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_딱 대(완) >
1.
“이열. 그래서 청와대도 다녀왔다고?”
“대통령도 만났음? 인증샷 고고?”
“야. 세금 좀 낮춰달라 그러지!”
차례로 기태와 준현이 재현이의 발언.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친구 놈들도 연말이라 일정 맞추기가 어려워 카이서스 전 이후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했다.
“어. 다녀왔음. 인증샷은 내가 아니라 대통령이 찍었지. 청와대 SNS 들어가면 있을걸? 그리고 세금을 대통령 마음대로 낮추냐? 하여튼 간에.”
알아보는 사람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익숙하고 편한 아지트 술집.
내가 어느 위치에 있건. 주변 환경이 어떻게 변했건. 친구 놈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언제나처럼 편하고 즐거웠다.
“참. 준현이 넌 결혼 준비 잘 돼가냐?”
“잘 돼가는 게 아니라 끝났지 인마.”
원래라면 내 결혼식이 먼저고 한참 뒤에 준현이의 결혼이 있을 예정이었는데 어떻게 일정이 변경되다 보니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게 되었다.
“내 결혼식 꼭 와야 한다?”
“걱정 마. 설마하니 내가 네 결혼식 안 가겠냐?”
나와 채 한 달도 차이 나지 않게 결혼식을 올리는 준현이 놈.
혹시 내가 신혼여행 일정이나 다른 스케줄 때문에 자기 결혼식에 불참할까 봐 불안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재현이 저 새끼는 아직 솔로냐? 기태는 요즘 유나랑 잘 만나고 있는 것 같고.”
지난번 입장 테마로 곡을 사용한 이후 국내외로 꽤나 이슈가되며 간간히 티비에도 얼굴을 비추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기태.
마찬가지로 대기업이 된 너튜브 채널 유나 TV에도 자주 얼굴을 비추며 공식 커플로 발전해 있었다.
“옘병. 원래라면 지난달에 해서 결혼식에서 여자친구 딱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래야 연말이 따뜻했을 텐데! 그래도 이번 주말! 난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어!”
“불쌍한 새끼. 복싱 이벤트도 혼자 오고. 커플들 사이에 껴서 그게 뭐냐?”
“... 팩트로 때리지 마라. 공짜로 데리고 간다고 해도 아무도 없더라...”
재현이나 필승 형이나. 아무래도 연애라는 거리가 영 멀었다.
생긴 건 멀쩡한데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거면... 흠. 흠. 성격이나 다른데 문제가 있는 거겠지.
내 결혼식에서 어떻게든 짝을 찾아 솔로 탈출을 해보겠다는데 과연 어떨까 싶었다.
“아참. 아름 씨는?”
이번에는 주제가 바뀌어서 나와 아름이 쪽으로 대화 내용이 흘러갔다.
“집에서 휴식 중. 연말에 이렇게 쉬는 것도 오랜만이라고 아주 살판나셨어.”
“하긴. 원래 연예인은 연말이 제일 바쁜 시기였을 테니까.”
“당분간은 강제 휴식기지. 배도 점점 불러올 테니까.”
“근데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네. 어때? 실감이 조금 나냐?”
아름이의 이야기에서 급격히 내 결혼 이야기로 넘어가는 주제.
사실 오늘 모임은 내 총각파티라고 할 수 있었다.
“솔직히 잘 안나. 진짜 번갯불에 콩 볶아먹는 기분이라.”
“무슨 번갯불이야? 원래 11월 초였던 걸 12월 말로 거의 두 달이나 미뤄놓고.”
“그렇긴 한데... 하하.”
차마 결혼식이 아니라 다른 데 집중해서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아름이와 결혼 준비를 함께하긴 했지만 8월 라무차 전과 12월 카이서스 전을 준비하는 기간에는 머릿속에서 결혼이라는 단어를 지워버리고 오로지 시합 준비에만 전념했었다.
그러다보니 내 기준에서는 정신을 차려보니 결혼식이 눈앞으로 다가온 느낌이었다.
“하. 해서 이 새끼가 우리 중에 제일 먼저 가다니.”
“그러게. 세상일 모르는 거야. 여자친구한테 차이고 집에 박혀있는 걸 불러내서 놀아줬던 게 엊그제 같은데.”
꽤나 오래된 옛날처럼 말하는 기태와 재현이.
생각해보면 이제 겨우 5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이야기였다.
“사실 너희 덕이지.”
“어?”
“그때 그 당시에 너네가 억지로라도 나 불러 내주지 않았으면 내가 어떻게 이 자리에 있겠냐. 아름이랑 결혼은 정말 꿈만 꿨겠지.”
생각해보면 딱 이 자리였다.
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웹 소설 쓴다고 일주일에 한 번도 밖에 나오지 않는 날 친구 놈들이 불러내서 술 한 잔씩 사줬던 자리.
그러다가 이 자리에서 스트리트 파이트의 홍대 오디션을 구경하게 됐고. 그게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
“진짜. 거짓말 안 하고. 진짜 고맙다. 너네한텐.”
내가 힘들 때. 큰 쓰임새나 가치가 없을 때.
그런 시기에 가장 큰 힘이 돼주고 응원해줬던 친구 놈들이 바로 이놈들이었다.
“지랄. 나도 네 덕분에 꿈만 꾸던 일 하고 있어.”
“동감. 나도 너 아니었으면 회사도 못 차리고 영은 씨도 못 만났음.”
뒤늦게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어 성공하는 날 보고 과감히 꿈에 도전해 승승장구하고 있는 기태.
프로 데뷔 초반. 나와 함께 해외를 쏘다니며 통역을 해줬고 그걸 기반으로 창업에 도전해 젊은 사장님이 된 준현이.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된 좋은 케이스였다.
“나만 아무것도 없어! 나만! 쟤들은 네 덕 봤지만 난 없으니까 해서 네가 책임지고 나도 여자친구 만들어줘!”
... 재현이 이 새끼만 빼고.
“아. 빨리 약속해! 현기증 나니까!”
얘를 결혼식에 불러도 되나 싶었다.
*
“해서야!”
“강해서!”
“열~ 강해서~”
온 사방이 날 찾고 부르는 소리로 가득했다.
“해서야. 여기 와서 인사해라. 너희 당숙 어른이다.”
그중 머리를 곱게 틀어 올리고 고운 빛깔의 한복을 입고 선 우리 여사님의 부름.
“아. 안녕하세요.”
“어이. 그래. 너 어렸을 때 보고 처음 보지? 네 아버지 사촌 형이다.”
“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당연히 와야지! 집안에서 이렇게 큰 인물이 나왔는데.”
“하하. 감사합니다.”
실감이 나진 않지만, 오늘은 내 결혼식 날이었다.
“해서야. 이리 와봐.”
친인척들과 비공개로 진행한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많은 분들이 찾아주셔서 정신없는 와중 날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
“얘는 뭘 먹고 이렇게 덩치만 커졌는지. 머리 좀 숙여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 보니 머리가 조금 헝클어졌나 보다.
내 머리를 슥슥 정리해주는 엄마의 손길.
어린 시절 이후 떨어져 살았기에 이런 엄마의 손길이 그립기도 했지만 그만큼 낯설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우리 잘난 아들 머리 좀 해줬네?”
“...”
“이제는 머리 헝클어지면 아름이한테 해달라 그래야지.”
머리 손질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아. 다 큰 놈 머리를 왜 만져주고 있어? 이리 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아버지가 불퉁하게 한마디 하셨지만.
“... 엄마가 아들 머리 좀 정리해주겠다는 게 뭐가 어때서요? 당신. 부산 혼자 내려가고 싶어요?”
“아니. 그. 여기 사람들도 다 쳐다보는데...”
“그러게요. 사람들 다 쳐다보는데 당신 아내랑 아들을 그렇게 타박하고 싶어요?”
“...흠. 흠. 오! 형님! 오셨어요!”
어머니의 말에 별다른 대답을 못 하더니 갑자기 누군가를 발견했는지 황급히 뛰어가시는 아버지.
내 결혼식에서 보기엔 뭔가 가슴 아픈 장면이었다.
아버지. 이제야 아버지의 고충을 이 아들이 조금 알 것 같아요.
“해서 너도. 절대 밖에서 아름이 흉보지 말고. 타박하지 말고. 그거 다 네 얼굴에 침 뱉는 거야.”
“...네.”
아름이가 저한테 타박 당할 스타일은 아니지만요.
“해서야!”
“해서 삼촌!”
그렇게 엄마에게 원활한 결혼생활을 위한 조언을 듣고 있을 때 들린 목소리.
“어? 두호 형! 유안아! 코치님!”
팀 피스트의 식구들과 유안이었다.
“와. 이건 뭐. 깡패들도 아니고.”
“뭐 인마?”
“하하하.”
빈말이 아니라 진짜 그냥 겉으로만 보면 깡패들이었다.
다들 운동하는 사람들이라 몸이 크고 좋았는데 머리는 다 짧아 놓으니 그냥 건달 형님들 모셔둔 느낌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형수님!”
창섭 형은 여자친구분과 함께 와서 따로 인사를 드렸다.
“필승 형은요?”
“태양이랑 바로 신부대기실로 갔다. 염불보단 잿밥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니까.”
“아...”
창섭 형에게 필승 형의 행방을 물었더니 역시나였다.
그나저나. 태양이랑 같이 다니면 뜻하는 바를 못 이룰 텐데. 거기다 비공개 예식이라 아름이 친구도 별로 많이 안 왔고.
“강해서 씨?”
팀 피스트 사람들이 지나가고 나자 이번에는 정말 먼 곳에서 온 손님이 등장했다.
“레이...첼?”
“오랜만이에요.”
내 든든한 후원자이자 세상에 몇 없는 ‘갑’의 위치에 계신 레이첼 님이었다.
“아름 언니 초청으로 왔어요.”
“아. 네.”
오늘 결혼식은 기본적으로 비공개 결혼식이어서 정말 가까운 친인척들만 불러 진행하기로 했었다.
브라이언과 카이서스가 꼭 참석하고 싶어 했는데도 거절했던지라 레이첼의 방문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번 카이서스 전. 정말 잘 봤어요. 아버지도 정말 기뻐하셨고... 저도 가문에서 좋은 평가를 많이 받았어요.”
“다행이네요.”
“제 첫 메세나의 대상이 해서 씨여서 정말 다행이에요. 이게 다 아름 언니 덕분이구요.”
“하하. 그렇게 말씀해주시면 감사하죠.”
“조만간 조촐한 결혼 선물이 갈 거예요. 부담 갖지 말고 받아주세요.”
“네?”
“그럼 전 언니 보러 가볼게요.”
-꾸벅.
역시 갑님. 할 말을 다 하고는 꾸벅 인사를 남기고 신부대기실로 총총 뛰어가버렸다.
“신랑분. 이제 입장 대기하실게요.”
한창 손님들을 응대하다 보니 어느새 예식 시작 시간이 된 듯했다.
“입장하실 때 조명이 신랑님을 따라 움직일 거에요. 너무 빠르게 걷지 마시고 천천히. 허리 펴시고 걸으시면 되세요.”
“넵!”
전 세계 수천만 명의 사람이 지켜보는 시합에서도 떨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떨렸다.
-꽈악.
손에 땀도 차는 듯했다.
“후우...”
어두운 예식장 입장로에 서 있으려니 온갖 상념이 스쳐 지나갔다.
-오늘의 주인공. 신랑 강해서 군이 입장하겠습니다!
드디어 가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 사회를 보는 준현이 놈의 목소리와 함께 날 비추는 한줄기 조명.
“흠. 흠.”
식장을 찾아준 내빈을 향해 가벼운 인사를 건네며 조명의 이동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말 짧은 거리였지만 이제껏 내가 걸었던 어떤 시합. 어떤 경기장의 입장로보다 더 떨리고 설레는 순간이었다.
-다음으로는 오늘의 진정한 주인공. 신부 손아름 양의 입장이 있겠습니다.
내가 식장에 도착하고 나자 곧이어 반대편 입장로를 비추는 스포트라이트.
장인어른의 손을 잡고 선 아름이가 보였다.
“...”
아까 신부대기실에서 잠깐 스치듯 보긴 했지만 정말 예뻤다.
매일 봐왔던 얼굴이지만 그저 입을 벌리고 멍하니 쳐다보게 될 정도로 예뻤다.
-사락. 사락.
따로 집중 모드에 들어가려고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주변이 느려지며 내게 다가오는 아름이의 모습이 오롯이 내 망막을 가득 채웠다.
암전이 내린 식장에 하얀 드레스만큼이나 하얀 피부 위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내게 걸어오고 있는 아름이.
살짝 내린 고개에 기다란 속눈썹. 장인어른을 꼭 잡은 손이 조금씩 떨리는 걸 보니 아름이 또한 긴장되긴 매한가지인 듯했다.
“...”
몇 걸음 마중나가 장인어른께 인사드리고 아름이의 손을 잡고 다시 앞으로 걸어가는 순간.
이 잡은 손을 절대 놓지 않겠다고. 앞으로 어떤 삶의 역경과 고난이 있더라도 지금 잡은 이 손의 떨림을 기억하며 헤쳐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오늘은 삶이라는 기나긴 마라톤을 함께 뛰어줄 평생의 페이스메이커가 생긴 날이었다.
*
-세기의 결혼식! 강해서와 손아름의 비공개 결혼식에 쏟아지는 전 세계 스타들의 축하 SNS!!
-세기의 커플이 선택한 신혼여행지는? 멜린 가의 전용기를 타고 떠나는 손강 커플!
-청와대 공식 SNS. 이례적으로 강해서 선수의 결혼식을 축하한다는 게시글이 올라와 이슈!
-강해서 손아름 커플의 신혼여행은 태교 여행? 이미 임신 16주!
-당분간 방송가에서 손아름을 보기는 어렵다? 속도위반으로 임신 16주 차 예비 엄마가 된 손아름!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나이. 강해서! 그의 다음 행보는?
“뭐 봐?”
“아. 그냥 우리 기사?”
나와 아름이는 지금 멜린 가 소유의 섬에서 신혼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어쩐지 아름이가 신혼여행에 대해서는 별 언급을 안 하더라니. 레이첼이 말했던 선물이 바로 이거였다.
리조트 규모의 숙박시설에 우릴 위해 준비된 수십 명의 고용인.
오롯이 우리 둘을 위해 준비된 그림 같은 남태평양의 바다 풍경.
이건 웬만큼 돈이 많다고 누릴 수 있는 사치가 아니었다.
-Rrrrrr.
그렇게 아름이와 꿈과 같은 한때를 보내고 있을 때 울린 스마트 폰.
“누구야?”
“안 코치님이신데. 무슨 일이지?”
“코치님? 얼른 받아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일단 전화를 받았다.
웬만한 일로 신혼여행 기간에 연락하실 분이 아니었으니까.
-여보세요? 어. 해서냐?
“넵! 코치님. 무슨 일 있어요?”
-어어. 신혼여행에 미안하다. 빠르게 답변해줘야 하는 일이 있어서.
“빠르게 답변해줘야 하는 일이요?”
다행히 무슨 나쁜 종류의 사고가 일어난 건 아닌 듯했다.
-킥복싱 레전드. 아니지. 지금은 입식 타격 레전드라는 따완 선수의 입식 시합 요청이 들어왔어. 방금 텔론에게 직접 연락이 왔다.
“입식 타격이요?”
-그래. 297전 297승의 무에타이 베이스 헤비급 입식 선수다. 룰은 당연히 입식이고.
무에타이라니까 예전에 맞붙었던 솜차이 선수가 생각나네.
나름대로 고전이라는 걸 했던 시합 중 하나였지.
입식의 제왕이라는 무에타이의 전설이라.
안 코치님과 통화하면서도 아름이의 눈치를 살짝 봤는데 별다른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전 무조건 콜입니다.”
전설이라.
앞으로 그 단어는 내 이름 앞에만 붙일 수 있을 거다.
“언제든 좋아요. 잡아만 주세요.”
내가 써 내려가는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었으니까.
격투기 판에서 전설이라는 타이틀 달고 있는 선수들.
전부 딱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