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딱대격투천재의 탄생-174화 (174/203)

< 174화_폭탄발언 >

1.

“안녕... 하세요?”

먼저 날 알아보고 아는 체 했는데 무시하기도 뭐 해서 마주 인사를 받았다.

그나저나 엘리라니.

아까 창섭 형이 말 했던 병원을 찾은 아이돌 그룹 멤버가 핑크 펀치의 엘리를 말하는 거였나 싶었다.

“시합 잘 봤어요. 챔피언 축하드려요.”

엘리는 나와 마찬가지로 모자에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마스크를 내린 상태였다.

만약 마스크를 올리고 선글라스까지 끼고있었다면 나는 엘리를 알아보지 못했을 거다.

“아아. 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난 엘리처럼 마주 마스크를 내리거나 선글라스를 벗을 수가 없었다.

많이 낫긴 했어도 아직 얼굴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으니까.

“해서야?”

“아. 네. 엘리 씨. 다음에 또 봬요.”

“네? 아. 네.”

나는 창섭 형의 눈치에 엘리에게 인사를 하고는 빠르게 계단을 벗어났다.

엘리는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딱히 신경 쓰이진 않았다.

어차피 나와는 다른 세계의, 다른 세대의 사람었으니까.

오늘은 우연히 마주쳤다지만 또 얼굴 볼 일이 있을까 싶었다.

“방금 핑크 펀치 엘리 맞지?”

“네? 아. 네.”

“흐음...”

“왜요?”

비상계단을 벗어나 병원 복도를 걸으며 생각에 잠긴 창섭 형.

무슨 일이지?

“우리 라스베이거스에 있을 때. 너랑 엘리 기사 났던 거. 알고 있냐?”

“...네?”

“광고 촬영 때 엘리 사고 날 뻔 했던 거 네가 구해줬다며?”

“어... 네.”

그런 일이 있긴 했었다.

사실 꽤나 아찔했던 순간이었고, 그때의 극한까지 집중력을 끌어올렸던 경험이 라무차와의 타이틀전에서도 많이 도움이 되긴 했었다.

‘정말 종잇장 한 장 차이의 경기였기 때문에 만약 그날의 경험이 없었다면 내가 졌을 수도 있었겠어.’

다시 떠올려보니 꽤나 고마운 경험이기도 했다.

“그게 기사 났었어. 해당 브랜드에서 의도적으로 노출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현장 스케치를 하던 카메라에 사고 당시의 아찔한 장면들이 모두 녹화돼 있었거든. 그게 어떤 경론지는 모르겠지만 인터넷에 올라왔었어.”

“... 왜 저는 몰랐죠?”

“이슈는 됐었어. 기사도 몇 개 떴었고. 다만 핑크 펀치 쟤네 회사랑 팬덤 힘이 워낙 컸던 게 관건이지. 그냥 해서 네 ‘미담’ 정도로 마무리 됐거든.”

그런 일이 있었구나.

아무래도 시합 전 훈련 때는 스마트폰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정말 가까운 사람과의 연락 이외의 용도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특히나 내 기사를 찾아보는 행위는 절대 금물이었다. 괜히 비방성 기사나 악플같은 걸 보고 시합 전에 문제가 생기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시합이 끝난 뒤에는 챔피언 달성 관련 시가만 주구장창 떠댔으니 엘리와 관련 된 기사는 이미 저 밑으로 밀려났었을 거고.’

창섭 형이나 다른 사람들도 이미 지나간 기사라 딱히 말을 하지 않았던 듯 했다.

“오늘 여기서 엘리를 만났으니 한 이야기야. 괜히 기자들한테 먹이 주지말자.”

“당연하죠.”

확실히 이런 점에선 창섭 형이 좋았다.

필승 형이었으면 모르긴 몰라도 자리를 피하기보단 엘리와 말 한마디라도 더 해보려고 애썼을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어쨌든 비상계단에서 엘리를 만난 것 외에는 담당 교수님을 찾아뵙고 검진을 받는 동안 별다른 특별한 일이 일어나진 않았다.

-톡. 톡.

특별한 일이라면 아까 전 엄마와 한 통화내용을 가지고 나눈 아름이 와의 톡이랄까.

-해서 : 름름!

-해서 : 혹시 12월 말쯤에 부산 내려갔었어?

-아름 : 어? 아! 응!

-아름 : 아무래도 아버님 어머님 한번 찾아뵙는게 도리인 것 같아서...

-아름 : 상의없이 혼자 움직여서 미안해...(우는 토끼 이모티콘)

-해서 : ㄴㄴ 괜찮음

-해서 : 사실 이번에 한국 들어오면 같이 부산 내려가보려고 했는데 너가 먼저 다녀왔다길래

-아름 : 헤헤

-아름 : 아버님 어머님이 뭐라고 하셨어?

-해서 : 칭찬밖에 안하셨어. 아버지는 식스테이크 1화부터 정주행중이라고 하시고

-해서 : 부산 내려올 필요 없이 빨리 상견례 날짜나 잡으라시더라

-아름 : 헤헤헤(하트 쏘는 토끼 궁수 이모티콘)

따로 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 몰래 신경을 써준 아름이 에게 고마운 마음이 컸다.

아무래도 아들이라는 핑계로, 바쁘다는 핑계로 잘 찾아뵙지도 연락드리지도 못했던 부모님이었으니까.

“야. 가자.”

그렇게 아름이와 톡을 하고 있는데 행정처리를 모두 끝낸 창섭 형이 돌아왔다.

검사는 다 끝났고 결과는 며칠 뒤에 다시 병원을 방문해야했다.

“계단으로?”

“그게 낫겠지?”

이제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열에 아홉은 알아보는 얼굴이 되어버린지라 혹시나 싶어 올라올때와 같이 비상계단을 사용하기로 했다.

“다음부턴 진짜 얼굴은 안 맞아야지.”

“얌마. 그게 말처럼 쉽냐?”

“얼굴땜에 엘리베이터도 못 타고. 이게 뭐예요. 에휴.”

사람들이 알아보는 거야 아무 문제가 안됐다. 지금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비상계단을 이용하는 건 그냥 보기 흉한 얼굴로 사진을 찍히는 상황이 생기는 게 싫어서일 뿐이었다.

-끼익.

비상계단 문을 열고 1층으로 내려가는 길.

조금은 번잡했던 대학병원 복도를 창섭 형과 내 발소리만이 울려 퍼지던 비상계단에 아래층의 문 열리는 소리가 뒤섞였다.

“...”

“...”

이건 우연인거야 뭐야?

“안녕... 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또 다시 핑크펀치의 엘리와 마주쳤다.

이번에는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과 함께 있었는데, 아무래도 볼일을 마치고 우리처럼 비상계단으로 나가려는 듯 했다.

그나저나 뻘쭘하네.

둘 다 목적지는 1층일 텐데. 같이 내려가자니 불편했고, 먼저가라고 한 뒤 여기서 기다리는 그림도 영 이상했다.

“그럼.”

나와 창섭 형이 머뭇거리는 사이 짤막하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한 엘리의 매니저가 그녀를 데리고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우린 천천히 가자.”

“네.”

조금씩 엘리의 발소리가 멀어지는걸 들으며 나와 창섭 형은 계단을 내려가는 속도를 늦췄다.

어느새 다시 비상계단에는 나와 창섭 형의 발소리만 들리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1층 비상계단 문을 열고 나서니.

“어? 지금 나오는 사람은 누구야?”

“마스크에 모자에. 연예인인가?”

“엘리랑 같이 있었던 사람 아냐?”

“누구야? 빨리 확인해봐!”

1층 비상계단 앞쪽으로는 기자로 보이는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망할.”

어차피 사진 찍힐 거면 편하게 엘리베이터 타고 사진 찍힐걸 그랬어.

*

-강해서 씨? 오늘 병원을 찾은 이유가 어떻게 되시죠?

-비상계단에서 나오셨는데. 엘리 씨와 함께 계셨죠?

-한국에 들어오신지 얼마 안 된 걸로 알고 있는데. 오자마자 엘리 씨를 만나기 위해 병원을 찾은 겁니까?

-손아름 씨와 공개연애중이신데요. 엘리 씨와는 무슨 사이입니까?

-엘리 씨가 이상형으로 강해서 씨를 언급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엘리 씨! 강해서 씨와는 무슨 관계입니까?

-엘리 씨! 오늘 병원을 찾은 이유는 강해서 선수를 만나기 위해서인가요?

-두 분은 지난 광고 촬영 때 처음 만난 걸로 알고 있는데, 그때의 인연으로 만남을 시작하신 겁니까?

순식간에 치고들어오는 질문 공세들.

라무차와 싸울 때만큼이나 정신이 없었다.

나보다 꽤나 먼저 1층에 당도했을 엘리 또한 멀리 움직이지 못하고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어쩔래? 해서야?”

창섭 형 또한 이런 상황은 익숙지 않았기에 꽤나 당황한듯 한 표정.

“어쩌긴요. 우린 그냥 갈 길 가면 되지.”

어쩌다보니 그림이 이상하게 되긴 했지만 애초에 나와 엘리는 별 접점이 없었다.

오늘의 일도 모두 우연의 일치일 뿐이었고.

-강해서 씨! 답변 좀 해주시죠!

-어디가세요! 강해서 씨!

다만 이놈의 기자들이 내 발걸음을 편하게 놔두질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후우... 저는 엘리 씨랑 아무 관계 없구요. 오늘은 담당 교수님께 시합 후 검진을 받으러 왔습니다. 이만 좀 가게 비켜주세요.”

-그러면 왜 엘리 씨와 함께 비상계단을 사용하셨죠?

-우연이라기엔 엘리 씨와의 만남이 너무 절묘하지 않나요?

“비상계단을 사용한 건 혹시나 알아보시는 분들이 있을까봐 그런 거구요. 엘리 씨랑 만난 건 정말 우연인데 그걸 가지고 뭐라 하시면 할 말이 없네요.”

대충 적당하게 답변을 둘러치고 자리를 모면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을 하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사실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나와 엘리의 사이를 가지고 소설을 쓰듯 기사를 쓰는 기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부분이었다.

나는 엘리에게 관심이 1도 없었고 빨리 나아서 아름이를 보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으니까.

-엘리 씨와는 어떤 사입니까!

-손아름 씨와는 헤어지신 겁니까?

그런데 이 기자양반들이 선을 넘네.

엘리 쪽에서도 그런 거 아니라고. 몸이 안 좋아 병원을 검사를 위해 병원을 들린 것뿐이라고 해도 기자들은 들어먹질 않았다.

“말조심하세요.”

덕분에 난 조금. 아주 조오금 짜증이 났다.

-...

-...

당장 내 주변에 있던 기자들 위주로 조용해진 분위기.

“엘리 씨랑은 지난 광고 때 딱 한번 본 게 답니다. 아무 사이 아니구요. 연락처도 모르고 알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그리고 아름이랑 안헤어졌구요. 상견례 방금 전까지 상견례 날짜 정하고 있었고 저는 어떤 프러포즈를 해야하나 검색하고 있었습니다.”

-...!

-강해서 씨! 손아름 씨와 결혼발표를 하시는 겁니까?

-강해서 씨와 손아름 씨가 상견례를 준비한다는 말씀이신 거죠?

-강해서 씨!

아름이에게 동의를 구한 건 아니었지만 기자들을 상대로 결혼발표를 해버렸다.

덕분에 기자들은 내 쪽으로 급격히 몰려들었고 엘리와 매니저는 순식간에 기자들의 관심 밖이 되었다.

“...”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쪽을 바라보는 엘리와 그의 매니저.

나는 눈짓으로 이 틈에 빨리 가라는 제스처를 취했고 그들은 가볍게 고개인사를 하고는 사라졌다.

“자세한 건 따로 인터뷰 하겠습니다. 이렇게 병원에서 갑작스럽게 말씀 드릴 부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추측성으로 기사 쓰지 말아 주시구요.”

엘리가 사라지고 난 뒤에야 나또한 기자들을 물리고 병원을 나올 수 있었다.

“...해서 너. 아름 씨랑 결혼 하냐?”

“네? 아. 하하하.”

차에 타자마자 창섭 형은 대뜸 아름이와의 결혼 여부부터 물어봤다.

“아까 말했던 대로에요. 상견례 이야기가 나오고 있긴 해요.”

“그럼 하겠네.”

“아마도... 특별한 일 없으면 그렇겠죠?”

중요한 건 방금 전 내가 폭탄을 터뜨렸다는 거다.

조금 전 폭탄 발언이 ‘특별한 일’이 되지 않게 하려면 빠른 수습이 필요했다.

-rrrrrr

그렇기에 차에 타자마자 바로 스마트 폰부터 꺼내 아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아름아!”

나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그대로 이실직고했다.

아... 왠지 아버지가 사고치고 엄마한테 혼나는 모습이 내게 오버랩 되는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그런 일이 있었어?

“어. 상의없이 터뜨려서 미안해.”

-헤헤. 괜찮아.

다행히도 아름이는 이번 일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해줬다.

-근데. 진짜 우연히 만난거야?

“뭐가?”

-그. 핑크펀치 엘리 말이야.

“당연하지. 내가 걜 어떻게 알고 만나?”

오히려 아름이는 결혼 발표보다 다른 부분이 더 신경 쓰이는 듯 했다.

-흐음. 걔가 해서 너가 이상형이라고 하던데.

“에? 에이. 찌라시겠지. 유언비어야. 유언비어.”

-내가 걔 입에서 직접 들었는데.

“...엉?”

엘리 입에서 직접 들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내일이 아니라 오늘 좀 봐야겠지 않아?

“...”

아직 멍이 다 안 빠졌는데...

-됐으니까. 바로 집으로 와. 알겠지?

“...네...”

아까까진 그렇게 보고 싶던 아름이었는데.

왜 지금은 이렇게 마음이 불안한 걸까...

“집으로 가면 되냐?”

아름이와의 전화를 마치고 나니 행선지를 묻는 창섭 형.

“...아뇨. 아름이 집으로... 가주세요.”

“엉?”

부럽다는 듯 날 바라보는 창섭 형.

형. 부러워 할 필요 없으니까 과속하지 말고 천천히 가주세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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