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_WFC 296 >
1.
WFC Apex.
라스베이거스에 위치한 종합격투기의 총본산이자 WFC의 메인 체육관이기도 한 이곳은 사실 내게 썩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는 않았다.
‘졸전을 펼쳤으니까.’
WFC 274.
나는 미첼과의 미들급 타이틀전을 이곳에서 가진 바 있었다.
당시를 떠올려보면 감량에 실패하다시피 했고 컨디션도 바닥을 쳤던 상황이라 나름대로 핀치에 몰려 졸전이라 부를만한 시합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집중력과 체력이 저하되어 평소 기량의 반도 내지 못했었지만 그래도 얻은 건 많았던 시합.
‘이번 기회에 좋은 시합 내용으로 덮어버려야지.’
미들급에 이어 헤비급 타이틀전.
-꾸욱.
지난번 이곳에서도 나는 승자였으며. 이번 시합에서도 나는 승자일 것이다.
말아쥔 손아귀에 힘을 주며 그렇게 다짐했다.
“뭐해? 안가고?”
“아. 네.”
어쨌든 WFC 296 시합은 아직 한 달도 더 남았다.
다짐대로 훌륭한 승리의 기억을 덧씌우기 위해서는 일분일초를 아껴서 훈련에 매진해야겠지.
“여기도 겨울엔 살만하네.”
“대신 저녁에 나가면 얼어 죽는다. 태양이. 조심해?”
“넵!”
차례로 필승 형 창섭 형 그리고 태양이의 대화.
1월의 라스베이거스는 폭염의 도시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쌀쌀한 날씨를 자랑했다.
평균 최고 기온이 1도 남짓. 최저기온은 영하 14도까지 떨어지며 사막 도시답게 큰 일교차를 보여주는 라스베이거스.
“그래도 한국보단 훨씬 나은데요? 낮엔 그렇게 춥지도 않고.”
“저녁에 나가봐라. 저녁에. 얼어 죽어.”
현지 체육관에 짐을 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팀원들.
어느새 이런 풍경이 익숙했다.
뭐랄까. 일종의 전우애까지 생길 것 같은 풍경이랄까.
“뭐해 인마? 빨리 짐 풀고 몸 풀어야지.”
“넵!”
이번에는 두호 형까지 함께한 코칭팀.
미리 섭외해둔 현지 코치들과 훈련 스케줄을 다시 한번 점검하는 동안 나는 긴 비행으로 굳어버린 몸을 풀며 컨디션을 끌어올렸다.
“흣-차!”
시차 적응 및 시합 날짜와 시간에 맞춰 최고의 컨디션을 세팅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컨디셔닝 팀이 괜히 있는 게 아닌 만큼.
그래도 다행인 건 헤비급으로 넘어온 뒤로는 감량이라는 리스크가 없다는 것.
“해서야. 몸 다 풀었으면 이쪽으로 와봐라.”
“...넵!”
대신 감량만큼 무서운 두호 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
WFC NEWS.
WFC의 최신 트렌드를 다루며 영상과 사진 및 기사들을 다루는 전문 매체였으며 FOX 채널과도 연계해 WFC의 핫이슈들을 팬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와우! 실물로 보다니! 정말 반가워요!”
“라무차! 오랜만이에요! 오우 미스터 강! 지저스! 실물 맞죠?”
그리고 오랜만에 실내 스튜디오에서 진행되는 팟캐스트 형식의 인터뷰에는 이번 WFC 296의 메인 카드이자 전 세계 MMA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주인공들. 강해서와 라무차가 등장했다.
“두 분은 저쪽에 앉으시고. 네. 와우. 헤비급 선수 두 분이 들어오니 스튜디오가 꽉 차는 것 같아요.”
팟캐스트 맥&데이나‘s 를 운영하는 맥과 데이나는 강해서와 라무차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둘 다 키와 근육이 같은 사람이라는 종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기 때문.
“우선. 이번 WFC 296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데요. 라무차? 이번 시합을 준비하면서 특별한 게 있었나요?”
“특별한 거? 그런 게 어딨어?”
“컴온- 제발. 전 세계 팬들이 기대하고 있다구요.”
“흐음...”
맥의 질문에 잠시 고민을 하는듯한 라무차.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한 게 없어. 그냥 똑같다고. 상대 선수를 최대한 빨리 케이지 바닥에 눕혀버리는 거. 그걸 연습할 뿐이야.”
“이번 상대는 WFC 미들급과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을 달성한 강해서 선수라구요. 그가 특별하지 않다는 겁니까?”
“특별할 거 뭐 있어? 이 애송이는 시합이 시작되면 날 피해서 도망치다 결국 바닥에 쓰러지게 될 거야.”
맥의 질문에 쾌활하게 웃으며 답변하는 라무차.
그는 진심으로 강해서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반대로 미스터 강에게 물어보죠. 미들급과 라이트 헤비급을 거쳐 3개 체급 제패라는 기록적인 순간을 앞두고 있는데요. 이번 WFC 296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게 있습니까?”
이번에는 강해서에게 돌아가는 데이나의 질문.
“하하. 사실 라무차처럼 아무런 준비를 한 게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사실 저는 준비한 게 있어서요.”
“오! 어떤 특별한 준비가 있었을까요?”
“우선. 피부샵을 끊었어요. 이번 시합은 시합 전 기자회견과 시합 후 인터뷰도 예정되어있는 만큼 피부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네?”
“아. 그리고 이번에 치과를 다녀왔네요. 치아 미백을 했거든요.”
“... 이전 WFC 296 시합에 관한 준비...를 물어봤습니다. 강해서 선수.”
“네. 이게 그 준비인데요?”
익살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리는 강해서.
그제야 맥과 데이나는 그의 말뜻을 이해했는지 폭소하기 시작했다.
“연초 최대 이벤트에서 팬 분들과 만나는데. 이것보다 중요한 준비가 있나요? 붓기도 빼고 건강한 미소로 팬들을 찾아봬야죠.”
“그럼 라무차를 위해 준비한 건 없을까요? 미스터 강?”
“아! 라스베이거스에 유명한 마사지 샵을 알아냈습니다. 그를 위해서 그곳을 추천해줄 수 있어요. 거기가 특히 붓기나 멍을 잘 빼준다고 하더라구요. 이번 시합이 끝나고 찾아 가보면 좋을 거예요.”
이제는 아예 큰소리로 웃기 시작하는 맥과 데이나.
강해서의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덤덤한 표정이 압권이었다.
“이봐. 애송이. 그런 소리는 농담이라도 하지 말라고.”
이에 라무차의 낯빛은 꽤나 흥분했는지 검은 얼굴임에도 시뻘겋게 달아올랐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마사지샵이 마음에 안 들었나? 그러면 이번에 내가 갔던 치과를 소개해줄까? 이빨 몇 개정도 나가도 거기서 다 알아서 해줄 거야. 피부샵도 추천해주고 싶은데... 음... 너한테는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
“뭐?! 이런 애송이 자식이!”
유들유들한 강해서의 태도에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 같이 움직이는 라무차.
“워. 워. 진정하세요. 진정하세요. 이 모든 건 이번 주말에 풀어야죠?”
“저 애송이는 이번 주말 이후로 두 발로 걸어 다니지 못할 거야! 내가 저놈의 다리와 혀를 뽑아버리겠어!”
“와우. 라무차에게 혀와 다리를 구분할 수 있는 머리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놀랍네요.”
연초 최대 이벤트인 WFC 296.
라무차와 강해서의 타이틀전이 걸린 이번 이벤트는 역대급 인기와 관심을 끌었기에 이번 팟캐스트에도 두 선수가 초대해 간단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리고 결과는 말 그대로 대박.
이날 두 선수의 트래쉬 토크 인터뷰는 어마어마한 조회 수를 기록했고, 여러 너튜버들을 통해 재가공 되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라무차는 흥분하고 갓-해서는 넘모 차분한거 아님?
┕강해서 도랏ㅋㅋㅋㅋ 피부괔ㅋㅋㅋㅋ마사지샵ㅋㅋㅋㅋㅋㅋ 쟤는 한번씩 볼때마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음ㅋㅋㅋㅋㅋ 흑형한테 미백마사지 추천해줄라그라넠ㅋㅋㅋ
┕최창우 피셜 강해서의 트래쉬 토크 뿌리는 자기라더라ㅋㅋㅋㅋ
┕최창웈ㅋㅋㅋㅋㅋㅋㅋ 실력없이 트래쉬 토크만 하는 거랑 강해서랑은 다르지 ㅋㅋㅋㅋ 아. 강해서랑 학센이랑 한번 붙어봐야 트래쉬 토크의 끝장을 달리는 건데
┕학센 부들대고 있던데 ㅋㅋㅋㅋ최대 이벤트 갓해서한테 뺏기고 미들급 토너먼트 결승전 3월달로 밀려섴ㅋㅋㅋ
┕어딜 2체급 학센 따위가. 종합격투기 3체급 석권이면 복싱으로 치면 거의 8-9체급 아니냐? 전설이다 전설
┕근데 라무차 저렇게 도발해도 됨?ㅋㅋㅋ 강해서 ㅈㄴ 맞는거 아님?
┕강해서 몸뚱이 봐 ㅋㅋㅋㅋ 저게 한국인 피지컬 맞음? 동양인 피지컬이 아님 그냥
┕이런 시합에선 제발 도핑테스트 안했으면. 그냥 무탈하게 조용히 보고싶다
┕시합 라스베가스에서 하는거 개꿀이지 않냐 ㅋㅋㅋㅋ 일요일 오후에 시합볼 수 있어서 넘모 좋음
┕빨리 계체 이벤트랑 시합전 기자회견 했으면 좋겠닼ㅋㅋㅋㅋㅋㅋ 벌써부터 꿀잼각임ㅋㅋㅋ
당연하게도 한국 인터넷 또한 시끄럽게 불타고 있는 상황.
하지만 정작 뜨거운 주제의 주인공인 강해서는 스마트 폰을 볼 틈도 없이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와... 저게 진짜 사람인가 싶다.”
“...선배님. 저런 피지컬이 아니면 WFC 진출 못하는겁니까?”
“아니. 저놈이 비정상적인 거다.”
강해서의 훈련을 곁에서 지켜보던 필승과 태양. 두호는 모두 할 말을 잃은 채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후욱. 후욱...”
스스로 집중 모드라고 이름 지은 상태.
인지력이 극단적으로 올라가지만 반대로 심박 수가 떨어지는 부작용이 있어 체력에 심대한 무리를 주는 상태를 유지한 채 훈련을 지속하는 강해서.
-펑. 퍼퍽. 텅! 뻐억!
그의 미트 치는 소리만이 리드미컬하게 체육관을 채웠는데, 패드워크를 돕는 코치 수만 3명이었다.
“허억. 허억... 스-읍... 후...”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듯한 체육관.
강해서는 긴 호흡을 들이쉬며 온몸으로 산소가 퍼져나가는 걸 느꼈다.
’확실히. 이 훈련을 시작하고 나서 체력과 집중력이 말도 안 되게 좋아졌다.‘
한국에서 최두호와 함께했던 훈련에서부터 성과를 얻었던 ’집중 모드‘의 훈련 접목.
그전에는 집중 모드의 효율이 너무 좋지 않아 오히려 이후 훈련에 방해가 될 정도였기에 실전에서만 간간히 써먹는 정도였다면, 지금은 하루 훈련 중 몇 타임 정도는 꼭 집중 모드를 유지한 상태로 진행하고 있었다.
그 결과는 지속시간의 놀라운 발전. 그리고 급격한 체력과 근력의 성장으로 돌아왔다.
’체력을 빠르게 소모하고 몸 안의 산소공급에 차질을 준다. 이건 마치...‘
고산지대 훈련을 하거나 산소통제 마스크를 끼고 훈련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였다.
아니, 해당 훈련들의 경우 산소량이 제한되기는 하나 몸속 혈행의 속도는 제한되지 않은 데 반해 ’집중 모드‘를 이용한 훈련은 심박 수와 혈행을 늦춤으로써 더욱 양질의 효과를 뽑아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쉬운 건. 이 상태로 하루종일 훈련을 할 수 없다는 거지.‘
너무 늦게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집중모드의 지속시간이 늘어가고있지만 이젠 진짜 WFC 296 시합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다.
집중모드는 고사하고 이런 고강도 훈련도 그만둬야 할 판.
“해서야.”
그런 강해서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을 건네는 최두호.
“이제 일주일도 안 남았다. 컨디셔닝 훈련만 하는 게 어떠냐.”
“하하. 그래야죠. 안 그래도 그 생각 하고 있었어요.”
원래 훈련 스케줄대로라면 이틀도 전에 이런 고강도 훈련은 그만뒀어야 했다.
다만 ’집중 모드‘ 상태에서의 훈련으로 효과를 보기 시작하면서 그 성취감에 강해서가 고집을 피워 이틀간 고강도 훈련 스케줄을 더 늘렸을 뿐.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정말 그만둬야 할 만큼 시합까지의 시계가 초읽기 상태로 돌입했다.
“오픈 워크아웃은?”
“라무차가 엄청 벼르고 있다죠?”
“뭐. 그렇다고는 하더군.”
“그러면 안 갈래요.”
어차피 계체 이벤트 때 시합전 기자회견이 예정되어있었다.
굳이 오픈 워크아웃에 참가해서 또 부딪혀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편이. 더 약 오를 테니까요.”
강해서를 벼르고 있던 라무차는 강해서의 오픈 워크아웃 불참에 약이 바짝 오를 터였다.
“계체 이벤트 때. 그렇게 약이 바짝 오른 라무차를 톡. 건드려주면.”
손으로 뭔가 터지는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악동처럼 웃어 보이는 강해서.
“정말. 넌 왜 그렇게 상대 선수를 도발하지 못해 안달인 거냐?”
“에이. 먼저 도발한 건 라무차라구요.”
최두호는 모르겠지만, 그의 미들급 토너먼트 때 라무차와 빌리가 체육관까지 찾아와 강해서를 도발했던 적이 있었다.
“말끝마다 애송이. 애송이. 이참에 애송이 주먹이 얼마나 매운지. 한번 맛보여 줘야죠.”
라무차.
WFC 296.
그리고.
헤비급 챔피언 벨트.
아주 그냥 딱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