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_스펙업 >
1.
“답변이 왔어.”
후끈한 열기로 가득한 체육관.
라무차의 수석 코치는 WFC에서 날아든 메일 프린트를 팔랑이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벌써?”
“미룰 생각이 없었나 보지. 그리고... 놀라운 소식도 있어.”
“놀라운 소식?”
한창 훈련 중이던 라무차는 대충 땀을 닦아내고는 코치의 손에 들린 종이를 건네받았다.
“8월 첫 주... 한국이라.”
“미스터 강의 홈그라운드지.”
“그리고... 흐흐흐. 애송이 녀석도 나와의 재대결을 먼저 원했다는 거지?”
“그래.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더군.”
강해서와의 리벤지 매치를 원한다는 라무차 측의 요청에 WFC가 보낸 답변은 OK였다.
“반년이라. 애송이가 누리기엔 충분한 시간이지.”
그 외에 잡다한 인사말들이 적혀있는 종이를 대충 던져두고는 다시 훈련을 위해 발걸음을 돌리는 라무차.
“... 그렇지. 맡겨둔 걸 다시 찾으러 가자고.”
라무차의 코치는 그런 그를 보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 단순 반복 훈련이라는 걸 지독히 귀찮아했으며 스파링 위주의 훈련만 해왔던 라무차가 이번에는 묵묵히 모든 훈련에 성실히 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은 애송이 애송이 하지만. 미스터 강을 가장 높이 평가하고 인정하는 건 라무차겠지.’
처음으로 겪은 패배.
그 과정과 결과가 아슬아슬했든 어쨌든 간에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건 라무차였다.
-쿵! 쿵!
그렇기에 라무차는 평소보다 더욱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다음 시합을 준비하고 있었다.
‘강해서. 다음 시합의 마지막에 서 있는 건 내가 될 거야.’
웨이트 머신에 앉아 스트렝스 훈련 중인 라무차의 눈은 저 멀리 어딘가 있을 강해서를 노려보기라도 하는 듯 불타오르고 있었다.
*
-미스터 강! 그의 다음 행보는? 라무차와의 2차전!
-반년 만에 리벤지? 라무차는 과연 지난 시합의 설욕에 성공할 것인가?
-라이트 헤비급이 아닌 헤비급 방어전을 선택한 강해서의 영리한 판단?
-WFC 라이트 헤비급 잠정 챔피언 빌리. ‘이번 강해서의 선택은 치명적인 판단 미스! 그는 나와의 챔피언 결정전부터 치렀어야 했다.’
-카이서스와의 복싱 이벤트는 언제? 미스터 강과 카이서스의 이벤트 매치에 몰린 격투 팬들의 시선!
-포브스가 선정한 스포츠 선수 수입 순위 TOP10. 미스터 강의 순위는?
“흠.”
-탁.
자신의 체육관에서 태블릿으로 인터넷 기사를 읽던 카이서스는 몇 개의 글을 읽고는 태블릿을 내려뒀다.
“꽤나 강력하게 밀어 부쳐봤는데. 이번 리벤지 매치가 우선이라는 답변밖에 받질 못했어.”
카이서스의 프로모터인 켄달은 꽤나 낭패한 목소리로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일단 미스터 강은 이제껏 단 한 번도 방어전을 치르지 않았기에 이번에도 방어전을 회피하고 이벤트 매치를 치르게 되면 이런저런 잡음이 나올 게 예상된다고 하더군.”
실제로 일각에선 강해서를 두고 챔피언의 자리는 원하면서 그 의무를 다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미들급 챔피언을 달성한 이후 바로 라이트 헤비급으로 체급을 올렸고, 미들급 타이틀은 한 번의 방어전도 치르지 않고 반납해버렸다.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을 달성한 뒤에도 바로 헤비급 타이틀에 도전했고 빌리라는 잠정 챔피언이 탄생한 상태에서도 방어전을 피하고 있었다.
여기서 헤비급 타이틀 방어전까지 뒤로 미루고 또 다시 복싱 이벤트로 눈을 돌린다면 분명히 거센 역풍이 불 수도 있었다.
“라무차와의 리벤지 매치라. 그의 코치와 교류가 있었지?”
“아아. 그렇지. 듣자 하니... 라무차가 최근 무섭도록 훈련에 매진 중이라 하더군.”
“호오.”
켄달은 지난 강해서와 라무차의 시합 이후 라무차의 헤드 코치와 교류를 가졌다.
WFC의 정점이었던 라무차와 복싱계의 정점인 카이서스의 코치와 프로모터는 서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예를 들자면
“이거. 미스터 강과 얽히니 그 친구도 훈련을 하는 모양이군.”
“후후. 카이서스. 마치 자네처럼?”
둘 모두 어느 순간부터 제대로 된 훈련을 행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카이서스는 방어전 일정이 잡히면 가벼운 패드워크 정도만 행할 뿐 제대로 된 방어전 대비 훈련은 한 지가 오래였고, 라무차 또한 시합이 잡히면 스파링 위주의 훈련만 즐겼을 뿐 고된 훈련은 해본 지가 오래된 상태였다.
“이거. 미스터 강이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닌지 모르겠어.”
그렇기에 켄달은 다음 리벤지 매치에서 라무차와 강해서 사이의 힘의 균형이 어긋날 것을 걱정했다.
“글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그리고 카이서스 또한 그런 켄달의 말에 부정하지 못했다.
라무차는 자신과는 또 다른 영역의 천재였고 이번에는 그 천부적인 재능에 노력까지 더 해지고 있었으니까.
“시합 개최지는 서울이라는 군. 어쩔 거야. 가볼 건가?”
“글쎄....”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한 카이서스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국이라. 한번도 가보지 않은 나라인데. 좋은 기회겠어. 준비해줘.”
“오케이.”
복싱 황제의 한국행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2.
“호호호. 그런 말씀 마세요. 저희 애가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어려서부터 방송 쪽 일을 하다 보니 모자란 부분이 많아요.”
“호호호. 아닙니다. 아름이처럼 싹싹하고 밝은 애를 본 적이 없어요. 저희 애야말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많이 이해해주세요.”
완연한 봄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4월의 어느 날.
“이렇게 먼 걸음을 해주시고. 저희가 찾아뵀어야 했는데요.”
“아니에요. 아름이도 해서도 바쁘고. 또 사람들이 알아보는데 먼 걸음 하기도 불편하니 저희가 올라오는 게 맞습니다.”
부모님은 상견례를 위해 오랜만에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셨다.
청담동의 고급 한정식집에서 진행된 상견례 자리.
분위기는 역시나 나쁘지 않았다.
“사실. 저희는 애들 나이도 있고 하니 이왕 할 거면 조금 빠르게 식을 올렸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하하하.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해서 저놈이 급하다기보단 아름이 같은 며느리를 어디 뺏기기 싫어서라도 식을 서두르고 싶습니다. 악!”
아름이의 어머니가 결혼식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평소답지 않게 입을 열었다가 엄마한테 허리를 꼬집히신 듯한 아버지와.
“흠. 흠. 여보. 아무리 그래도 결혼은 인륜지대사인데 그리 급하게... 일단 오늘은 상견례 자리니 양가 얼굴 보는 거로...”
“호호. 여보. 여기 순두부가 맛있네요. 나가서 순두부 좀 더 달라고 말 좀 해줄래요?”
“...”
“순두부요.”
“그, 그래.”
뭔가 한마디 하시려다가 빈 반찬 그릇을 들고 상견례 방 밖으로 터덜터덜 나가시는 아름이의 아버지를 보니 왠지 싸한 느낌이 들었다.
“아름이가 왜 그렇게 착하고 바른가 했더니. 현명하신 사부인을 닮아서 그런가 봐요? 호호호.”
“저야말로 해서 군이 요즘 사람답지 않게 진중하고 순하다 했더니 역시 사부인의 교육이 훌륭하셨나 봐요. 호호호.”
그리고는 왠지 모를 의기투합을 하는 양가 어머니들.
아니. 엄마. 이런 상황에서는 아들을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들이 장가가서 잡혀 살길 바라는 거야?
“아들아. 집안이 평안하려면 남자 목소리가 크게 들리지 않아야 하는거야.”
“... 그거 되게 위험한 발언인 거 알죠? 요즘 같은 시국에?”
“자고로 나이가 들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야 해.”
“아름이도 돈 잘 버는데?”
“엄마 말에 토 다는 거니?”
“...아뇨.”
살짝 반항해보려 했지만 결국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크흠...”
아버지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셨고.
-탁.
아름이의 아버지는 조용히 새로 받아 온 순두부 반찬을 내 앞으로 밀어주셨다.
“해서 군. 이것 좀 들어봐. 아주 맛있어.”
뭔가 동병상련의 눈빛을 담아서.
“감사합니다.”
“더 먹고 싶은 것 있으면 말하게. 편하게.”
“어... 저는 당근이요.”
“...뭐?”
“당근이요. 당근.”
아. 갑자기 왜 이렇게 당근이 땡기는지 모르겠다.
*
“후욱. 후욱.”
상견례가 끝나고 다시 돌아온 일상.
기초부터 다시 다진다는 생각으로 스트렝스 훈련과 테크닉 훈련들로 하루 4타임을 풀로 채워 빈틈없는 스케줄을 소화해내고 있었다.
“해서야.”
그때 날 부르는 필승 형의 목소리.
“안 코치님 호출. 바로 들어가 봐라.”
“넵!”
안 코치님의 호출이었다.
-똑똑
“코치님. 저 해섭니다.”
-들어와.
언제 들어와도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 안 코치님의 사무실.
처음 구 체육관에서 봤던 모습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어 이곳만 들어오면 언제나 초심이라는 놈이 생각이 나곤 했다.
‘그런데 내 초심은 조금 썩어있었지 않나?’
두호 형이 아름이를 소개시켜준다고 해서 시작했던 게 초심이었으니 딱히 초심을 찾는 게 도움이 될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름이와의 접점을 만들어준 게 두호 형이었네.
참 고마운 일인데 왜 갑자기 전투력이 올라가는지 모르겠다.
“다음 시합에 관한 연락이 왔다.”
“라무차와 2차전이요?”
“그래.”
우리가 요청했던 헤비급 타이틀 방어전에 관한 답변은 이미 지난주에 받았었다.
라무차와의 2차전으로 8월 첫 주 서울에서의 이벤트 개최에 대한 건.
“세부적인 조율 사항들이다.”
그리고 이번에 온 연락은 해당 시합에 대한 세부적인 협의 사항들이었다.
“라무차 쪽에서도 모두 오케이했고. 우리 쪽 확인만 끝나면 WFC에서도 대대적으로 프로모션을 시작할 거야.”
“오랜만에 한국에서의 빅 이벤트네요.”
“지난 시합들과는 다르지. 출전 희망 선수들부터 사이즈가 달라.”
WFC는 이전에도 간간히 한국에서의 이벤트 시합을 가졌었다.
나와 두호 형이 맞붙었던 미들급 서울 시합부터 예전 필승 형이 출전했던 부산 이벤트 등.
하지만 그때에도 메인 카드를 제외한 다른 시합의 출전 명단은 그리 화려하지 않았었다.
일단 종합격투기의 불모지라 불리는 아시아. 그중에서도 한국에서의 시합이었고 메인 카드들의 흥행 파워도 그리 높지 않았으니까.
“국내 격투기 팬들이 좋아하겠네요.”
“열광을 할 거다.”
하지만 이번 이벤트는 달랐다.
일단 WFC의 절대적인 네임드 선수인 라무차가 출전했고 그 상대 선수가 바로 나였으니까.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지금 격투기 시장에서 내가 가지는 위상은 그리 가볍지가 않았다.
20대 후반(한국 나이로는 서른에 시작했지만)이라는 늦은 나이에 격투기에 입문해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미들급부터 헤비급까지 3개 체급을 제패한 레전드.
이게 전 세계의 격투 팬이 바라보는 나의 이미지였다.
“한국 선수들이 출전할 자리가 있으면 좋을 텐데.”
“이번은 장담할 수 없다더라. 희망 선수들이 많아서.”
보통 한국에서 진행되는 이벤트 매치에는 WFC에 활동하는 한국인 선수들이 많이 출전했다.
개최국이 한국이니 한국인 선수를 우선 우대하는 거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이벤트 출전 희망 선수들이 별로 없었기에 한국인 선수들로 채웠던 이유도 컸다.
“그리고. 라무차 쪽에서는 다음 달부터 현지 캠프를 차릴 거라더라.”
“다음 달요?”
“그래. 3개월 풀 캠프를 할 예정인 듯해.”
“빡세게 준비하네요.”
듣기로 라무차는 지난번 타이틀 전 때 스파링 훈련 외에는 제대로 된 훈련을 거의 하지 않은 거로 알고 있었다.
“그만큼 지난 패배를 크게 의식하고 있다는 거겠지. 요즘 훈련은 어떻냐?”
“저요?”
방금 전까지도 완전 토나올 정도로 구르다 왔습니다.
하필이면 이번에도 시합이 여름 시즌이라 앞으로 더더욱 지옥을 맛볼 예정이네요.
뭐. 그래도...
“라무차와의 2차전.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들 준비를 하고 있죠.”
그 지옥 덕분에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싶을 정도로 스펙업을 하고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