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딱대격투천재의 탄생-197화 (197/203)

< 197화_ROUND 1. >

1.

가벼운 글러브 터치.

하지만 그 가벼운 행위는 말처럼 가볍지만은 않았다.

굵직한 시합들을 몇 번이고 치러냈던 경험이 있지만, 오늘만큼 긴장과 압박감이 컸던 시합은 없었으니까.

그런 마음이 반영된 것인지 카이서스와의 글러브 터치는 그만큼이나 무겁게 내게 다가왔다.

-슥

-슥

MMA의 옥타곤 케이지보다 확실히 작은 복싱 링.

전체적으로 둥근 MMA의 원형 링과 복싱의 사각 링은 그 활용도부터 달랐다.

-슥

-슥

그렇기에 첫 글러브 터치 이후 카이서스와 나는 이렇다 할 펀치 교환 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신중한 시간을 가졌다.

체감상으로는 꽤나 오래도록 탐색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끽해야 4-5초 정도 흘렀을 거다.

-팟!

첫 시작은 카이서스의 멀리서 뻗어오는 레프트 잽이었다.

팔 전체를 휘두르는 MMA식 펀치와는 달리 점이 선이 되듯 간결하고 깔끔하게 뻗어오는 카이서스의 잽은 그 소리부터 달랐다.

-휙.

-팟!

가볍게 던진 잽이니만큼 가볍게 피해 주고는 그대로 카운터 잽을 뻗어봤지만

-슥.

상체를 세운 상태에서 무게중심을 뒤로 두고 있었던 카이서스는 가볍게 상체를 젖히는 것으로 내 잽을 무력화시켰다.

정말 가벼운 잽 교환이었지만 이 속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씨익.

그리고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카이서스를 보아하니 그 생각이 마냥 틀린 것 같지는 않았다.

‘기본.’

카이서스는 내게 ‘복싱의 기본은 충분히 익혔냐’를 물어보고 있었다.

-휙. 휙.

레프트잽에 이어 원 투.

-휙. 휙휙.

원 원투.

-찌직.

-퉁. 휘익!

나는 색깔 없는 카이서스의 질문에 색깔 없는 더킹으로 답하며 마주 펀치를 던져줬다.

-파앙! 팡!

MMA와는 다른 복싱화가 바닥에 마찰하는 소리와 거기서 얻어지는 힘까지 전달한 펀치.

하지만 마찬가지로 카이서스의 상체 컨트롤과 패링에 가로막혀 유효타를 성공시키진 못했다.

처음보다는 조금 더 길어진 펀치 교환.

서로 유효타는 없었지만, 처음과 달라진 게 있다면 서로의 주먹이 맞부딪혔다는 점이었다.

‘1라운드는 탐색전이라...’

힘 빼고 했다간 순식간에 잡아먹힐 것 같은데 어떻게 탐색전을 하라는 건지.

-꽈악.

12라운드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긴 여정이라는 건 알지만 마우스피스를 꽉 물며 조금씩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그냥. 12라운드까지 가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 애초에?

*

-파앙! 팡!

어차피 이번 복싱 매치는 말 그대로 ‘이벤트’성 경기였다.

3분 12라운드 경기로 협의된 바 있지만, 오늘 경기가 진짜 12라운드까지 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카이서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늘 시합을 위해 초심을 되찾고 구슬땀을 흘리며 훈련에 매진했지만, 진심으로 자신의 패배를 염두에 두진 않았다.

1라운드 초반의 장난스러운 인사는 그런 마음에서 나왔던 퍼포먼스에 가까웠다.

다양한 시합으로 꾸려지는 이벤트 매치와는 달리 카이서스와 강해서의 복싱 이벤트는 단 하나의 경기로만 구성되어 있었으니까.

몇 주. 몇 달이나 이번 시합을 기대하고 기다렸을 팬들을 위해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지는 않아야겠다.

초반 라운드에는 여러 가지 볼거리를 만들어낸 뒤 중반 라운드쯤부터 제대로 강해서를 공략하고 10라운드 안에 깔끔하게 KO로 승리해야겠다.

그게 카이서스의 계획이었을지도 몰랐다.

-꿈틀.

하지만 1라운드 초반 카이서스가 장난처럼 던진 잽과 원투에 자극을 받은 걸까.

강해서의 턱 근육이 한번 크게 꿈틀거리더니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펀치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휘익. 휙!

갑자기 펀치 스피드가 빨라졌다거나 파워가 강해졌다거나 하는 부분이 아니었다.

-팡!

-퍽!

카이서스가 펀치를 뻗고 회수하는 타이밍.

스탭과 스탭 사이에 체중 이동으로 땅을 딛고 있는 다리의 힘을 사용하기 어려운 정말 찰나에 가까운 순간.

호흡과 호흡의 경계. 긴장되어 있던 근육이 다음 동작을 위해 잠시 긴장을 푸는 타이밍.

이런 순간들을 노려 잘 벼려진 칼과도 같이 군더더기 없는 궤적으로 카이서스의 빈틈을 비집고 강해서의 펀치가 뻗어왔다.

그 결과 카이서스는 모든 펀치를 피하거나 쳐내지 못하고 바디나 어깨. 혹은 가드 위로받아내며 강해서의 펀치력을 몸으로 느껴야 했다.

‘이거. 확실히 나태해졌군.’

이런 펀치를 던질 줄 아는 상대를 두고도 안이한 마음을 먹었다니.

카이서스는 자신의 가벼웠던 마음가짐을 반성하며 머릿속에서 ‘초반 탐색’이라는 개념을 지워버렸다.

‘내게 탐색전이라는 단어는 필요치 않으니까.’

1라운드도 아닌, 단 몇 번만 상대의 동작을 자세히 관찰하면 그게 카이서스에겐 ‘탐색’의 끝이었다.

이제껏 카이서스가 상대했던 선수들은 하나같이 느리고. 약했으며. 예측을 빗나간 적이 없었으니까.

-꽈악.

시합에서 마우스피스를 이토록 빠듯하게 악물어본 적이 언제였는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 카이서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마우스피스를 악물며 진심으로 자신을 쓰러뜨리기 위해 달려드는 강해서를 향해 마주 몸을 던졌다.

복싱 시합은 이제 시작이었다.

**

-휘익!

꽤나 확신을 가지고 뻗은 레프트 바디.

-후웅.

하지만 여지없이 빈공간을 가로지를 뿐이었다.

-꿈틀.

레프트 바디를 뻗으며 틀어진 중심축의 시야로 보이는 카이서스의 다리 근육과 상·하체의 밸런스.

돌아가 있는 내 왼쪽 측면을 노린 카이서스의 라이트 펀치가 예상됐다.

‘흐읍!’

라이트 스트레이트일까?

아니면 라이트 혹일까?

그것도 아니면 라이트 바디블로우일 수도 있겠지.

찰나의 순간. 주어진 단서와 표본으로 카이서스의 선택지를 정확히 맞춰내야 하는 극악한 난이도의 게임이었다.

비유하자면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상대방의 손을 보며 정확히 무엇을 내는지 예측해서 그것에 이길 수 있는 것을 늦지 않게 내야 하는 정도의 난이도랄까.

‘미친 거지.’

그런데 지금은 그걸 해내야 했다.

일단 카이서스의 뒷발인 오른발의 각도가 덜 돌아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축발인 왼 다리의 무릎도 크게 돌아가지 않았고 상·하체 밸런스도 나쁘지 않았다.

큰 회전력이 필요한 훅은 아니었다.

그러면?

‘흡!’

집중력을 조금 더 끌어올렸다.

체력을 소모하는 대가로 지금, 이 순간의 선택 시간이 조금 더 늘어났다.

-꿈틀

바디블로우와 스트레이트 펀치는 크게 두 가지 큰 차이점을 보였다.

복근의 수축 정도와 어깨 근육의 회전 방향이었다.

어깨 아래에서 펀치를 위로 쳐올리는 느낌의 바디블로우는 어깨와 거의 같은 라인에서 앞으로 뻗어내는 스트레이트와는 차이가 있었으니까.

‘스트레이트!’

그리고 지금 카이서스가 준비하고 있는 펀치는 스트레이트가 확실했다.

겨드랑이를 조으기전에 어깨 근육이 먼저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휘익.

답을 정했으면 그에 맞춰 빠르게 대처해야 했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는 나 또한 민첩하게 움직일 수 없었으니까.

-후웅.

예상했던 대로 내가 더킹으로 피해낸 공간을 꿰뚫듯 지나가는 카이서스의 라이트 펀치.

‘보통 여기서 카이서스는...’

지난 두 달간 영상으로 확인했던 카이서스라면 라이트 스트레이트 이후 휘청거리는 상대에게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듯한 스트레이트를 한 번 더 뻗어내는 경우가 많았다.

비록 내가 펀치를 허용하고 휘청거리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구도로만 본다면 카이서스가 내려찍기 딱 좋은 위치로 더킹을 한 상태.

과연 카이서스의 선택은 무엇일까 싶었다.

‘분석이라고 해봤자. 죄다 카이서스가 일방적으로 때리는 영상이다 보니 공격에 실패했을 때 카이서스의 행동은 알 수가 없잖아!’

그나마 알고 있는 정보는 높은 확률로 같은 쪽 펀치를 날릴 거라는 점이었다.

카이서스는 라이트 레프트 컴비네이션보다는 먼저 썼던 쪽의 펀치를 연달아 던지는 걸 더 선호했으니까.

-꾸욱.

오른쪽 아래로 더킹한 상태에서 몸의 중심을 바로잡으며 살짝 뒤로 상체를 드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카이서스의 두번째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상체를 들어 올리는 내 안면을 노리고 뻗어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역시.’

틀리면 어쩌나 했는데 카이서스는 안이하게도 평소처럼 익숙한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한 번 더 준비하고 있었다.

-뿌드득.

난 들어 올리던 상체를 다시 반대로 돌리며 뒷발인 오른 발목에서부터 올라온 회전력과 허리의 회전력. 다시금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상체의 회전력까지 더해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준비하느라 훤히 비어버린 카이서스의 오른쪽 몸통을 향해 레프트 바디 블로우를 뻗어냈다.

-휘이이익.

꽤나 집중력을 끌어올린 순간.

풀어버려도 괜찮겠지만 왠지 쎄한 느낌에 펀치가 제대로 들어갈 때까진 집중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터업!

‘...!’

아니나 다를까. 비어있던 카이서스의 오른쪽 몸통을 향해 뻗어가던 내 왼손은 어느새 내려온 카이서스의 오른손 글러브에 막혀있었다.

애초부터 두번째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함정이었다.

자신의 펀치 취향을 내가 알고 있다는 걸 이용해서 일부러 상체를 비워두고 바디 블로우를 유도했던 거다.

‘좃됐다.’

이미 이번 바디 블로우를 위해 몸의 축 대부분이 돌아가 있었다.

왼팔이 카이서스에게 막힌 상태에서 몸은 완전히 오른쪽으로 돌아가 있는 상태.

이젠 오히려 내 상체의 절반 이상이 카이서스의 정면으로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쒜에에엑

그리고 당연하게도 비어버린 상체를 두들기기 위해 날아드는 카이서스의 레프트 펀치.

짧고 좁은 공간에서 내 오른손 가드를 피해 아래에서 위로 뻗어지는 어퍼컷 성 펀치였다.

-뿌득. 뿌드득.

집중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어떻게든 내게 주어진 시간을 조금 더 늘려야 했으니까.

그러면서 돌아가고 있던 몸을 멈춰 세우며 오히려 반대로 돌리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뿌드득. 뿌득.

관성을 무시하는 명령에 온몸의 근육과 관절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훈련은 애초에 이런 상황을 버티기 위한 것이었다.

‘크흡!’

그럼에도 시간은 부족했기에 카이서스의 레프트 어퍼의 궤적에서 온전히 상체를 빼내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뻐어억!

다만 최대한 몸을 틀어내며 카이서스의 왼손과 내 턱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내 오른손 글러브를 끼워 넣을 수 있었다.

“크흡!”

충분히 미리 대비했기에 이를 악물고 목에도 힘을 줬다.

펀치력을 줄이기 위해 오른손으로 턱을 가리며 충격도 분산했다.

그럼에도 순간 내 목이 빠져버린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한 힘이 내 얼굴을 아래에서 위로 쳐 올리는 게 느껴졌다.

“...!”

내 오른손을 치고 머리 위로 뻗은 카이서스의 왼손.

이런 대처는 예상치 못했는지 살짝 놀란듯한 카이서스의 표정이 보였다.

그리고 다음으로 보이는 건 내 눈앞으로 훤히 드러난 카이서스의 왼쪽 상체.

나는 어떻게든 카이서스의 펀치를 버텨냈고. 일순간 비어버린 카이서스의 왼쪽 상체를 향해 턱을 받쳤던 오른손을 예비 동작 없이 그대로 뻗어냈다.

-퍼억!

“흡!”

카이서스의 억눌린 듯한 숨소리.

그렇게 공평하진 않지만. 어쨌든 일 대 일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1라운드는 언제 끝나는 거야?

*

“시청자 여러분! 이게 복싱입니다! 이게 수준 높은 복싱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번 카이서스와 강해서의 복싱 이벤트 매치의 해설을 위해 스포츠온 TV를 찾은 한국 복싱의 살아있는 신화 장명우 선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1라운드 초반에는 서로 살짝 인사하듯이 잽으로 인사를 하는 듯했는데요. 여기. 여기부터입니다! 이건 정말 느린 화면으로 하나하나 짚어드리면서 설명을 하고 싶을 정도예요.”

장명우는 강해서와 카이서스의 수준 높은 공방에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도 모른 채 목소리를 높였다.

“이 짧은 거리에서 우리 강해서 선수는 카이서스의 펀치를 모두 피해냅니다. 카이서스의 핸드스피드는 헤비급에서는 나올 수 없는 사기적인 속도에요. 그런데 우리 강해서 선수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그리고 저 간결한 펀치 라인. 자로 잰듯한 상체 컨드롤! 대체 어디서 저런 선수가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짜!”

1라운드가 끝을 향해갈수록 장명우 해설은 침을 튀겨가며 하이레벨 복싱의 설명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1라운드가 끝나기 직전.

-뻐어억!

-퍼억!

카이서스의 라이트 펀치를 피해낸 강해서가 레프트 바디 블로우를 날리려다 역으로 레프트 어퍼컷을 맞는 장면. 그리고 동시에 비어있는 카이서스의 복부로 라이트 펀치를 꽂아 넣는 장면까지.

짧은 순간 그림처럼 펼쳐진 공방에

-우와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

-휘익! 휘익!

현지 체육관의 관중들까지 자리에서 일어나 열렬한 환호를 던졌고

“아...! 여러분! 믿어지십니까? 저는 지금 태어나서 복싱이라는 스포츠를 처음 접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오늘 이후로 저는 다른 복싱 경기를 해설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지금 이 시합은 수준 높고 아름다운 ‘복싱’ 그 자체입니다! 제발 이 시합이 오래도록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생길 정도입니다!”

장명우 해설위원 또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해설이 아닌 소감을 쏟아낼 뿐이었다.

┗방금 무냐?

┗복싱이 원래 이런거임? 그냥 막 휘두르다 얻어걸려서 맞고 그런 거 아님?

┗ㄴㄴ 다 그런건 아님. 그런데 나도 지금 내가 보고있는게 복싱이 맞나 싶다.

┗이제 1라운드 봤는데 앞으로 다른 복싱 시합은 못볼것 같은 강렬한 예감이 든닼ㅋㅋㅋ ㅅㅂ 이런걸 보고 어떻게 평범한 복싱 시합을 봐?

┗진짜 세계관 최강자들의 시합이 이런거구나... 가슴이 웅장해진다.

┗하. 이제 1라운드 끝났네. 한라운드 끝날 때마다 느린화면으로 경기내용 복습시켜줬으면 좋겠다. 선수들도 충분히 쉬고. 그래야 오래 보지...

강해서와 카이서스.

결코 짧지 않을 그들의 시합 중 이제 겨우 1라운드가 지났을 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