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_자만심 >
1.
“앉아라.”
필승 형의 말을 듣고 곧바로 찾은 안 코치님의 사무실.
“몇 가지 전달사항이 있는데. 우선은 라무차와의 헤비급 타이틀전 일정이다.”
“넵.”
"내년 2월 말. WFC Apex에서 치러지는 넘버링 이벤트다. 내년 상반기 최대 규모 이벤트가 바로 그때야."
"저는 괜찮습니다!"
라스베이거스에 위치한 WFC Apex.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 될 WFC의 센터와 같은 경기장이었다.
"겨우 두 달이다. 너무 짧지 않겠어?"
"지금 당장이라도 좋을 것 같은데요. 하하."
“라무차는 강한 상대다. 충분히 준비한 뒤 붙어도 늦지 않아.”
“이제껏 제가 상대했던 선수들 중 강하지 않은 상대가 있었나요. 언제나 그랬듯. 이기고 오겠슴다.”
“... 그래. 그럼 일단 이 건은 긍정적인 답변으로 회신하도록 하마. 다음으로는 지금 들어오고 있는 광고 협약건과 각종 매채 출연 섭외건인데...”
가장 중요한 용건이었던 라무차와의 타이틀전에 관한 내용 이후로도 안 코치님과의 회의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동양인 최초 미들급 라이트 헤비급 등 중량급 챔피언 달성.
복싱 헤비급 동양태평양 챔피언 격침.
앞으로의 행보는 WFC 헤비급 챔피언인 라무차와의 타이틀전과 위대한 복싱 황제 카이서스와 예정중인 복싱 이벤트 매치.
지금 나로 인한 국뽕은 치사량에 가까웠고,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가까운 나라인 일본과 중국에서도 ‘아시안 뽕맛’에 취해 나를 섭외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실제로 오늘 확인한 출연제안서의 절반 이상이 중국과 일본 쪽 방송이나 매체였다.
일본인 종합격투기의 종주국. 혹은 이종격투기의 탄생지라고 자칭할 정도로 MMA 시장에 높은 관심도가 있는 나라였다.
중국은 말할 것도 없이 떠들기 좋아하고 다양한 전통 무술들이 있는 나라이니만큼 나에 대한 관심도 또한 높았다.
어쨌든, K-드라마나 K-POP의 한류열풍을 넘어서 K-격투기의 한류열풍까지 일어날 정도로 아시아권 국가들에서 나는 좋은 평가를 얻고 있었고 그들은 나의 행보에 박수와 열광을 아끼지 않았다.
“그럼. 이렇게 정리해두도록 하마. 일단은 이걸로 끝이다. 지금도 문의는 계속 들어오고 있으니 조만간 정리해서 다시 한 번 알려주마.”
“넵!”
격투기 선수의 특성상 한국에 체류해있는 기간이 불특정하다보니 다수의 기업들은 내가 한국에 들어와 있을 때를 노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문의 및 방문 문의를 해왔다고 했다.
“몸값이 많이 오르긴 올랐나보네.”
연말 연초를 이용해 시간을 많이 뺐지 않는 선에서 광고 두 개정도를 찍어볼까 싶었다.
유명 스포츠 브랜드의 운동화 광고와 국내 뷰티 브랜드의 남성 화장품 광고.
둘 다 촬영타임이 짧고 촬영장 안에서만 진행되는 등 이동 동선이 없는 광고들이었다.
“어이. 강해서.”
안 코치님의 사무실을 나와 체육관으로 돌아가는데 뒤에서 필승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넵?”
“잠깐 좀 보자.”
“...?”
갑자기 따로 좀 보자며 날 불러내는 필승 형.
아무래도 아까전 체육관에서 두호 형과의 트러블을 알게 된 듯 했다.
“자. 들어와.”
“넵.”
체육관 입구 근처의 상담실.
안 코치님의 사무실과는 달리 외부 손님들을 맞이하는 방음이 잘 된 깨끗하고 넓은 공간이었다.
“뭐 죄 지었냐? 자리 앉아.”
상담실에 들어와서 자리에 앉지 않고 서있는 날 보더니 피식 웃으며 편하게 앉으라는 필승 형.
뭐. 필승 형 말마따나 내가 죄를 지은 건 아니었다.
물론 두호 형에게 말실수를 하긴 했지만 그 외에는 딱히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까 두호 형이랑 한판 했다며?”
“네? 아. 네.”
마음속으로는 떳떳한 척 했지만 막상 필승 형 입으로 ‘한판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괜히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어쭈? 너 지금 긴장하냐?”
“네?”
“푸하하. 뭐 잘못하고 혼나는 초딩도 아니고. 왤케 얼어있어?”
“제가 뭘요. 아무렇지도 않구만.”
“큭큭. 와. WFC 챔피언이 이렇게 새가슴이라니. 누가 상상이나 할까 싶다야.”
“아! 아니라니까요!”
나는 괜히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서 쓸데없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물론 필승 형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웃어댈 뿐이었다.
사실, 실제로 나는 필승 형의 호출을 받고 상담실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뭔가 잘못한 걸 들킨 어린아이마냥 괜히 불안하고 마음이 불편했었다.
“아놔. 역시 강해서. 넌 재밌는 놈이야.”
“...뭐가요.”
“힝싱 예상을 벗어나니까. 재밌을 수밖에.”
전 하나도 재미없거든요.
어쨌든 필승 형의 반응을 보아하니 뭔가 혼내거나 심각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따로 불러낸 건 아닌 것 같았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뭔가 편해졌다.
“네가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말마따나 네가 잘못한것도 아닌데. 널 혼낼 일이 뭐가 있어. 그것도 내가 무슨 자격으로.”
“...”
“그런데. 뭐. 너보다 나이가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형으로서 뭔가 해줄 말은 있을 것 같아서 따로 좀 불렀다.”
“네.”
썩 보기 드문 필승 형의 진지한 모습.
“두호 형이랑 부딪친 거. 이야기 들었어. 어떻게 된 건지도.”
“...넵.”
“네가 두호 형에게 뭐라고 했건. 훈련 커리큘럼으로 어떻게 부딪쳤건. 사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내가 끼어들 일도 아니고. 다만... 그 과정에서 조금 걱정되는 게 있긴 해.”
“과정에서 걱정되는 거요?”
“그래.”
나와 두호 형의 트러블 과정에서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다니. 그런 게 있었나 싶었다. 다시 되짚어봐도 딱히 문제될 건 없었는데?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혹시나 해서.”
“뭐가요?”
“보통의 사람들이. 어떤 목표를 달성하거나 높은 위치에 올랐을 때. 보통 사람들이 성취할 수 없는 걸 성취해 냈을 때. 그럴 때 생기는 마음.”
“...네?”
“자만심. 거만함. 혹은 그 비스 무리한 어떤거?”
“...”
자만심? 거만함?
내가 자만심에 빠져있었다고?
“네가 격투기 시작한지 올해로 5년차지?”
“네.”
“미들급을 시작으로 무패행진. 아시안 최초의 중량급 챔피언. 미들급 라이트헤비급 통합챔피언. 지금은 헤비급 타이틀에 도전중인 아시아의 자랑.”
“...”
“충분히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질만한 커리어야. 네가 쌓아올린 건 쉽게 폄하해서도 안 되고 폄하될 수도 없는 종류의 것이니까.”
필승 형의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나 스스로 몇 번이고 되묻고 있었다.
나는 과연 자만심에 빠져있었는가?
“다만, 내가 남들과는 다른 ‘어떤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커지다보면, 남들을 밑으로 깔아보게 되고 스스로를 더욱 특별하게 여기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 수가 있어. 내가 밑으로 깔아보는 사람과 날 비교하는 소리를 들으면 참을 수 없게 되고 나의 특별함을 사람들이 몰라주면 알아줄 때까지 스스로 뽐내게 되는 그런.”
“...”
“멀리 볼 것도 없다. 나도 그랬으니까. 한국인 중 아주 드물게 WFC 미들급에서 활약하면서 랭킹권 선수들까지 잡아내고 있었으니. 주변에서 대단하다고 치켜세워주고 내가 하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에 박수쳐주니 정말 내가 특별한 줄 알았지.”
지금 필승 형이 하는 말이 본인의 이야기인지 아니면 내 이야기인지 헷갈렸다.
“고작 나정도 커리어로도 그랬는데 너는 오죽하겠냐. 정말 역사를 다시 쓰다시피 하는 행보를 걷고 있잖냐. 같은 격투기 선수인 내가 봐도 경외심이 들 정도로.”
“...”
“사실. 두호 형이 존나 이상한거야. WFC 웰터급 챔피언이면 어딜 가든 대접받고 거들먹거릴 법 하거든. 사람이 저렇게 한결같고 겸손하고 그러면 좀 거부감 느껴지더라 나는. 인간미가 없어 인간미가.”
“그건 대단한 거죠. 욕할게 아니라.”
“푸하하. 입 꾹 닫고 있다가 두호 형 욕 하니까 입 여네?”
“...”
“그래. 두호 형이 대단한 거야. 피지컬. 격투 센스. 재능. 이런 걸 다 떠나서. 두호 형은 나도 정말 사람으로서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반면에 해서 너는...”
재미있다는 듯 웃어젖히던 필승 형은 이내 웃음을 그치고는 다시 진지한 얼굴로 날 바라보면 말을 이었다.
“너는... 압도적인 재능. 경이로운 피지컬. 그럼에도 ‘사람’으로서는 그냥 평범한 느낌이야. 그래서 옆에서 조금 지켜봐주고 도와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됐거든요?”
“큭큭.”
대충 할 말을 다 했는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필승 형.
“더 세세하게 묻고 트집 잡으며 말해봐야 네 마음속에 반발심만 생겨날거다. 넌 나보다 많이 배운 놈이니까 이정도만 말해도 알아먹겠지. 그치?”
“뭐래.”
내 마음과 감정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화두만 던져두고는 한발 빼는 필승 형.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형은 형이고 연륜은 연륜이구나 싶었다.
“난 먼저 나간다. 쉬다 나와라.”
“... 아까 훈련이 너무 빡셌어서. 조금만. 조금만 쉬다 나갈게요.”
-휙. 휙.
성의 없는 손짓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문을 닫고 나가는 필승 형.
“자만심이라...”
그리고 혼자 남은 나는 아까전 스스로가 던졌던 질문에 답을 찾았다.
“자만심이었구나.”
내 마음에 생겨난 독의 이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에 열광하고 박수치는 만큼.
내가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적이 없었던 만큼.
모든 게 쉬워 보이고 우스워 보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 마음속에는 자만심이라는 이름의 독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나보다.
‘특히...’
두호 형에게는 특히나 심하게 나타났다.
나는 두호 형을 ‘멘토’로 생각할 만큼 좋아하고 존경했다.
이건 과거형이 아닌 현재 진행형인 이야기였다.
그리고, 두호 형을 좋아하는 만큼 그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은 마음 또한 컸던 것 같다. 그런 상대에게 쓴 소리와 질책을 듣게되자 더욱 욱하는 마음과 반발심에 하지 않아야 할 말을 굳이 꺼내게 된 것이고.
“찌질하게...”
텔론 회장과의 만남 때도 그랬었던 것 같다.
내가 쌓아올린 것에 대해 의심을 받거나 부정을 당해서 화를 냈던 것이 아니라, 날 제대로 알아주지 않아서. 날 인정해주지 않아서 부아가 치밀었던 것 같았다.
‘내가 언제부터 박수와 찬사를 받는 게 당연한 놈이었다고.’
필승 형의 말을 듣고 최근의 내 모습을 돌아보자 오전 훈련으로 달아올랐던 몸이 싸늘히 식어버리는 기분이었다. 그 곳에는 내가 정말 싫어하고 혐오했던 군상이 내 탈을 쓰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다행인 건 이런 날 잡아주고 참아주는 형들이 있다는 것과 나 스스로가 이런 부분을 지적받아도 인정하지 못할 정도로 머저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읏-쌰."
예전에 브라이언에게 그랬던 것처럼.
잘못한걸 알고 있고 사과를 해야 한다면 스피드만큼 중요한 게 없지.
두호 형한테 한 대 제대로 얻어맞는 한이 있더라도. 자존심 세우지 않고 제대로 사과부터 하기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지. 오히려 한 대 제대로 맞아야 정신 좀 차리려나.”
훈련으로 지친 상태였지만, 상담실을 나서는 발걸음만은 오늘 하루 중 가장 가벼워진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