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막리지 막내아들-13화 (1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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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폭풍전야

“유신 형님! 이 기세면 닷새 안에 성문을 여는 것이 가능하겠사옵니다.”

“방심하지 말거라! 흠순아. 첩보에 의하면 한성의 연정토가 기병 3000기의 구원병을 보낸다고 했느니라.”

“그걸로는 이 포위망을 뚫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허! 평양에는 연개소문이 있느니. 그리고 뒤에는 백제가 있느니라.”

“소, 송구하옵니다! 형님. 이 아우가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아우 김흠순을 바라보는 상장군 김유신의 주름이 짙어졌다. 백제 원정군 최고 지휘관인 그는 신라 조정이 지난날 당의 사신이 요구한 대로 따른 우려를 나타냈다.

당의 황제는 여왕이 다스리는 신라를 우습게 보고 있다. 하물며 신라 귀족들 사이에서도 여왕이 정치를 못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어디 남의 나라만 비판할 수 있으랴.

‘내 춘추공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 백제 국경의 군사를 이곳으로 옮기긴 했지만, 과연 백제가 당의 말을 듣고 고구려를 공격할 것인가.’

오히려 국경이 느슨해진 틈을 타 신라를 공격해 들어온다면 이쪽이 큰 타격을 입고 만다.

기껏 점령한 요충지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동화성(同火城) 등 7개의 성을 다시 백제에게 빼앗길 수 있다.

의자왕(義慈王) 아래 흑치사차(黑齒沙次), 계백(階伯), 성충(成忠)과 같은 만만치 않은 자들이 백제 진형에 있는 것도 걸리고.

“연개소문을 남쪽으로 끌어들이는 것, 내 임무는 오직 그것뿐이다. 저 성을 넘겠다고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이 김유신이 가만두지 않을 거라 전하거라!”

“혀, 형님!”

김흠순의 부름에도 김유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용화향도(龍華香徒)의 화랑(花郞)과 낭도(郎徒)들의 목숨을 어찌 허투루 쓰랴.

김유신은 언제든 물러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앞에 있는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보다 뒤가 계속해서 걸리기 때문이다.

* * *

“......”

요동 성주를 만나러 간 남산이 앞서 건네준 천으로 양 볼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하얀 천이 새빨갛게 번졌지만,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신녀의 피 냄새가 짙었다.

혈흔이 묻은 천을 들고 망연히 서 있는 옥소는 남산의 명을 받아 요동성의 신녀를 처단했다.

“웃기는 일이야. 내가 그 아이의 말을 따라 사람을 죽이다니. 그것도 신녀를...”

그 어린애의 말을 듣고 살생을 저질렀다고 하면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무려 요동성의 신녀를.

고구려에서 신녀가 상징하는 바가 어떤 의미인지는 저잣거리에서 동냥하는 어린아이들조차 알고 있다.

하지만 옥소는 요동성에서 구걸하는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주다 우연히 그들의 사연을 들으면서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저희 어머니께선 천리장성 축조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빌어주시려다 양곡을 온통 신당에 바치셨어요! 그러고는... 흐흑. 열흘 후에 돌아가셨어요. 저희 것을 뺀 끼니를 모두 신당에 바치시는 바람에...

-신녀께서 이달은 베를 바치지 않으면 집안에 크나큰 재앙이 일어날 거라 하셨으니, 온 식구가 나서서 베를 마련하느라 저희는 식구가 모두 이런 누더기를 입고 있지요.

-하지만 동명신께서 틀림없이 우리를 살펴주실 겁니다!

-그럼요! 신녀님께서 그리 약조해 주셨는걸요!

무슨 일이 있는지는 알아도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는 순진한 아이들.

영험한 추모대왕의 가호를 받는다는 명목으로 눈먼 이들이 저마다 신당에 나아가 가산을 탈탈 털어 모두 바쳤고, 아이들은 이렇게 밖으로 나와 동냥을 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16년간 천리장성 축조로 민생이 피폐해지고 흉년이 들어도 신당은 번영했고 풍족했다. 백성들에게는 풍작을 위해 오히려 젊은 처녀를 제물로 바치라고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통탄할 일이었다.

누구에게는 언니, 누나, 여동생, 딸자식 등 살아있는 가족을 잃은 그들의 사정을 하나, 둘 들으면서 옥소는 애써 눈물을 감췄다.

가족들과 생이별한 동냥아치 아이들의 사정이 필경 자신과 다르지 않았기에.

그때 똑같이 사당의 악행을 말하는 남산을 만났고.

“..!”

어느덧 정신을 차렸을 때쯤에는, 신녀를 처단한 뒤였다.

-옥소가 죽인 게 아니라 내가 죽인 거니까 너무 자책하지는 마. 고구려, 아니 이곳 요동성의 백성들을 위해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거니까 뒤는 나한테 맡기고.

그렇게 말하면서 피를 닥으라며 천 쪼가리를 주었던 남산.

그 어린 망나니가 다 큰 자신을 위로해 주었다.

쥐뿔도 안 되는 게 자책하지 말라니, 또 책임을 지겠다니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어머니와 생이별하게 만든 원수의 아들에게 내가 위로를 받다니!”

옥소는 칼집을 부러질 듯 세게 잡았다.

전혀 다른 방향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기에.

-소야야, 이 어미는 네 할미를 살리기 위해 너를 도성에 두고 갈 수밖에 없단다. 다시 볼 그날까지 무탈하거라.

2년 전 생이별한 어머니의 음성이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옥소의 가슴에는 고구려 땅 어딘가에 살아계실 어머니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 * *

“대막리지의 막내아들이 이곳 요동까지 먼 길을 오셨구려. 고생하시었소.”

고구려가 다스리는 요동 관아.

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또 한 명의 인물, 요동 성주 을지문강이 자리에 앉아 거만한 태도로 나를 맞이했다.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활약한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조카이자, 대모달 강이식(姜以式)의 사위라고 했던가.

그러니 여태껏 다른 성주들과 달리 저런 모습으로 나를 대할 수 있는 것이다.

남산의 미래 기억에 따르면, 을지문강은 숙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薩水大捷) 기념비를 허물어버린 영류왕과 중앙 조정에 상당히 불만이 많은 인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변이 터진 후 을지문덕의 승전탑 재건과 가문의 명예를 복권해 주지 않는 연개소문에게도 무언의 불만이 있는 상황.

그런 불만이 무색하게 요동 성주는 당 태종의 요동 총공세에 목숨을 걸고 맞서 싸우며 결국 패배하면서 역사에 기록 한 점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버리는 불운의 사내다.

“제가 고생을 하긴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구려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쓰는 성주와 요동 군사들의 노고에 비할 바가 되겠습니까? 아버님께서 소자를 요동에 보내신 까닭은 이곳에서 애쓰는 군사들을 위로하도록 하고자 하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이실 겁니다.”

제법 어른답게 말한 덕분인지 을지문강에게서 미세한 표정 변화가 관찰되었다.

권력을 차지한 뒤로 요동에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거라 믿어온 연개소문이 과연 그랬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터.

“하나 공자가 이 요동성에 들린 이유는 그것만이 아닌 거 같은데?”

요동 성주의 물음에 나는 손대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답했다.

“백암성 성주께 이미 말씀을 들었으리라 사료됩니다. 풍년이 들었으니 요동성 곳간에 찬 곡식을 천리장성 축조로 함께 고생한 이웃 작은 성들에 조금 나누어 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외다! 조정에서 신경 쓸 일이 아니고!”

갑자기 위협을 가하듯 소리치는 을지문강. 꽉 막힌 말투는 꼭 조직의 불통 임원을 대하는 기분이다.

“조정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조정과는 연관이 없다?!”

되묻는 요동 성주의 시선이 손대음에게 향했다. 곤혹스러운 손대음을 보자 필시 내가 지시하지 않은 말을 꺼내 일을 복잡하게 만든 모양이다.

이런 쓸모없는 매국노 같으니!

“성주께 긴히 얘기 드릴 일이 있습니다!”

나는 오해를 일으킨 손대음을 급히 내보내며 을지문강과 일 대 일 담화를 요청했고, 을지문덕의 패기를 이어받은 그가 수락했다.

술 한 잔을 가볍게 쓰읍 한 을지문강이 미간을 찌푸렸다.

“부유하게 자란 어린 공자가 무슨 연유로 나와 단독 면담을 요구했는지는 모르나 나는 평양 놈들을 믿지 않소이다! 목숨 걸고 싸우는 이와 후방에서 안락하게 지내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리는 귀족들이 어찌 한 편에 설 수 있겠소이까?”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받는다를 말하고 싶은 건가.

“그것뿐입니까?”

“...뭣이?”

“성주의 불만은 그것뿐이냐고 물었습니다.”

“어린 공자가 겁이 없구나!”

쨍그랑, 그러자 을지문강이 들고 있던 술잔을 바닥에 던져버리며 또 한차례 패기를 보였다.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알코올 영향 때문인지 어렴풋이 그가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같은 혈육인 수영이를 그리 박대하다니..!”

......수영이?

“혹 여장부(女丈夫)이신 고모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어린 공자에게는 고모가 되겠구나!”

을지문강은 일세의 여걸(女傑) 연수영(淵秀英)을 말하고 있었다.

내가 현대의 요동 반도의 해안 지역을 여행하고 알게된 연수영은 그야말로 고구려의 이순신이었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당나라를 상대로 바다에서 단 한 번도 지지 않은 또 한 명의 고구려의 화신.

당나라를 상대로 승리한 고구려 장수들이 구당서 신당서 등 그들의 사서에 남지 않았던 것처럼 연수영 역시 기록에 남지 않아 역사에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그녀가 활약했던 요동 반도 해안가에는 여전히 연수영을 기리는 사당과 유적들이 남아 있었다.

요동성에서 풍작을 이룬 고구려 양곡 50만 석을 취하며, 보급이 원활해진 당나라 황제가 안시성에서 허무하게 퇴각하게 된 또 하나의 계기는 훗날 고구려 수군 도독이 될 5품관 태대사자(太大使者) 연수영의 존재일 것이라 조심스럽게 예측만 했었다.

“그리 유능한 인재를 사내가 아닌 이유로 촌구석에 박아 놓다니!”

하지만 막상 이곳에 요동 성주와도 친분이 있으며, 요동에서 인정을 받고 있는 연수영의 명성을 듣자 그저 추측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1차 고당 전쟁에서 당의 수군 원정에 대한 기록이 미비했던 건, 필시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한 연수영 때문이라는 확신이 강하게 드는 순간이다.

그런 생각에 나는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님에 대한 오해십니다! 고모님께서는 고구려 수군을 담당하는 중책을 맡고 계십니다!”

신녀가 죽고 요동요로 어지러워진 요동성. 요동 전역으로 점차 확대되는 전운은 요동 성주도 이미 감지하고 있으리라.

여기서 고구려 내부에서의 분란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하지만 을지문강은 이대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궁여지책(窮餘之策)이겠지! 남쪽의 매금(寐錦)의 나라나 백잔(百殘) 놈들을 상대하기엔 수영이가 낭중지추(囊中之錐)이니 그럴 수밖에! 처음에는 비사성(卑沙城) 도사(道使)로 임명해 보내놓고 그것도 못 미더워서 이제는 변두리에 작은 석성(石城)에 넣어 선박 건조나 시키다니!”

신라와 백제를 깔보는 고구려인의 자부심이 남다르다.

윽박지르는 것이 불만이 이만저만도 아닌 모양이지만.

아니, 근데 자기 일도 아니고 왜 저래? 무슨 연수영이 지 첫사랑이라도 되는 거야 뭐야?

나는 살짝 짜증이 났지만, 꾹 참고 대화를 시도했다.

“고구려 수군의 규모는 당나라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아버님께서 고모님께 그런 명을 내리셨다면 필시 적임자이기에 그랬을 겁니다.”

얼떨결에 연개소문의 변호를 하게 된 입장이지만, 지금 요동 성주가 반감을 가져 봐야 내게 좋을 것이 없었다.

이제 진짜 얼마 후면 영주의 계필하력의 선봉대가 요하를 가로질러 북쪽의 신성을 때릴 거고, 요동도행군대총관 이세적은 그 밑에 현도성을 공격한다.

어디 그뿐이랴, 요동 반도 남단의 비사성은 장량의 해군에 의해 기습당할 것이다.

이후 비사성 부근 석성에서 연수영이 전선 100여 척의 함대를 이끌고 수백 척의 당나라 수군과 맞설 예정이다.

해로가 막힌 이세민이 안시성을 뚫지 못하고 황급히 퇴각한 이유 중 하나가 될 몇 안 되는 고구려의 빛.

“믿지 않는다! 요동은 평양과 노선을 달리할 것이니 돌아간다면 연개소문에게는 그리 전하시오!”

거참 꽉 막히긴.

미안하지만, 여기서 순순히 돌아갈 수 없다!

시일을 앞다투는 지금, 매국노 손대음의 처단과 요동 일대의 고구려 백성 보존을 서두르기 위해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도박을 걸어서라도 반드시 관철시키리라!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저를 이곳에 보낸 이가 아버님이 아니라 고모님이라면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어린 공자가 가지가지 하는군! 그런다고 내가 속아 넘어갈 줄...”

믿지 않는 요동 성주의 말을 재빨리 끊었다.

“이 요동성에 고모님의 여식, 그러니까 제 사촌누이께서 와 계십니다!”

“뭐어라...?!”

돌직구에 을지문강의 눈동자가 크게 진동했다.

* * *

“당과 내통을 한 손대음을 처형한다!”

나흘 후 아침, 내가 조작한 가짜 밀서가 매국노 손대음을 처분했다.

따로 옥소를 불러 만난 을지문강은 그녀가 어머니 연수영의 상징과도 같은 옥비녀를 소지한 걸 보고 내 말을 모두 믿어주었다.

‘빌어먹을! 이렇게 쉽게 해결될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요동성에 와서 수성에 대비하는 건데!’

미래를 알아도 사람을 모른다면 역사는 바꿀 수 없었다.

“억울하오! 그 밀서(密書)는 내가 쓴 것이 아니오! 삼공자, 나를 살려주시오! 제발!”

손대음이 나를 향해 울부짖었다.

그가 곧 받게될 처분.

소수림왕 때 율(律)을 공포하였다.

고구려의 법에 이르길, 모반과 반역죄는 화형을 가한 뒤에 참수하고 가산을 적몰하니, 매국노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을 집행한 나라였다.

“어서 처형을 집행하라!”

“끄아아아아악!”

불길이 멎자 휙, 눈 깜짝할 사이에 손대음의 목이 떨어졌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것이 저잣거리에 효수되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협잡과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까지 고군분투하는 대상이 외세가 아니라 같은 고구려인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내부의 적은 때로는 바깥의 적보다 더 위험하다.

‘따지고 보면 한반도의 왕조들은 외세가 아니라 대체로 내부의 배신으로 망했지. 어쩌면, 저 남쪽에 백제마저도...’

나는 두 눈을 꼭 감으며 아직 매국노 짓을 하지 않은 손대음을 위해 극락왕생을 빌어주었다.

부디 목숨을 건, 이 고생이 수포로 돌아가질 않길 바라면서.

떠날 채비를 마치자 때마침 요동 성주가 마중 나왔다.

“삼공자의 요구대로 백암성과 건안성, 안시성에 각각 양곡 7만 섬씩을 보내기로 결정했소이다!”

“그렇게 많이 보내셔도 괜찮겠습니까?”

“다음 수확이 있기 전까진 문제가 없으니 염려 마시오!”

아오 귀 따갑네, 저 특유의 울리는 목소리는 화가난 것이 아니라 그냥 습관이었나.

“다른 하나는 어떻게 됐습니까?”

“이 을지문강이 살아 있는 한, 결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요동성의 성문이 뚫린다면 남은 양곡과 성안을 모두 불태워 적들이 쌀 한 톨도 가져가는 일은 없게 할 것이오!”

전날과 180도 달라진 을지문강의 눈빛이 살아 있었다.

요동성을 버리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막상 떠날 때가 되자 이런 사내의 역사를 바꾸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이 전쟁이 끝나면, 내 기필코 역사에 당신의 이름을 새겨 주지.

“옥소라는 저 아이, 여장부인 어미를 아주 닮았구려. 부디 잘 지켜주시오.”

마지막 작별까지 옥소를 챙기는 걸 보면 틀림없이 연수영과의 사정이 남다른 것 같다.

“아버님의 이름을 걸고 약조하죠.”

그렇게 을지문강과 인사를 마치고 성 밖으로 나오자 싸울 수 없는 노인과 어린아이, 그리고 부녀자들이 줄을 이루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통솔하는 옥소와 걸걸중상 동생들.

내 다음 행선지(行先地)가 안시성(安市城)이기에 동요에 나오는 3곳의 성 중 그곳을 택한 백성들이 나를 따르기로 자처한 것이다.

요동성의 새로운 신녀의 예언과 달라진 요동 성주의 협력으로 싸울 수 없는 백성들을 요동의 다른 성에 얼마간 피신을 하도록 해주었다.

다그닥! 다그닥!

그들과 함께 성문 앞을 나설 무렵, 웬 급한 일이 있는지 공문을 가지고 온 기마대들이 달려와 외쳤다.

“당의 대군이 요하를 넘었사옵니다!”

“남도와 중도, 북도에서 모두 당의 군사들이 국경을 넘었다는 급보이옵니다!”

요동성 전령의 보고에 마침내 고당 전쟁이 발발했음을 감지했다.

그 말에 묘한 긴장감이 들었다.

나는 차분히 남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미리 안시성에 간 걸걸이가 그 사람과 잘 만났으려나, 부디 얘기가 잘 되었으면 좋겠는데.

* * *

“소인, 대막리지의 삼남 남산 공자님을 따르는 걸걸중상이라 하옵니다. 삼공자께서 안시성에 입성하시길 희망하십니다!”

걸걸중상이 자신만만하게 서찰을 내어주고는 성문 밖에서 성주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성벽 위 차분히 서찰을 읽어내려가는 사내의 얼굴이 이내 급속하게 썩어들어갔다.

“무슨 헛소리냐! 누구의 아들이 이 안시성으로 들어오겠다고?!”

남산의 서찰을 구긴 안시성 성주 양만춘의 낯빛에 이글이글한 격분이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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