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화_전야 >
1.
WFC 303.
한국 서울에서 치러지는 WFC 메인 넘버링 이벤트로 전 헤비급 챔피언인 라무차와 현 헤비급 챔피언인 강해서의 2차전이 예정되어 있는 빅 이벤트였다.
“와씨. 오픈 워크아웃도 못 갈 뻔했네.”
“이번 강해서 시합 티켓값이 중고나라에 기본 백만 단위란다. 그것도 없어서 매물 뜨자마자 바로 팔린대.”
“하아... 진짜 보고 싶었는데.”
평소 격투기 마니아였던 동규는 이번 강해서의 첫 방어전을 꼭 보러 가고 싶었다.
국내에서 자주 열리지 않는 WFC 메인 이벤트인데다가 그를 격투기 세계로 입문시켰던 강해서 선수의 첫 방어전이라는 기념비적인 이벤트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빨리 매진될 줄 누가 알았냐. 그래도 오픈 워크아웃이랑 계체량이라도 가면 되지. 시합은 실시간으로 보고.”
“쩝. 그래야지.”
한국에서 치러지는 시합치고는 이례적이게도 순식간에 매진된 WFC 303 티켓.
예전 WFC IN BUSAN에서는 당일까지도 잔여 티켓이 남아있었고, 서울에서 치러졌던 강해서와 최두호의 메인 매치가 인상 깊었던 WFC IN SEOUL의 경우에도 이벤트 직전까지도 티켓에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강해서가 WFC 챔피언을 달성하고 나서(그것도 무려 3체급) 처음으로 갖는 방어전을 그의 고향인 한국에서 치르게 되니 말 그대로 순식간에 WFC 303 티켓은 매진되고 말았다.
“와. 사람 봐. 오픈 워크아웃 때 원래 이렇게 사람 많나?”
“아닐걸... 지난 서울 이벤트 때도 왔었는데 꽤 한산했었어.”
선수들의 공개 훈련이나 가벼운 시합전 인터뷰 등을 들어볼 수 있는 오픈 워크아웃 이벤트.
모든 팬에게 무료로 오픈되는 서비스 같은 이벤트지만 실제 대부분의 오픈 워크아웃을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실 경기도 아니었고 선수들 또한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하는 자리.
정말 선수 자체를 좋아해서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은 팬심이 아니라면 지나치고 말 이벤트였다.
그것도 무더운 8월 첫주 수요일 낮이라는 피크 타임.
대부분 사람들은 출근을 하거나, 출근하지 않았다면 피서를 떠났을 휴가철이었다.
“강해서가 대단하긴 하구나.”
“강해서가 대단한 것도 있지만 지난 서울 경기 때보다 한국 격투기 시장 자체가 많이 성장했지.”
거대한 오픈 워크아웃 행사장을 둘러보며 동규와 그의 친구는 최근 한국에서의 격투기 붐에 관해 이야기했다.
“요 몇 년 사이 동네에 생긴 격투기 체육관만 몇 갠지 모르겠다.”
“뉴스 보면 요즘 애들 진로 희망에 격투기 선수 쓰는 애들도 많다잖아.”
최두호가 열고 강해서가 확장시킨 세계시장에서 한국 격투기의 가능성.
실제로 강해서가 WFC 챔피언 등극 이후 브로일러나 WFC에 진출하는 한국인 격투기 선수가 유의미하게 늘어났다.
많은 선수가 자신의 한계를 한정 짓지 않고 세계라는 벽에 스스로를 던진 결과였다.
“어? 저기 사람들 몰려있다. 몇 시야? 강해서 나올 시간 됐나?”
“가보자!”
한창 오픈 워크아웃을 둘러보던 동규와 친구는 이내 강해서의 공개 훈련 무대를 찾고는 인파에 섞여들었다.
무대 위에선 한창 강해서의 공개 훈련이 진행되고 있었다.
-뻐엉! 뻐엉!
지난 시합과 마찬가지로 주특기인 타격으로 시합을 풀어갈 거라는 예고인지 타격 훈련을 보여주는 강해서.
-뻐어억!
-우와아아아아...
강해서의 강한 미들킥에 킥패드를 들고 있던 코치의 몸이 살짝 들리자 그걸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는 일제히 환호성과는 다른 놀라움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와... 저게 사람 몸이야?”
“실제로 보니까 더 무시무시하네. 와. 몸 봐라 진짜. 한국인한테서 나올 수 있는 피지컬인가 싶다.”
“지난 헤비급 타이틀전 때보다 더 좋아진 것 같은데? 아냐?”
“확실히 훨씬 더 괴물스러워진 것 같아. 모레 계체량에서 체중 보면 되겠지. 근데 진짜 팔다리 기네. 화면으로 봤을 땐 잘 몰랐는데.”
“속도도. 화면으론 느려 보였는데 실제로 보니까 개 빠름.”
그렇게 모두가 감탄하는 사이 예정되었던 공개 훈련이 모두 끝나고.
-그럼 강해서 씨. 오늘 이 자리를 찾은 팬 분들에게 이번 WFC303 시합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신다면?
간단한 시합전 인터뷰가 이어졌다.
-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강해서.
-이번 서울 이벤트의 티켓이 비싼 값에 되팔이 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 시합을 봐주러 오시는 팬 분들의 마음은 감사하지만 몇 배나 되는 돈을 주고 시합을 보러 오는 분은 없었으면 합니다.
-이번 주말. 저는 철창 안에 오래 들어가 있을 생각이 없거든요. 비싼 돈을 주고 헛짓을 하는 건 고릴라나 하는 짓이니까요. 하하.
한국 현지 캠프를 차려 몇 달간 억 단위의 훈련비용을 쏟아부은 라무차를 또 한차례 저격해내는 강해서였다.
*
"준비는?"
"완벽하죠."
엊그제 오픈 워크아웃을 무사히 마치고 오늘은 계체 이벤트가 있는 날이었다.
지난 6개월의 땀과 노력의 보상을 받는 날이 바로 내일.
오늘은 그 전야제였다.
"라무차 봤냐?"
"오픈 워크아웃 때요?"
"어."
지나가다 먼발치에서 보긴 했다.
보통 메인 카드의 두 선수가 사이가 좋을 경우 오픈 워크아웃 때 함께 포토타임을 가지거나 팬서비스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나와 라무차는 아무래도 그럴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물론 내가 일방적으로 라무차를 공격한 게 많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라무차 또한 상대 선수에 대한 존경심이나 배려 따위를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무시무시하던데. 해서 네 인터뷰 내용을 듣고도 아무 표정이 없더라니까?"
오늘도 열심히 어떻게 알았을지 궁금한 정보들을 알려주는 필승 형.
"마치 터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느낌이랄까? 몸도 더 좋아진 것 같고."
"뭐. 열심히 했을 테니까요."
라무차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패배라는 걸 모르고 정상에 섰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처음 겪은 패배.
높은 곳일수록 떨어졌을 때의 충격도 큰 법이라 했던가.
아마도 라무차가 느꼈을 충격은 내가 생각하는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그가 느꼈던 충격을 이해하고픈 생각은 없었지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컨디션 체크했으면 움직이자. 날이 덥다. 여유롭게 움직이자."
"넵!"
8월 첫 주 금요일.
아스팔트가 익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날이었다.
계체 이벤트가 오픈되는 건 오후 6시.
어느새 길어진 해는 계체 이벤트가 오픈되었음에도 그 열기를 잃지 않았다.
“어때요?”
계체장에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두호 형에게 입을 열었다.
“뭐가?”
“여기. 다시 찾은 소감이요.”
“흠...”
이곳 체육관은 나와 두호 형이 WFC 미들급 타이틀 샷을 걸고 맞부딪혔던 곳이었다.
몇 년 만에 다시 찾은 이곳에서 나는 헤비급 챔피언으로. 두호 형은 그런 내 코치로서 서 있었다.
“짜식. 지금 형 놀리는 거냐?”
“놀리다뇨. 그냥. 아쉽지 않나 싶어서 그러죠.”
지난 2월 WFC 296 시합 이후 3월에 있었던 WFC 297 이벤트에서 결국 학센은 미첼을 잡아내고 WFC 미들급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학센은 이미 두 번이나 이겼던 상대였다.
웰터급에서도. 그리고 미들급 토너먼트에서도.
두호 형의 부상만 아니었다면 토너먼트 결승전에 올라 미들급 타이틀을 따낸 건 어쩌면 학센이 아니라 두호 형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상성이 달라. 만약 내가 올라갔다면 못 이겼을지도 모르지. 미첼과 나는 비슷한 스타일이니까.”
“비슷한 스타일이지만 형은 학센에게 두 번이나 이겼고 미첼은 졌어요. 그러면 형이 더 강하다는 거 아닐까요.”
“짜식. 너도 알잖냐. 경기는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걸.”
쓴웃음과 함께 내 어깨를 두드리는 두호 형.
사실 지난 3월 학센의 타이틀 획득과 함께 국내 격투기 커뮤니티에서는 두호 형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부상을 입었어도 충분히 회복하고 토너먼트에 응했다면 우승 각이지 않았느냐고.
두호 형에게 두 번이나 패배했던 학센이 미들급 타이틀을 획득했으니 다시 한번 도전해도 되지 않느냐고.
“형 나이가 적지 않다는 건 알지만. 미련이 남지 않을까 싶어서요.”
“...”
“유안이가 큰 만큼 조금 더 가정에 집중하고 싶은 건 알겠는데. 그만큼 스스로에게도 솔직해지는 건 어떨까 생각해봤어요.”
내 훈련은 새벽부터 시작된다.
해가 뜨기 전에 시작해서 해가 지고 나야 끝나는 고된 훈련 일정.
두호 형은 그 모든 훈련을 지켜보고, 함께했다.
나보다 일찍 나와 훈련을 준비하고, 나보다 늦게까지 남아 훈련을 마무리했다.
그러면서도 결코 빼먹지 않았던 재활 훈련과 본인의 훈련 루틴들.
그걸 알기에 실례가 될 줄 알면서도 슬쩍 찔러본 것이다.
이곳 체육관에 들어서자 몇 년 전 내 앞에서 호랑이처럼 불타는 눈을 하고 있던 두호 형이 떠올라서.
“...”
“뭐. 제가 뭐라고 형한테 선택을 강요할 수도 없는 거고. 제 말을 듣고 선택했을 때의 리스크를 대신 짊어질 수도 없어요. 다만. 이번 시합 잘 지켜봐 줘요. 형이 끌어들인 선수가 세계 최정상의 무대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마.”
내가 힘들 때. 흔들릴 때.
어떤 의미에선 부모님이나 친구. 연인보다도 더욱 의지가되고 힘이 되어줬던 두호 형.
물론 내가 받은 것에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내가 펼치는 경기가 앞으로의 두호 형에게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강해서 선수!
그렇게 두호 형과 이런저런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강해서 선수. 255lbs. 계체 통과.
오늘 아침에 쟀던 체중이 115.5킬로그램.
계체에서는 저스트 255로 여유롭게 통과할 수 있었다.
-라무차 선수. 264.8lbs. 계체 통과.
그리고 정말 아슬아슬하게 265파운드 안쪽으로 계체를 통과한 라무차.
-두 분 선수. 앞으로 서 주시구요.
상의를 벗고 계체무대 위에서 마주한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와. 눈이 무슨.’
내 도발 겉으로 응하지 않았을 뿐 그 분노와 불편함은 라무차의 눈빛에서 여실히 느껴졌다.
-두 분 선수. 파이팅 포즈 한번 취해주시구요.
진행자의 요청으로 사진 촬영을 위한 파이팅 포즈를 잡는 시간.
여기서 라무차를 한번 도발해볼까 싶었지만 여기서 도발했다간 정말 시합 전에 사고가 날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이 미친놈은 퍼포먼스가 아니라 그냥 진짜로 싸우자고 덤빌 놈이니까 말이야.’
어차피 계체 이벤트 이후 시합전 기자회견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기에 이번만은 조용히 넘어가자 싶었다.
그런데.
-후웅!
파이팅 포즈를 취하는데 난데없이 내 턱 쪽을 향해 날아드는 라무차의 레프트 어퍼.
-휘익!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꽤나 위험한 모습을 연출하며 겨우 피해냈다.
“이런 썅! 뭐 하는 짓이야?!”
라무차의 펀치를 피해내곤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굳어있는 동안 내 뒤에 서 있던 필승 형이 거칠게 항의하며 앞으로 달려들려 했다.
“이거 왜 이래? 퍼포먼스잖아? 퍼포먼스. 미스터 강이 피할 걸 알고 있었다고?”
그러자 눈은 전혀 웃지 않으면서 입꼬리만 올린 채 장난이라고 말하는 라무차.
장담하는데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작정하고 때리려고 올려 쳤던 펀치였고 내가 피해냈을 때 라무차는 순간적이지만 놀란 표정을 지었었으니까.
“하아. 이 고릴라 새끼.”
적당히 해주려는데 아주 매를 버는구나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