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딱대격투천재의 탄생-171화 (171/203)

< 171화_Vs. 라무차_END >

1.

“...”

“...”

잠시간의 고요.

집중모드 상태라고는 해도 지나치게 길게 느껴졌던 순간.

하지만 실제 그 시간은 정말 찰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씨익

-후우웅!

내가 기대했던 당황한 표정이나 낭패라는 표정 대신 또 다시 재수 없는 미소와 함께 안면 정면으로 뻗어오는 라무차의 라이트 펀치.

-퍼억!

피해내지는 못하고 겨우 팔을 들어 가드 위로 공격을 받아낼 수 있었다.

-뚜둑. 뚜둑.

내가 한차례 물러서자 가볍게 스트레칭 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라무차.

발끝에 제대로 느낌이 왔었기에 잘하면 게임 종료. 못해도 다운은 얻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반격을 해올 줄이야.

‘생각보다도 훨씬 터프하잖아. 미친...’

만약 반대로 내가 저 킥을 맞았다면 저렇게 멀쩡할 수 있을까 싶었다.

맷집은 아무래도 나보다 라무차가 한수 위라는 건가.

-퉁. 퉁.

이제 2라운드 초반.

앞으로 남은 라운드가 많았다.

이번 시합을 어떻게 풀어가야할지 오만가지 생각이 뇌를 스치는 순간.

“이봐 애송이.”

마우스피스를 낀 라무차의 입이 열렸다.

“아주. 화끈하게 한번 가보자고.”

보통 마우스피스 때문에 말을 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시합중 대화는 심판의 경고를 받을 수 있는 사항이었기에 이런 식의 대화는 처음이었다.

그나저나. 화끈하게라니?

-투우웅!

나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머리로 이해하기도 전에 몸으로 먼저 이해해야만 했다.

-후우우웅!

라무차가 이번에는 방어를 도외시하고 정말 짐승처럼 달려들었으니까.

-찌릿. 찌릿.

조금 전 몸싸움 도중에 집중력을 끌어올렸더니 순간적으로 과부하가 왔는지 머리가 살짝 지끈거렸다.

하지만 라무차가 불도저처럼 들어오는 상황이라 집중을 풀 수도 없었다.

-휘익. 스팟!

안면을 노리고 크게 휘두르는 라무차의 라이트 펀치와.

-후우웅. 스팟!

이어지는 레프트 펀치까지 상체를 뒤로 젖혀 피해 내고나니 극히 찰나지만 훤히 드러난 빈틈들이 있었다.

-뿌득. 뿌드득.

회피 동작에서 공격 스텐스로 동작을 바꾸는 게 몸에 약간 무리가 가긴 했지만 이번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파아앗!

라무차의 펀치를 피하느라 상체가 뒤로 젖혀진 상태에서 휘두른 오른 주먹이 라무차의 왼쪽 안면을 한번 더 가격하나 했는데 역시나 얕았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라무차는 또 다시 공격을 반쯤 흘려 내버렸으니까.

-퍼어억!

하지만 그 상태에서 다시 상체를 강제로 끌어당기며 라무차의 오른쪽 바디에 꽂아 넣은 래프트 바디블로.

혹시나 이번 바디블로로 라무차의 가드가 내려오면 다시 한 번 그의 안면을 노려볼까 했는데 이번에도 라무차는 견딜 만 하다는 듯 더욱 간격을 좁히며 내 왼쪽 안면으로 라이트 펀치를 뻗어왔다.

-슈우우웅.

모든 게 느려진 세상에서 그 궤도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는 라무차의 공격.

-스윽.

나는 그 펀치를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면서 그의 안면에 다시 한 번 카운터펀치를...

-퍼억!

“...!”

순간 체육관이 정전이라도 된 듯 잠시 나갔다 들어온 시야.

무슨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후우우웅!

확실한 건 이번엔 라무차의 왼손 주먹이 내 얼굴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후우웅. 쉐에에에엑!

조금 전의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집중력은 풀려가고 있었다.

“크윽!”

-뻐억!

다급하게 오른 손 가드를 올렸지만 그 위로 떨어진 라무차의 펀치 위력에 휘청이며 백스텝을 밟아야했다.

‘무슨 일이지?’

분명 라무차의 펀치를 피해낼 수 있도록 몸을 움직였고 동시에 카운터펀치를 날릴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궤도를... 수정했다고?’

내가 상대의 움직임에 맞춰 전진 스텝을 밟거나 타격의 궤도를 수정하듯이 라무차 또한 내가 아슬아슬하게 피해낸 거리만큼 펀치의 궤도를 수정했다. 그렇게 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정말이지. 녹화 영상이라도 좀 보고 싶네.’

충격 부위를 생각하면 라무차의 라이트 펀치를 맞은 게 분명했다.

충격량을 생각하면 제대로 휘둘러진 정타를 맞은 건 아니고 어느 정도 힘이 빠진 펀치를 빗맞은 정도였고.

중요한 건 단순히 보고 피하는 것만으로는.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는 것만으로는 라무차의 타격을 무효화 할 수 없다는 ‘변수’가 생겼다는 거다.

‘그리고... 집중 모드도 벌써 너무 많이 썼어.’

훈련 막바지 때 약 1라운드 가량을 풀로 유지할 수 있었던 집중모드.

하지만 정작 시합에 들어오니 생각보다도 효율이 더 좋았다.

아무래도 흥분으로 인해 피가 빨리 돌면서 집중 모드 상태에서도 혈행이 조금 더 빨라진 덕분이겠지.

‘그걸 감안해도 너무 남발했지만.’

1라운드에서도. 2라운드에서도. 모든 순간이 긴박했다보니 집중모드를 너무 많이 썼다.

체력과 집중력이 떨어진 게 느껴질 만큼.

-쿵!

-후우웅!

그때 다시 날아드는 라무차의 왼발 로우킥.

‘... 망할.’

집중모드가 풀려있어서 너무 늦게 봤다.

이건 피하기 어렵겠어.

-떠어억!

-휘이이익!

오른쪽 다리에 최대한 무게와 힘을 실으며 라무차의 킥을 받아내고는 그 힘을 이용해 그대로 뻗어낸 레프트 훅.

-퍼억!

그리 강하진 않지만 라무차의 안면에 아주 정확하게. 정면으로 들어갔다.

“...”

코와 입술에서 붉은 피를 흘리는 라무차.

-씨익

그리고는 예의 그 재수 없는 미소를 짓는데, 검은 피부에 흰 치아. 그리고 그 위로 번지는 붉은 핏물이 꽤나 그로테스크했다.

*

“... 이거 위험하겠는데.”

“그러게요.”

케이지 밖에서 강해서의 시합을 지켜보던 두호와 필승은 이번 시합이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일단. 너무 터프해.”

“덩치가 더 크니 타격 반감되어서 들어가는 것도 있어요. 진짜 괴물이네 저 놈.”

“그래플링으로 풀기에도... 불리해. 우리로선 라무차가 그래플링에 조예가 없다는 걸 감사해야 할 판이야.”

“그것도 그렇죠.”

만약 라무차가 그래플링에 조예가 있었다면 아마 이번 시합은 벌써 승부의 추가 기울었을지도 몰랐다.

“타격은... 솔직히 해서가 유리해.”

2라운드부터 제대로 된 유효타를 넣기 시작한 강해서였다.

“하지만...”

물론 최두호도 박필승도. 심지어 안형석마저도 케이지 안에서의 자세한 속사정 같은 건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라무차의 맷집이 너무 좋아. 그리고 이상하게 해서의 타격에 연타가 없어.”

“확실히 그래요. 컴비네이션 훈련을 그렇게 해놓고 타격 연계가 너무 미흡해요.”

실상은 타격 포인트 때마다 라무차의 알 수 없는 움직임으로 제대로 된 정타를 넣지 못했던 강해서가 무리해서 연타에 고집하고 있는 게 정답이었다.

무리해서 연타에 집착했다가는 반격의 단초가 될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한 대 맞고 네다섯 대 때리니까. 우리가 유리하지 않을까요?”

“판정으로 가면 확실히 그럴 수 있지. 그런데 과연... 판정까지 갈까가 문제야.”

어느덧 3라운드 종반을 맞이하고 있는 강해서와 라무차.

두 사람은 1라운드의 방어적인 운영을 무색케 하는 공격적인 플레이로 누가 더 낫다 하기 어려울 만큼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삐-

그때 울리는 3라운드 종료 신호음

“깨끗한 수건! 얼음! 물! 마른 수건!”

“준비 완룝니다!”

“빨리 대기!”

힘겨운 3라운드를 끝내고 돌아오는 강해서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춘 스텝진들.

WFC 296. 헤비급 타이틀전은 이제 길어야 10분 남짓이 남았을 뿐이었다.

**

“...”

숨을 거칠게 몰아쉴 체력도 아까웠다.

조용히. 최대한 몸에 힘을 들이지 않고 깊고 온전한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것에만 집중했다.

“잘하고 있어. 해서야!”

“저쪽도 지쳤을 거다. 잘 하고 있다.”

지금이 몇 라운드가 끝난 거지? 3라운드인가?

왜 아직 3라운드지? 하루 종일 싸운 것 같은데?

의자에 앉으면 그대로 다리가 풀릴 것 같아 케이지에 등을 기댄 채 반대편 세컨진을 노려다 봤다.

두호 형과 필승 형 등이 몸에 묻은 땀과 피 등을 닦아내주고 입을 헹굴 물을 건네줬지만 나는 그저 멍한 상태였다.

‘대체... 어떻게?’

“두호 형.”

“어?”

“저. 많이 때렸죠?”

“당연하지. 네가 저놈보다 배는 더 많이 때렸을 거다.”

그렇죠? 내가 생각해도 내가 더 많이 때린 것 같거든.

그런데 어째서. 어떻게.

“라무차는 어떻게 저렇게 서있는거죠? 저는 진짜 그냥 주저앉고 싶은데.”

“...”

분명 3라운드 중에도 정말 제대로 타격이 들어갔던 적이 있었다.

라무차의 의식을 끊어냈다고 생각했을 만큼 깔끔하게 들어갔던 펀치.

하지만 라무차는 끝끝내 쓰러지지 않았고 더욱 흉포하게 내게 달라붙어 소모전을 펼쳐갔다.

“... 이제 와서 낡아버린 정신론을 이야기 할 생각도 없고. 근성이니 소중한 것을 위한 마음이니. 그런 말을 할 생각도 없다.”

그때 들리는 안 코치님의 차분한 목소리.

“그저.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 그것 뿐일 거다.”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

“해서 너도. 지금 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것 아니냐. 맞고. 다치고. 피 흘리는 모습을. 그런데 거기에 더해지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그건 싫을 것 아냐.”

“...”

멍했던 정신이 조금 개운하게 깨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 지금 엄청 맞았지?

“필승 형. 저 지금 얼굴 어때요?”

“...어떻긴. 완전 호빵맨이 형님 할 정도로 퉁퉁 부었지.”

“하하...”

이거.

아름이가 걱정하겠는데.

이번 시합 끝마치면 같이 부산에 부모님 뵈러 가자고 할랬는데.

아버지랑 엄마도 시합 보고 계실까? 지난번에 듣자하니 스포츠온 TV 결제하셨다는 것 같던데.

지금 안보고 계셔도 나중에 너튜브나 이런 걸로 보겠지?

아... 한국 사람들도 다 보고 있겠구나. 나중에 커뮤니티에 이상한 짤방 돌아다니면 어쩌지?

한번 시작된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이질 않았다.

-삐-

그 와중에 4라운드의 시작을 알리는 알림 음이 울렸고.

-짜아악!

데뷔 이후 처음으로 안 코치님의 등짝 스매시가 내 등에 작렬했다.

“지더라도 멋있게. 이긴다면 더 멋있게.”

“...넵!”

다행히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여전히 다리는 무겁고 집중력은 바닥이었지만.

‘여기 체육관이 나랑 안 맞는 건가.’

미첼과의 미들급 타이틀전 때도 컨디션 난조로 난투를 벌였었는데 결국 오늘도 데뷔 이후 첫 장기전으로 난투극을 펼치고 있었으니까.

WFC Apex는 앞으로 피해야지.

-쿵... 쿵!

저돌적이던 라무차의 스텝도 꽤나 둔중해졌다.

발걸음은 무거웠으니 그 안에 힘은 실려 있지 않았다.

-퉁.. 퉁..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

-우와아아아아!

-휘익. 휘이이-익!

집중력이 풀린 만큼 주변 객석의 함성과 호응들도 생생하게 귀에 들려왔다.

거 참 시끄럽네.

역시 여기 체육관이 나랑 안맞는거야.

-휘이익.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다짜고짜 왼발 프론트 킥을 차올리는 라무차.

그래도 넌 힘이 넘치나보구나?

-툭.

-휘익.

그의 프론트 킥을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오른손으로 툭 쳐낸 뒤 뻗어온 발이 회수되는 타이밍에 맞춰 라무차에 접근했다.

-쉬이익

그래고 그대로 뻗어낸 라이트 펀치.

뭔갈 보고 노리거나 한 게 아니었다.

셋업할 체력도 없어서 일단 펀치를 던진 뒤 라무차의 반응에 맞추어 대응하려 했던 것일 뿐.

-퍼억

“...?”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라이트 펀치는 라무차의 왼쪽 안면을 정확히 두드렸다.

“크윽-”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라무차.

그래. 너도 마냥 괴물은 아니었구나.

괜찮은 척 했지만 이미 너도 바닥을 쳤던 거야. 이런 허접한 펀치에도 반응을 제대로 못할 만큼.

이럴 줄 알았으면 미끼 식으로 던지는게 아니라 온 몸을 실어 펀치를 날릴 걸 하는 후회가 잠시 들었지만.

-쒸이이익!

열려있는 내 왼쪽 상체를 향해 날아드는 라무차의 라이트 펀치를 피하느라 후회를 오래 가지고 갈 틈은 없었다.

-퍼억!

피해낸다고 피해냈지만 라무차의 라이트 펀치는 내 머리 위족을 스치듯 때리고 지나쳤다.

정타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데미지를 줄 수 있을 정도의 펀치.

‘설마. 때리려고 일부러 맞은 건가?’

조금 전의 미끼 성 라이트 펀치.

아무래도 라무차 저 미친놈은 대놓고 맞은 뒤 대놓고 때리려는 심산이었던 것 같았다.

‘징한 놈...’

그러면 이것도 한번 맞아봐라.

-후우웅!

라무차의 펀치를 피해내느라 숙였던 상체를 왼쪽으로 비틀며 바로 세웠다.

그와 함께 아래에서 위로 올려쳐지는 라이트 바디 훅.

-뻐어억!

‘이번에도 들어갔다!’

아까와는 달리 작정하고 복싱과 태권도의 메커니즘을 모두 섞어 회전력을 실어 꽂아 넣은 펀치였다.

비록 내가 힘이 많이 빠졌다지만 누구든 이 펀치를 맞고 버틸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정도로 혼신의 힘을 다했으니까.

“큭!”

펀치가 바디에 꽂힘과 동시에 들리는 억눌린 신음.

이 괴물은 이 상황에서도 쓰러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휘익

그래서 나는 피니쉬를 위해 왼손 오버핸드 펀치를 라무차에 날리려 했고.

-쩌어억!

-휘청!

-쿵!

나는 라무차의 오른발 로우킥을 왼쪽 대퇴부에 제대로 얻어맞고는 균형을 잃은 채 바닥에 쓰러졌다.

“...”

순간 뭐 됐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대로 지나?

아름이한테 뭐라고 하지?

카이서스도 보고 있을까?

텔론 회장은?

단 한 번의 패배만 있어도 내 상품 가치는 떨어진다 그랬나?

한국 팬들은? 내가 지면 모두 등을 돌릴까?

응원하고 박수 쳤던 사람들도 욕하고 손가락질 할까?

두호 형이나 필승 형은? 창섭 형과 안 코치님은?

팀 피스트 사람들은 어쩌지?

아. 오늘 처음 기태네 밴드 음원으로 입장했는데. 이렇게 지면 괜히 미안해지는 거 아닌가?

재현이랑 준현이는 뭐라고 할까?

휴식 시간 때처럼 찰나의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났다.

“...”

그리고 후속 공격을 들어오지 않는 라무차.

‘!’

그 또한 내 바디 샷에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던 듯 했다.

-벌떡!

그걸 깨닫자마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후우...”

‘제발 좀 쓰러져라. 이 괴물 같은 놈아.’

하마터면 이번 다운에서 시합을 포기할 뻔 했다.

아름이와 부모님의 얼굴.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이 마치 힘을 주듯 날 일으켜 세웠다.

-쿵. 쿵!

라무차 또한 이제야 어느 정도 충격을 해소하고 체력을 회복했는지 다시 날 향해 걸어왔다.

정말 짐승 같은 선수였다.

상대방을 물어뜯는 법 밖에 모르는 굶주린 짐승.

-쿵. 쿵. 쿵. 쿵쿵쿵!

-후우웅!

마지막 힘을 짜내는지 갑자기 전진 속도를 높이더니 다시 한 번 불도저처럼 날 향해 달려드는 라무차.

-퍼어억!

나는 그의 돌진을 미처 피해내지 못했다.

그럴만한 체력도 집중력도 없었으니까.

-철컹!

그의 몸에 밀려 케이지 끝. 철창까지 밀려났다.

-퍽! 퍽!

내 가드 위를. 가드가 없는 맨 몸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무차별적으로 때려대는 라무차.

“크흡!”

가드 위로 펀치가 날아들 때는 괜찮았지만 한 번씩 가드가 비어있는 몸통을 때릴때는 숨이 턱턱 막혔다.

“흐으읍!!!”

순간 내 호흡이 흐트러지고 가드가 떨어진 순간.

라무차는 본능적으로 그 틈을 읽어내고 마무리를 하려는지 억눌린 기합성과 함께 오른손을 크게 휘둘러왔다.

“흐읍!”

-찌릿. 찌릿. 찌릿.

그에 맞춰 나 또한 마지막으로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펀치 때문인지 집중모드 남용 때문인지 모르겠다.

중요한 건 어찌됐든 이번이 마지막일 거라는 거였다.

-후우우웅!

라무차의 검은 얼굴은 곳곳이 퉁퉁 부어 있었으며 검은 피부에 대비되던 흰 눈동자는 온통 핏발이 바짝 서 있었다.

내 몰골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

-휘이이익!

라무차의 라이트 펀치를 살짝. 아주 살짝 피해냈다.

초반 라운드처럼 라무차가 궤적을 수정한다면 그대로 끝날 수도 있는 상황.

나름대로의 도박이었다.

-스파아아앗!

하지만 다행히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는 라무차의 라이트 펀치.

‘이제 끝내자!’

여기에 카운터를 넣으면 이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뻐억!

복부에서 전해지는 강렬한 충격.

라무차의 왼발 니킥이 내 복부를 두드렸다.

“...”

순간 아득해지는 의식.

마지막까지 승리를 위해 악을 써봤지만, 결국 여기까지인가 싶었다.

“...!”

그때 머릿속을 스친 건 아까 전에 떠올렸던 상념들.

그리고 얼굴들.

-뿌드득.

이번 시합으로 느꼈다. 나 또한 짊어지고 있는 게 적지 않다는 걸.

이게 투쟁심인지. 오기인지. 미련함인지. 난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이딴 생각을 할 힘이 있다면 아직 주먹 한번정도 더 뻗어낼 힘이 있다는 게 아닐까.

의식을 잃고 KO를 당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포기를 할 수는 없잖아.

-쒜에에엑.

니킥에 고통스러워하던 날 향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라무차의 라이트 펀치.

-휘이익.

-찌릿. 찌릿!

전보다 더 고통스러운 두통.

집중력의 한계인지 순간 그의 펀치가 느렸다 빨라졌다를 반복했지만 결국 라무차의 펀치를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이제. 제발. 좀. 쓰러져라!!!’

지기 싫은 건 너만이 아니야. 나도 이렇게 지기는 싫다고!

-떠어어억!!!

다리도 몸도. 지탱할 힘이 없었기에 철창에 기댔던 몸을 튕겨내며 그 힘까지 긁어모은 마지막 펀치였다.

-쿠우우웅!

그리고 드디어 쓰러진 라무차.

-스탑! 스탑!

순간적으로 설마 또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심판의 스탑 사인이 들려옴과 동시에 온 몸에 힘이 턱 풀리는 것 같았다.

-툭

“으아아아아아아!!!!!!!!!!!!!”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도. 양 팔을 펼쳐 하늘을 향해 만세를 외치며 크게 울부짖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4라운드 3분 37초.

WFC의 비스트. 헤비급 챔피언 라무차를 격침시키고 3체급 제패를 달성하는데 걸린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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