짐이 백암성의 항복을 바랐거늘, 개소문의 막내아들로 인해 안시성을 거저 얻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흐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이세민은 이미 승리에 도취한 듯보였다.
나는 이때다 싶어 한번 요구해보았다.
“폐하! 고구려말을 할 줄 아는 당나라 병사가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안시성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네 어린 것이 그런 배려까지 생각해두었구나! 알겠다. 여봐라! 막사 안에 고구려말을 할 줄 아는 이들을 뽑아 이 아이와 함께 안시성으로 보내거라!”
그 말과 함께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세민의 호령에 무슨 말을 꺼내려는 이세적과 이도종의 입이 쏙 들어가 있었다.
* * *
계획대로 이세민의 시선이 백암성에서 안시성으로 분산되었다. 아래 건안성까지 계산한다면 그의 머릿속은 한층 더 아래쪽으로 향해 있을 것이다.
“이랴! 이랴!”
요동성을 벗어난 나는 지금 기마하며 안시성으로 귀환하고 있었다.
요동 지역을 대표하는 성을 점령한 당의 기세는 만만치 않아 보였다.
요동 성주 을지문강의 목은 요동성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효수되어 당나라 군사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고, 살아남은 요동성 병사들은 놈들의 포로가 되어 가축마냥 끌려다니고 있었다.
속에서 화가 치밀어올랐으나, 나는 가까스로 진정하며 이세민을 속이고 그곳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다그닥! 다그닥!
말을 타며 정신없이 달려가는 도중, 뒤에 있는 당나라 병사 대표가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이보시오, 공자! 이곳이 정녕 안시성으로 가는 길이 맞소이까?”
흰옷을 입은 사내가 의심 가득한 어조로 고구려말로 묻고 있었다.
“저기 저곳으로 가로질러가면 곧바로 안시성의 성벽이 보일 겁니다.”
“그렇구려. 내 언제나 황제 폐하 옆에 나란히 서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소이다! 안시성을 황제께 바친다면 틀림없이 기뻐하시겠소. 내 고구려 말을 할 줄 아니, 공자를 만난 건 천운(天運)이오!”
그래 천운이지.
출세를 위해 목이 마른 사내를 보며 나는 확신했다.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백설기같이 하얀 옷을 입고 있는 그는 멀리서 봐도 크게 눈에 띈다.
설인귀(薛仁貴), 나는 이 자를 생포해 장차 고구려의 후환(後患)을 없애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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