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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빈 성의 계
이세민이 꽁무니를 빼고 도망가려면 몇 가지 조건이 성립해야 한다.
하나는 장량의 수군이 요동 남단의 연수영의 함대에게 괴멸당해 뱃길이 완전히 끊기는 것이고.
둘은 후미에 설연타가 움직여야 한다.
셋은 역사에도 익히 알려진 안시성에서의 수성.
이 외에도 요동 곳곳에서 당의 군량 수송을 저지하는 연개소문 직속 조의들의 활약과 함락되지 않은 신성과 건안성, 부여성, 국내성의 고구려군 10만의 주둔이 그것일 것이다.
아 중요한 하나 더, 평양 도성에서 언제든 출정할 준비가 돼 있는 연개소문의 본대를 빼놓을 수 없겠지.
그 많은 것들 가운데, 나는 오직 3번째에만 집중하면 된다.
고돌발이 지키는 백암성만 사수하면 주필산 전투가 일어날 리는 없을 거고, 내가 당의 정예군대를 이곳 안시성으로 분산만 시키면 고구려의 성도 더는 잃을 것이 없다.
여기서 전쟁을 끝낼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결과가 될 것이다.
물론 그런 내 생각을 알 리가 없는 요동과 안시성 사람들이 지금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일이 터지고 나서야 화가 조금은 누그러졌는지 성문을 열고 나온 양만춘이 한참이나 작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요동성의 백성들과 제 일행들을 성안으로 들여보내주십시오. 저기 방목지에서 기른 가축들과 요동성에서 가져온 양곡이 적지 않으니 필경 안시성의 큰 보탬이 될 겁니다. 수레에는 돌덩이와 목책용 목재, 그리고 요긴하게 쓸만한 것들도 준비했으니 가져가시고요.”
“그러면 너는 어찌할 참이냐?”
나는 씩 웃으며 답했다.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홀로 이세민과 맞서고 오겠다고요.”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양만춘에 이어 어느 틈에 바로 옆에서 엿듣고 있었는지 옥소와 걸걸중상 일행이 소리쳤다.
“도련님!”
“작은 막리지, 그 어인 말씀이십니까?”
“단신으로 당의 황제와 맞서신다니요?”
“당의 황제가 이끄는 6군만 해도 무려 30만 대군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대관절 뭔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냐고 어린아이에게 말하듯 나를 다그쳤고, 눈치를 보던 양만춘이 끼어들면서 일단락되었다.
“크흠! 아무래도 네가 나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해서 그런가 보구나! 네 아비와 사이가 좋지 못한 걸 어린 네게 풀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그리하면 나도 같은 놈이 되는 것인데...!”
입술을 질근 깨문 양만춘은 조금 전 내 발언에 갑자기 생각이 달라지기라도 한 건지 제법 딱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이곳에서 백성들과 함께 이렇게까지 고생할 줄은 몰랐다. 여타 귀족 아이와 마찬가지로 언제든 평양으로 돌아갈 줄 알았거늘...”
아마 안시성의 어린아이들도 성 밖에서 이처럼 고생하는 일은 무척이나 드문가 보다.
나는 당황했다.
“아니, 네? 그게 무슨...”
“설마, 이 수레에 든 것도 전부 안시성을 위해 한 것이었느냐?”
아니면, 내가 준비한 뜻밖의 선물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가.
잠깐만! 이렇게 나온다는 가정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고, 이봐요! 당신.
“삼공자님! 어찌 저희들을 버리고 가십니까?”
“요동성의 새 신녀께서 반드시 삼공자와 있어야 안전하다고 하였습니다!”
“부디 저희를 버리지 마십시오!”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정이 들었는지, 그간 작업을 도와준 요동 백성들의 눈망울에 물기가 배어 있었다.
“도련님!”
“작은 막리지!”
마찬가지로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옥소와 걸걸중상 일행들.
“지금 요동성에 가면 죽는 길이외다!”
“성주께는 우리가 잘 말할 테니 안시성으로 들어오시구려! 공자.”
거기다 이제는 괜찮다는 안시성 사람들까지.
계획에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일단 안시성에 입성부터 하고 생각해 봐야겠다.
어쩌면, 저 양만춘이 알게 되었을 때 오히려 더 완벽한 작전이 나올지도 모른다.
* * *
뿌우우─!
쿠-웅! 쿠-웅!
뿔나팔 소리와 북소리가 천지를 뒤덮었다.
“요동성을 넘어라!”
황제가 이끄는 6군의 총공세를 알리는 시각.
마수산(馬首山)에 진을 진 이세민은 포차와 충차를 앞세워 밤낮으로 요동성을 향해 진격령을 내렸다.
수나라가 비루(飛樓), 당차(橦車), 운제(雲梯), 팔륜루차(八輪樓車)와 같은 다양한 공성무기를 동원해 요동성 공략을 시도한 것과 달리 이세민은 큰 돌을 날리는 포차(抛車)를 주력으로 원거리에서 요동성을 포격했다.
콰앙! 쾅!
평지에 세워진 요동성은 포차가 날리는 위력적인 투석에 속수무책으로 성벽이 깨지고 있었다.
또 날이 밝으면 동문에서 이세적의 요동도행군이, 정오에는 이세민의 6군이 두 갈래로 나뉘어 북문과 서문으로, 밤에는 계필하력과 아사나사이의 이민족부대가 남문을 공격하여 수백 겹으로 겹겹이 포위한 채로 쉴 새 없이 요동성을 때렸다.
콰쾅! 콰광!
“아아악!”
“머, 머리에 피가...!”
북문에서는 투석이 쉴 새 없이 치(雉)에 올라 화살을 쏘아대는 고구려 군을 공격했다. 큼지막한 돌덩이에 벽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과연 수나라가 고전을 면치 못한 성이야!”
매일 성벽이 아작나는 요동성을 바라보지만, 이세민은 방심하지 않았다. 요동성 군사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또 그가 지휘하는 6군이 도착하기 전인 요동도행군대총관 이세적과 부총관 이도종 등이 먼저 성을 공격하기까지 날짜를 합친다면 공성을 시작한 지 꼬박 열흘째였다.
이세민은 친정하여 수많은 전쟁 경험을 치렀지만, 진형을 갖춘 당의 주력 부대가 열흘을 공략해서 함락시키지 못한 성은 손에 꼽았다.
“폐하! 동남쪽에 고구려 기병이 나타났사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시일이 지체되면서 주변 고구려성에서의 원군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또 백암성에서 온 고돌발의 군사이냐?”
“아, 아무래도 오골성의 성주 추정국의 군사로 사료되옵니다!”
“고돌발이 오골성 출신이니, 그쪽까지 불러들인 모양이군!”
이세민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불과 2, 3000기 남짓의 고구려 기병이었으나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공성이 시작될 때마다 배후를 공략하며 치고 빠지는 식으로 전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이 지시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신출귀몰한 놈들의 움직임.
“내 익히 듣기로 백암성의 성주 손대음이라는 자는 허약하고 욕심이 많은 자라 하여 안심하고 있었거늘, 어찌 짐이 요하를 건넌 이때에 성주가 바뀌었는가?!”
“요동성의 첩자에게서 듣기로, 반역죄로 처형을 당했다 하였습니다!”
장손무기의 대답에 이세민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 하나가 생각지도 못한 손실로 이어지고 있기에.
전쟁에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제일로 여긴 그였기에 응당 큰 성을 취하고 주위의 자잘한 성들을 순차적으로 항복 받을 계획을 미리 세워놓고 있었다.
한데 이래서야, 성하나 취하자고 아군의 피해를 상당수 감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안 되겠다! 요동도행군부총관 이도종으로 하여 2만의 군사를 별도로 주어 배후를 맡게 하고, 나머지는 요동 공략을 계속하라!”
“즉각 실행에 옮기겠사옵니다! 황제 폐하.”
이 조치로 요동성 점거에 시일은 좀 더 걸리겠으나. 열흘 가량 수백 겹의 포위망을 유지하면서 형세는 완전히 당나라에게 기울었다.
와아아아아아아!
북을 치며 고함을 치자 당의 군세는 꺾일 줄을 몰랐다.
불패(不敗)의 신화를 가진 황제가 친정한 진정한 효과는 요동성에서 그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고구려가 방해를 한다 해도, 이제 요동성은 얼마 버티지 못하리라.
“진형을 바꿔라!”
이후 이세민의 빠른 결단력에 당의 편제가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반드시 버틴다!”
한편, 성벽 위에 긴 수염을 자랑하는 사내. 요동 성주 을지문강은 파르르 떨면서도 화살 시위를 놓지 않았다.
당나라에게 성이 포위가 된 지 이십 일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홀로 쏘아 내린 화살만 무려 1000여 발이 넘는다. 굳은살이 박인 손 마디 마디에는 피멍이 한가득했고, 휴식 없는 오랜 전투에 요동성의 군사들은 지쳐만 갔다. 그들이 유일하게 버틸 수 있는 힘은 대막리지의 삼남인 삼공자가 그들의 가족들을 지켜준다는 약조 하에 결사항쟁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저 당나라 군대가 물러나면 다시 돌아올 부모와 처자식을 위해!
‘하나 그것도 이 상태가 지속되면 소용없게 된다!’
서서히 기력이 다해가는 을지문강은 불안했고, 그것이 시위가 되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이 요동성을 져버린 듯, 꺾이기 시작한 것이다.
“남풍이다!”
“요동성 쪽으로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바람이 분다! 불화살을 쏴라!”
제각각 약속이라도 한 듯, 각각의 성문 공략을 맡은 이세적, 장손무기, 계필하력 등이 호령했다.
쏴사사사사사!
한밤중에 날아오는 수천 발의 화살이 모조리 성벽을 넘어 들어왔다.
뜨거운 불길이 엄습했고, 깨진 성벽 사이사이로 들어선 투석과 화살로 요동성이 무너지고 있었다.
용감하게 버티는 요동 성주와 그의 수하들이었으나, 돌풍이 요동성 쪽으로 불어오면서 마침내 성내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예언이 사실이었구나! 설마 하늘이 요동성을 져버리다니!”
요동 성주 을지문강은 설마설마했던 일이 터지자 숙연해졌다.
수나라 300만 대군을 물리친 요동성의 자존심이 무너지려 한다.
“불길이 거셉니다! 성내가 모두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병사들이 모두 타죽고 있사옵니다!”
“큰일입니다! 적의 당차(橦車)에 북문이 뚫렸사옵니다!”
마침내 뚫려버린 성문. 서문과 남문에서 물밀 듯이 밀려오는 당나라 군대를 막기도 벅찬데 뚫린 북문에 주력하다간 다른 성문도 모두 파괴될 것이다.
내성만으로 지키기에는 버겁고, 을지문강은 이제 선택해야만 했다.
바로 삼공자와의 약속.
“양곡을 오늘 치를 제외하고 모조리 불태워라!”
“예에?!”
“어서 모조리 태우라 하지 않느냐! 저들에게 줄 쌀은 한 톨도 없다! 요동의 군사들은 단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다면 장렬히 싸워 죽을 것이다!”
을지문강의 대처에 그의 휘하 고구려의 군사들의 눈매가 달라졌다.
성안에 잃을 것도 지킬 것도 없는 그들에게 남은 길은 오직 죽음뿐.
포로가 되어 수치를 당할 바에야 열렬히 싸우다 죽으리.
“싸우자!”
“고구려의 수치로 남지 말자!”
와아아아아아아아!
고구려와 당나라, 양군의 함성과 함께 그날 밤 요동성은 외성과 내성을 가리지 않고 피 흘리는 격전지가 되었다.
* * *
“......질긴 놈들이군. 참으로 질긴 놈들이야! 어느 하나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놈들이 없다니.”
“폐하!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성안에 백성들이 없사옵니다!”
“뭐어라?! 이 큰 성에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다고?!”
“모, 모두 빠져나간 듯싶사옵니다! 폐하.”
장손무기의 보고에 불길이 식은 요동성에 입성한 이세민은 당황했다.
승리의 공을 세운 군사들에게 성과에 맞게 적절히 포상을 해야 한다. 재물을 내리거나 아니면 노예를 주거나.
목숨을 걸고 싸운 군사들에게 사기를 위한 당연한 조치였다. 더욱이 이렇게 격렬했던 전쟁은 이세민의 기억 속에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성안에 아무것도 없다면, 공을 세운 이들을 가려 짐의 비단을 내려야겠구나. 아니면 요동성의 양곡이라도...”
“폐하! 양곡도 없사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이어서 식량창고를 확인하고 온 이세적의 보고에 정신이 없어졌다.
“없사옵니다! 요동 성주가 성문이 뚫리자 곧바로 양곡을 모두 불에 태우라 하였다 했습니다!”
국가의 사활을 건 고구려 원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보급이다. 그 군량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은 응당 성을 점령하고 그곳의 양곡을 차지하는 것.
“이런 빌어먹을! 참으로 지독한 놈들이로다!”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승리를 기뻐하기도 전에 입맛이 개운치 않은 이세민이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불길 속에 죽다 살아난 말 200여 필에 요동성의 백성들이 버리고 간 생필품이 전부였다.
그것도 대부분이 불에 타 남은 것이 별로 없다.
“당장 그 성주라는 놈의 목을 베어 이 성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어라!”
“즉시 집행하겠사옵니다! 황제 폐하.”
군사들의 사기를 생각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였다.
“폐하! 큰일이옵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달려온 이는 우무위대장군(右武威衛將軍) 손이랑이었다.
“또 무슨 일이냐?!”
“저 연기를 보시옵소서! 성안에 불길이 치솟고 있사옵니다! 살아남은 고구려 잔당이 벌인 일인듯싶사옵니다!”
“이, 이놈들이! 오호라, 저놈들이 양곡을 모조리 태운 놈들이구나! 장손무기는 어서 가 놈들을 처단하고 계필하력은 불길 가까이에 휴식을 취하는 군사들을 서둘러 깨워 남문 밖으로 대피시켜라!”
“예! 폐하.”
“예! 폐하.”
황제의 명에 계필하력이 부랴부랴 휴식을 취하고 있던 군사들을 이끌고 남문으로 대피했으나, 때마침 남문 앞에서 기다린 고돌발의 별동대와 마주쳤다.
“내 너희들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공격하라!”
“이, 이 고구려 놈들이... 감히!”
불현듯 나타난 고돌발과 고구려군에 계필하력의 낯빛이 새하얘졌고, 미처 제대로 무장도 하지 못하고 뛰쳐나온 당나라 군사들이 혼비백산하며 고구려 별동대의 기습에 무차별적으로 쓰러졌다.
“이놈 계필하력아! 내 창 맛을 보아라!”
“네 이노오옴!”
칭! 챙!
“아악!”
불과 두 합에 계필하력이 고돌발의 창에 찔려 말 위에서 떨어졌다.
“성주! 들켰습니다! 동문에서 이세적의 대군이 몰려오고 있사옵니다!”
척후병의 보고에 고돌발이 쓰러진 계필하력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제기랄, 아주 운이 좋은 놈이로구나! 이만 백암성으로 돌아가자!”
“이, 이노옴...!”
바닥에 널브러진 계필하력은 분개했고, 고돌발은 요동성에 걸린 당나라의 깃발을 바라보며 아쉬운 듯 선뜻 말의 고삐를 채치지 못했다.
* * *
흐름대로 요동성이 이세민의 손에 떨어졌다.
두 차례 원정에서 수나라 백만 대군이 해내지 못한 걸 이루어낸 이세민과 당나라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겠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원역사이다.
지금은 역사대로 흘렀으나, 결과가 다르다.
『빈 성의 계(計)』
불길이 식은 텅텅 빈 요동성에 입성한 이세민은 불로써 큰 성을 취했으나, 방심하여 또 한차례 크고 작은 불길에 휩싸이며 고구려 원정을 감행한 약간의 후회를 하고 있으리라.
요동성을 빼앗긴 아쉬운 마음을 쓸어내리며 내심 그렇게 믿었다.
“불허한다!”
한편, 나는 지금 안시성 내 성주 막사에 와 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를 성안에 들이지 않으며 완고하게 버틴 양만춘이 이번에는 나를 곧이곧대로 보내주지 않는단다.
대체 어떤 뇌 구조를 가지고 사는지 참 궁금한 사내다.
조마조마 해하며 막사 밖에서 기다리는 일행들을 개의치 않고 내가 물었다.
“무엇 때문입니까? 저 때문에 여태껏 성문을 굳게 닫고 들여보내 주지 않은 게 아닙니까?”
눈을 감은 채 심사숙고하며 말하는 양만춘.
“.....그랬지.”
“한데 지금은 왜?”
“막상 너와 말을 섞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생각이 달라졌다고?
머리가 아팠다.
석 달간 원수 보듯 문전박대하며 개고생시킬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저러니 원.
“제게는 계책(計策)이 있습니다!”
말할 생각은 계획에 없었지만, 저쪽에서 이렇게 나온다면 별수 없다.
“계책? 그것도 연개소문의 생각이냐? 어린 자식마저 사지(死地)에 내보내는 그 포악한 성정!”
갑자기 성질을 내는 양만춘을 보자 머리가 바쁘게 움직였다.
여기서 대답을 잘해야 한다.
“반반입니다.”
“....반반?”
“저를 요동에 보낸 건 아버님의 뜻이 맞사오나, 여기까지의 여정은 오로지 저의 몫이었거든요. 앞으로도 마찬가지고요.”
“그럼 더더욱 너를 보낼 수 없구나!”
“보내주십시오!”
“네까짓 게 당의 이세민을 만나서 무얼 할 작정이냐? 목숨이라도 보전할 수 있겠느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의 황제는 저를 절대로 죽이지 않을 겁니다.”
“뭐?!”
“당의 황제의 계책은 단순합니다. 요동에 있는 고구려의 성 작은 것 토씨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차례차례 모두 취하여 육로와 해로로 동시에 평양으로 가는 것이 목적이니까요.”
“그래서?”
“머지않아 당의 황제가 친정하여 이곳 안시성으로도 올 것이니, 다른 성들이 위협에 처하는 것에 앞서 제가 이세민을 만나 그때를 당기고자 합니다.”
“?”
양만춘 당신은 모르겠지, 이곳이 전쟁을 끝낼 마지막 무대라는걸.
속을 감춘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요동성에서 고생한 당의 황제는 틀림없이 싸우지 않고 이기는 걸 가장 기뻐할 테니까요.”
“......”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양만춘.
그를 빤히 쳐다보며 잠시 고심한 나는, 내 계책을 조금 더 자세히 풀어 설명하고자 했다.
매국노 손대음이 저지른 악역사를, 역이용하는 그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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