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딱대격투천재의 탄생-173화 (173/203)

< 173화_새아가 >

1.

“받아들여질까?”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

라무차의 코치는 미스터 강과의 리벤지 매치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글쎄? 텔론이 어떤 대답을 주든. 애송이는 나와 다시 마주하게 될 거야.”

라무차가 헤비급 타이틀을 장기집권하는 동안 WFC 헤비급의 선수 풀은 상대적으로 빈약해졌다.

압도적인 괴물을 마주한 최상급 랭커들이 브로일러를 포함한 타 단체로의 이적을 선택한 경우가 많았으니까.

오죽하면 루키라곤 하지만 몇 전을 치르지도 않았던 패드릭에게 타이틀 샷을 주어야 하는 상황까지 생겼었다.

물론 강해서라는 걸출한 도전자가 치고 올라오면서 패드릭의 타이틀전 도전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애송이. 그를 너무 얕봤어.”

“어쨌든 진 건 진 거야.”

“그렇지. 다만 다음 시합에서는 다를 거라는 게 중요해.”

텔론이 자신의 리벤지 매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도 현재 남은 WFC 헤비급 컨텐더 중에 강해서를 이길 선수는 없다. 라무차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챔피언의 자리에서 내려오지만 않는다면 이르든 늦든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라무차는 강해서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언터쳐블인 선수였으니까.

“라무차 네가 지다니. 난 사실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아.”

“...”

“괴물 같은. 예측에 가까운 네 위험 감지를 뚫고 널 쓰러뜨리다니 말이야.”

“그러니까 재미있는 거야.”

라무차는 코치의 말에 지난 시합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시합 내내 온몸 여기저기서 싸늘한 감각이 그칠 줄을 몰랐던 그 날.

이제껏 MMA를 수련해오면서. 아니, 이제껏 라무차가 살아오면서. 그토록 동시다발적인 위기감을 느꼈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 라무차는 강해서에게 유효타들을 허용해야 했다.

피해낼수록 수렁으로 빠져들듯 궁지에 몰리는 느낌. 결국은 절대 피할 수 없는 위험 신호들까지.

“하지만 다음번엔 다를 거야. 이번에는 나도 생소해서 당황이란 걸 했을 뿐이거든.”

예의 불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코치를 바라보는 라무차.

“내게 다가오는 위기보다 더 큰 위기를 상대에게 선사한다. 결국, 그거면 되는 거잖아?”

이번 시합으로 확인했다.

힘도. 맷집도. 라무차가 강해서보다 월등했다.

이번 라무차의 패배는 그저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적응. 그것 때문이었다.

“하하하. 라무차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이거. 미스터 강은 WFC 챔피언 역사에 손꼽히게 짧은 집권 기간을 기록하겠군.”

라무차의 코치는 그의 호언장담에 무한한 신뢰를 보내며 마음 편히 웃어 보였다.

챔피언의 자리에서 내려왔다지만 라무차는 라무차였으니까.

*

“받아들여질까?”

병원에서의 검진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장시간의 비행에 지쳤는지 이리저리 뒤척이던 필승 형이 별안간 입을 열었다.

“뭐가요?”

“뭐긴 뭐야. 리벤지 매치지.”

“흐음...”

솔직히 아주 높은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질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현 WFC 헤비급에는 제대로 된 컨텐더가 없었으니까.

라무차 또한 리벤지 매치를 생각하고 있지 않더라도 내가 역으로 제안을 한다면 거절할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적극 동의하거나 아니면 저쪽도 이미 리벤지 매치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중요한 건. 리벤지 매치를 하더라도 확실히 이길수 있으냐야. 나는 솔직히 왜 네가 라무차와의 리벤지 매치를 원하는지 모르겠다.”

“하하. 뭐. 그렇죠.”

확실히 라무차와의 리벤지 매치는 내겐 리스크가 컸다.

종합격투기를 수련한 이후 처음으로 패배할 뻔했던 시합.

그 과정을 보면 결코 승리라고 말 할 수만은 없었던 경기.

“라이트 헤비급에서는 이번에 빌리가 잠정 챔피언에 올랐어. 공백이 길어지면 라이트 헤비급의 타이틀도 결국 반납해야 할 거야.”

“...”

브로일러와의 챔피언전과 복싱 이벤트 매치. 거기에 헤비급 타이틀전까지 연이어 달리며 정작 라이트 헤비급 타이틀 방어전은 갖질 못했기에 WFC의 잠정 챔피언 제도에 따라 빌리가 잠정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그는 지금도 꾸준히 날 향해 진정한 챔피언을 가리자며 SNS로 도발하고 있는 상태.

“텔론이 답변을 주겠죠. 다행히 복싱처럼 의무방어전 기간은 없으니.”

WFC는 일정 기간 동안 방어전을 치르지 않으면 타이틀을 박탈하는 공식적인 규정이 없었다.

오로지 텔론 회장의 마음에 달려있는 상황.

“방어전을 치르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헤비급 방어전을 먼저 치르겠다는 내용이었으니 어느 정도 참작의 여지는 있을 거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안 코치님까지 한마디 거드셨다.

“하긴. 헤비급 방어전을 먼저 치르고 라이트 헤비급 방어전을 치르는 게 무리가 없긴 하죠. 텔론이 오케이만 한다면 뭐.”

안 코치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용하는 필승 형.

“두호 형.”

나는 한 칸 떨어진 자리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두호 형을 나직이 불러봤다.

“...왜?”

다행히 자고 있었던 건 아닌지 조금은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는 두호 형.

“이번에 한국 가면... 훈련. 정말 제대로 좀 다시 해보려구요.”

“...그래?”

“네.”

어느 순간부터였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랬는지.

내 훈련은 나태하기 그지없었다.

그 정도 수준으로도 승승장구했으니까. 잘 해내고 있었으니까. 주변에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고 나 또한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했었다.

‘자만심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허울만 벗었던 거였어.’

밖으로는 내비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내가 최고’라는 교만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겉으로는 자만심을 버리고 성실히 한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빈틈이 있었다.

“그래서. 그 빈틈들. 이번 기회에 단단히 메우려고요.”

“흠...”

그제야 감았던 눈을 뜨며 내 눈을 바라보는 두호 형.

그런데 그 눈빛이 두호 형이 선수로서 시합에 임하기 직전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듯한 열기를 품은 눈.

“그 말. 절대 무르지 마라.”

“...네?”

“네 한계를 정확히 알게 될 때까지. 아주 모질게 굴려주마.”

“...”

어...

이런 반응을 원했던 건 아닌데.

말을 잘못했나 싶었다.

하지만

“당연하죠.”

이번만은 나도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부탁드려요.”

말 그대로. 전력을 다하고 싶었으니까.

2.

-그럼 내일 보는 거야?

“어. 오늘까진 조금... 병원도 다녀와야 하고.”

-후웅. 알겠어. 몸조리 잘 하구.

“응. 고마워.”

어느덧 한국에 도착한 지도 이틀째.

시차 적응도 어느 정도 끝났지만, 아직 아름이나 친구들은 아무도 만나지 않은 상태였다.

‘이제 좀 가라앉았네.’

그도 그럴 게 얼굴이 엉망진창이었다 보니 밖에서 누굴 만나기가 어려웠다.

거울을 보며 부었던 곳과 멍이 들었던 곳들을 살펴보다가 다시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내일쯤이면 그래도 맨얼굴로 다닐 정도가 될 것 같긴 했다.

-Rrrrrrr

그때 다시 울리는 스마트폰.

“여보세요?”

-야. 안 나오냐?

창섭 형이었다.

벌써 병원 갈 시간이구만.

“준비 끝났어요. 지금 나갑니다-”

끝말을 늘이며 침대에서 일어나 대충 옷을 걸쳤다.

물론 모자와 마스크 선글라스는 필수였다.

“빨리빨리 안 다니냐?”

“아. 부상자라구요.”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창섭 형이 투덜거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라면 태양이가 왔어야 할 일이었지만 이번에 태양이의 브로일러 데뷔전 일정이 잡히면서 창섭 형이 짬 처리를 당했다.

그나저나 20대 초반에 FFC에서 브로일러로 이적이라니. 태양이도 확실히 재능이 넘치는 놈이긴 했다.

“컨디션은?”

“좋아요. 얼굴 욱신거리는 것 빼면.”

“그래도 혹시 모른다. 일단 타라.”

“넵.”

라스베이거스에서 현지 병원을 다녀오긴 했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담당 교수님에게 정밀 검사를 받는 게 좋았다.

특히 나는 다른 사람과는 조금 다른 운동능력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기에 시합 전후로 뇌파나 심장 쪽 기능 검사를 정밀하게 하는 편이었다.

“부모님한테는 연락 드렸냐?”

“네? 아. 아직요.”

어차피 부상이 좀 회복되면 아름이랑 같이 부산에 한 번 내려갈 참이었다.

그때 연락드리면 되겠지 라는 마음으로 아직 귀국 후 연락을 드리진 않은 상태였다.

“얌마. 그래도 그러는 거 아니야. 부모님도 시합 보셨으면 걱정 많이 하셨을 텐데. 연락해드려.”

“하하. 넵.”

병원으로 이동하는 길.

창섭 형의 잔소리에 결국 스마트폰을 들어 엄마의 번호를 눌렀다.

아무래도 아버지보다는 엄마가 편하니까.

-rrrrrr

잠시간의 통화대기음이 들리고

-여보세요? 해서니?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여보세요? 엄마? 나야. 해서.”

-그래. 한국이니? 이제 왔어?

“어... 어. 이것저것 좀 처리한다고 이제 막 한국 왔어.”

한국 온 지 벌써 이틀 차지만 차마 진실이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아이고. 고생 많았다. 축하해 아들. 세계 챔피언 먹은 거.

“세계 챔피언은 아닌데. 어쨌든 고마워.”

-고맙긴. 엄마가 뭘 해줬다고. 어디. 다친 덴 없니?

“괜찮아요. 멀쩡해.”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니 스스로 속여왔던 진실을 마주할 수 있었다.

부모님께 연락하지 않았던 건 조만간 찾아뵐 거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그냥 핑계였을 뿐.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병원 꼭 가보고.

“지금도 병원 가는 중이에요. 걱정하지 마.”

-한국 오자마자 병원으로 가니? 많이 다친 거 아니야?

“아니라니까요. 목소리 봐요. 팔팔하잖아.”

연락을 피했던 건 그냥 부모님의 걱정하는 목소리와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들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는 걸 보셨을 부모님이 챔피언 타이틀 땄다고 마냥 기뻐하지만은 않으실 테니까.

‘찌질하네 진짜.’

나태와 자만의 대가로 신나게 두들겨 맞은 걸로도 모자라 부모님께 불효까지 저지르려 했다.

쪽팔리게.

-아! 그리고 지난번에 새아가 왔다 갔다. 너 시합 준비 중이라고 극구 말하지 말라고 해서 이제사 말한다.

“...네?”

-새아가 말이야. 아름이.

“아름이요? 손아름?”

-네가 만나는 아가씨가 우리 아름이 빼고 또 있니?

...대체 언제부터 우리 아름이가 됐는데 엄마?

“아, 아름이가 언제 갔다구요?”

-작년 말에 왔었어. 12월달 말에. 너 한창 시합 준비한다고 미국 나가기 직전에.

“그걸 왜 지금 말해요!”

-어머나. 왜 엄마한테 큰소리야? 아름이가 너 훈련하는 데 방해된다고 말하지 말래서 안 한 거다? 그렇다고 우리 아름이한테 뭐라 할 생각도 하지 마. 네 아버지가 너 아름이 울리면 바로 호적에서 파버리신다더라.

“...”

작년 말.

12월 말이면 대체 언제지?

아름이가 부모님 뵈러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한 뒨가?

그럼 아름이네 부모님 뵙고 나서?

-넌 뭐 광곤가 뭔가 찍는다고 바쁘다고. 새아가 혼자 부산까지 내려왔었어. 그래도 상견례 전에 한번 찾아뵙는 게 도리인 것 같다고. 어찌나 생각도 바르고 마음씨도 고운지.

“...”

그래서 이번에 아름이랑 같이 부산에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알고 보니 아름이는 벌써 두 달도 전에 부산을 다녀왔었단다.

이러면 내가 너무 못나 보이는데.

-어쨌든. 우린 상견례 전에 새아가 얼굴도 봤고. 미련 없다. 날은 바쁜 너네 편한 날짜로 잡아. 너희 아버지랑 나는 무조건 맞춰줄 테니까.

“...아버지는. 좋아했어?”

-뭘? 새아가?

“네.”

-말해 뭐해? 아주 입이 귀까지 찢어져서는 새아가 다녀간 이후로는 식스테이큰가 뭔가 그걸 첫 화부터 정주행 중이다. 요즘 집에만 오면 그거 다시 보기 한다고 바빠.

“하하하.”

아름이가 몇 년째 고정으로 나오는 프로그램인지라 누적 회차가 장난이 아닐 텐데 그걸 정주행하시다니.

-어쨌든. 둘이 싸우지 말고. 날짜부터 빨리 잡아. 아무리 바빠도 결혼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너희도 이제 어린 나이가 아니고.

“넵. 아. 엄마. 나 이제 병원 도착해서.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그래.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넵!”

엄마와 통화하는 중에 어느새 도착한 병원.

“통화 끝났냐?”

“네? 아. 네, 고마워요.”

창섭 형은 차 밖에서 전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맙기는. 부모님한테 전화하는 건 당연한 건데.”

“그래도요. 형 아니었으면 아마 오늘은 전화 안 했을 거예요. 분명히.”

“새끼.”

창섭 형은 멋쩍은지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성큼성큼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나저나. 병원은 형이 온 게 아니라 제가 온 건데 왜 형이 앞장서는 건데요.

-웅성 웅성.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끼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창섭 형을 따라 병원으로 들어서는데 병원이 평소보다 소란스러운 느낌이었다.

“무슨 일이지?”

“잠깐만 있어봐라.”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나 때문은 아니겠지 싶었다.

아무리 봐도 병원 홀에서 웅성거리고 있는 사람들은 기자들로 보였으니까.

“우리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조용히 피해서 계단으로 가자.”

“그래요?”

별일이네. 대학병원 로비에 저렇게 기자들이 들어찬 건 또 처음 봤다.

“무슨 아이돌 그룹 멤버가 지금 여기 있다나 봐. 우린 조용히 가자. 괜히 너까지 들키면 더 시끄러워진다.”

“넵!”

이제 조금 괜찮아졌다지만 카메라에 담겨 좋은 것 없는 얼굴 상태였으니 창섭 형 말대로 조용히 검진만 받고 가는 게 상책이었다.

그렇게 창섭 형과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담당 교수님이 계신 층까지 걸어 올라가고 있는데

“어? 강해서... 선수님?”

병원 계단을 울리는 맑은 목소리.

“...엘리... 씨?”

모자와 마스크까지 쓴 날 어떻게 알아봤는지는 모르겠지만. 핑크 펀치의 엘리가 환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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