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_광고촬영 >
1.
“선배님! 여깁니다!”
어.
알겠으니까 제발 목소리 좀 낮춰줄래?
나는 촬영장의 다른 사람들 눈을 의식하며 목소리 좀 낮추라고 눈치를 줬지만 태양이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휴우...”
오늘 촬영은 지난번 찍었던 화장품 촬영과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스튜디오에서만 촬영을 했고, 그나마도 대부분이 클로즈업 촬영이었던 화장품 광고. 심지어 땀을 흘리거나 메이크업을 고치고 옷을 갈아입는 등의 소요도 없었다.
반대로 오늘 촬영할 운동화 광고는 실내 체육관 컨셉의 촬영 스튜디오와 야외 컨셉의 스튜디오까지 이어지는 촬영이었고, 당연하게도 땀도 흘리고 옷도 갈아입어야 하는 스케줄이었다.
한마디로 혼자 와서는 불편한 점이 여러모로 많을 것이기에 함께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거기에 태양이가 낙점된 거다.
“선배님. 그래도 제가 예전에 모델일도 조금 해봤고 그래서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그래. 그래.”
그냥 아름이가 회사에 말해서 사람 붙여준다고 할 때 그거라고 할 걸.
괜히 나 편하자고 태양이 데려왔더니 뭔가 더 피곤해진 느낌이었다.
“선배님. 일단 여기서 대기하시다가 메이크업 차례 되면 메이크업 받으면 된다십니다.”
“고마워.”
“여기. 음료수 챙겨왔습니다.”
“쌩유.”
그래.
좋게 생각하자.
어차피 필요한 건 나대신 자질구레하게 움직여줄 사람이었다.
생판 남인 아름이네 회사 사람이나 창섭, 필승 형 보다는 만만한 태양이가 최고지.
“선배님! 메이크업 받으러 오라십니다!”
목소리 큰 것만 빼면 말이야.
“어머! 안녕하세요!”
스튜디오 한켠에 마련된 메이크업 부스.
담당 스텝으로 보이는 여성분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하하. 안녕하세요?”
마주 인사를 하며 메이크업 부스를 훑어봤는데 오늘은 운동화 광고인만큼 앞에 깔려있는 화장품들이 많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그때 들리는 또 다른 목소리.
부스 안쪽에서 한창 메이크업을 받던 오늘 광고의 또 다른 모델. 엘리였다.
“아. 네. 안녕하세요.”
나와는 거의 열 살 가까이 차이 나는 여성 아이돌 그룹의 멤버 엘리.
이번 촬영으로 알게 되었는데 현재 한국 돌판을 씹어먹고 있는 슈퍼 연예인이라고 했다.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네.’
우리 때 슈퍼 연예인이면 그냥 손아름이었는데.
시간은 물처럼 흘러 벌써 나와 아름이도 30대 중반이 되었고 모든 시장이 그렇듯 연예계도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있었다.
‘아니지. 벌써 일어났지.’
식스 테이크에 출연했을 때도 아름이가 메인은 아니었으니까.
예전 같았으면 어느 예능에 나가더라도 가장 주목을 많이 받고 질문도 많이 받았을 아름이가 식스 테이크에서는 구박도 받고 놀림도 받고 그런 이미지였다.
물론 고정멤버이니 친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연예인으로서의 주목도가 한창 치고올라오는 신인들에 비해 부족한 것도 있을 것이다.
“저...”
한창 메이크업을 받으며 혼자만의 공상에 빠져있는데 어느새 메이크업을 끝낸 엘리가 말을 걸어왔다.
“강해서 선수. 맞죠?”
“아. 네.”
본인이랑 같이 광고 찍을 상대방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별 이상한 질문을 다 하네.
“오늘 촬영 잘 부탁드린다구요.”
“아. 네.”
딱히 긴장했던 건 아니지만 생각보다도 더 가벼운 용건.
엘리의 첫 인상은 꽤나 비즈니스 적이고 차갑다는 이미지였다.
적어도 살갑거나 그런 스타일은 아니랄까. 하긴, 오늘 처음 본 사람이고 다시는 볼 일 없는 사람인데. 이정도가 당연한 걸지도.
어쨌든 스포티한 메이크업은 얼굴의 윤곽과 입체감을 살짝 살리는 정도에서 마무리 되었기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고.
“선배님. 연출부에서 메이크업 끝나면 바로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촬영 전에 기본 콘티 확인하고 동선 체크 한다고 합니다.”
“오케이. 고맙다.”
메이크업이 끝나자 본격적인 촬영에 돌입했다.
태양이는 생각보다 현장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 모델 일을 해봤다는 게 허튼소리가 아니었는지 예상보다 훨씬 빈틈없이 움직였다.
-그러면 바로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레디. 액션!
그렇게 들어간 광고 촬영.
실내 촬영은 크게 힘든 것 없었다.
샌드백을 두드리거나 웨이트 훈련하는 장면 등을 몇컷 찍으며 격투기 훈련 장면들을 촬영한 뒤 땀을 흘리며 운동화를 신는 장면이 끝이었다.
물론 여러 구도에서 다양한 각도와 조명으로 수차례 촬영했다지만 그리 어려운 촬영은 아니었다.
다음은 야외 촬영
아무래도 운동화다보니 야외에서 운동화를 신고 달리는 장면의 촬영이 빠질 수가 없었다.
엘리는 여기서부터 등장하는데, 실내 촬영은 내가 메인이었다면 야외 촬영은 엘 리가 메인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아까 동선은 미리 알려드렸죠? 동선 안에서 자유롭게 한번 움직여보시면 됩니다.”
첫 번째 야외 촬영지는 빈티지한 느낌이 나는 스튜디오 옥상이었다.
운동화가 클로즈업 되면서 자유롭게 뛰고 웃는 장면을 촬영한다고 했다.
다음으로는 밑으로 내려가 체육관 외부의 산책로를 가볍게 달리는 컨셉의 촬영을 끝으로 광고 촬영은 마무리가 될 예정이었다.
‘생각보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는구나.’
겨우 반나절 정도 걸릴 듯한 광고 촬영.
야외 촬영도 실내 촬영처럼 별달리 문제 될 건 없겠다 싶었다.
“꺄아!”
엘리의 날선 비명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뭐야! 무슨 일이야?”
“옥상 난간이 부서진 것 같아요! 엘리 씨가 밑에...”
“뭐야 빨리 확인해봐!”
촬영 팀들은 난리가 났고 나 또한 무슨 일인가 싶어 비명소리가 들린 곳으로 뛰어갔다.
“야! 빨리 끈이든 뭐든 가져와봐!”
“어떡해!”
빈티지한 느낌의 스튜디오 옥상.
상업시설이 아닌 스튜디오다 보니 건물 관리가 부실했나보다.
엘리가 무심코 기댔던 옥상 난간이 부식되었는지 부서졌고 엘리는 그 덜렁거리는 난간의 끝을 잡고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사다리나 아니면 밑에서 받아줄 뭐 없습니까?”
“스튜디오에 충격 방지용 매트 같은 거 있는데. 그거라도 갖다 깔까요?”
촬영 팀들도 모두 멘붕이 왔는지 우왕좌왕 하며 행동보다 말만 앞서고 있는 상태.
스튜디오 건물은 3층 건물이었고, 지금 엘 리가 매달려 있는 곳은 옥상보다 조금 아래. 3층 천장정도의 높이였다.
이대로 떨어지면 결코 가벼운 부상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상황.
‘중요한건...’
난간에 매달린 엘리가 그리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거였다.
스텝들이 1층으로 내려가 매트를 꺼내서 밑에 까는 동안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아무리 건강미 넘친다 해도 보통의 여성이 철봉 오래 매달리기를 한 손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이었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뭔가 더 재고 따지고 할 건덕지가 없었다.
엘리는 말할 힘도 없는지 고개를 숙이고 난간을 붙잡는 게 다였는데 그 팔도 파르르 떨리는게 그리 여유있어보이지 않았으니까.
“선배님?”
“태양아. 옷 좀 받아라.”
나는 태양이에게 윗옷을 벗어서 넘기고는 스튜디오 아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실외기 렉이 있다. 3층과 2층 사이에 약간 튀어나온 벽돌도 있고.1층 입구 쪽에는 지붕이 있어.’
스튜디오 건물은 전체적으로 매끈했기에 벽을 집고 내려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다만 3층과 2층을 구분 짓듯 길게 띠 형식으로 둘러져 있는 튀어나온 벽돌이 있었고, 엘리가 매달려 있는 곳에서 꽤나 먼 곳이지만 1층입구 위로 삼각형으로 솟은 지붕이 있었다.
“어쩌시려구요 선배님!”
“어쩌긴 뭘 어째.”
일단 사람은 살려야지.
12월 말의 추운 날씨.
다행히도 실내 촬영 때 충분히 몸을 움직여두어서 따로 워밍업을 할 필요는 없었다.
“엘리 씨. 내말 들려요?”
“...”
대답은 없지만 미세하게 끄덕이는 고갯짓이 보였다.
“지금 제가 뛸 거거든요. 갑자기 제가 덮쳐도 놀라지 마세요?”
“...”
이번에는 대답도 끄덕임도 없었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라 통보를 하기 위한 말이었으니까.
“아니... 강해서 씨!”
“잠시만요!”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말리기도 전에 나는 엘리가 매달려 있는 곳 바로 위에서 뛰어내렸다.
-스으으읍
이제껏 내가 말 했던 ‘최고 수준의 집중 상태’는 잘못된 표현이었다.
그건 그냥 집중 상태일 뿐이었고 최고 수준의 집중 상태는 바로 지금 수준은 되어야 붙일 수 있는 말이었다.
옥상에서 뛰어내려 낙하하는 짧은 순간. 엘리의 팔과 몸. 그리고 밟아야 할 층간 경계 벽돌까지. 정확하게 캐치를 하고는 몸을 움직였다.
-텁!
떨어지는 와중에 엘리의 몸을 왼팔로 캐치하고.
-투욱.
2층과 3층의 경계를 나누는 벽돌 띠에 왼발로 안착하며 충격을 아래로 분산시켰다.
-타악. 타아악. 타악.
그리고는 발바닥과 발 끝 하나하나에 감각을 집중한 상태로 벽돌 띠를 밟고 1층 입구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말이 띠를 밟고 뛰는 거지 실제로는 거의 벽을 딛고 달리는 것과 별 차이가 없을정도로 벽돌 띠는 얇았다. 그냥 서서 균형을 잡으라고 해도 잡을 수 없을 정도.
나는 몸이 지면과 거의 60도에서 45도 정도가 될 때 까지 최대한 벽돌 띠를 밟는 힘의 방향을 아래로 두며 달렸고.
-타아악! 쿠웅!
마침내 추락 직전에 크게 점프해 1층 입구 지붕으로 내려설 수 있었다.
삼각형 지붕이라 경사면이 있어 조금 위험하긴 했지만 집중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덕분에 큰 문제는 없었다.
“헐!!! 대박! 방금 뭐야!”
“야! 놀라지 말고 빨리 사다리! 사다리 가져와!”
“꺄악! 살았어! 살았어!”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며 집중력 모드가 풀렸다.
“휴우...”
솔직히 위험했다.
사실 나는 스튜디오 옥상에서 뛰어내리더라도 크게 다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에 과감하게 몸을 던질 수 있었다지만 엘리 씨를 다치지 않고 구하는 것 까지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가만 놔두는 것 보다는 훨씬 경미한 부상으로 구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아무 문제 없이 구해낼 수 있을줄이야.
“저어...”
내 왼 품속에 안겨있던 엘리 씨의 입이 열렸다.
이제 조금 진정이 된 걸까.
“이, 이것 좀 풀어주시면...”
“지금 여기 경사가 조금 있어서요. 스텝들이 사다리를 가져올 때 까지만 조금만 기다리시죠.”
“...네...”
많이 놀랐는지 목소리가 아주 기어들어갈 것 같았다.
12월 날씨가 많이 추웠는지 귀도 볼도 목도 빨갛다.
이러다 동상 걸리는 거 아냐?
어쨌든 이날의 소란은 큰 피해 없이 넘어갔지만 이후 촬영 스케줄은 모드 캔슬되었다.
우선 엘리 씨가 너무 놀랐다는 것과 함께 촬영을 할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라는 게 가장 컸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현장 체크를 더 꼼꼼히 했어야 하는데...”
“아니에요. 사고인데요 뭐.”
“그리고... 촬영을 떠나서 감사합니다. 해서 씨가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났을거에요.”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거죠. 제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결국 이날 촬영은 재개되지 못했고, 광고 연출은 실내 촬영분만을 살리는 방향으로 가겠다고 했다. 나는 이제 현지 훈련을 위해 출국 일정이 빠듯해 추가 촬영은 할 수가 없는 처지라서 말이지.
“야외 촬영은 엘리 씨랑 따로 하면 되고. 편집으로 어떻게든 잘 엮어봐야죠.”
감독은 안타까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결국 반쪽짜리 스케줄을 끝마치고 태양이와 함께 체육관으로 돌아가려는데
“저...”
우리 차량 쪽으로 엘리 씨가 찾아왔다.
“저...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촬영이...”
많이 놀랐는지 창백한 얼굴로 사과하러 온 엘리.
“아니에요. 사고인데요 뭐. 많이 놀라셨을 텐데. 가서 안정 취하세요. 저희는 괜찮아요.”
어차피 광고비를 적게 받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추운데 야외 촬영 안하고 이득이지 뭐.
“이 은혜는... 제가 꼭 갚을게요.”
“일단 몸부터 추스르시고. 나중에 또 볼 일 있으면 그때 이야기해요.”
“감사합니다...”
추운데 오들오들 떠는 엘리를 돌려보내고 나서야 체육관으로 출발한 나와 태양이.
“선배님. 아까는 진짜 멋있었습니다. 무슨 무술영화 보는 줄 알았습니다! 와이어도 없는데 벽을 밟고 막 휙휙!”
“운전에 집중해 운전에.”
“크으. 그런 장면을 눈앞에서 보다니. 영상 촬영을 못한게 한입니다!”
“운전에 집중하라고.”
태양이는 체육관으로 향하는 내내 엘리를 구했던 장면을 이야기했고 결국 나한테 뒤통수를 한 대 맞았다.
필승 형이 내 뒤통수를 때릴 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어쨌든 약간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별 문제없이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던 광고촬영.
그것을 마지막 스케줄로 나는 전담 팀과 함께 한국을 떠나 라스베이거스 현지 캠프를 위한 길을 나섰고, 나는 이날의 광고 촬영이 이후 어떤 후폭풍을 몰고 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WFC 헤비급 타이틀전.
세계 최정상의 자리에 내 이름 석 자를 걸어두기위한 경기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