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딱대격투천재의 탄생-186화 (186/203)

< 186화_깨어난 괴물 >

1.

“그래서? 미루기로 했어?”

“응. 그래야지 뭐.”

손아름은 오랜만에 친언니처럼 친하게 지내는 배우 성아라를 만나 브런치를 즐기며 그간 밀린 수다를 떨고 있었다.

결혼 준비로 바쁘단 핑계를 대며 얼굴 보기가 어려웠는데 강해서의 복싱 이벤트 매치 덕분에 갑자기 여유가 생긴 덕분이었다.

“흐응- 그래도 준비 많이 했었지 않아?”

“준비야 많이 했지. 뭐 그렇다고 결혼식이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니까.”

“하긴. 그렇긴 하지. 이번 이벤트 매치는 해서 씨한테도 엄청 중요한 경기라며?”

“응. 완전 애처럼 들떠있어. 귀여우니까 봐준다 내가.”

성아라는 손아름이 아직 아이돌 활동을 할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언니로 벌써 10년 가까이 가깝게 지내온 사이였다.

연예인 사모임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모임 중 하나. 세계 최정상급 배우이자 할리우드 톱스타인 백경이 주축으로 있는 배우들의 사모임 ‘주인공’의 멤버 중 하나.

“오랜만에 경이 오빠네나 정호 오빠네도 다 보나 했더니.”

“연말에 보면 되지.”

“이번 연말에는 시간 되고? 해서 씨는 데리고 올 수 있어?”

“으음...”

데리고 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이번 복싱 이벤트에서 부상을 입거나 질 수도 있기 때문에 손아름은 그에 관해 확답을 줄 수는 없었다.

“으이그. 그래도 좋다. 오랜만에 여유 나서 이렇게 얼굴 보니까.”

“헤헤. 그치?”

“근데 벌써 추측성 기사들 올라오는 것 같던데.”

“그건 소속사에서 알아서 해줄 거야. 이미 말 해뒀으니까.”

11월 초에 예정되어 있었던 강해서와 손아름의 결혼식이 취소됨에 따라 벌써 소식을 접한 기자들이 추측성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던 것.

최대한 비밀리에 진행했던 결혼 준비였지만 이미 결혼 발표를 공식적으로 했었기에 언론의 눈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래도 대단하다. 결혼식 미루는 결정을 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뭐.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어. 만약 내가 정말 좋은 기회로 할리우드에서 작품을 들어갈 수 있다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봤거든.”

“아아. 그래. 그렇겠네.”

성아라는 아까 손아름이 말했던 ‘결혼식이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라는 말의 뜻을 이제야 확실히 이해했다.

“좋은 작품. 놓치기 싫은 작품. 그런 게 들어온다면 나도 분명 아쉽고 미련 남았을 거야. 그걸 포기하고 결혼식을 선택했어도 계속 생각나겠지. 만약 그 작품이 흥행하고 매체에 계속 나오면 더더욱 그럴 거야.”

“그래. 결혼식은 도망가지 않지만, 작품은 타이밍 놓치면 끝이니까.”

“마찬가지라 생각했어. 이번 시합. 지금이 아니면 안 되니까 해서도 고민하다 말 꺼낸 거겠지. 거기서 결혼식을 선택했으면 해서도 계속해서 미련 남고 생각났을 거야. 신혼부터 그런 모습 보고 싶진 않았거든.”

“흐흠-”

얘가 언제 벌써 이렇게 컸지. 라는 눈빛으로 손아름을 바라보는 성아라.

수명이 다 끝나가던 걸그룹 멤버에서 연기자로 전향하며 많이도 울고, 많이도 방황하던 아이가 이제는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로 깊은 생각을 할 줄 아는 성숙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헤헤. 그리고 이번 일로 시댁에도 점수 좀 따놨지. 어머니랑 아버님이 해서 잡으러 올라온다는 걸 겨우 말렸다구.”

“해서 씨 잡으러?”

“응. 결혼식을 미루고 싸우러 가는 놈이 어딨냐구. 아버님이 엄청 뭐라 하셨어. 헤헤. 아버님이 나 엄청 이뻐하시거든.”

그래도 그 특유의 헤헤거리는 웃음을 잃지 않아서 좋네. 라고 성아라는 생각했다.

“아! 그러면 웨딩 사진은?”

“웨딩은 미리 찍자고 그랬어.”

“잘했어. 근데 그러면 해서 씨는 아직 몰라?”

“으음. 아직 모를걸. 걔 눈치가 좀 없어서.”

“맙소사.”

만약 이번 이벤트 매치에서 지기라도 하면 강해서는 평생 약점 하나 정도는 안고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딸그락.

한창 밀린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들.

“뭐. 더 먹고 싶은 건 없어? 다 시켜. 언니가 다 사줄게.”

“우움. 웨딩 촬영 때문에 살 빼야 하는데... 그러면 나 초코케이크 하나랑...”

초가을.

햇살이 따사롭고 바람이 선선한 어느 평일 낮의 브런치는 이제 시작이었다.

*

“헐! 미친 새끼!”

“이거 도라이 아니냐? 결혼식을 미뤘다고?”

“와. 아름 씨가 보살이다. 어떻게 이런 놈을 데리고 살 생각을 했지?”

결혼식 일정이 변경된 사실을 말했더니 하나같이 쌍욕을 내뱉는 멋진 친구 놈들.

차례로 기태 재현 준현이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카이서스랑 이렇게 좋은 타이밍에 맞붙을 기회가 없다고.”

“카이서스고 나발이고. 없으면 그냥 안 붙으면 되지. 카이서스가 너 늙어 죽을 때 향이라도 하나 피워줄 것 같냐?”

“아. 아름이도 알겠다고 오케이 한 상황이라고.”

“하란다고 다 하냐? 이 새끼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사람 말을 잘 들었다고.”

“...”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거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저항이 심하네.

어째 아름이보다 친구 놈들이 더 열받아 하는 것 같았다.

“아... 강해서 이 새끼... 난 네 결혼식만 믿고 있었는데...”

물론 모두가 아름이를 위해서 화를 내는 건 아니었다.

“결혼식에서 만날 아름 씨 친구들만 믿고 있었는데... 내 연말 물어내 이 자식아!”

재현이 저놈은 내 결혼식보다는 결혼식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에 더 관심이 많은 놈이었다.

“에라이. 너는 친구 결혼식이 밀렸다는데 그러고 싶냐?”

“지금 솔로이신 분들이 연말에 외로워서 남자친구 만들 수도 있잖아!”

“그거랑 너랑 뭔 상관인데.”

“내가 그 남자친구가 될 기회가 날아갔으니까!”

“미친놈.”

다행이다. 재현이 덕분에 기태와 준현이의 화살이 조금 분산되었다.

“휴우. 해서 너한테 이번 이벤트 매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어떤 시합인지는 우리가 이해는 해도 공감은 못 해. 그래도 이건 좀 심했다.”

“그래. 뭐. 어차피 미루기로 한 거면 우리가 입 댈 건 없다지만... 아름 씨한테 잘해라. 진짜. 그런 사람 없다.”

그렇게 한바탕 욕을 먹고 나자 이제야 조금 진정되었는지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주는 기태와 준현이.

“그러면 뭐 식장이랑 이런 거 예약한 건 다 취소한 거야?”

“어. 일단 취소 가능하거나 일정 조정 가능한 건 다 취소하거나 미뤘어. 아! 웨딩 촬영은 그대로 하기로 했고.”

“웨딩촬영?”

“어. 그것도 미루려고 했는데 아름이가 그건 그냥 그대로 하자고 해서 알겠다 했지.”

원래는 웨딩 촬영도 시합 이후로 미루려고 했다.

아무래도 시합 준비 모드로 훈련에 들어가면 웨딩촬영 일정을 빼기가 빠듯했으니까.

한두 시간 걸리는 것도 아니고 거의 하루를 통째로 비워야 하는 게 웨딩촬영이었다.

“그래? 보통 웨딩촬영할 때 신부 친구들 오고 그러지 않냐?”

“...글쎄?”

“그럼 나 너 웨딩촬영 때 구경가도 되냐?”

“아. 꺼져.”

재현이 이놈은 아직도 미련이 남았는지 영양가 없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뭐. 웨딩 촬영이야 그대로 하고 싶을 수도 있지. 해서 너 시합에서 부상입거나 얼굴이 붓거나 하면 바로 웨딩촬영은 못 할 거 아냐.”

“그건 그렇지. 일단 아름이가 많이 양보해줘서 그 부분은 나도 두말않고 오케이 했어.”

“웨딩 촬영은 언젠데?”

“다음 주. 원래 다다음주였는데 차라리 빨리 당겨버렸어. 그래야 훈련에 집중하니까.”

준현이는 본인도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 보니 꽤나 본격적으로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기태 놈이야 이제 유나랑 막 만나기 시작하는 타이밍인 듯했는데 유나의 나이가 아직 어리다 보니 결혼이야기는 입도 못 떼고 있는 듯했다. 거기다 기태도 이제야 밴드로 겨우 자리 잡아가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아! 나는 이미 모든 게 준비됐다고. 외모. 매너. 직장. 경제력! 모든 게 다!”

“응. 넌 개념이 준비 안 돼서 안 됨.”

유일한 솔로 재현이만 열심히 본인 어필을 해봤지만 어림도 없었다.

어딜 우리 아름이 친구들한테 껄떡거리려고.

“여튼. 잘해라. 아름 씨한테. 그리고 이왕 하기로 한 거 절대 지지 말고.”

“근데 카이서스한테 절대 지지 않을 수가 있나? 와... 진짜 내 친구가 그 카이서스랑 붙는다니. 난 아직도 약간 꿈같아. 실감이 안 난다야.”

“근데 그건 나도 동감. 해서 이 새끼가 어쩌다 카이서스랑 복싱 매치를 하는거지? 카이서스가 지는 모습도 상상 안 되고 해서 저 새끼가 지는 모습도 상상이 안 되는데.”

아름이와 결혼 이야기로 시작해서 어느새 카이서스와의 이벤트 매치로 주제가 넘어간 친구 놈들.

결혼 일정 변동을 알리기 위해 뭉친 자리였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자리는 해가 저물도록 주제를 바꿔가며 끝나지 않았다.

“야! 아름이 온대! 다 와 간대! 꺼져! 빨리 꺼져!”

아름이가 오기 전까지는.

2.

-미스터 갓- 강해서! 카이서스와의 결전?

-지상 최대의 결전! 인류 최강을 가린다! 카이서스 Vs. 강해서!

-강해서&손아름. 결혼을 미룬 이유는? 손-강 커플 불화설?

-풍성한 연말 격투 이벤트! 11월 최두호 선수의 WFC 미들급 타이틀전에 이어 12월은 카이서스와 강해서의 복싱 결전!

-종합격투기를 제패한 갓해서! 이제는 복싱이다? 위대한 챔피언! 황제 카이서스를 향해 쏴라!

-전 WFC 헤비급 챔피언 라무차. ‘강해서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괴물 같은 선수. 아무리 카이서스라도 긴장해야 할 것.’

-해외 복싱 커뮤니티. ‘강해서? 듣도보도 못한 얼간이. 카이서스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저 황제의 연말 전용 샌드백일 뿐.’

-한국 종합격투기의 명문 ‘팀 피스트’ 소속 정태양 선수. WFC로 이적하며 라이트헤비급으로 체증!

-WFC 소속 파이터만 셋. 그 중 두 명이 챔피언? 격투기 명문 ‘팀 피스트’를 파헤치다!

┗헐. ㅇㄱㄹㅇ임?

┗진짜? 진짜 강해서랑 카이서스랑 붙는다고?

┗와... 진짜 이건 세계관 최강자들끼리의 싸움 아니냐?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 게 전혀 상상이 안 된다. 카이서스가 쓰러지는 것도. 강해서가 쓰러지는 것도.

┗ㄴㄴ 난 강해서 쓰러지는 건 상상되는데? 미첼 전도 그렇고 라무차 1차전도 그렇고. 강해서는 위험한 장면 연출된 적 많았음

┗ㅈㄹ 강해서 경력을 보고 말 해ㅋㅋㅋㅋㅋ 이제 5년 차에 이정도 커리어면 그냥 미친거임. 카이서스도 초창기엔 위태한 경기 많았음.

┗ㅇㅇ 맞음. 카이서스가 지금에서야 워낙 압도적이니까 잊고들 있지만 카이서스도 데뷔 초반에 랭커들 만났을 때는 위험한 경기들 있었음.

┗말 잘했네. 카이서스는 예전에 위태로웠고 강해서는 최근에 위태로웠음. 자. 그럼 누가 더 유리하지?

┗지랄ㄴ 라무차도 그냥 괴물새끼임. 카이서스라도 라무차랑 싸우면 위험한 장면 나올걸? 그리고 2차전에서는 강해서 라무차 21초만에 떡바름.

┗응~ 그건 니 뇌피셜~ 실제로는 카이서스가 라무차 만나면 10초컷!

강해서와 카이서스의 연말 복싱 이벤트 매치가 오피셜 기사로 뜨자 인터넷에서는 나라를 막론하고 매치의 승자를 점치는 사람들의 언쟁이 뜨거웠다.

그리고 그런 소요를 발생시킨 장본인이 훈련 중인 라스베이거스 카이서스의 체육관.

“...맙소사.”

텔론 회장과의 매치 프로모션에 관한 내용을 조율하느라. WBC 회장과의 이번 복싱 이벤트의 후원 및 매출에 관한 내용을 조율하느라. 이런저런 바쁜 일정 덕분에 오랜만에 체육관을 찾은 카이서스의 프로모터 켄달은 입을 떡 벌린 채 ‘맙소사’ 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오! 켄달. 왔어?”

크지 않은 체육관 내에 설치된 사각 링.

그 위에서 카이서스는 아주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켄달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맙소사... 카이서스. 내가 방금 뭘 본 거야?”

“뭘 보긴. 내 스파링 훈련을 본거지.”

“...세상에 이런 스파링이 어디 있단 말이야?”

켄달이 오랜만에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와서 처음 본 상황.

그건 켄달에게 너무 익숙한 세계 랭커급 복서들에 둘러싸여 있는 카이서스였다.

3명의 복서에게 둘러싸인 채 쏟아지는 펀치 세례 속에서 단 한대의 클린 히트도 허용하지 않으며 그들 모두를 다운시킨 카이서스. 그렇게 총 9명의 미들급부터 헤비급까지 다양한 랭커들이 쓰러질 때까지 카이서스는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깔끔한 모습으로 스파링을 끝냈다.

“이거. 내가 완전 잘못 생각했구만.”

이런 카이서스가 강해서에게 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니.

전성기 그 이상의 컨디션을 만들어가고 있는 카이서스. 그를 마주한 켄달은 지금껏 누구도 카이서스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가장 가까이 지냈던 켄달 자신도. 어쩌면 카이서스 본인 스스로도.

“어처구니없는 괴물을 깨워버렸어. 미스터 강.”

그리고 제대로 깨어난 괴물은 지난 세월 웅크리고 있었던 만큼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발전 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