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_프러포즈 >
1.
“우와...”
스트리트 파이트 촬영 중 가볍게 행한 스파링.
애초에 이곳 촬영장을 오면서부터 이런 비슷한 상황은 상정해두었었다.
단순히 코칭만 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고, 제작진 또한 단순 코칭만을 위해 날 부르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고 이 정도에 이렇게 놀라면 곤란한데.’
어차피 스트리트 파이트에 출연해서 전력을 노출시킬 생각은 없었다.
제대로 된 전력을 보여줄 만한 상황이나 상대도 없을게 당연했으니까.
“진짜 빠르다.”
“박해솔 코치가 스피드로 오히려 밀리는데?”
“헤비급이 저 정도 핸드 스피드에 몸놀림이면 사기 아냐?”
그렇다고 이 정도 반응을 받을 만큼 힘을 주지도 않았다.
박해솔 선수가 경량급이라고 해서 스피드는 어느 정도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영 별로였다.
“스탑! 스탑!”
결국, 뭘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했는데 끝나버린 스파링.
“와. 챔피언은 정말 다르시네요. 저보다 윗 체급에 스피드로 꼼짝도 못 해본 건 처음입니다.”
“하하. 박해솔 선수님도 워낙 움직임이 좋으시네요. 체급이랑 리치가 깡패죠 뭐.”
스파링이 끝나자 아주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다가와 인사하는 박해솔 선수였다.
“어땠냐? 해서야?”
“어떻긴 뭘 어때요.”
스파링 글러브를 벗으려는 내게 다가온 필승 형.
“박해솔이 스피드. 어땠냐고.”
“뭐. 나쁘지 않은 거 아닌가요? 저 정도면?”
“새끼. 지금 마이크 안 잡혀.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라고. 솔직히 어땠어?”
마이크가 꺼진 걸 확인시켜주며 지금은 다음 촬영을 위해 카메라도 다 꺼진 쉬는 타임이라는 걸 알려준 필승 형. 그러면서 솔직한 박해솔 선수의 평가를 물어봤다.
“... 저게 진짜 국내 탑급에 드는 스피드... 맞아요?”
“왜? 그렇게 안 보여?”
“솔직히 좀 그래요.”
“흠. 그래?”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빠지는 듯한 필승 형.
“창섭아.”
그리고는 체육관 한편에서 대기 중이던 창섭 형을 불렀다.
“네?”
“너. 방금 스파링 봤지?”
“봤죠.”
날 태워다주기 위해 일일 매니저 겸 해서 함께 촬영장을 찾았던 창섭 형은 촬영 내내 카메라 뒤쪽에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
“박해솔 선수. 어떻디?”
“박해솔 선수요?”
“그래. 특히 스피드나 이런 거?”
“음...”
갑작스런 질문에 잠깐 고민을 하는 듯한 창섭 형.
“좋았어요. 확실히 국내 탑 티어 파이터답게 날카로운 느낌도 있었고. 스파링이라 그런지 조금 가벼운 감은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스피드는 확실히 좋았지 않나요?”
“그치?”
박해솔 선수에게 꽤나 좋은 평가를 내려주는 창섭 형.
그나저나. 스피드는 확실히 좋았다고?
“해서야.”
“네?”
창섭 형의 말을 듣더니 다시 날 부르는 필승 형.
“너. 스파링 한지 얼마나 됐냐?”
“저요? 스파링은... 그러고 보니 한참 됐네요.”
국내에선 스파링 파트너를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였다.
나와 스파링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헤비급 체급 선수가 국내에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박해솔 선수. 스피드로만 따지면 WFC에서도 그렇게 떨어지는 편 아닐 거다. 확실히 라이트헤비급이나 헤비급 선수 중에서는 비빌만한 상대가 없을 거야.”
“...진짜요?”
“이번 스파링은 해서 네 훈련 중간평가이기도 했어. 두호 형한테 부탁받았었거든.”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긴. 최근 제대로 된 스파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쌓아 올린다는 생각으로 기초에 충실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 난이도가 지옥이긴 했지만.
“이번에 ‘그거’ 안 썼지?”
“네? 아... 안 썼어요. 쓸 이유가 없어서.”
“괴물 같은 새끼.”
그제야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웃어 보이는 필승 형.
“라무차와 시합. 이제 3달 남았나?”
“2달 조금 더 남았죠. 8월 초니까.”
“아주 기대된다. 대한민국이 터져나갈 거야.”
“하하.”
라무차.
그 또한 지금 열심히 훈련 중이라는 기사를 봤다.
아마 지금쯤 서울 어디선가 구슬땀을 흘리고 있겠지.
현지 훈련을 5월부터 한다고 했던 것 같으니까.
“형. 해서 촬영 몇 시 쯤 끝나요? 5시 전에 끝나죠?”
“어? 아. 5시 안에 무조건 보내준다니까. 아까부터 왜 이렇게 보채냐 너는?”
“보채는 게 아니라 일정 체크죠. 일정 체크.”
창섭 형은 저녁에 약속이라도 있는지 아까부터 계속 촬영 마치는 시간을 체크하다가 결국 필승 형에게 한 소리 들었다.
“해서야. 넌 글러브 빼지 말고 기다려.”
“네?”
“이왕 온 거. 애들 한번 좀 봐줘라.”
“아아. 뭐. 그러죠.”
링 밖에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스트리트 파이트 도전자들.
그래. 뭐 그 정도 서비스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
겸사겸사 나도 몸 좀 움직이고 말이야.
"자. 그럼 바로 이어 가보자고."
제작진도 흔쾌히 승낙한 스파링 코칭이 이어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젠 나 또한 어엿한 격투기 선수인지라 체육관과 이런 스파링들이 어색하지 않고 편하기만 했다.
-퍽. 퍽!
"다음! 바로 들어와!"
물론 일방적으로 때리는 상황이 더 좋았던 것도 있었지만 말이야.
“좋아! 다음!”
*
"수고했다."
"수고는요. 형이 더 고생했지."
아침부터 시작된 스트리트 파이트 촬영.
다행히 내가 필요한 촬영은 오후 5시가 되기 전에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오히려 조금 더 빠른 4시쯤 마무리되었으니 필승 형이 나름 신경을 써준 덕분이었다.
"일찍 마쳤는데. 뭐 좀 먹고 갈까?"
"저 지금 식단 하잖아요."
"그렇지? 그러면 날도 좋은데 강변이나 한 바퀴 할까?"
"... 저녁에 약속 있는 거 아니에요? 아까부터 계속 5시 전에 마쳐야 한다더니."
"응? 아아. 있지. 있지. 그런데 지금은 또 빨리 마쳤잖아. 곧 퇴근 시간이라 엄청 막힌다 너?"
"그러니까 퇴근 시간 전에 빨리 가야죠."
"..."
이 형이 오늘 영 이상하네? 여자친구랑 싸웠나?
아까는 무조건 5시 안에 마쳐야 된다더니 이제는 또 학교 가기 싫은 애들처럼 늦장을 부리려 하고 있었다.
"그냥 답답해서 그래. 강변 한 바퀴만 하자. 어차피 뒤에 일정도 없잖아."
"...뭐. 그래요."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답답하다는데 어쩌겠어.
창섭 형에게는 항상 미안하고 고마운 것들이 많았다.
물론 내가 시합을 뛰어 벌어오는 돈으로(팀 피스트 소속 다른 프로선수들도 있지만 내가 벌어오는 돈이 압도적이다) 체육관과 스탭진들의 월급이 나가긴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인간적인 고마움들이 있었다.
모든 운동선수가 그렇겠지만 격투기 선수 또한 아주 이기적인 부분들이 있었다.
특히 시합이 임박하면 주변을 둘러보기보단 스스로에 집중하기 바쁘다. 주변의 스탭들을 동등한 객체로 보기보단 수단적 독 로 여기게 된달까.
그들의 감정이나 기분. 환경이나 개인 사정 등에 관심을 기울이기엔 여유가 없었으니까.
모든 게 선수 위주로 돌아간달까?
"좋네요."
"그렇지?"
그래서 창섭 형이나 필승 형의 개인사나 관심. 취미. 고민 따위는 잘 알지도 못했고 그런 부분들이 항상 미안했다.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으니까.
"무슨 일 있어요?"
"응? 무슨 일은."
“뭐. 아무 일 없으면 됐구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별일 없으면 됐다 싶었다.
-툭. 툭.
“이거. 이거. 또 말썽이네.”
“음? 왜요?”
“아아. 요즘 오디오가 조금 말썽이라서 블루투스를 잡았다 못 잡았다 그러네?”
차량 오디오데크를 이리저리 만지며 투덜거리는 창섭 형.
“제 껄로 해볼까요?”
“아니야. 그냥 라디오 듣지 뭐.”
“차 문제가 아니라 폰 문제일 수도 있잖아요.”
“아. 됐다니까 그러네!”
“...”
뭔 일 있네. 뭔 일 있어.
내 폰으로 오디오 연결해본다니까 괜히 버럭하는 창섭 형.
평소 창섭 형은 감정을 겉으로 잘 드러내는 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필승 형보다 동생이지만 더 믿음직스럽고 의지가 되는 스타일이랄까.
그런데 오늘은 보통 때와는 달리 꽤나 감정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지직 지지직...
강변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마포구로 넘어가는 길.
결국, 퇴근시간이 겹쳐 주차되다시피 도로에 정체되어있는 차 안에서 창섭 형은 라디오를 틀었다.
-...곡 듣고 오겠습니다!
이내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라디오 DJ의 목소리.
누군지는 모르겠다. 생전 라디오라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알 리가 없지.
FM AM 이런 게 있다는 건 아는데 무슨 차이인지. 어떤 주파수가 무슨 채널인지 이런 건 전혀 모른다.
솔직히 내가 라디오 세대는 아니었으니까.
“가끔씩 이렇게 라디오 듣는 것도 좋지.”
“하하. 뭐. 네.”
하지만 창섭 형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가 꽤나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다음은 오늘의 고백송 시간입니다.
-오늘의 고백송은 ‘5월의 어느 날’ 입니다.
-사연 먼저 읽어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오늘의 고백송을 신청한 신청자입니다. 제가 오늘 고백할 친구를 처음 만난 것도 벌써 5년이 흘렀네요.
한창 노래가 흘러나오던 라디오에서는 다시금 DJ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더니 이내 사연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오늘의 고백송이라.’
뭔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하거나 프러포즈하는 그런 프로인듯했다.
나도 프러포즈를 해야 하는 입장이라 창섭 형과 별 할 말도 없고 해서 라디오 내용에 집중했다.
-처음 그 친구를 만난 건 같은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면서였어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 친구를 처음 만난 건 지금처럼 날이 좋은 5월의 어느 날 밤이었죠.
-그때는 우리 사이가 이렇게 깊어질 줄 몰랐어요. 그 친구도 저도 보통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처지였기에 마음을 키우기가 그리 쉽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 벌써 우리가 함께한 지 5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우리가 사귄지도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요.
-최근 상견례를 가졌어요. 우리 드디어 결혼합니다! 하지만 아직 프러포즈를 못 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오늘의 고백송’에 사연을 신청해 프러포즈를 해봐요!
와. 듣다 보니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사연 신청을 했나 싶을 정도로 나와 비슷한 상황의 사연이었다.
이래서 라디오 라디오 하는 건가 싶었다. 완전 공감 가는 사연이잖아?
-사연 잘 들으셨죠? 오늘은 특별히 ‘오늘의 고백송’ 사연 신청자를 직접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5월의 어느 날’을 직접 불러주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와. 라디오 프러포즈만 해도 로맨틱하다 생각했는데 직접 출연해서 노래까지 불러준다고?’
노래를 정말 못 부르지 않는 이상 충분히 성공적인 프로포즈이지 않을까 싶었다.
반대로 ‘프로포즈 하려면 저 정도로 거창하게 해야 하나?’ 싶은 불안감도 살짝 들긴 했고.
-오늘의 고백송 사연자! 여러분. 깜짝 놀라지 마세요? 두구두구두구. 후후. 오늘의 고백송 사연자! 손아름 씨를 소개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의 고백송을 신청한 손아름이라고 합니다.
“오! 프로포즈라길래 당연히 남자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연 신청자가 여자였네?”
진심 놀라서 라디오를 듣다가 육성으로 말을 내뱉었다.
“...”
“왜요?”
그러자 날 기괴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창섭 형.
-손아름 씨가 이렇게 오늘의 고백송에 신청해주실 줄은 몰랐어요. 프로포즈의 대상은 우리가 모두 아는 그분일까요?
-헤헤. 네. 맞습니다. 제가 정말 사랑하는 제 예비 신랑. 강해서 씨에게 보내는 프로포즈입니다.
와. 상대방 이름이 나랑 같...
“헐!”
이거 사연자가 아름이잖아!
아름이가 나한테 프로포즈 하는거라고?
“휴우...”
창섭 형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5월의 노을이 눈부신 서울의 도로 한복판.
-강해서 씨. 듣고 있죠? 지금쯤 길 한복판이려나? 잘 들어줘요?
나는 프로포즈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