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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백암성
“남산이가 어디 있느냐 내 묻지 않느냐! 어찌 태학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느냐?!”
연개소문의 불호령에 그날 밤 태학이 한바탕 발칵 뒤집혔다.
취침에 들어간 조교들이 눈을 비비고 일제히 달려왔으나 입 한번 잘못 놀리다가 하루아침에 거세당할 수도 있는 곳이 바로 여기 궁궐이라는 걸 모르는 이가 없었다.
남산이 태학을 찾은 건 벌써 3주도 더 전이었으나, 정확한 행방을 모르는 태학의 조교들은 저마다 입을 아끼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
혹여나 진짜 그 망나니 남산이 태학 어딘가 숨어 있으면 무소불위(無所不爲)의 대막리지께 거짓을 아뢰는 격이 되고 마니까.
“사, 삼공자께서야 응당 대막리지의 동부가 댁에 계시지 않겠사옵니까?”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자 결국 책임자인 태학박사가 두 눈을 찔끔 감으며 나섰다. 다행히 그 말에 수긍한 연개소문이 곧장 안학궁을 벗어나 평양의 동쪽 사저로 향하려 했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그 어린아이가 이 야심한 시각에 태학에 머물 리가 없지!’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의 회오리 속에 정작 연개소문은 가정에 대한 사리가 흐렸다.
영희 부인을 총애하여 평상시에는 줄곧 안학궁에서 더 가까운 서쪽 별장을 통해 입궐했기에 어린 자식들이 뭘 하고 어찌 자라는지 그들과의 관계가 소원했다.
“오늘은 원화 부인께서 계시는 동쪽 사저로 가시는 겁니까? 대막리지.”
“......그래.”
이기우의 물음에 답한 연개소문이 기마했다.
각각 차남과 삼남인 남건과 남산을 낳았으며, 역대 왕비를 배출한 5부 귀족의 하나인 절노부(絕奴部) 집안의 우 씨.
그녀 가문의 막강한 뒷배경은 청년 연개소문이 중국 본토를 유랑한 뒤 평양에 돌아와 무사히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부대인(東部大人) 대대로(大對盧)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연개소문의 입장에서 그들은 어디까지나 권력을 수중에 넣고, 당나라와 천하를 두고 한판 붙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들 역시 대대로가 된 자신을 이용하려 했으니 피차일반(彼此一般)이다.
권력은 줄 수도, 나눌 수 없으니, 그들을 멀리하는 것이 후일을 위해 바람직한 결정이라 믿었다.
“지금 퇴궐하시옵니까? 아버님.”
때마침 궁 밖에 장남 남생이 마중 나와 있었다.
“오늘은 먼저 들어가 보거라. 네 어머니한테는 조금 늦을 수 있으니 기다리지 말라 이르고.”
“아버님, 이런 늦은 시각에 어딜 가는 길이시옵니까?”
“남산이를 보러 가는 길이다.”
“.....남산이요?!”
기마한 연개소문이 그대로 지나치려 하자 남생이 붙잡았다.
“아버님!”
“어허, 무슨 할 말이 있는 게냐?”
“원화 부인 댁에 가셔도 남산이를 보실 수 없으실 것이옵니다!”
“?”
“그것이...”
“뭘 그리 뜸을 들이는 게냐? 네가 남산이의 행방을 아느냐?”
말할까 말까 고민한 남생은 원화 부인을 만나러 간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 영희가 실망할까 염려하여 결국 입을 열었다.
“남산이는 지금 도성에 없사옵니다.”
“뭐라?!”
* * *
“이랴! 이랴!”
고돌발이 이끄는 오골성의 토박이 기병 300기를 앞세워 우리는 요동 벌판을 달리고 또 달렸다.
말들의 달음박질에 심장이 벌컥벌컥 뛰는 것 같았고, 상쾌한 가을바람 소리와 더불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율이 돋고 있었다.
옛 조상의 터전을 누비는 순간이 믿기지 않았기에 그런 기분이 드는가 싶었으며, 또 이 시대의 일원이 된 사실이 가슴을 벅차오르게 했다.
하지만 곧 이 넓은 벌판이 고구려인의 피로 물들 생각이 들자 경치를 즐길 여유 없이 몹시 숨이 가빠졌다.
연개소문이 지휘하는 고구려의 대응은 빨랐고 용감했으나, 중원 대륙을 통일한 당나라의 국력에 비할 바는 못됐기에.
거기다 군비뿐만 아니라 내정까지 완벽히 번영시킨 이세민은 정관의 치라 부를 정도로 중국 왕조의 가장 완성도 있는 군주.
거기다 친정(親征)하여 단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는 전쟁의 신.
중국인들은 그런 그를 두고, 유방(劉邦)과 조조(曹操)의 기량을 한 몸에 갖춘 인물이라 칭하였던가.
“작은 막리지께서 해주신 양꼬치가 정말 일품이었는데. 언제 또 먹어보려나.”
“아 또 먹고 싶다~”
“오골성을 나서기 전부터 그리 처먹어 놓고 뭘 더 바라느냐? 작은 막리지께 부끄럽지도 않느냐?”
“걸걸이 형님이 제일 많이 드시지 않았습니까?”
“제거도 뺏어 먹어드시고는...”
”시, 시끄럽다!“
옆에서 잘 조리된 양고기에 향신료 맛까지 알아버린 걸걸중상 일행이 떠들고 있다.
옥소도 내 특제소스가 마음에 들었는지, 몇 개 빼서 품에 넣은 걸 보았다.
나는 그만 한숨이 나왔다.
나름 오골성에서 시일을 가지며 궁리해보았으나, 기껏 수성에 대한 대비책 몇 가지와 특제 향신료 소스를 만들어 군사들을 배불리 먹일 생각밖에 나지 않았으니.
장기적으로 보면, 목장을 설치해 가축들을 기르고 그것들을 배불리 먹이는 건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다. 북방의 기마 민족이 아시아와 유럽을 지배했던 힘의 근원은, 결국 육식(肉食)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곧 있을 큰 전쟁에 앞서, 단기적으로 효과를 보기에는 어렵다.
‘빨리 가야 해! 요동으로 조금이라도 더 빨리!’
대비는 결국 전장의 무대에서 해야 한다.
이세민이 친정하는 제1차 고당 전쟁의 결과로 함락된 요동 일대 성들에 거주하는 수만 명의 고구려인들이 당나라의 포로로 끌려가며, 가뜩이나 당과 비교해 부족한 고구려 인력(人力)은 한층 더 꺾이고 만다.
나는 그 부담을 최소화하여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방안을 강구하고 또 강구했다.
“요동성으로 곧장 가지 않으시고, 백암성에 먼저 들리신다고요?”
기마하며 내 옆에 다가온 고돌발이 의문을 가지며 묻고 있다.
“예. 규모는 작으나 백색 산성의 위세가 웅장하니 사기만 북돋아 준다면 능히 100만 대군이 와도 뚫지 못할 겁니다. 그런 요새를 앞에 두고 그냥 가면 섭하지요.”
“그런 깊은 뜻이 있으셨군요!”
오골성에서 요동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흰 백의 백암성(白巖城).
6미터가 넘는 거대한 성벽으로 이루어진 산성으로 옆으로는 절벽이 있고. 아래로는 강을 끼고 있어 천연의 요새로 규모는 작으나, 어찌 보면 안시성 못지않은 철옹성이기도 했다.
이런 중요한 성이 싸움 한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바로 옆에 있는 큰 성 요동성과 위에 개모성이 당나라에게 함락당하자 지레 겁을 먹은 성주가 백기를 들고 투항해버리면서 중국 역사에 편입한다.
당의 황제에게 항복하고 충성을 바쳤으니, 구당서와 신당서에 기록된 영광스러운 성주의 이름은 손대음(孫代音). 오늘날로는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 같은 인물이었다.
“이 백암성 성주 손대음, 삼공자 같이 귀하신 분을 뵙사옵니다!”
그런 인물에 걸맞게 내 신분을 듣자마자 흔쾌히 성문을 열고 나와 허리까지 굽히며 처세술을 부리고 있다.
“대막리지를 대신해 요동 시찰을 나오셨다고요?”
어디 놈의 유영술(游泳術) 한번 볼까.
“네, 맞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리 견고한 성을 보게 되니 그간 성주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삼공자께서 그리 생각해 주시니 소인은 그저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후후.”
족제비 같은 웃음 그만 흘려라, 이 매국노 놈아.
옆에 요동성만 무너져도 잽싸게 항복부터 생각할 쫌생이가 감읍은 무슨.
요동성이야 수나라 때부터 고구려를 지킨 방파제로서 설사 이번에 공성무기로 무너져도 그 공을 이루 말할 필요도 없이 원대했지만, 당나라 손에 거저 들어간 백암성의 변수는 이후 이어질 주필산(駐蹕山)에서의 참패와 2차, 3차 고당 전쟁에서 당이 더는 요동 전선에서 시일을 끌지 않고 곧바로 평양으로 직하하여 수도 러시를 감행하게 되는 새로운 루트를 창시하게 한다.
당 태종 이세민은 여기 백암성을 암주(巖州)로 고친 후, 손대음을 자사(刺史)에 임명하여 고구려 정벌에 단초(緞綃)로 삼는다.
이 버러지 같은 매국노를 어떻게 처리할까, 오골성에서 이곳까지 달려오면서 심히 고민해보았다.
“차 맛이 아주 좋습니다.”
그럼에도 손대음 세력이 가득한 이곳에서 나는 애써 속을 숨긴 채 웃어야만 했다.
“저의 집안 대대로 마셔온 전차(錢茶)이옵니다. 차나무의 어린싹을 시루에 쪄서 아주 잘 찧어 말렸지요. 후훗.”
나는 족제비 웃음을 흘리는 손대음과 가볍게 차를 나누고는 평양과 요동의 이야기를 했다.
사람이란 각자 자기가 사는 지역이 전부인 양 생각하는 버릇이 있기에 하루가 저물도록 떠들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 평양에는 메밀이 유명하옵니까?”
“그렇습니다. 언제 동부가에 한번 오시면 제가 평양 제일의 메밀국수를 대접해 드리죠.”
“영광이옵니다. 후후.”
일을 벌이기에 앞서, 기승전결(起承轉結)이 필요한 법.
때마침 날이 저물자 신호로 받아들인 나는 슬슬 본론을 꺼냈다.
“성주께서 저와 함께 요동성에 가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제가 삼공자와 요동성에요?”
“그렇습니다. 이곳 성은 비록 견고하고 요새이나 작은 부락에 사는 백성들의 처지 하며, 요동에 다른 큰 성들에 비해 곡식이 충분하지 않다 들었습니다.”
머리를 긁적거린 손대음이 수긍했다.
“그것은 사실이긴 합니다. 천리장성 축조가 끝난 지가 몇 해 되지도 않았고, 아무래도 여긴 골방에 있는 산성에다 앞에는 요동성이 굳건히 지키고 있으니 국내외로 그리 신경을 쓸 곳이 못 되지요.”
헤헤 웃으면서 말하고 있지만, 손대음은 내심 백암성이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 불만을 품은 것 같았다.
비단을 내리며 이민족에게도 대우해 주는 당나라 황제 이세민에 대한 소문은 북방과 서역까지 수천 리 넓게 알려져 있을 정도이니 이곳 요동에 거주하는 성주들이 모를 리가 없다.
알게 모르게 연개소문의 쿠데타에 불만을 품은 이도 적지 않을 테고.
살살 달래볼까.
“그러니 저와 함께 요동으로 가 양곡을 지원받자는 겁니다. 백암성의 백성들도 먹고살아야지요.”
“요동성의 군량을요?!”
“예. 이곳까지 달려오면서 처려근지에게 듣기로, 올해 요동의 풍년이 들어 양곡 50만 석이 넘게 비축돼 있다고 합니다. 내 요동 성주에게 부탁하여 사정이 딱한 다른 성들에 양곡을 나눠줄 수 있냐 부탁할 작정입니다. 그러니 성주께서도 나와 함께 요동으로 가 말한다면 더욱 설득력이 있지 않겠습니까?”
“삼공자께서 그런 깊으신 뜻이 있으셨군요! 그런 말씀이라면 오늘 밤이라도 소인 기꺼이 삼공자를 따르겠사옵니다!”
쌀을 공짜로 준다는데 마다할 인간이 있나.
하물며 처세술에 능하고 여우 같은 기질을 가진 손대음이라면 응당 나를 쫓아 요동성의 곡식을 취하리라.
막상 그런 내 의도대로 술술 흘러가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나는 그걸 꾹 참으며 손대음과 고돌발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럼 그동안은 이곳 백암성 성주의 자리가 빌 것이니 처려근지에게 일러 잠시 성주의 대임을 맡겨 지키게 하십시오.”
쌀 얻을 생각에 손대음이 의심 없이 곧바로 읍했다.
“삼공자의 말씀대로 따르겠나이다.”
이제 나는 이 매국노와 함께 요하(遼河)가 흐르는 성으로 향할 것이다.
그 강 넘어 머지않아 달려올 황제의 군대를 대비하기 위해.
* * *
서기 644년 11월.
10월에 이세민은 장안의 노인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면서 고구려 원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자칫 수나라 때와 같이 민심이 흉흉해질 것을 염려해 연륜이 풍부한 노인들을 이용하여 내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필요 조치였다.
이후 민심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이세민은 마침내 대내외에 알리며 출정식을 거행했다.
“형부상서(刑部尙書) 장량을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總管)으로 임명한다. 남부지역에서 징발한 4만의 군사와 장안과 낙양에서 모병한 3천의 군사, 그리고 전함 500여 척을 내어줄 터이니 해로를 통해 고구려로 진격하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황제 폐하.”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지원군 3만이 고구려의 남쪽을 견제할 것이니 평양의 개소문의 발은 이제 꽁꽁 묶인 것이나 진배없다.
“병부상서(兵部尙書)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總管)으로, 예부상서(禮部尙書)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을 부총관(副總管)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6만과 난주, 하주의 유목민 항호를 내어줄 터이니 영주에 집결된 군사들과 합류해 3방위로 요하를 건너 요동으로 진군하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황제 폐하.”
“명을 받들겠나이다! 황제 폐하.”
수나라 양제 때의 패배를 기억하고 있는 이세민은 요동부터 야금야금 고구려를 찢어버릴 치밀한 계획을 세워두었다.
“후송 부대가 준비되는 대로 짐이 친히 6군을 거닐고 요하를 건너 나아갈 터이니, 선봉대들은 각자 하달 받은 성들을 짐에게 바쳐, 전군 요동성(遼東城) 앞에서 집결하도록 한다! 알겠는가!”
“명을 받들겠나이다! 황제 폐하.”
“명을 받들겠나이다! 황제 폐하.”
“명을 받들겠나이다! 황제 폐하.”
와아아아!
고구려 정벌을 위한 당나라 황제 이세민(李世民)의 철저한 계획하에, 당나라 장졸들의 함성 소리가 온 천하에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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