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_위기 >
1.
-번쩍!
집중력이 깨졌던 건지 아니면 유지가 됐던 건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카이서스의 공격을 예상하고 준비했음에도 순간적으로 시야가 나갔다 들어왔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크흡!”
내가 맞은 펀치는 라이트 카운터였다.
카이서스의 레프트 바디 잽에 카운터로 꽂아 넣으려던 라이트 펀치에 되레 카운터로 얻어맞은 샘.
-꽈악!
발가락 끝부터 온몸의 근육에 힘을 주며 어떻게든 퓨즈가 나간 것처럼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기 위해 애썼다.
-쉐에에엑!
그 와중에 들리는 파공음.
카이서스의 펀치가 공기를 찢어발기며 날아들고 있었다.
‘어디지?’
아직 밸런스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
눈에 보이는 건 카이서스의 하체뿐이었다.
‘앞발은 왼발. 그리고 조금 전 펀치는 라이트 카운터.’
라이트 스트레이트에 이은 레프트 바디 잽인 척하다가 결국 라이트 크로스 카운터였다.
연속 두 번의 라이트. 카이서스는 같은 손을 연달아 쓰는 경향이 있었으니 이번에도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는 라이트를 던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이 벌어진 것 자체가 카이서스의 함정 때문이었기 때문에 무작정 앞서 수집한 데이터를 맹신할 수는 없었다.
라이트 스트레이트 이후 내리꽂는 라이트 연타를 낸다는 것 또한 카이서스의 밑밥일 수 있었으니까.
‘... 레프트일 가능성이 높아...!’
만약 내가 카이서스라면 이 상황에서 확실하게 승기를 가져가기 위해 이전과는 다른 루틴을 사용했을 거다. 그렇다면 높은 확률로 훅성을 지닌 레프트를 날렸겠지.
고개를 들어 펀치를 확인하고 피할 시간은 없었다.
라이트 펀치를 피하려다 레프트 훅에 얼굴을 들이미느냐.
혹은 레프트 훅을 피하려 상체를 들다가 내리꽂는 라이트에 얼굴을 들이미느냐였다.
물론 맞을지 맞지 않을지의 확률은 5대 5.
-꿈틀!
나는 펀치를 보지도 않고 허리를 펴며 숙였던 고개와 상체를 들어 올렸다.
-휘익!
그리고 그와 함께 조금 전까지 내 머리통이 있었을 자리를 꿰뚫고 지나가는 카이서스의 글러브.
‘...끝날 뻔했네.’
다행히 이번에는 내 예측이 맞았다.
조금만 선택을 지체했거나 라이트 펀치를 피하려 오른쪽으로 움직였으면 저 송곳 같은 펀치에 관자놀이가 꿰었을 터였다.
-턱!
상체를 들자마자 카이서스를 밀어내고는 공간을 띄우며 잠깐의 시간을 벌었다.
“후우. 후우...”
집중력이 계속 떨어졌다.
집중 모드를 유지하자니 조금 전 펀치의 여파 또한 쉬지 않고 날 괴롭혀댔다.
‘짧게 지나갈 고통도 길게 느껴야 한다는 거. 진짜 뭣 같네.’
아름이가 최대한 얼굴은 다치지 말라 그랬는데. 지금 내 얼굴이 어떻지?
순간적으로 지금 시합 중이라는 것도 잊은 채 별의별 상념이 다 들었다.
현실감각이 잠시 가출했달까.
-쿵!
하지만 그것도 카이서스의 발 구름과 함께 연기처럼 흩어졌다.
-지끈!
오랜만에 느껴지는 과부하가 걸리는 느낌.
억지로 집중력을 끌어올리자 속까지 울렁거리는 것 같았고 조금 전 얻어맞은 왼쪽 안면 부근의 고통이 더욱더 생생하고 끔찍하게 다가왔다.
-쒜에에엑
하지만 그렇다고 집중을 풀 수는 없었다.
이 순간에도 카이서스는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휘익. 휙.
-후웅. 턱!
아직 데미지를 회복 중인 상태.
카이서스는 상체를 뒤로 두는 기존 스탠스를 버리고 무게중심을 앞으로 두며 라이트 스트레이트와 레프트 바디 잽을 깊고 길게 뻗었다.
하나는 피하고 하나는 가드.
무리해서 피하려다 체력만 소모하고 추가 공격을 당하는 것보다는 가드로 막아내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쉬이이익.
이번에는 어깨부터 일직선으로 원근감을 삭제시키며 뻗어오는 레프트 잽.
어느 정도 데미지를 해소한 상태에서 레프트 잽을 피하기보단 패링으로 쳐버리고 반격을 노려보려 했는데
-우뚝.
-휘익.
내 오른손이 패링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자 바로 왼손 잽을 멈추고는 오른손으로 짧게 펀치를 찔러오는 카이서스.
나 또한 그에 맞춰 오른손을 되돌리며 왼쪽 어깨를 끌어당기며 숄더로 그의 라이트 펀치를 막기 위한 자세를 취했다.
-우뚝.
그랬더니 이번에도 라이트를 멈춰 세운 카이서스.
그 자세가 흡사 날 덮치기 위해 곰이 양팔을 활짝 펼친 것과 비슷한 그림이었다.
-쉬이익.
거기서 바로 앞다리의 탄력을 이용해 오른손을 다시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으려던 카이서스는 또 한 번 페이크를 주며 상체를 횡으로 비틀며 아래에서 위로 올려 치는 어퍼컷 성 레프트를 뻗어냈다.
‘이것저것 페이크를 많이 쓰니 뭐부터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네.’
카이서스의 시선 처리. 근육 움직임. 동시다발적으로 던지는 펀치까지.
거짓말 안 하고 눈이 돌아갈 것 같았다. 가뜩이나 멀미할 것 같은데.
‘후우...’
그럼에도 마음을 한차례 진정시키고 집중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우선 잡아당기던 왼쪽 어깨의 연장인 왼팔로 카이서스의 레프트 어퍼를 중간에서 막아냈다. 그리고 몸을 다시 왼쪽으로 회전시키며 뒤로 돌려졌던 라이트로 노리는 레프트 바디블로우.
-꽈아악
-부들부들.
바디블로우를 막기 위해 왼팔을 들어 올리려는 카이서스와 어떻게든 그 팔을 밑으로 걷어내려는 내 왼손.
그리고 그사이를 마침내 오른손이 지나쳤다.
-뻐억!
정확히 카이서스의 왼쪽 몸통을 꿰뚫는 내 라이트 바디블로우.
-퍼억!
그리고 내 시야 바깥에 있던 카이서스의 오른손 또한 내 왼쪽 옆구리를 꿰뚫었다.
“커헉!”
“크흡!”
거의 동시 터져 나온 신음소리.
하지만 분명히 이득은 이쪽이 컸다.
-땡!
어떻게 이 타이밍에 절묘하게 라운드가 끝날까 싶을 정도로 완벽한 순간에 울리는 라운드 종료 알림.
“후우...”
일부러 억지로라도 호흡을 정상처럼 내쉬며 오른팔을 한차례 크게 돌려줬다.
그리고는 카이서스를 지나쳐 내 코너 쪽으로 아무렇지 않게 걸었다.
‘뒈지겠네.’
물론 이 순간에도 집중력은 유지해야 했다.
조금만 방심하면 다리가 풀릴 것 같았으니까.
라이트 카운터에 이은 마지막 바디블로우까지 데미지가 꽤 컸다.
물론 마지막 바디블로우 싸움은 내가 이겼지만, 카이서스 또한 아무 내색 없이 태연하게 자신의 코너로 걸어갔다.
“고생했다. 괜찮아? 데미지는?”
“아 해봐. 야! 물!”
창섭 형과 세컨 진이 달라붙어 카이서스에게서의 시야를 가린 틈을 타 입속 가득 차올랐던 피와 침을 뱉어냈다.
아까 카운터 때 입안이 찢어졌는지 침을 삼킬 때마다 피 맛이 난다 했더니 침보다는 피밖에 안 보였다.
“이제 피는 거의 안 난다. 다행이야. 그 외에는? 불편한 데 없어?”
물로 입을 한번 헹구고 난 뒤 입을 벌리고 있자 창섭 형이 상처를 살펴보고는 다른 불편한 곳을 물어왔다.
“저. 얼굴 얻어맞은 데 괜찮아요?”
“어?”
“막 붓거나 멍들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우리 아름이 예쁠 때 식 올려야 되는데.
다치면 안 되는데.
“이 미친 새끼. 괜찮아.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하하. 다행이다.”
“바디 맞은 건?”
“제가 먼저 때렸어요. 생각보다 데미지 없었어요.”
“오케이.”
이번 5라운드는 꽤나 위험했다.
습관 혹은 기호도라고 생각했던 카이서스의 움직임들에 속아 정말로 시합이 끝날뻔했다.
이제는 어디까지가 함정이고 어디부터 진짜인지 예측이란 걸 하기가 무서웠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반응하려 했더니 이번엔 카이서스의 페이크들에 눈이 돌아갈 뻔했다.
“그래도... 답이 보이는 것 같아요.”
“어?”
“답이요. 이번 시합에서 이길 수 있는 정답.”
12라운드를 상정해뒀지만, 기회를 잡으려면 다음 라운드에 승부수를 띄워야 했다.
-땡
어느새 끝난 휴식 시간.
“다녀올게요. 집 갈 준비 해두세요.”
“...어?”
이기든 지든. 아무래도 이번 라운드는 넘기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꽈악.
그 말을 끝으로.
깨끗이 씻어둔 마우스피스를 악물며 사각의 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3분.
그 뒤로는 이곳에 더 이상 서 있을 생각이 없었다.
*
“...가려줘.”
5라운드가 끝나고 자신의 코너에 도착한 카이서스가 의자에 앉으며 가장 먼저 꺼낸 말이었다.
“오, 오케이!”
그리고 그의 요청에 따라 상대 코너에서 카이서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그를 둘러싸는 세컨 진들.
“커헉... 허억. 허억...”
카이서스는 그제서야 계속해서 삼키고 있던 고통스러운 숨을 토해냈다.
“후우... 후우...”
마지막 바디블로우는 끔찍했다.
그의 질기고 강인한 근육을 뚫고 갈비뼈를. 오장육부를 끊어버리는 듯한 펀치였다.
카이서스가 태어나 단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종류의 펀치.
“카이서...”
그런 카이서스에게 뭐라 말을 붙이려던 한 세컨드는 주변의 눈치에 급히 입을 다물었다.
“후우... 후우...”
아무리 뛰어난 세계 최고의 스텝들이라지만 이 상황에서 카이서스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는 갈피 잡을 수가 없었다.
카이서스는 이런 상황에 놓여본 경험이 처음이었다.
이런 심대한 타격을 입고 다음 라운드를 고민해야 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다.
‘조지가 보고 싶군.’
복싱이 시시하다고 한바탕 싸운 뒤 그의 품을 떠났던 카이서스.
입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피 맛에도 오늘 아침 마셨던 밀크 티 맛이 나는 건 그만큼 그에게 조지의 존재가 컸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조지라면. 뭐라고 했을까?’
답을 찾으라 했을까. 할 수 있다 격려했을까. 거만 피우더니 꼴좋다 했을까.
어쩌면 앞서 했던 모든 말을 종합선물세트로 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자신의 승리를 위해 어떤 식으로든 방법을 찾아줬겠지.
‘이미 답은 알고 있다.’
5라운드의 마지막.
정말 진심으로 이번 시합을 끝내려고 강해서의 모든 움직임을 봉쇄하려 했을 때. 그때 보였던 한줄기 가능성.
‘보이는 것만 쫓는다. 동시다발적으로 페이크를 섞으면 판단이 느려졌어.’
강해서는 분명 자신과 같은 ‘시간’ 속에 있었지만, 자신과 같은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카이서스는 강해서의 전체적인 움직임만 보더라도 다음 움직임이 확실히 예측 가능했는데 강해서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하나하나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을 해야 하는 듯한 모습이었으니까.
“후우...”
카이서스가 깊은 호흡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땡!
라운드 간 휴식 시간의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6라운드.
강해서와 카이서스. 둘 모두가 이번 복싱 이벤트의 마지막이 될 거라 생각하는 라운드가 막을 올렸다.
2.
“아아! 강해서 선수! 라이트 카운터를 맞았습니다!”
“위험합니다! 카이서스! 달려듭니다!”
“레프트 바디를 막아내며 바디 블로! 양 선수 동시에 바디블로를 적중시킵니다! 그 상태로 울리는 5라운드 종료종! 5라운드가 끝났습니다!”
“정말 위험했습니다! 우리 강해서 선수! 종이 아니었다면 꽤나 위험했을 수도 있어요!”
장명우 해설은 이제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마이크를 잡아먹을 듯 해설을 이어나갔다.
“고급 기술들의 향연입니다! 느린 화면으로 보시죠. 여기. 여기부터 여기까지. 페이크와 간파가 정말 짧은 순간 수차례는 오간 공방입니다!”
라운드 간 휴식 시간에 보여주는 5라운드 하이라이트 장면을 보며 하나하나 성실히 설명하는 장명우 해설.
┗와... 복싱을 보는데 왜 내가 울컥함?
┗ㅅㅂ 진짜. 너무 멋지다 갓-해서!
┗마지막에 라이트 카운터 맞았을 때 그냥 끝난 줄...
┗ㅇㅇㅇ 나도 겜 끝난줄! 그런데 뒤에 바디블로는 강해서가 이득봄. 카이서스도 자기 코너 가서 마른기침 ㅈㄴ 함
┗와... 카이서스를 이렇게까지 궁지로 몰아넣은 선수가 있었냐? 진짜 강해서는 올타임 레전드다
┗이제 둘 다 체력이 많이 떨어져보임. 역시 카이서스가 우세한가?
┗아무래도 카이서스가 유리한 듯. 중반 넘어가니까 강해서가 아슬아슬한 장면이 많네
┗ㅈㄹ 카이서스 바디 제대로 꽂혀서 이제 발 묶였을걸? 강해서가 유리함
┗강해서는 대가리 뚤렸음ㅋㅋㅋㅋ 뇌 데미지가 훨씬 오래감
┗야 다들 쉿. 6라운드 시작한다.
아슬아슬한 국면을 보여주던 강해서와 카이서스의 5라운드가 끝나고.
한국 뿐만 아니라 미국과 전 세계가 이번 5 라운드의 결과로 이번 시합의 승패를 점 치는 순간 다시금 종이 울리며 두 선수가 사각링 중앙에서 마주했다.
-툭.
마치 이번 라운드가 끝이라는 듯 1라운드 이후 처음으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볍게 글러브 터치를 한 두 사람의 모습에 일순간 말 그대로 전 세계가 숨을 죽였다.
-타탁!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다시 한번 전진 스텝을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