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딱대격투천재의 탄생-185화 (185/203)

< 185화_이벤트 매치 >

1.

“더! 더 밀어붙여!”

“허리 세우고! 힘 빼지 말고!”

“겨드랑이를 파! 돌아 나오고!”

어느덧 한여름의 열기가 한풀 꺾인 날씨.

그럼에도 한낮의 무더위는 지난여름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고 우리 ‘팀 피스트’의 체육관은 그보다 더 뜨거운 열정을 발산하고 있었다.

특히 빌리는 단순 스파링 메이트 합류 외에도 두호 형의 훈련 전반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라면 거절하지 않고 나서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이게 큰 도움이 됐다.

“한국에는 저런 피지컬을 찾기가 어려우니까 말이야.”

혼자 쪼그리고 앉아 두호 형의 훈련을 지켜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자니 필승 형이 다가와 말을 받아줬다.

“뭐. 그건 그렇죠.”

그중 빌리의 합류로 가장 많은 도움이 된 건 역시 그라운드 훈련이었다.

빌리는 원래 미들급에서 활약하다가 라이트헤비급으로 체증을 한 만큼 몸 사이즈 자체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물론 나도 미들급부터 시작했다지만 나는 애초부터 키와 뼈대가 컸다. 그래서 어느 정도 근육이 붙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도저히 미들급을 유지할 수가 없었고.

“학센과의 3차전은 아무래도 그라운드로 풀리게 될 거야.”

“그게 제일 확실하죠. 타격만 견제할 수 있으면.”

두호 형이 학센보다 확실히 유리한 부분은 힘과 노련함이었다.

타격은 변수가 너무 많고 또 한 살이라도 더 어린 학센에게 유리할 수 있었다.

안정적이고 확실한 승기를 가져갈 수 있는 건 역시 그래플링.

“근데 맞잡기에 너나 태양이는 너무 커서 문제였지.”

“형은 상대가 안되고요.”

“아놔. 나도 다시 바짝 운동하면...”

“예이. 예이.”

잠정 은퇴였던 두호 형과는 달리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던 필승 형은 은퇴 이후 이렇다 할 운동이나 훈련을 지속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온몸에 군살도 많이 붙었고 어느새 배도 나오고 있었기에 두호 형의 그래플링 훈련을 도와주기엔 무리가 있었다.

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시합 상대 선수와 비슷한 테크닉이나 체구를 가진 훈련 상대를 만나는 것이었다.

나와 태양이는 학센보다 너무 컸고, 필승 형이나 창섭 형은 두호 형에 비해 힘이 너무 떨어졌다. 두호 형의 근력도 미들급의 기준은 한참 벗어나 있었으니까.

“여튼. 몸 두께나 파워는 차이 난다지만... 그래도 학센과 덩치가 비슷한 빌리가 도와줘서 정말 다행이지.”

“그건 그래요.”

체육관 한편에 쪼그리고 앉아서 두호 형과 빌리의 맞잡기 훈련을 지켜보며 필승 형과 이런저런 잡담을 나눴다.

사실 요즘 내 일과는 한량과 비슷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천천히 체육관에 출근 도장 찍고 가볍게 몸만 풀어준 뒤 아름이를 만나거나 아니면 두호 형의 훈련을 도와줬다.

물론 지난 라무차와의 2차전 이후 광고나 방송 출연 등 정말 많은 섭외 요청이 빗발쳤었다.

다만 그 모든 건 결혼식 이후로 미뤄뒀다.

괜히 결혼식 이전에 구설수가 생기거나 이미지 소비를 하며 대중에 노출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안 코치님이 찾더라.”

“그럼 그걸 먼저 말 해줬어야죠.”

중요한 용건을 놔두고 영양가 없는 혼잣말에 맞장구쳐주다니.

역시 이 형은 말이 너무 많아.

“읏-차!”

너무 오래 쪼그리고 앉아있었나. 다리가 살짝 저렸다.

“오랜만에 네가 중심이 아닌 채 바쁘게 돌아가는 체육관이지? 어때?”

자리에 일어서 다리를 툭툭 풀고 있으려니 필승 형이 빙긋 웃으며 물어왔다.

왠지 저 웃음 킹받네...

“어떻긴요. 너무 좋구만.”

“할 게 없어서 서운하진 않고?”

“서운하긴. 애도 아니고. 결혼 준비하느라 머리 빠개질 것 같거든요? 아! 형은 아직 안 해봤으니 모르려나.”

“뭐? 이 새끼가?”

“어이쿠! 안 코치님한테 가야지!”

나는 필승 형의 발작 버튼을 살짝 눌러준 뒤 체육관 안쪽 안 코치님의 사무실로 도망쳤다.

‘할 게 없다라.’

사실 서운한 건 진짜 없었지만 할 게 없다는 필승 형의 말에는 어느 정도 공감했다.

이벤트가 잡히고 훈련을 지속할 때는 매일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나갈 때까지 해야 할 훈련들이 빡빡했다.

모든 스텝들의 업무는 날 위주로 돌아갔고. 그런데 지금은 할 게 없어 체육관을 나와 시간을 죽이는 느낌이랄까.

또 스타병이나 이런 게 도졌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선수로서 훈련을 하지 않는 내 위치는 체육관 내에서 꽤나 애매한 곳에 있다는 이야기였다.

누구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존중하며 개인 시간을 터치하지 않다 보니 막말로 조금 심심하달까.

-똑똑.

“코치님- 저 해섭니다.”

-들어와.

그런 와중에 안 코치님의 호출이라니. 무슨 일일까 싶었다.

“어. 들어왔으면 앉아라.”

“넵!”

일단 그리 가벼운 용건은 아닌 것 같았다.

소파에 앉으면 기본 10분 이상이었으니까.

“결혼 준비는 잘 돼 가고 있냐?”

“엄... 글쎄요?”

저는 하라는 대로 하는 머슴이라서요...

아름이만 즐거우면 됐죠. 뭐...

“11월 첫 주라 그랬지?”

“넵!”

덕분에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체육관에서는 할 짓 없는 한량으로. 체육관 밖에서는 결혼 준비로 정신없는 예비 신랑으로.

갭이 너무 크달까?

“일단... 들어온 거니 읽어봐라.”

본인 책상에서 일어나 내 맞은편 소파에 앉으시며 한 장의 종이를 건네는 안 코치님.

“이게...?”

“이벤트 제안서다.”

“...”

이벤트 제안서.

정확히는 카이서스와의 복싱 이벤트 매치 제안서였다.

“일단 최대한 미뤄보려고 말을 하긴 했는데. 카이서스의 방어전 일정 때문에 더 늦출 수가 없다는 입장이야.”

“흐음...”

복싱은 종합격투기와는 달리 협회에서 지정한 기간 내에 의무적으로 방어전을 가져야 하는 규칙이 있었다.

물론 이 규칙은 타이틀 획득 이후 방어전을 피해 챔피언 자리만 지키려고 하는 선수들을 견제하기 위한 내용이었고, 그러다보니 그 안에는 ‘협회가 도전자를 지목할 경우 반드시 해당 선수와의 방어전을 치러야 한다’는 조항 등도 있을 정도였다.

챔피언이 일부러 이길 수 있는 약한 선수들만 방어전 상대로 지목할 수도 있으니까.

“중요한 건. 카이서스의 의무 방어전 기간이 12월까지라는 거죠?”

“그래. 협회에서 지목한 도전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WBC 회장이 ‘타이틀 매치’로 공식 인정한 만큼 이번 복싱 이벤트 매치로 카이서스도 방어전을 대체할 수 있다고 하는 군.”

타이틀을 지키기 위해 방어전을 미루거나 만만한 선수만 지목하는 그런 선수들과 전혀 다른 문제로 방어전에 골머리를 썩이기는 카이서스.

앞서 언급한 경우와는 달리 카이서스는 도전자가 없어 방어전을 치르는데 곤욕을 치르는 케이스였다.

매치의 섭외와 구성. 이벤트의 개최와 상대 선수의 파이트머니까지 모두 카이서스 측에서 부담한다고 해도 도전자 구하기가 가장 어렵다는 카이서스의 프로모터 켄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어렵겠지?”

“흐음... 사실 이건 제가 당장 대답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어서요.”

제안서에 적혀있는 카이서스와의 이벤트 매치업 날짜는 12월 둘째 주 주말.

연말 중의 연말이며 성탄절 직전에 가장 큰 빅 매치를 성사하기 딱 좋은 날이긴 했다.

내 결혼식만 아니라면 말이지.

“그렇지. 일단 네가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불렀다.”

“넵. 알고는 있어야죠.”

“그... 안될 것 같으면 아예 말을 꺼내지 마라.”

“...네?”

“아름 씨한테 말이야. 승산 없어 보이면 그냥 재껴버려. 카이서스 쪽에는 대충 아무나 데려다 놓고 방어전 치르라고 하면 되니까.”

시합을 뒷전으로 한 채 아름이와의 관계를 먼저 챙겨주시는 안 코치님.

이런 모습은 또 처음이라 색다르기도 했고 뭔가 감동이기도 했다.

“해서야.”

“넵!”

“이건 코치가 아니라 인생 선배로서 해주는 조언이야. 잘 들어.”

“넵.”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는데 허락을 구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잖아?”

“네.”

“그런데 그 허락이 떨어질 확률이 낮아 보이면... 그냥 포기해. 찔러보지도 마.”

“...네?”

“결국, 원하는 건 원하는 대로 못 하고. 찔러봤다는 이유로 바가지만 긁힐 테니까 말이야.”

“...”

우리 코치님. 혹시 사모님한테 바가지를 많이 긁히시는 편인가...?

“그래도 만약에 말이야. 정말 만약에. 꼭 하고 싶은데 마누라가 허락을 안 해줄 것 같다! 그럴 땐!”

“그, 그럴 땐?”

“그냥 질러버려.”

“...네?”

“허락보단 용서가 쉽거든. 일단 지르면 며칠이 힘들지만 어쨌든 원하는 바는 이루게 되니까 말이야.”

“...”

“대신 물건이나 그런 건 사지 마라. 요즘은 그 뭐냐. 당근마켓인가 뭔가. 그걸로 다 갖다 팔더라.”

“...경험담이신가요?”

“... 백만 원이 넘는 내 드론이 반의반 값도 못 받고 팔린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었지... 그때 그걸 30만 원 주고 샀다고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어...”

“...”

처음으로 안 코치님이 짠해 보였다.

그나저나. 중고 거래 앱 이름이 당근마켓이라니. 이름부터 유부남을 기만하는 어플인가...!

-당근! 당근!

“응? 무슨 소리냐?”

“아아. 아름이한테 톡이 왔나 봐요. 마침 스케줄 끝났다네요. 일단 오늘 만나면 한번 이야기는 해볼게요.”

“누누이 말하지만.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으면 그냥 말도 꺼내지 말아라. 괜히 힘들어진다.”

“하하. 괜찮아요.”

우리 아름이는 착하고 사려 깊은 애라 이런 거 가지고 뭐라 할 사람이 아니거든요.

*

-슥슥. 깡!

-화들짝!

-찌릿!

“...”

간만에 평일 낮에 스케줄을 마친 아름이와 식사를 하기 위해 들린 홍대의 한 분위기 좋은 스테이크 하우스.

분명 처음에는 분위기가 좋았는데 지금은 뭔가 살벌했다.

-슥. 슥. 깡!

-화들짝!

조용히 고기 써는 소리와 칼이 접시에 부딪치는 소리만이 가득한 공간.

칼과 접시가 만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깜짝깜짝 놀라고 있었다.

이런 것 가지고 뭐라 할 사람 아니기는. 충분히 뭐라 할 사람이었다. 우리 아름이는.

“뭘 그렇게 놀라? 세계 챔피언이 이런 거 가지고 놀라면 돼?”

“세계 챔피언이 아니라 WFC 챔피... 아니. 세계 챔피언이야. WFC 챔피언이면 세계 챔피언이지 뭐.”

무슨 눈빛이 라무차보다 살벌하냐.

표현의 오류를 정정하려다 내가 정정할 때 죽을 뻔했다.

“그래서. 12월 둘째 주 시합을. 뭐. 하겠다고?”

“아니. 그냥 그 제안서가 들어왔다. 그런 이야기지.”

“그게 그거 아냐? 할 생각이 없으면 네 선에서 정리해야 할 내용이 지금 이 자리까지 왔다는 건 넌 하고 싶다는 거 아냐?”

“...”

그게 또 그렇게 됩니까 판사님?

저는 진짜 그런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안건이니 함께 의논을 해보자. 뭐 그런 의미로다가...

“그래서. 자기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나? 어... 그, 글쎄?”

“여기서 글쎄라는 대답이 나오는 것 자체가 그냥 하고 싶다는 이야기 아냐?”

아니지!

글쎄는 그냥 글쎄야! 하고 싶었으면 하고 싶었다고 했겠지... 글쎄는 그냥 글쎄일 뿐이라니까? JUST 글쎄!

“자기 생각은 그거야. 하면 좋을 것 같긴 한데 하고 싶다고 말하면 욕먹을 것 같고. 그렇다고 자기 선에서 끊어내자니 미련 남고. 그러니 은근슬쩍 나한테 들이밀면서 ‘이거 어떻게 할까?’ 라는 물음으로 긍정적인 대답을 강요하는 거잖아.”

“...우리 아름이 말 되게 잘 한다아. 딕션도 좋고. 배우라서 그런가?”

“말 돌리지 말고.”

“...넵.”

아름이의 말을 듣고 보니 분명 그런 의도가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연말. 그것도 일 년 중 가장 큰 무대에서 카이서스와의 이벤트 매치라니.

지금부터 준비하면 약 3개월. 빠듯하긴 하지만 절대 부족하지 않은 준비 기간이기도 했다.

만약 결혼식만 아니었다면 두말하지 않고 오케이를 외쳤을 상황.

하지만 결혼식 날짜도 벌써 나왔고 결혼은 나 혼자 하는 게 아니었으니 이젠 내 마음대로 정할 수는 없었다.

“내가 미쳐. 진짜...”

“아. 아니야. 내년에 해도 돼. 이벤트 경기야 뭐. 꼭 카이서스랑 붙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인연이 안되면 어쩔 수 없지.”

내 인연은 아름이 너뿐이니까.

“됐거든요. 지금 자기 눈빛이 완전 하고싶다는 눈빛이거든요.”

...그런가?

솔직히 이번 타이밍을 놓치면 또 카이서스와의 이벤트 매치가 언제 성사될지 알 수 없었기에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있었다.

그래도 결혼식보다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 그깟 이벤트 매치쯤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었다.

“진짜야. 진짜 안 해도 돼. 미안해. 이런 큰 결정을 너한테 미뤄서.”

“...으이그.”

이제 와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무책임했다.

지금 내 행동은 카이서스와의 시합과 결혼식. 이 둘 사이의 선택지를 그냥 아름이에게 미뤄버린 것밖에 안 되었다.

카이서스와의 시합을 준비하려면 아무래도 결혼식은 뒤로 미뤄야 할 상황이었다.

이미 식장까지 다 예약하고 웨딩 촬영 일정까지 모두 잡혀있는데 너무 내 생각만 했어.

-뚜루루. 뚜루루.

그때 어디론가 전화하는 아름이.

“름아. 뭐 해?”

“뭐하긴. 청첩장 나왔나 확인하려고 전화하지. 오늘 오후나 내일 오전에 나온다고 했단 말이야.”

“...어?”

“우리가 돈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쓸데없는 돈까지 쓸 필요는 없잖아. 최대한 취소할 수 있는 건 취소해야지. 뭐래? 자긴 웨딩홀 전화해 봐.”

“어? 어어. 알겠어!”

이거 분명 허락 맞지?

스텐스가 살짝 애매하긴 했지만. 일단 허락해준 거 맞지?

그럼 나 제안서에 오케이 해도 되는 거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