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딱대격투천재의 탄생-196화 (196/203)

< 196화_시작. >

1.

“후우...”

방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서늘한 12월의 아침 공기가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잘 잤냐?”

“넵.”

시합전이라고 잠을 설치거나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어제는 유독 편안한 잠자리를 가졌다.

덕분에 오늘은 아침부터 정말 컨디션이 좋았다.

“내려가자. 조지가 기다리고 있어.”

“조지가요?”

복싱 트레이닝이 끝나고 시합 전 컨디셔닝에 들어간 순간부터는 조지의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카이서스의 영상분석 시간에나 한 번씩 볼 수 있었달까.

“왔냐? 애송이?”

“조지.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라무차 떠오르니까.”

“애송이를 애송이라 부르지.”

조지와 함께한 시간은 사실 그리 길지 않았다.

끽해야 최근 두 달 정도 바짝 붙어있었을 뿐이니까.

“컨디션은 어떠냐?”

“아주 죽여줍니다.”

“카이서스를 죽여줘야지.”

“그래도 돼요?”

그럼에도 조지와 나 사이의 유대감은 특별한 데가 있었다.

가감 없이 진심을 드러내는 조지의 성격과 그런 진심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내 성격이 시너지를 일으켰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단단히 준비했더라도 카이서스는 만만치 않을거다.”

“넵.”

“카이서스 그놈은 내가 제일 잘 알아. 적어도 오늘 시합이 시작되기 전까진. 아마 그놈도 애송이 네놈에 못지않게 뼈를 깎아가며 준비했을 거다.”

“넵!”

“네 훈련의 마지막은. 오늘 있을 시합에서 마무리 될 거다.”

“네?”

“오늘까지는 카이서스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라면. 시합이 끝난 후엔 그게 네놈이 되어야 해.”

“...”

“시합 중에도 배워라. 훔쳐. 카이서스 그놈의 모든 걸 알아내야 해. 그놈이 널 학습하는 것보다 네가 그놈을 배우는 게 빨라야 해.”

이거 참.

항상 이런 식이구먼.

“조지. 그거 알아요?”

“뭘?”

뜬금없는 내 질문에 한쪽 눈썹만 꿈틀거리며 인상을 쓰는 조지.

“조지는 절대 좋은 코치가 아니에요.”

“뭐 인마?”

“내주는 숙제마다 항상 이렇게 어려운 것뿐이잖아요. 하하.”

“... 대신 네놈은 성실하잖냐.”

“네?”

반쯤 장난으로 던진 농담에 꽤나 진지하게 반응하는 조지.

“네놈은 무슨 숙제를 내주든 토 달지 않고 어떻게든 해내는 선수니까.”

“엄...”

“그러니. 이번 과제도 그냥 해봐. 토 달지 말고.”

이열... 까칠하신 양반이 오늘따라 좋은 말을 해주시네.

이렇게까지 말해주면 더는 장난스럽게 반응하기도 뻘줌했다.

“걱정 마세요. 조지가 내준 숙제 한번도 실패한 적 없으니까요.”

-척

나는 조지의 조언에 존경의 뜻을 담아 왼손을 뻗었고

-꽈악.

조지는 말 없이 그런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런데 조지. 귀가 너무 빨간 것 같은데...”

“추워서 그렇다.”

“아까부터 저 기다렸다면서요. 여긴 따뜻한데...”

“쓸데없는 소리 할 정신 있으면 가서 시합 준비나 해! 꺼져!”

결국, 소리를 빼액 지르고는 휙하니 나가버리는 조지.

거참. 영감님이 부끄러움도 많단 말이야.

“읏-차.”

어쨌든. 이런 진심이 담긴 응원도 받았겠다.

슬슬 준비해볼까?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기 위한 준비를?

*

-저벅. 저벅.

이른 아침부터 강해서에게 한마디 쏘아주고는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체육관에 도착한 조지.

“늙으면 잠이 없다는데. 그냥 게을러진 건가? 오픈 시간이 너무 늦잖아?”

“...카이서스.”

그리고 그런 조지의 체육관을 이른 아침부터 찾은 건 다름 아닌 카이서스였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오늘 시합인 놈이?”

갑작스런 방문에 퉁명스레 답하면서도 체육관 문을 여는 조지의 손은 조금 더 분주해졌다.

“미련한 놈. 시합을 앞둔 놈이 말이야. 안 오면 안 오는가 보다 하고 그냥 갈 줄을 알아야지.”

체육관의 불을 켜기도 전에 난방기구들부터 켠 후 따뜻한 물을 준비하는 조지를 보며 카이서스는 그저 말없이 웃어 보였다.

“이번 시합을 준비하면서 초심이라는 놈을 되돌아봤거든.”

한동안 잊고 있었던 초심. 열정.

카이서스는 강해서와의 시합을 준비하면서 오랜만에 자신의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내면의 불꽃을 다시금 피워올릴 수 있었다.

“전성기에 했던 훈련. 루틴. 거기에 더해 새로운 훈련들까지. 정말 열심히 준비했어.”

“...그렇게 보인다. 네놈 눈빛만 봐도 알지.”

“하하하. 역시 조지야.”

조지는 담담하게 말을 뱉는 카이서스의 눈빛에서 십여 년 전 폭군과 같았던 카이서스를 볼 수 있었다.

‘관록이 쌓인 폭군이라. 애송아. 애송아. 어려운 시합이 되겠다.’

조금 전 강해서에게 조언 아닌 조언을 해주고 왔지만 눈앞의 카이서스를 보니 괜한 말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조지였다.

이미 카이서스는 시합에서 보고 배운다고 이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닌 듯 했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내가 다른 건 다 초심을 찾았어도 시합날 아침 조지가 준비해준 밀크티는 도저히 해결이 안 되더라고.”

“돈도 많은 놈이. 뭐하러 그런 싸구려 밀크티를 찾아?”

“나한텐 그게 시작이었으니까.”

카이서스가 아프리카에서 처음 조지를 만났을 때.

하루하루 생존 자체가 과제였던 그에게 조지가 알려주는 복싱은 그저 비효율적인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그 시간에 먹을거리를 하나라도 더 구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카이서스가 다른 빈민촌 아이들과 어울려 조지의 복싱 수업을 들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난생처음 먹어봤던 달콤하고 따뜻한 밀크티.

“결국. 그때 그 밀크티가 날 이 자리까지 인도했으니까 말이야. 그게 아니었다면 난 지금까지도 하루하루를 버티듯 연명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

아련함이 묻어나는 카이서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조용히 달그락달그락 무언가를 준비하는 조지.

-탁.

그리고는 아직도 불을 켜지 않아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햇살이 조명의 전부인 체육관 테이블 위로 싸구려 밀크티를 올렸다.

“이건...”

“얼른 먹고 가. 컨디션 망쳐서 시합에 졌다는 변명은 듣기 싫으니까.”

“...”

조지가 내어준 밀크티. 정확히는 그 잔을 만지작거리며 카이서스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카이서스가 조지를 따라 처음으로 미국에 왔을 때. 밀크티를 좋아하는 그를 위해 조지가 선물해주었던 카이서스 전용 밀크티 잔.

오래되어 색이 바랬지만 이 하나 나간 곳 없이 깔끔한 모습 그대로였다.

“아. 뭐해? 빨리 먹고 꺼져.”

“...그러지.”

따로 씻지 않았음에도 먼지 하나 없는 찾잔 받침대는 조지가 평소에도 카이서스의 찻잔을 관리했음을 보여줬다.

-달크락.

투박한 손으로 작은 티컵을 들어 한 모금 머금는 카이서스.

‘맛... 있군.

그 맛은 이십여 년 전 치열했던 그 시절의 맛과 다르지 않았다.

2.

-웅성웅성.

-밀지 마!

-언제 시작하는 거야!

12월의 차가운 공기도 피해 가는 이곳은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

관계자 전용 복도를 통해 대기실로 이동하는 중에도 느껴질 정도로 이곳 경기장의 열기는 뜨거웠다.

“미스터 강. 저도 오늘 시합. 정말 기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체육관 관계자들이나 가드들까지 아이처럼 눈을 반짝거리고 있으니 말 다 했지 뭐.

“하하. 감사합니다.”

“편하게 쉬시고. 문제 있으면 언제든 말씀 주세요.”

“네.”

보통 경기장 관련 관계자들은 그리 협조적인 편이 아니었다.

문제가 있거나 요구사항이 있을 때도 늦장 피우는 건 예사였고.

물론 내가 유명해진 이후에는 그런 일이 거의 없어지긴 했다지만 오늘은 유독 살갑고 전체적으로 업된 분위기를 풍겼다.

“당연하지. 미국에서 복싱하면 우리나라 태권도랑 비슷한 위치야.”

“그래도 복싱이 미국껀 아니잖아요.”

“그런 뜻이 아니야. 한국 사람이 태권도 배우는 것처럼 미국인들한텐 복싱이 국민 스포츠에 접하기 쉬운 운동이라는 거지.”

“그건 저도 알지만요.”

그래도 앞선 복싱 이벤트에선 이정도로 반응하지 않았으니까 낯선 건 어쩔 수 없었다.

“카이서스는 그 상징성의 차원이 다르니까. 사실 나만 해도 현실감각이 떨어져. 해서 네가 카이서스랑 붙다니.”

오늘따라 말이 많은 창섭 형.

필승 형만큼이나 수다스럽다 했더니 이 형도 흥분했구만.

“자.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편하게.”

나한테 긴장하지 말라고 하는 건지. 아니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애 쉬는데 정신없게 굴지 말고 나가서 사람들이나 챙겨.”

“넵!”

결국, 안 코치님께 한 소리 듣고 바깥으로 쫓겨나는 창섭 형.

“형. 제 친구들이랑도 좀 챙겨주세요.”

“오케이.”

오늘 시합에는 준현이 재현이 기태. 세 친구 놈들이 모두 응원하러 현장을 방문해줬다.

준현이야 데뷔 초엔 같이 투어를 다녔다지만 재현이와 기태 놈은 제일 친한 친구 놈들이면서도 한번도 시합 응원을 오지 않았었다.

다들 개인적으로 바쁜 시기를 보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꽤나 서운했었는데 하필이면 이번 카이서스와의 시합 때 맞춰 응원을 오겠다고 해서 조금은 난감하긴 했다.

“쩝. 티켓 값이 얼만데.”

텔론에게 부탁해 관계자 관람석을 겨우 구하긴 했다.

물론 따로 돈을 내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다만 이 자식들이 SNS로 동네방네 떠든 바람에 대학 졸업 이후 한번도 연락하지 않은 친구들에게서도 연락이 왔었다는 게 문제지.

시합 끝나면 딱밤을 한 대씩 때려줘야겠다.

“슬슬 몸 풀어라.”

“넵!”

시간은 꽤나 빠르게 흘렀다.

방금 경기장에 도착한 것 같은데 벌써 워밍업을 할 시간이었으니까.

“확실히 풀어둬. 날씨가 날씨인 만큼 대기실 밖 공기는 차갑다.”

“넵.”

꼼꼼히.

눈을 감고 손끝부터 발끝까지. 신경 하나하나. 근육 하나하나를 느낀다고 생각하며 몸을 풀어나갔다.

“해서야! 안 코치님! 입장 대기 콜 왔습니다!”

딱 워밍업을 마무리하는 타이밍에 대기실 문이 열렸고

-번쩍!

나는 창섭 형과 함께 들어온 대기실 바깥의 서늘한 공기에 눈을 떴다.

“준비 다 됐냐. 해서야?”

“넵!”

“가자.”

“네!”

이제 시작이었다.

카이서스와의 시합은.

*

“자. 마우스피스.”

-텁.

WFC와는 조금 다른 입장로를 지나 도착한 사각 링 아래.

대기실에서 입장로까지 이어진 복도의 서늘한 공기와는 달리 입장로 안쪽 체육관 공기는 오히려 관객들의 뜨거운 열기에 계절을 잊게 할 정도였다.

“흥분하지 말고. 복싱은 길다. 알지?”

“넵!”

오늘 카이서스와의 복싱 매치는 이벤트 경기라고는 하지만 실제 WBC 타이틀이 걸린 타이틀전이었다.

당연히 시합은 복싱룰 12라운드로 진행되었다.

“조급히 달려들지 말고. 초반 라운드는 탐색. 견제. 알겠지?”

“넵.”

MMA 선수에게는 꽤나 낯선 12라운드 경기.

물론 1라운드가 3분으로 다소 짧긴 했지만, 전체 경기 시간은 최대 36분이었다.

체력 분배가 관건이었으니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듣더라도 부족함은 없었다.

-강해서 선수. 입장해주세요.

상의를 벗고 트렁크만 입은 상태.

마우스피스와 글러브를 착용하고 나니 입장 콜이 떨어졌다.

-탁. 탁. 휙!

몇 개 되지 않는 계단을 뛰듯이 지나 날듯이 사각 링 안으로 점프해 들어갔다.

-와아아아아아!!!!

-휘익 휘익!!!

단순히 입장만 했을 뿐인데 체육관을 뜨겁게 울려대는 관객들의 함성소리.

그리고.

-카이서스! 카이서스!

-황제! 황제!

-고! 카이서스! 고!

맞은편 코너로 카이서스가 상대적으로 조용히 등장했다.

“...”

카이서스와 이렇게 마주하는 건 몇 년 전 짧은 스파링 이후로 처음이었다.

‘최근 몇 달간 질리도록 영상을 봐서 그런지. 되게 친숙하게 느껴지네.’

카이서스도 나와 같은 감정일까?

맞은편에 서서 날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가벼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양 선수 앞으로.

심판의 안내에 따라 사각 링 중앙에서 마주한 우리 두 사람.

-파이트!

향후 최소 십여 년 이상을 레전드 시합이라 평가받을 복싱 시합의 시작.

-툭.

그것은 언제나 그렇듯 가벼운 글러브 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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