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화_결착지 >
1.
-찰칵! 찰칵!
12월 중순.
뉴욕의 가장 큰 자랑거리 중 하나인 매디슨 스퀘어 가든은 한겨울의 추위도 날려버릴 만큼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밀지 마!
-무대가 어디야?
-카이서스는 언제 나오지?
-이봐! 음료를 쏟았잖아!
드넓은 매디슨 스퀘어 가든을 가득 채운 인파.
이들은 바로 내일 있을 카이서스와 강해서의 시합에 앞서 계체 이벤트를 보기 위해 이곳에 모여있었다.
-강해서 선수 도착했답니다!
-카이서스. 도착 확인했습니다!
지금 이 시각 전 세계에서 가장 핫한 곳을 고르라면 어느 유명한 클럽이나 페스티발이 아닌 바로 이곳. 매디슨 스퀘어 가든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티켓 가격만 1억 달러 이상 팔렸다는 레전드 매치.
가장 좋은 자리의 경우 암표 가격만 한화 3억을 넘겼다는 세기의 대결을 하루 앞둔 시점. 매치 당사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계체장이야말로 이 시각 지구상에서 가장 핫한 플레이스로 손꼽히기에 손색이 없었다.
“아주 돈방석에 앉겠구만. 텔론 저 양반 봐. 입이 아주 다물어지질 않아.”
카이서스와 강해서의 사전 인터뷰를 위해 현장을 찾은 기자들은 계체장에 모습을 드러낸 WFC의 회장 텔론을 보며 입을 열었다.
“당연하겠지. 티켓만 1억 달러야. 거기에 PPV 판매수익에 중계권 판매까지. 앞으로 이런 규모의 이벤트 매치가 또 생길 수 있을지 궁금할 정도니까 말이야.”
기자들의 말마따나 이번 이벤트 매치의 수익은 상상을 초월했다.
미국 내에서만 500여 개 영화관에서 유료로 카이서스와 강해서의 시합을 관람할 수 있었는데 이미 전석 매진행렬을 이어가고 있었으며 심지어 영화관 티켓까지 암표로 팔릴 정도였다.
비단 미국뿐만 아니라 강해서의 모국인 한국에서도 협약된 영화관을 통해 약 100여 개 상영관에서 이번 이벤트매치를 관람할 수 있었고 아시아 전역에서도 영화관 시청 프로모션이 진행되었다.
“최소 대전료가 1억 5천 달러라니. 말 다 했지. 아마 이번 시합으로 둘 다 은퇴해도 될걸?”
“카이서스는 2억 달러가 넘는다더군. 과연 그만큼 좋은 경기를 볼 수 있을까가 문제이긴 하지만.”
이미 전문가들의 시합 예측에선 카이서스의 승리가 압도적인 상황.
강해서가 황제 카이서스를 상대로 얼마나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지가 관건이라는 평이 많았다.
물론 MMA 팬들과 전문가들은 강해서의 테크닉과 강점들을 짚으며 그의 승리를 점치기도 했지만, 전체 중 소수의 의견으로 치부될 뿐이었다.
“오! 저기 들어온다! 찍어!”
“빨리 붙어! 찍어!”
조금 전까지 시합내용을 걱정하던 기자들은 카이서스와 강해서가 계체 무대 위로 입장하자 득달같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어차피 저 무대 위 두 명은 모두 승자일 뿐이었다. 단 한 번의 경기로 1억 달러 이상의 수입을 거두는.
기자들은 그저 시합내용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자극적인 기사만 써내면 될 뿐이었다.
*
-척
“오랜만이군,”
요식행위에 가까운 계체를 마치고 포토 타임 때 내게 손을 건네는 카이서스.
-꽈악.
“오랜만이에요.”
나는 그의 손을 마주 잡은 채 반가움을 전했다.
지난번 조지의 체육관에서 만난 뒤 처음으로 함께하는 자리였다.
이번 시합의 홍보 스케줄에서나 여러 매체의 인터뷰에서도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우리 둘.
듣기로는 켄달과 텔론의 합작으로 일부러 우리 둘이 함께하는 스케줄을 만들지 않았다고 했다.
-자. 두 분 선수. 사진 촬영이 끝났으면 테이블로 이동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등 뒤로 WFC와 WBC 등이 적혀있는 포토존을 지나 프레스 명찰을 단 수많은 기자 앞의 테이블로 이동했다.
-많은 복싱과 MMA 팬 여러분들이 기다리던 순간입니다. 드디어 두 선수가 만났습니다! 여러분! 카이서스! 그리고 강해서 선수입니다!
-와아아아아아!!!
-휘익 휘익!!
-붙어라! 지금 붙어!
-한방 갈겨! 건방진 동양인 놈에게 본때를 보여줘!
-내 팬티 가져가!
기자단 뒤쪽으로 터지는 열화와 같은 함성.
기자들이 많다고는 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일반 입장객들이 벌떼처럼 모여 환호하고 있었다.
-우선. 이렇게 투 샷을 보는 게 참 힘들었습니다. 두 선수가 이번 이벤트 매치를 위해 만난 게 처음이시죠?
내 옆으로는 텔론 회장과 안 코치님이. 카이서스의 옆으로는 그의 스태프진들이 앉아있었다.
“네. 공식적으로 만난 건 처음인 것 같네요.”
-공식적으로는 처음이라면. 매치 성사 이후 비공식적으로는 만남을 가지신 적이 있습니까?
“음... 네. 카이서스가 뉴욕에 왔을 때. 조지의 체육관에서 한번 만난 적이 있죠.”
카이서스의 첫 코치이자 후견인이기도 했던 조지의 체육관에서 만났다는 지극히 별것 아닌 이야기.
그런 이야기에도 관객들은 체육관이 떠나가라 호응했고 기자들은 저마다의 방식대로 인터뷰 내용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거 함부로 입을 열면 안 되겠다고 생각을 하는 찰나. 또다시 진행자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각자 이번 매치와 관련된 스케줄을 소화하시면서 경기에 대한 포부들을 밝혔습니다. 서로의 스케줄을 모니터링 해보셨습니까?
“아뇨.”
“노.”
이번에는 나와 카이서스 모두 짧고 간결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바빠죽겠는데 뭐하러 상대 선수의 인터뷰 영상 같은 걸 본단 말이야?
그 시간에 상대의 시합 영상을 한 번 더 보는 게 이득이었다.
-하하. 두 선수 모두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해주셨습니다. 그러면 제가 짧게 말씀드려보죠.
-두 분 다 예상하셨겠지만. 두 선수 모두 이번 시합에서 강한 자신감을 보여주셨습니다. 특히 카이서스는 강해서 선수를 향해 뛰어난 실력을 갖춘 최정상급 선수다. 라는 평가를 해주셨는데요. 강해서 선수는 카이서스의 말에 동의하십니까?
내게 먼저 들어온 질문.
“어. 음. 반은 동의하고 반은 아닙니다.”
-반은 동의하고 반은 아니라는 건?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는 건 맞구요. 최정상급 선수... 이건 조금 표현이 애매하군요. 저는 최정상급(Top-Class)이 아닌. 최정상(Top)입니다. 전 세계. 어느 무대든 그곳이 격투기와 관련된 곳이라면 가장 높은 곳에 제가 있을 겁니다.”
-그 말은 카이서스 또한 강해서 선수보다 아래다?
“하하. 카이서스는 뛰어난 선수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선수구요. 그는 확실히 최정상급(Top-Class) 선수죠.”
-와아아아아!
-찍어! 찍어!
-우우우우!!! 넌 카이서스한테 안돼!
-내일이면 네 코가 깨져있을거다! 애송이!
이거.
지금 와서 트래쉬토크를 할 것도 없었다.
아니지. 정확히는 이정도의 발언만으로도 카이서스를 거의 신성시 하는 복싱 팬들에게는 극딜로 꽂혔다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카이서스. 강해서의 방금 발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TOP과 TOP-Class의 차이를 모르기 때문에 그는 결코 탑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내일 시합이 끝나고 나면 그는 탑이 될 수도 있겠죠.”
-왜 그렇죠?
“내일이면 제가 직접 알려줄 생각이니까요. 탑과 탑클래스의 차이를.”
-휘이이익!!
-카이어스!!!!
-황제!!!!
-복싱의 힘을 보여줘!!!
내 답변에는 환호와 야유가 반반이었다면 이번엔 환호성만 들리는데 내 착각이겠지?
-카이서스는 내일 시합이 몇 라운드까지 갈 거라 생각하십니까?
“음. 그 질문은 바꿔서 강해서 선수에게 해봐야 할 것 같군요. 헤이. 강? 내일 몇 라운드까지 경기를 하고 싶어?”
이번에는 카이서스에게 먼저 돌아간 질문.
카이서스는 그 질문을 살짝 비틀어서 내게 돌렸는데, 그 의도는 명백하게도 ‘내가 원하는 만큼 놀아주겠다’라는 뜻이었다.
“나야 하루종일이라도 가능하지. 가능하겠어?”
나는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유명 히어로 영화의 명대사를 인용해 답했다.
-와우!
-캡틴 코리아!!!
-그렇지! 하루종일도 할 수 있어야지!
-휘이익!!
역시.
이번에는 야유 없이 호응만 가득했다.
-마지막으로 강해서 선수. 이번 매치는 복싱으로 진행되는 만큼 강해서 선수에게 많은 불리함이 예상되는데요. 그에 대해 불만이라든지, 혹은 다음 매치가 만약 성사된다면 제안해볼 만한 내용이 있습니까?
마지막이라며 이번 시합의 불리함을 언급하는 진행자.
나는 텔론을 슬쩍 바라봤다.
어깨를 으쓱하며 원하는 대로 답해도 좋다는 제스처를 취하는 텔론.
이러든 저러든 이미 빅 비즈니스가 성공했으니 아쉬울 게 없는 듯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있습니다.”
나는 마이크를 움켜쥐고 상체를 앞으로 바짝 당기며 기자와 관객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복싱으로 붙으면 제가 불리할거라고요.”
그건, 카이서스는 원래부터 복싱 선수였고 또 복싱 경력이 오래되었으니 내게 불리한 경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하기 위해서였다.
“저는 한국 나이로 서른 살에 처음으로 격투기라는 스포츠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반년도 되지 않아 한국의 챔피언을 넘었습니다. 일 년이 되지 않아 브로일러에 진출했고. 제 우상을 넘어 WFC 미들급 챔피언을 달성하기까지 꼭 1년 7개월이 걸렸습니다.”
내 답변이 이어지는 동안 시끄러웠던 체육관은 일순간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듯 조용해졌다.
“세계 최초로 WFC 3개 체급을 제패하는 데 걸린 시간이 채 5년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상대했던 선수 중 저보다 운동경력이 짧거나 격투기 경력이 짧은 선수는 없었죠. 하지만 결과는? 모두 저의 승리였죠.”
말을 이어가다 보니 내가 상대했던 선수들이 하나둘 스쳐 지나갔다.
스트리트 파이트에서 붙었던 고딩 놈부터 시작해서 백기영 선수와 최창우. 브로일러에서 만났던 선수들부터 가장 최근의 라무차까지.
“확실히 말씀드리죠. 제 앞에서 경력은 의미가 없습니다. 카이서스가 얼마나 오래 복싱을 했건. 그게 그의 주 종목이건. 그런 건 별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할 일은 간단하니까요. 그저 지난 경기들과 마찬가지로 저보다 경력이 오래된 선수를 상대로 승리를 따낼 뿐입니다.”
-퉁.
할 말을 다 했다는 뜻으로 마이크를 거치대가 아닌 테이블 위에 툭 떨어뜨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이서스를 향해 다가갔다.
-...
-.....
일촉즉발의 상황이라고 생각한 건지 아직까지 깨지지 않은 체육관의 침묵.
“헤이. 카이서스.”
“강.”
“불합리한 재능이라는 단어. 누구보다 잘 알 거라고 생각해.”
“...”
“누군가의 피와 땀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불합리함. 그 혜택을 누구보다 많이 받은 사람이 바로 당신일 테니까.”
“그래서?”
“그러니까. 억울해하지 말라고. 당신보다 더 큰 재능에 의해 당신의 피와 땀이 물거품이 되더라도.”
“... 두고 보지.”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건넨 손을 꽉 쥐어 잡는 카이서스.
나와 카이서스의 대화는 카이서스와 주번의 마이크를 통해 체육관 전체로 퍼져나갔고
-우와아아아아!!!!
-아무나 이겨라!!!
-누가 세계 최강이냐!
-여기서 이기는 사람이 이 시대의 최강이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은 그 순간. 말 그대로 터져나갔다.
숨만 쉬어도 하얀 입김이 뿜어지는 12월의 둘째 주 금요일.
나와 카이서스의 이벤트 매치를 꼭 하루 앞둔 날의 이벤트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해서야. 일어나라.”
드디어 내겐 어떤 의미에선 결착지와도 같은 순간.
카이서스와의 이벤트 매치 날 아침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