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화_카이서스 전 END. >
1.
-툭.
1라운드 이후 처음으로 라운드 시작 전 글러브 터치를 하는 카이서스와 강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글러브 터치였고, 마찬가지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글러브 터치 이후 서로를 향해 무섭게 덤벼들었다.
-휘익!
-휘익!
거의 동시에 상대방을 향해 뻗어내는 레프트 잽.
-휙
-휙
마찬가지로 합이라도 맞춘 듯 서로의 펀치를 피해내고는
-흐읍!
-흡!
카이서스는 잽을 던졌던 왼손을 이용한 앞손 레프트 훅을.
강해서는 잽을 피하며 왼쪽 아래로 숙였던 상체 포지션을 이용한 라이트 바디 잽을 날렸다.
-퍼엉!
먼저 맞은 건 카이서스.
바디 잽을 피할만한 공간도 여유도 없었기에 오른손으로 최대한 가드를 하며 왼손 훅을 그대로 쭉 뻗었다.
-퍼엉!
강해서 또한 카이서스의 복부를 노리느라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머리로 향하는 카이서스의 레프트 훅을 피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뻗었던 레프트 잽을 회수하며 머리를 보호했지만 그래도 뇌가 흔들리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또 머리네.’
‘또 바디군.’
서로 지난 5라운드에 정타를 허용했던 부위에 다시 한 번 데미지를 입은 상황.
시작과 함께 붙었던 불은 잠시 소강되었고 두 사람은 2차전을 위한 잠깐의 호흡조정을 가지고 있었다.
‘후우... 후우... 흐읍!’
그리고 집중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한 강해서.
7라운드는 없다는 생각으로 남은 체력과 집중력을 이번 6라운드에 모두 때려박을 생각이었다.
‘스읍-하. 스읍- 하...스읍...!’
마찬가지로 블릿타임의 감각을 서서히 끌어올리는 카이서스.
조금씩 주변의 움직임이 느리게 흘러가면서 카이서스에게 전달되는 정보의 양이 압도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체력이 떨어진 지금 이 순간. 베스트다.’
카이서스가 스스로 블릿타임이라고 이름 붙인 감각.
카이서스는 어려서부터 인지능력이 좋았다.
주변에 일어나는 일이라면 스치듯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모두 인지하고 그에 대한 파급력까지 생각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삶을 살아왔으니까.
그리고 그 인지능력이 최고조에 달하면 주변의 상황들이 인식되는 속도 자체가 빨라졌다. 상대적으로 주변의 모든 것들이 느려지는 듯 한 착각이 들 정도로.
이 감각에 들어서면 카이서스는 말 그대로 신이 된 듯 한 고양감을 느꼈다.
모든 게 명확하게 보이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전능함.
-쒜에엑.
하지만 오늘부터 그 고양감과 전능함은 카이서스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자신과 같은 세계. 혹은 비슷한 어디쯤엔가 머물고 있는 적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휘이이익.
카이서스는 압도적인 인지능력을 바탕으로 강해서의 모든 육체 움직임의 정보를 캐치하고, 그 동작이 채 취해지기도 전에 한발 앞서 움직이며 강해서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그러면서 상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의 거짓 정보들을 흘리며 페이크를 줬고 간간히 그 안에 진실을 숨겨뒀다.
-퍽!
블릿 타임에 들어선 직후엔 꽤나 비등한 듯 보였던 양상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퍼퍽!
-퍽!
강해서가 허용하는 펀치의 숫자가 많아지고 있었다.
*
-퍼퍽!
아. 또네.
-퍽!
그리 큰 데미지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지속적으로 내게 유효타를 성공시키고 있는 카이서스의 펀치.
전 라운드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짧은 순간에 여러 가지 페이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걸려오니 적절한 대응방법을 찾기가 어려웠다.
차라리 그 페이크들이 안보이면 모르겠는데 보이긴 다 보이니 하나씩 진짠지 가짠지 가려내다보면 한 번씩 아직 확인하지 못한 진짜 동작의 여파를 맞아야했다.
-후욱... 후욱...
집중력과 체력을 끌어다쓰는중인 이번 라운드.
여기서 승기를 잡지 못하면 진짜 나가리였다.
그러니 이렇게 수세에만 몰려서는 답이 없지. 최선의 수비라는 공격으로 분위기를 바꿔야 할 때였다.
-퍼억!!
카이서스의 공격 중 최대한 충격이 덜하다고 생각되는 펀치를 일부러 한 대 허용하고는
-쒜에에엑!!!
6라운드 처음으로 수비적인 흐름을 끊고 공격의 흐름을 잡아냈다.
-파앙!
바짝 붙어선 상태에서 허리힘만으로 돌려 친 라이트 바디블로우.
하지만 카이서스의 왼손 글러브에 가로막혀 의미 없이 큰 소리만 남겼다.
-쉬이익!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왼손도 끌어당겨 아래에서 위로 카이서스의 턱을 노리는 훅을 던졌다.
-휘익.
이번에도 내 동장을 미리 알았다는 듯 반박자 정도 빠르게 피해내는 카이서스.
그러면서 내가 공격 주도권을 가져가는 걸 막겠다는 듯 오른손 바디블로를 던지며 왼쪽 어깨를 돌려 안면 스트레이트를 노렸다.
둘 중 하나는 페이크. 혹은 둘 다 페이크.
하지만 지금은 둘 다 진짜라도 상관없었다. 내 공격이 더 중요했으니까.
‘기어를... 올린다 생각하자...’
모 유명 만화의 주인공처럼.
내가 타고 온 자동차처럼.
몸의 기어를 올려 엔진이 더 놓은 출력을 낼 수 있도록.
-쒜에엑
카이서스의 공격에 방어를 도외 하다시피 하며 마주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뻗어냈다.
-움찔!
그런 내 판단에 놀랐는지 잠시 움찔하는 카이서스.
‘어쩔래? 같이 주고받을까. 아니면 한발 물러서서 내 공격을 막을래?’
여기서 물러서면 일방적으로 나만 두들겨 맞는 장면이 나올 수 있었다.
아주 높은 확률로.
그럴 바엔 한 대 맞으면서 같이 한 대 때리는 게 나았다.
-휘익.
하지만 카이서스의 판단은 역시나 나와는 달랐다.
페이크와 공격을 모두 포기하고 내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더킹으로 피하며 다음 동작을 준비했으니까.
‘...됐다.’
그리고 이게 지난 라운드 마지막에 내가 봤던 한줄기 승리의 빛이었다.
-쒸이이익!
반걸음 더 앞으로 들어가며 레프트 바디 어퍼.
-팡!
카이서스의 글러브에 막혔지만 아랑곳 않고 카이서스의 글러브에 막힌 힘을 이용하여 왼손 훅.
-휘익!
카이서스가 그것 또한 피해내는 걸 굳이 확인하지 않고 라이트 바디블로우.
-꽈앙!
이번에는 카이서스의 왼쪽 팔꿈치에 막혔지만 역시나 신경 쓰지 않고 라이트 훅.
-휘이이익.
라이트 훅이 막히든 말든 다음 공격으로 왼손 바디 훅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는데
-콰앙!
라이트 훅이 카이서스의 머리통을 두들겼다.
“커헉...!”
던지기만 하고 별 신경은 안 썼기에 파워도. 정확한 타점도 부족했던 라이트 훅.
그럼에도 카이서스의 머리에 충격을 주기엔 충분했다.
‘...됐다!’
솔직히 나도 반신반의 했는데. 생각보다도 더 잘 먹힌 것 같았다.
힌트는 처음 조지가 했던 말에 있었다.
카이서스는 한 번에 모든 걸 보고 인지하는 반면. 나는 하나씩 빠르게 보고 인지한다는 말.
거기서 나는 ‘빠르게 본다’는 말에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됐다.
카이서스는 나보다 넓은 시야를. 여러 가지를 한 번에 볼 수는 있지만. 연속해서 빠르게 보는 건 내가 조금 더 낫지 않을까? 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수백 수천 개의 검은 공 중 단 하나의 정답을 고르라고 한다면 카이서스가 유리하겠지.
하지만 한 번에 하나씩의 공을 쉬지 않고 던지고 그걸 다 쳐내라고 한다면 그건 내가 더 유리할 수도 있다는 거였다.
나는 한 번에 하나씩 확인하지만 대신 그 ‘속도’가 빨랐으니까.
그래서 한번 시도해봤다.
최대한 빠르게. 스스로도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확인 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한 번에 하나씩. 점을 던지듯.
하지만 그 점이 연결되어 선이 될 정도로 빠르게.
그것만 신경 쓰며 펀치를 뻗어냈더니 결국 통했다.
-휘청.
처음으로 링 위에서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카이서스.
나는 그 모습을 오롯이 바라보며 더욱 무자비하게 그를 향해 짖쳐들었다.
-휘이익
조금 전의 그 속도감을 잊기 전에 라이트 잽을.
그리고 오른손이 채 다 뻗어지기도 전에 왼쪽 상체를 아래에서 위로 끌어올리며 레프트 바디블로를 준비했다.
-휘이이익!
카이서스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휘청거리는 와중에도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피해내며 내 레프트 바디블로에 앞서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뻗어냈다.
페이크일까? 이걸 피하기 위해 바디블로를 포기해야하나?
정답은 ‘아니’였다.
맞더라도 바디를 꿰뚫는다는 심정으로 왼다리에 힘을 더 꽉 주며 몸의 회전을 더욱 가속시켰다.
-꾸드득. 꾸드드득.
그러면서도 스트레이트 이후 회수됐던 오른손을 가슴 아래로 내려 다음 공격의 준비를 이어갔다.
-꽈앙!
-뻐억!
제대로 들어간 레프트 바디블로우.
“커헉!”
순간 카이서스의 마우스피스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크게 고통스러워했다.
억지로 마우스피스를 악물은 그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끄흡...!”
그리고 그의 레프트 스트레이트에 오른쪽 안면이 정확히 꿰인 나는 순간적으로 집중모드가 깨지는 걸 느끼며 뒤로 크게 물러서야했다.
‘페이크거나 아니면 그냥 피할 줄 알았는데.’
설마하니 카이서스도 정타를 감수하며 끝까지 펀치를 날릴 줄은 몰랐다.
“후욱... 후욱...”
다행히 아직 카이서스도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는 못한 것 같았다.
지난 라운드부터 시작해 6라운드만 벌써 두 번째 안면 정타.
뇌가 흔들리는 것 같고 멀미가 나는 것 같았다.
집중모드는 고사하고 제대로 초점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이거. 아름이가 한 소리 하겠네. 바로 결혼식은 못 올릴 것 같았다.
-쿠웅!
그래도 일단 이번 시합은 끝내야지.
-쿵. 쿵.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카이서스를 향해 다가갔다.
상체는 당기고 글러브는 겨우 턱 밑을 유지했다.
“커헉...”
아직도 마른기침을 내뱉으며 호흡을 정리하던 카이서스.
아까 마우스피스가 보였는데 다행히 떨어뜨리진 않은 것 같았다. 만약 그랬다면 레프리가 시합을 잠시 중단시켰을 테니까.
-후욱.
-쉬이이익!
카이서스. 이제 좀 끝냅시다.
무거운 다리를 크게 한걸음 더 내딛으며 카이서스에게 파고들었다.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카이서스는 내 공세를 막아보려 했지만.
-휘이익.
그의 복부에 왼손 바디 훅을 날리는 제스처를 취하자 카이서스의 가드가 너무 자연스럽게 내려와버렸다.
이 양반도 이렇게까지 피치에 몰린 적이 없으니 당황하는구나.
-뻐어억!
레프트 바디 훅은 함정.
이제껏 내가 당했던 수많은 페이크의 복수였다.
진짜 피니쉬 블로는 내려온 카이서스의 가드 덕분에 훤히 드러난 그의 얼굴을 두드리는 MMA식 라이트 오버핸드 펀치였다.
“커헉!”
-쿠웅!
안면에 정확히 꽂힌 오른손. 제대로 느낌이 왔다.
이건 못 일어난다고.
-스탑! 스탑!
순간 나와 쓰러진 카이서스 사이로 파고든 레프리가 머리 위로 손을 흔들며 스탑 제스처를 취했고.
-우와아아아아아!!!!
-카이서스!!!
-갓-해서!!!!!
-화아아아아아아아!!!!
뉴욕 한복판.
매디슨 스퀘어 가든은 말 그대로 열기와 함성으로 터져나갈 듯 가득 찼다.
“후욱... 후욱... 으아아아아악!!!!!!!!!!!!!”
마침내 승리가 실감되어서일까.
나도 모르게 양 팔을 하늘로 치켜들며 속에 있던 모든 걸 쏟아낼 둣 소리를 질러버렸다.
6라운드 1분 56초.
복싱 올 타임 레전드라 불리는 황제 카이서스. 그를 격침시킨 역사적인 승리 타임이었다.
*
-퍽퍽!
-퍽!
“아아... 강해서 선수. 6라운드 들어서 허용하는 유효타가 점점 많아집니다.”
“6라운드 시작은 좋았는데요. 서로 한차례 공방을 주고받은 이후로는 일방적으로 공격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스포츠온 TV의 장명우 해설위원은 목이 쉬어서일까. 아니면 시합의 분위기가 좋지 않아서일까. 조금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해설을 이어가고 있었다.
┕약빨 다 떨어졌네. 안 봐도 뻔함 강해서 짐
┕아. ㅈㄴ잘 싸웠는데. 확실히 후반 가니까 안되네.. 카이서스가 압도적임
┕ㅅㅂ ㅂㅅ새끼들. 후반가니까 안되는게 아니라 카이서스가 초반에 그냥 놀아준거얔ㅋㅋㅋ 카이서스가 봐준거 가지고 희망고문 오지게 당했죠?
┕카이서스도 ㅈㄴ 많이 맞았는데 뭘 봐줘 봐주긴? 눈깔 없냐?
┕응~팩트만 봐~ 지금 쳐맞는건 강해서임~
스포츠온 TV의 실시간 채팅에도 어느새 어두운 그림자가 들었다.
강해서의 패색이 짙어 보인다는 의견이 점점 많아지고 있던 것.
-퍼억!!
그때 또 다시 카이서스에게 유효타를 허용한 강해서.
하지만 그때부터 강해서의 수비 흐름이 끊기고 공세가 시작되었다.
“어! 강해서 선수! 이건 일부러 들이밀었습니다! 타점을 흩어버린 거거든요! 다시 공세를 가져왔습니다!”
┕ㅈㄴ 발악하네ㅋㅋㅋㅋ 공세는 무슨. 죽기전에 발악하는거지
┕공격 다 막힌다. 다 막혀
찰나의 순간.
한 호흡에도 몇 번의 펀치가 왔다갔다 하는 순간이었다.
-콰앙!
“가, 강해서 선수! 우리 강해서 선수의 펀치가 카이서스의 머리를 두드렸습니다! 카이서스! 오늘 시합 처음으로 고통스러워하며 휘청거립니다!”
┕와. 펀치속도 실화?
┕저걸 다 피하고 막아내는 카이서스도 카이서슨데. 결국 빈틈 찾아서 공격 성공시키는 강해서는 진짜. 와...
┕이거 진짜 이러다 이기는 거 아니냐?
그때쯤부터였다.
시합을 지켜보는 한국 팬들 마음속에 ‘혹시’라는 마음이 싹튼 건.
-꽈앙!
-뻐억!
강해서의 공세에 카운터를 치듯 뻗어낸 카이서스의 스트레이트
서로 복부와 안면에 정타를 허용했지만 그 충격은 카이서스가 더 큰 듯 했다.
“강해서 선수! 지금! 지금입니다! 지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해요! 아! 말 하는 순간 강해서 선수 카이서스를 향해 다가갑니다! 카이서스는 아직 정신을 못 차렸어요!”
언제 조심스러운 해설을 했냐는 듯 다시 한 번 피를 토하듯 열성적인 해설을 이어가는 장명우.
-뻐어억!!!
“아! 아! 심판의 스톱 사인이 들어왔습니다! 대한의 자랑스러운 파이터! 우리 강해서 선수가 그 황제 카이서스를 상대로 KO승을 따 냅니다! 레프트 바디블로우로 페이크를 준 뒤 열린 안면으로 오버핸드 펀치를 꽂아 넣었어요!”
“여러분! 역사적인 날입니다! 한국이 낳은 선수가 전 세계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는 순간입니다!!”
6라운드 1분 56초. K.O
라는 자막과 함께 터져 나오는 방언과도 같은 장명우 해설의 맨트들.
이번 시합이 가져올 충격은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