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딱대격투천재의 탄생-184화 (184/203)

< 184화_스파링? >

1.

빌리.

풀 네임은 빌리 잭슨.

현 WFC 라이트헤비급의 잠정 챔피언이자 나와는 이런저런 얽힌 이야기가 있는 선수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다고 이렇게 막 찾아오냐.”

도대체 얘가 왜 한국에. 그것도 내 눈앞에 있는지 모르겠다.

“꼭 한번 보고 싶었어.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잠정 챔피언까지 먹어놓고도 애가 살짝 모자란 듯한 건 여전하네.

그래서. 한국까지 찾은 이유가 대체 뭐야? 설마하니 라이트헤비급 챔피언 결정전을 갖자고 부탁하러 온 건 아닐 거 아냐.

“하하. 아니야. 설마 그런 생떼를 쓰러 왔겠어.”

혹시나 하고 물어봤는데 역시나 아니라며 씁쓸하게 웃는 빌리.

그러면 대체 왜 온 거야? 관광차 왔니?

“... 클락이 지난달 나왔어.”

“엉?”

“클락.”

클락이 누군...

“아아! 빌리! 네 형!”

“그래. 맞아.”

흐음.

딱히 내가 잘못한 일은 없지만, 괜히 불편했다.

이러든 저러든 내가 잡아서 감방에 넣었던 사람이 출소했다니. 그리고 그 소식을 그 사람의 친동생에게 듣다니.

“오해는 하지 마. 클락도 나도 감사하고 있어. 미스터 강.”

내 표정이 미묘하게 굳는 걸 봤을까. 빌리는 오해하지 말라며 손사래를 치며 부연 설명을 더 했다.

“당시 클락을 그대로 뒀으면 정말 더 큰 사고를 쳤을 수도 있으니까. 다행히 복역 중에 심리 치료도 받으며 지금은 아주 많이 나아졌어.”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그런데. 그러면 넌 진짜 왜 온 거냐?

빌리가 나와의 시합을 원했던 기저에는 친형인 클락의 그늘이 있었다.

클락을 제압했던 나와의 일전을 통해 그 형을 뛰어넘고 한명의 파이터로서 자존감을 찾고자 했던 것.

그런데 이제 클락이 출소했고 빌리는 원한다면 언제든 그와 시합을 가질 수 있을 터였다.

“... 시합을 원해서 온 건 아니야. 다만... 지난번 미스터 강 네가 브라이언과 했던 것처럼 가벼운 스파링을 한번 요청할 수 있을까 하는 게 목적이야.”

“스파링이 시합이지. 브라이언이랑 했던 스파링은 거의 전력을 다한 스파링이었다고.”

“어려울까?”

“끄응...”

어렵고 자시고를 떠나서 일단 빌리와 나는 체급부터가 달랐다.

지금 내 평체는 지난 라무차와의 2차전에서와 마찬가지인 110킬로 초반대.

그에 반해 지금 빌리의 체중은 비시즌 평체인걸 감안해도 100킬로 초반대를 넘기진 않을 것 같았다.

“그런 건 괜찮아. 어차피 이건 이기기 위한 스파링은 아니니까.”

“그냥 얻어맞고 싶어서 하는 스파링이면 딴 데 가서 알아봐. 맞는 건 취미 없다지만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때리는 취미도 없으니까.”

“미스터 강. 널 찾기 전에 브라이언을 먼저 찾아갔었어.”

“브라이언을?”

하긴. 브라이언은 빌리와 같은 라이트헤비급이긴 하지.

그렇다곤 하더라도 빌리와 브라이언은 딱히 이렇다 할 접점이 없을 텐데?

“서로 안면 정도야 있지. 사정을 말하고 스파링을 신청했더니 흔쾌히 받아줬어.”

“그러니까. 그 사정이 대체 뭔데?”

“한명의 파이터로서 내 위치를 잡는 것.”

“그 위치를 왜 남한테 잡아달라고 그러냐고. 본인 위치는 스스로 잡지 않으면 안 되잖아?”

“...”

내 대답에 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꽤나 오랫동안 침묵을 유지하는 빌리.

아마 할 대답이 없거나, 혹은 그 대답이 너무 어리광 같은 대답이라 입 밖으로 내뱉지 못 하는거겠지.

“한번 붙어줘라.”

그렇게 빌리가 침묵을 지키는 동안 뒤에서 들려온 두호 형의 목소리.

“네?”

“세상 모든 일이라는 게 생각한 것처럼 쉬우면 얼마나 좋겠냐.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으면 딱 공부하고. 헤어지고 잊기로 마음먹었으면 바로 잊어지고.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거. 알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냥 스파링일 뿐이야. 가벼운 스파링. 너튜브 콘텐츠나 아니면 태양이의 지도 스파링 정도라고 생각해.”

“끄응...”

스파링 자체야 어려울 게 전혀 없었다.

빌리가 어떤 각오를 가지고 있든 간에 압도적인 모습을 보일 자신이 있었으니까.

다만 빌리의 저 답답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

“사람마다 사정이나 내면 상태는 다 달라. 어려운 게 아니라면 해줘라. 그래도 여기까지 왔잖냐.”

“...하.”

빌리는 한국어를 하지는 못하지만 대충 분위기를 보고는 그냥 열심히 가만히 있으면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눈치를 보며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툭

그 모습이 정말 한대 쥐어박고 싶어서 스파링용 글러브를 빌리에게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그거 끼고 따라 나와.”

맞고 싶으면 맞아야지.

그래. 세상에는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놈들이 있으니까.

*

-꾸욱. 꾸욱.

빌리는 아주 정성 들여서. 꽤나 오랜 시간 몸을 풀었다.

-꿈틀. 꿈틀.

그에 따라 그의 몸을 뒤덮고 있는 근육들 또한 기지개를 켜며 조금 후 있을 스파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미스터 강...’

처음에는 그에 대한 증오심이나 복수심이었다.

형인 클락을 패대기치고 감옥에 잡아넣은 원수.

한때는 복수하기 위해 TWF의 코치로 참여해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씻을 수 없는 잘못된 선택을 할 뻔한 적도 있었다.

-툭. 툭.

“다 됐냐? 부탁하는 놈이 뭐 이렇게 늦어?”

링에 올라 빌리를 향해 손을 까딱거리는 강해서.

빌리는 그런 그를 보면서 처음으로 씁쓸한 웃음이 아닌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다 됐어.”

이제는 복수나 증오가 아닌 그저 같은 길을 걷는 격투기 선수로서 순수하게 그와 겨루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한때는 같은 미들급과 라이트헤비급에 있었던 강해서.

미들급에 있을 당시 빌리는 그다지 주목받는 선수가 아니었지만, 클락이 체포된 이후 형의 체급인 라이트헤비급으로 체증을 하여 승승장구하며 커리어를 쌓았다.

하지만 끝내 강해서와의 이벤트는 무산되었고 강해서는 헤비급으로 체급을 다시 한번 올리며 두 사람이 서로 주먹을 마주하는 순간은 오지 않는 듯했다.

‘이렇게라도 붙어볼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그렇기에 빌리는 직접 한국을 찾았다.

강해서는 이미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릴 정도로 압도적인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는 선수.

훗날 지금의 카이서스보다 더욱 대단한 선수가 되었을 때 오늘의 스파링은 영광스러운 기억으로 추억될 것이다.

“뭘 멍하니 서 있어? 3분 2라운드. 물론 네가 버틸 수 있다면. 오케이?”

빌리의 막무가내식 스파링 요청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꽤나 삐딱한 뉘앙스의 강해서.

“오케이. 걱정 말라고.”

빌리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온몸의 근육을 일깨웠다.

미들급에서 라이트헤비급으로 증량하며 찾은 자신의 베스트 컨디션.

하지만 정확히는 92킬로그램의 제한이 있는 라이트헤비급보다는 100킬로그램 초반의 평체일 때가 빌리의 베스트 퍼포먼스 체중이었다.

‘그게 바로 지금이고.’

강해서와의 스파링을 위해 한국을 찾기 위해 빌리는 나름대로 많은 준비를 거쳐야 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파이터가 될 수도 있는 선수를 상대하러 가는 길.

받아줄지 안 받아줄지도 모르는 스파링이었지만 빌리는 라이트헤비급 타이틀전 이상으로 진지하게 이번 스파링을 준비했었다.

-꾸득. 꾸득.

-꿈틀.

그 반증으로 100킬로를 훌쩍 넘는 체중임에도 라이트헤비급 시합 때보다 더욱 선명하고 위협적인 근육들.

라이트 헤비급에서도 체급을 뛰어넘는 펀치력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랭킹 1위 핸콕을 꺾고 챔피언 자리를 거머쥐었다. 지금은 그때보다도 10킬로그램 이상 증량한 상태. 아무리 강해서라도 제대로 맞기만 한다면 충분히 유의미한 데미지를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삐!

옥타곤과는 전혀 다른 너른 스파링용 사각 링.

빌리는 스파링을 알리는 신호음과 함께 글러브 터치를 위해 링 중앙으로 나서며 강해서를 바라봤다.

-오싹!

‘... 무슨 눈이...’

조금 전까지 귀찮다는 기색이 가득했던 표정은 사라지고 없었다.

단순히 글러브 터치를 하기 위해 다가서는 것뿐임에도 마치 맹수 우리에 맨몸으로 들어가는 느낌.

‘이거. 1라운드도 못 버틸 수 있겠는데.’

유의미한 데미지를 주는 건 고사하고 그의 근육과 맷집으로도 1라운드를 버티지 못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지금 빌리 눈앞의 강해서는 스파링 전과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전혀 다른 위압감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꾸욱.

-퉁!

하지만 열 시간을 넘게 날아 도착한 한국.

그곳에서 마주하는 어느새 동경하게 되어버린 선수와의 스파링을 고작 그런 이유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시금 글러브 속 주먹을 꽉 쥐고 전진 스텝을 밟는 빌리.

-후웅!

-휘익!

전력을 다한 스파링을 하기로 한 만큼 빌리는 진심으로 덤볐다.

아무리 전력 스파링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전력의 60-70프로정도를 사용하는 게 보편적이라면 이 순간 빌리는 정말 100프로 메인 이벤트 시합 때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덤벼들었다.

“좋은데?”

빌리의 앞 손 견제를 여유롭게 휙휙 피해내며 입을 여는 강해서.

-까득

-후우웅!

그의 여유를 보며 빌리는 방어를 도외시하며 그를 향해 라이트 펀치를 휘둘렀다.

-뻐어억!

빌리는 이번에도 당연히 피해내겠지 싶었지만 어쩐 일인지 주먹에 걸리는 감촉이 제대로였다.

‘됐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제대로 된 손맛이었다.

“와우. 타격이 좋네 확실히. 몸이 심상치 않다 했더니. 같은 체급에선 이런 펀치 버텨내는 선수가 없겠어 확실히.”

하지만 빌리의 주먹이 꽂힌 건 강해서의 안면이 아니라 그의 왼팔 가드 위였다.

“솔직히 말해서. 라이트헤비급에서는 브라이언 정도가 아니면 상대가 없을 법 하겠어. 헨더슨보다도 움직임이 좋아.”

“...”

“그래도 말이야.”

아무리 스파링 도중이라지만 이렇게 말을 많이 하다니.

빌리는 발끈하며 다시금 강해서를 향해 펀치 컴비네이션으로 시선을 돌리며 그의 왼 다리를 향해 레그킥을 뻗었다.

-휙. 휘익!

-쉬이이익!

하지만 빌리의 펀치 컴비네이션은 강해서의 가벼운 상체 움직임에 모두 헛손질이 되었고 그의 오른발 레그킥 또한 뜻한 바를 이루지 못 한 체 허공을 훑을 뿐이었다.

-툭.

그의 오른발 레그킥이 미처 회수되기도 전.

어느새 강해서는 빌리에게 바짝 붙어 그의 왼 다리를 툭 차버렸다.

-휘청!

‘무슨 움직임이... 헤비급 맞나?’

분명 빌리의 타격 거리 밖으로 몸을 피했던 강해서가 눈 깜짝할 사이 폭발적인 스피드로 달라붙은 상황. 빌리는 몸을 지탱하던 왼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걸 느끼며 순간적으로 세상이 뒤집히는 착각을 경험했다.

“나한테 비빌 정도는 아니라고.”

-뻐어억!

-퍼억!

왼 다리가 무너지며 균형을 잃고 있는 빌리의 복부에 깊이 꽂히는 강해서의 레프트 바디. 그리고 그 충격에 활짝 열린 채 내려오는 빌리의 턱을 뒤흔드는 강해서의 라이트 훅.

빌리는 그렇게 자신이 어떻게 쓰러졌는지도 모른 채 스파링 1라운드가 시작된 지 채 얼마 되지도 않아 의식을 잃고 말았다.

**

-쿠웅!

턱주가리 한 대 맞고는 그대로 곱게 바닥에 쓰러져 주무시는 빌리.

그래도 현역 선수라 큰 데미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집중 모드까지 써가며 때려줬다.

그냥 막 때렸다가 잘못되면 큰일 나니까.

“너무 심한 거 아니냐?”

“심하긴요.”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좀 어울려줄까 싶어 펀치 한대를 받아줘 봤는데 장난이 아니었다.

WFC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은 고스톱으로 딴 게 아니듯 빌리의 실력은 진짜였다. 적어도 그의 펀치력은 이제껏 내가 상대했던 선수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그의 몸과 목 근육 등으로 봤을 때 맷집 또한 보통이 아닐 듯했다.

이렇게 한방에 기절시키지 않았다면 꽤나 많은 데미지를 주고 나서야 스파링이 끝났을 테고 그렇게 되면 혹시나 모를 후유증이 생길지도 몰랐다.

그래도 현역 파이터에다 챔피언인데 스파링 데미지로 후유증이 생기게 할 순 없었다.

“크윽...”

벌써 정신을 차렸는지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서는 빌리.

확실히 맷집이 좋긴 좋구나 싶었다.

“내가 의식을 잃었었나?”

“너 코 골더라. 푹 잤냐?”

“... 푸하하하하.”

아주 시원하게 웃는 빌리.

쟤가 저렇게까지 시원하게 웃는 건 처음 봤다.

“이제 속이 후련해?”

“후련하지. 이렇게 쉽게 의식을 잃다니. 정말 괴물이야.”

“알았으면 이젠 정말 엉기지 좀 마라.”

“알겠어. 알겠어.”

한번 기절하고 깨어났더니 뭔가 엉켰던 실타래가 풀렸다는 듯 개운한 표정의 빌리.

약간 찐따미 있던 말투나 목소리도 꽤나 밝고 시원스러워졌다.

“그래. 이제 원하던 거 다 얻었으니 가봐.”

겨우 이것 때문에 열몇 시간을 비행기 타고 오다니. 미친놈이야 미친놈.

“아아. 그렇지.”

축객령에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는 빌리.

“내 용건은 스파링이 끝이 아니야.”

“...그럼 또 뭔데?”

“미스터 강. 너만큼 고마운 사람이 또 하나 있거든.”

“무슨 소리야?”

나만큼 고마운 사람이라니?

“미스터 초이. 이번에 복귀한다지? 학센과의 3차전?”

이제 내겐 미련 없다는 듯 두호 형을 바라보며 말을 건네는 빌리.

“지난 TWF 때는 신세를 졌어. 한국에서는 제대로 된 중량급 스파링 메이트를 구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때? WFC 라이트헤비급 챔피언 스파링 메이트가 때마침 한국에 와 있는데 말이야.”

... 아 꺼지라고 미친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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