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_코칭 >
1.
-팡! 팡 팡!
체육관 가득히 울려 퍼지는 글러브 소리.
“쉬지 말고. 하나만 더!”
“자. 잠깐 쉬었다가 바로 다음 훈련으로.”
“늘어지지 말고! 킥 왜 안 올라와!”
확장 이전하며 꽤나 넓어진 ‘팀 피스트’의 체육관이 지금만큼은 꽤나 좁게 느껴졌다.
11월에는 두호 형과 학센의 3차전이자 미들급 타이틀전이 WFC 넘버링 이벤트에서.
12월 초에는 태양이의 WFC 데뷔 이벤트이자 라이트헤비급으로 체증한 이후 첫 시합이 WFC 파이트 나이트에서.
마지막으로 나와 카이서스의 복싱 이벤트 매치가 WFC와 WBC의 공동 주최 하에 12월 중순에 예정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팀 피스트의 모든 스테프들이 풀 가동되어있는 상태.
“와. 야. 넌 복싱센터 안 가냐?”
“거기나 여기나 별 차이 없어요. 그냥 편한 게 최고지.”
체육관이 좁은 것도 아닌데 괜히 툴툴거리는 필승 형.
필승 형은 지금 태양이의 전담팀으로 12월달에 있을 데뷔전을 준비 중에 있었다.
태양이는 브로일러에서 승수를 차곡히 쌓으며 미들급의 루키로 떠올랐지만 나와 비슷한 케이스로 체중이 불어나며 라이트헤비급으로 체증을 한 상태였다.
꽤나 슬림했던 몸에 근육이 붙으면서 가뜩이나 훌륭했던 기량에 파워까지 붙었달까.
다만 태양이의 베스트 컨디션은 딱 라이트헤비급까지였다. 그 이상으로 체중이 불었을 때는 태양이 특유의 스피드가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면 너 태양이 스파링 좀 받아줘라.”
“또요?”
“너밖에 없어. 태양이가 맘 놓고 때릴 수 있는 사람이. 대신 복싱 룰로. 오케이?”
미들급에서도 체급 최상급 스피드에 가까웠던 태양이는 라이트헤비급으로 체증을 했음에도 오히려 스피드가 더 붙은 듯한 케이스였다. 근력이 붙으며 속도가 줄어든 게 아니라 오히려 좋아지며 확실히 라이트헤비급에서는 최상급 스피드를 장착한 선수가 되었다.
“뭐. 알겠어요.”
그런 태양이와의 스파링은 내게도 나쁘지 않았다.
국내에서 복싱 훈련을 받는다고는 해도 이미 원론적인 훈련은 애시당초 다 뗀 상황.
스파링이 절실했지만 내게 맞는 스파링 메이트를 구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어. 어. 그래.”
그렇기에 스피드만큼은 발군인 태양이와의 스파링이 내게도 도움이 되었다.
사실 이 상황을 기대하며 체육관에서 훈련했던 것도 있었고, 필승 형은 투덜거리면서도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내게 스파링 제안을 줬던 거다.
내게도 태양이에게도 모두 득이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툭.
-휙! 휙. 휘익!
확실히 태양이의 스피드는 대단했다.
이정도면 미들급? 아니. 웰터급에서도 꽤나 빠른 축에 속하는 수준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재빠른 몸놀림. 그 몸놀림에는 반칙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긴 팔과 다리의 리치.
마치 채찍처럼 쇄도하는 태양이의 펀치는 라이트헤비급에서는 피해낼 사람이 별로 없을 듯했다.
-슥. 슥슥. 휘익.
물론 내게는 안 통하지만 말이야.
이제껏 태양이와의 스파링에서 제대로 된 클린 히트를 허용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태양이는 정말 마음 놓고 전심전력을 다 해 펀치를 쏟아내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태양이의 펀치 정도야 전부 다 피해낼 수 있었지만
-툭. 툭툭.
그렇게만 해서는 훈련이 되지 않으니 간간히 내게 쇄도하는 펀치들을 패링으로 쳐내며 자세를 무너뜨렸다.
“큽...!”
이게 내가 생각하는 태양이의 문제점이었다.
한 체급 아래에서도 수위급에 들 정도로 빠른 스피드. 하지만 그 속의 파워가 부족했다.
별 힘들이지 않고 툭 툭 쳐내도 튕겨 나갈 만큼 힘아리가 없달까.
이래서야 대체 몇 대를 때려야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미친놈아! 그건 네 기준이고!”
“뭐가 내 기준이에요? 태양이가 펀치력이 없는 건 사실이지.”
태양이에게 그 말을 해주자 필승 형이 다짜고짜 날 윽박질렀다.
“태양이가 복싱하냐? MMA 글러브 끼고 태양이 펀치 턱에 제대로 맞으면 충분히 KO 나와 인마. 그리고 너 정도 되니까 태양이 펀치에 반응해서 쳐내는 거지 WFC에서도 태양이 펀치를 그렇게 정교하게 쳐 낼 수 있는 선수는 드물어 인마.”
“어... 뭐. 그건 그렇겠죠.”
필승이 형 말도 맞는 말이긴 했다.
내 기준에서 태양이는 스피드도 애매했고 파워도 애매한 스타일이었지만 WFC 라이트헤비급을 기준으로 보면 충분히 경쟁력 있는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오히려 태양이의 문제점은 그래플링이지. 이 새끼는 쓸데없이 해서 널 닮아서 그라운드가 약하니까.”
“어? 누가 제가 그라운드가 약하대요? 거기까지 갈 일이 없어서 보여줄 일이 없는 거지.”
내가 그래플링을 얼마나 잘하는데.
타격이 더 좋고 타격이 더 편할 뿐이지 결코 그라운드가 약한 게 아니라고.
“앗 지랄. 고릴라 같은 힘으로 억지로 잡는 포지션이 실력이냐?”
“사람한테 고릴라라니. 말이 너무 심하시네? 그리고 힘으로든 어쨌든 포지션 잘 잡으면 그게 실력이지.”
“라무차한테 고릴라 드립 친 네가 할 말은 아니야 새꺄. 그리고 태양이는 너처럼 무식한 힘은 없어 인마.”
라무차는 고릴라를 닮았으니까 고릴라라 그런거고.
난 어딜 보나 고릴라가 아닌데 고릴라라고 하니 괜히 기분이 좀 안 좋고 그렇네?
“와. 강해서 선배님은 진짜! 대단하심다!”
“아아. 됐어. 됐어.”
그렇게 나 혼자 일방적으로 여유로운 스파링이 끝나고 난 뒤 태양이는 날 향해 90도로 깍듯한 감사 인사를 해왔다.
“아닙니다! 해서 선배님 아니었으면 이런 스파링 기회도 없었을 겁니다!”
“필승 형한테 고맙다 그래.”
“넵!”
내가 스파링 메이트를 구하기 어려운 것처럼 태양이도 마찬가지로 스파링 파트너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국내엔 세계 수준의 라이트헤비급 격투기 선수가 정말 드물었으니까.
이런 걸 보면 빌리라는 스파링 메이트가 있는 두호 형이 정말 복 받은 거지.
“어? 빌리 쌤한테는 저도 신세 지고 있습니다.”
“엉?”
“이틀에 한 번 정도 저랑 맞잡기 해주십니다. 어후. 그 양반도 힘이 정말 장난 아닙니다.”
“아. 그래?”
“넵. 챔피언과의 스파링이라니. 매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아.”
그래.
빌리는 태양이가 데뷔하는 라이트헤비급의 챔피언이었지.
물론 태양이가 탑 컨텐더가 될 때까지 챔피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가능성은 정말 희박했지만 어쨌든 같은 단체 같은 체급 챔피언과의 스파링이라는 건 여러모로 의미가 남다르겠지.
“해서야!”
짧은 스파링을 마치고 이런저런 스파링에서의 아쉬웠던 부분들을 알려주며 태양이와 피드백을 하고 있는데 체육관 안쪽에서 나온 창섭 형이 날 불렀다.
“넵.”
“안 코치님 호출.”
“넵!”
필승 형은 태양이에게.
기존에 있던 다른 스텝들도 일단은 가장 가까운 두호 형의 스텝으로 대부분 붙어있는 상황.
‘팀 피스트’ 소속 스텝 중에서는 창섭 형만이 거의 유일하게 내 쪽에 남아있었다.
(물론 팀 피스트 스탭을 제외하고도 내 전담팀은 차고 넘쳤기 때문에 별 어려움은 없었다.)
-똑똑.
-들어와.
누구라고 말도 안 했는데 바로 들어오라시는 안 코치님.
“부르셨습니까!”
“어. 앉아봐.”
“넵!”
확실히 복싱 이벤트 매치가 잡힌 이후로 뭔가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그게 결혼식이 미뤄져서인지 아니면 체육관 안에서 내 포지션이 확실해져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심리적으로 꽤나 안정된 건 확실했다.
지난번 사무실을 찾았을 때보다 훨씬 편안하게 소파에 앉을 수 있었으니까.
“준비는 잘 되고 있냐?”
내가 자리에 앉자 서류를 탁. 탁. 정리해서는 양손에 들고 맞은편에 앉으시는 안 코치님.
“뭐. 이제 시작이니까요. 조금씩 스퍼트를 올리려고 하긴 하는데... 하하.”
아무래도 내 전담팀으로 있는 코치진들이 대부분 컨디셔닝/스트렝스/스트라이킹/그래플링 등 MMA에 집중되어 있어 복싱 훈련에 최적화되어있지는 않았다.
그나마 스트라이킹 팀 중에서 복싱을 담당하는 코치가 있긴 했지만 그 정도로는 조금 아쉬운 점이 있긴 했다.
“그 준비 말고. 이번 주말에 웨딩 촬영이라고 안 했어?”
“아아. 넵! 맞습니다!”
코치님이 물어보시길래 당연히 훈련을 이야기하시는 줄 알았다.
웨딩 촬영이라. 안 그래도 오늘 저녁에 아름이와 스튜디오 사전 미팅을 가기로 했다.
촬영 컨셉이나 옷 치수 같은 것들을 미리 협의해놔야 한다나 뭐라나.
“웨딩 촬영 이후로는... 훈련에 집중할 수 있나?”
“어... 넵. 일단 그렇게 이야기는 돼 있습니다.”
“흐음...”
내 대답이 애매했는지 살짝 고민하는 듯 턱을 쓰다듬던 안 코치님.
-탁.
이윽고 손에 준비해뒀던 종이를 내 앞으로 내려두셨다.
“이게 뭐예요?”
“제안서다.”
“제안서요?”
“훈련 제안서.”
훈련 제안서?
그게 뭐지 싶어 얼른 종이를 들어 내용을 확인했다.
“어... 그러니까... 이분... 조지 파울로? 이분이 저한테 훈련 제안서를 보내신 건가요?”
“그래.”
“...”
이런 건 처음 받아봤다.
보통 유명한 코치가 있다고 하면 우리 쪽에서 컨텍해서 스카웃해 데리고 오는 경우는 있었어도 외부 코치가 내게 ‘가르쳐 줄 테니 우리 쪽으로 와서 배워볼래?’라는 식으로 역제안을 해온 적은 없었으니까.
“조지 파울로. WBA 헤비급 챔피언 출신이지. 과거의 복싱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해.”
“저도 들어는 봤어요.”
물론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활동해서 내가 아주 어릴 때 은퇴했던 선수로 알고 있지만 ‘복싱 레전드’ 를 언급할 때 결코 빠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래. 조지 파울로 선수. 현역 시절에도 화려한 커리어를 자랑했지만, 지도자로서도 성공적인 전향을 했지.”
“그런가요?”
은퇴한 복싱 선수의 근황까지 알기에는 내가 이쪽 분야에 너무 관심이 없었다.
종합격투기도 내가 발을 들이면서 알게 되었지 애초에 투기 종목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으니까.
“그래. 조지 파울로의 지도자로서 가장 큰 커리어라고 한다면... 역시 그거겠지.”
“그거라면...”
“카이서스를 발굴해낸 사람이자. 카이서스를 챔피언의 자리까지 이끌며 그 정성기를 만들어줬던 첫 번째 코치.”
“...”
“듣기로는 지금도 카이서스가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는 사람 중 하나라더군.”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긴. 카이서스라고 해서 처음부터 복싱 챔피언이었던 건 아니었겠지.
누군가 그의 재능을 알아봤을 테고 그걸 꽃피워 줬을 거다.
내게 두호 형과 안 코치님이 있었듯 그에게도 멘토와 같은 사람이 있었겠지.
중요한 건.
“그런 사람이 왜 저를... 카이서스도 아니고 그와 대척점에 있는 선수인데...”
“글쎄. 솔직히 나도 그것까지는 알 수가 없어. 물론 여러 가지 추측은 해볼 수 있겠지만 정답은 알 수 없지.”
“흐음...”
“다만. 분명 손해는 아닐 거다. 카이서스와 조지 파울로의 사이가 틀어졌든 아니든. 카이서스도 파울로도 이런 거로 지저분한 짓을 할 사람들은 아닐 테니까. 거기다 그쪽엔 스파링 파트너 구하기도 비교적 쉬울 테고.”
에헤이. 우리 코치님은 사람이 너무 착해.
사람 속은 알 수 없다구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그렇게 쉽게 믿으면 안 됩니다.
“어쩔 테냐?”
“기간은요?”
“전적으로 우리 쪽에 맡기더구나. 웨딩 촬영 끝나고 다음 주쯤 출국하면 어떨까 싶다.”
“뉴욕... 이죠?”
“적혀있는 그대로다. 뉴욕이지.”
뉴욕이라.
애초에 카이서스와의 복싱 이벤트 매치는 매디슨 스퀘어가든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뉴욕에서의 복싱 캠프라.
안 코치님 말마따나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