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_모전여전 >
1.
-웅성웅성
-저기 강해서 맞지?
-와! 씨바 손아름! 야! 나 방금 손아름 봤음!
-저 둘 아직 사귀는구나? 대박! 사진! 사진 찍어 사진!
거의 처음이다시피 한 아름이와의 공개 나들이.
"흠. 흠..."
나름 운동복 중 가장 깔끔한 놈으로 챙겨입고 위로 입은 외투도 제일 좋은 놈으로 걸쳤다.
다행히 11월 중순은 꽤나 쌀쌀했기에 방한 외투만으로도 어느 정도 코디가 커버되었다.
"..."
아름이도 이제야 우리가 공개 데이트 중이라는 걸 인지한 모양. 내 손을 꼭 잡고 별말이 없었다.
"저, 저기부터 들어가 볼까?"
"응? 으응."
최근 여의도에 새로 오픈한 백화점.
아름이는 모르겠고 나는 아예 초행길인 곳이었다.
'사람 많네.'
곧 연말 시즌이고 오늘이 주말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백화점은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어서오... 어머! 강해서 선수 맞죠?!"
정말 오랜만에 방문한 남성복 매장.
직원이 미소와 함께 인사를 하다가 나를 먼저 알아봤다.
"아. 네."
"저 진짜 팬이에요! 아! 옷 보러 오셨구나.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아름이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지 내게만 살가운 직원.
우리를 매장 안으로 이끄는데 여기가 백화점인지 동대문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원래 백화점이 이렇게 친절했었나?
"우와. 몸이 너무 좋으시다. 팔다리도 길고. 한국 사람 체형이 아니세요. 코트 찾으세요? 아니면 셔츠?"
내 몸을 은근슬쩍 훑어보며 여러 스타일의 최신 트렌드를 설명해주는 직원.
"아. 저 일단 셔츠랑..."
"조금 더 둘러보고 다시 올게요."
어쨌든 들어온 김에 옷 좀 보려고 했는데 내 말을 싹둑 자르고 들어온 아름이.
"응?"
"다른 브랜드들도 한번 둘러보자. 여기 옷도 괜찮은데 자기한테는 안 어울릴 것 같아."
"어? 어. 어어."
갑자기 자기라뇨?
나는 완강한 아름이의 손길에 이끌려 별다른 말도 하지 못하고 매장을 나와야 했다.
"아름아? 갑자기 왜 그래?"
"기분 나빠."
"응?"
"왜 남의 남자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그런담? 직원이 아주 불친절해."
"하하..."
"내가 연예인만 아니었으면 한마디 쏘아줬을 텐데. 치."
“하하하하하.”
평소에는 이런 모습을 볼 일이 별로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아름이는 꽤나 질투심이 있는 편이었다.
그나저나. 나 시합할 때는 MMA 팬츠 한 장만 입는 건 알고 있지 아름아?
너튜브만 검색해도 거의 헐벗은 내 몸을 찾아볼 수 있...
“그건 그거고! 나도 무대에서는 노출 있는 의상 입거든? 그러면 너는 누가 내 다리나 가슴 훔쳐보면 좋니? 인터넷에 내 수영복 사진들도 많으니 상관없어?”
“미친. 누가 감히!”
우리 아름이 다리랑 가슴을 훔쳐본다?
아주 그냥 작살나는 거지.
“그런 거라구.”
-쿡.
“이거. 내꺼. 오키?”
“...”
내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콕 찌르며 올려다보는 아름이.
흠. 흠.
새삼 느끼는 거지만. 아름이는 예뻤다.
바로 뒤 브랜드 홍보 사진 속 여자 모델보다 아름이가 훨씬 예뻤다.
단정하게 포니테일 형식으로 묶은 머리 덕분에 더욱 도드라진 하얀 목선과 잔머리들.
빤히 날 올려다보는 깨끗하고 맑은 눈동자는 살짝 밝은 갈색을 띠고 있어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줬다.
“...뭐해?”
“응? 아. 새삼 내 여자친구가 정말 예쁘구나 싶어서.”
“... 사, 사람들 많은데. 다 들린다구우.”
유난히도 피부가 흰 편이라 조금만 당황해도 목덜미와 귓불이 빨개지는 아름이.
“응? 방금전엔 나더러 내꺼라며? 그것도 다 들리지 않았을까?”
“... 이런다 이거지?”
볼을 부루퉁하게 부풀리는 게 살짝 위험한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내게 바투 서서는 까치발을 들고 귀엣말을 하는 아름이.
“나중에... 집에 가서 두고 봐.”
...
그 집은. 부모님 댁인 거지?
“당연히 우리 자기 집이지. 나 오늘... 자고 갈 건데?”
“...”
아. 왜...
오랜만에 부모님 집 가면 하루쯤 자고 와도 좋잖아...
*
“흠. 흠....”
백화점에서 당장 입을 옷들을 사고는 늦지 않게 겨우 도착한 아름이네 본가.
아름이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서는 이렇다 할 말이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얘. 넌 가서 앉아 있으라니까?”
“과일은 내가 깎는다구우.”
그도 그럴 게 아름이와 어머니는 주방에 들어가 계셨고 거실엔 나와 아버님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뵙는 여자친구의 아버님과 딱히 무슨 할 말이 있겠어... 말씀 걸어주실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래. 나이는 아름이랑 갑장이라고?”
“네? 아. 네!”
“부모님은 부산에 계신다고 들었는데...”
“네. 고향이 부산인 건 아니고 아버지의 일 때문에 부산에 살고 계십니다.”
“젊은 나이에 부모님과 떨어져서 고생이 많았겠어.”
“아닙니다. 하하.”
아름이의 아버지는 꽤나 과묵한 스타일이신 듯했다.
목소리도 중저음에 무게 있는 말투를 사용하시는 느낌이랄까.
“이이는 왜 안 하던 목소리를 깔고 그래? 불편했죠? 이것 좀 들어요.”
그때 구원자처럼 다가오신 어머니.
준비해둔 간단한 다과상을 들고 거실로 나오셨다.
“아유. 우리가 뭐라고 불러야 하려나. 해서 선수? 강 서방은 너무 나간 거겠지?”
“아! 엄마!”
“얘는. 동네 시끄럽게 왜 소리는 지르고 그러니? 어차피 너도 강 서방 데리고 오면서 다 생각하고 왔을 거 아냐?”
“... 그, 그래도...”
뭔가 부끄러운 걸 들킨 것처럼 내 눈치를 보며 어머니께 미약한 반항을 하는 아름이.
괜히 중간에서 내가 미안해졌다.
아름이와 내가 만난 지도 벌써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서로 나이도 있고 형편이 모자라지도 않으니 조금 더 건설적인 미래를 그려봐도 좋았을 텐데 아름이도 나도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그걸 외면해왔다.
내가 먼저 이런 부분은 확실히 해줬어야 했는데.
“저. 아버님. 어머님.”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자세를 고쳐잡고 무릎을 꿇었다.
“해, 해서야?”
아름이는 살짝 당황한 듯했고 어머님은 얼굴이 활짝 피셨다.
아버지는... 모르겠다. 표정이 없으셔서 무서워...
“저. 아름이 가볍게 만나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직업도 안정적이지 못하고. 위험한 직업이기 하지만... 그래도 아버님 어머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결혼을 전제로 아름이와 계속 교제하고 싶습니다.”
물론 지금 하는 말이 아름이와 사전에 협의가 되었던 부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나 말투로 보아.
그리고 아름이가 오늘 이 자리에 날 초대해준 것으로 보아.
우유부단하게 눈치만 보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 들었다.
“아유. 계속 교제라니. 사돈댁도 보고 빨리 날짜부터 잡아도 모자랄 판에.”
“아! 엄마!”
“아. 시끄러. 얘는 아까부터 왜 자꾸 소리를 지른담? 그래서. 너는 강 서방이랑 생각이 달라?”
“...”
“결혼하기 싫니? 우리가 반대해줘?”
“...아니...”
와.
어머니 강하시다. 아름이가 꼼짝을 못하네 아주 그냥.
“나도 우리 예쁜 딸. 억지로 시집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어. 그렇지만 좋은 사람이 있고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이왕 할 거 빨리해버리면 좋지? 빠르지도 않다 얘. 네 나이가 벌써 몇인 줄 아니?”
“요즘은 다들 늦게 하거든? 내 주변만 하더라도...”
“네 주변 말고 이 엄마 주변 좀 봐라. 다들 손주 본지가 언젠데 그런 말을 하니?”
“...”
이번에도 어머님의 승리.
“흠. 흠. 거. 해서 군도 있는데 너무 아름이한테 뭐라 하지 말고...”
“가만있어요. 당신은. 그리고 목소리 원래대로 안 해요?”
“...내가 오늘 화초에 물을 줬던가?”
아버님은 아름이의 편을 들어주려 하신 것 같은데 어머님의 한마디에 갑자기 화초에 물을 주러 일어나셨다.
그나저나. 목소리가 좀 전과는 달리 꽤나 미성이신데?
“호호호. 이거. 강 서방 앞에 두고 내가 주책이네. 아름이 방에 가서 앨범 같은 거라도 보고 있어요. 금방 밥 차려줄게.”
“아. 넵!”
나도 모르게 기합이 바짝 들어간 대답이 튀어나왔다.
아름이 졸업앨범이라. 인터넷에 다 떠 있어서 여러 번 봤지만 또 봐야지 뭐...
“밥하는 데 오래 걸리니까 천천히. 느긋이 있어요. 절대 아름이 방 근처로도 안 갈 테니까.”
“아. 엄마. 제발 좀...!”
이번에는 소리를 지르지 않고 애원하는 듯한 아름이. 사람의 학습능력은 정말 대단해.
“여보? 와서 이것들 좀 꺼내줘요.”
“응? 어디. 뭐 꺼내줄까?”
베란다 쪽에서 화초를 둘러보시던 아버님은 어머님의 부름에 바로 주방으로 직행하셨다.
“정말 못살아. 왜 그렇게 서 있어? 방으로 가자.”
“응? 응...”
왜 아버님의 모습이 낯설지가 않지...
내 미래를 보는 듯한 기시감은 착각이겠지...?
2.
-퉁. 퉁.
-팡! 파팡! 파팡!
-흡! 흐읍!
여기저기서 미트 치는 소리와 샌드백 치는 소리. 억눌린 기합 소리가 울려 퍼지는 체육관.
“헤이. 브라이언. 좀 쉬엄쉬엄해. 그러다 쓰러져.”
“후우... 후우...”
브로일러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브라이언은 휴식 시간 없이 하드코어로 달리던 훈련 중이었다.
“요즘 좀 이상해?”
“...뭐가?”
“브라이언 네가 훈련 중독인 건 알았지만. 요즘은 정도가 너무 심해.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은...”
브라이언은 그의 코치가 던진 질문에 약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줄였다.
‘열등감이라는 말은 죽어도 내 입으로 못 뱉지.’
브라이언 또한 누군가에게는 동경의 대상일 수 있었고 넘고 싶은 벽일 수 있었다.
다만 그런 벽이 브라이언의 앞에도 나타났다는 게 문제일 뿐이었다.
“라무차와 강해서. 그 둘이지?”
“...뭐가?”
“지금 브라이언 너를 조급하게 만드는 것.”
“...”
정곡을 찔렸다는 듯한 표정의 브라이언.
“그 둘은 대단한 선수지. 좋은 자극제가 될 거야.”
“하하. 자극제라. 그렇다면 자극이 너무 강하다고 말해주고 싶군.”
“그 정도는 이겨내야지. 그래야 브라이언이지.”
“하하하. 그래. 그래... 고마워.”
모든 발전은 문제에서부터 나온다.
문제를 해결하며 발전하듯, 이 열등감을 뛰어넘었을 때 브라이언은 몇 계단은 성장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브라이언.”
“응?”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는데. 라무차와 미스터 강. 둘 중 누가 이길 것 같아?”
“라무차와 강해서라...”
브라이언은 지난 스파링들을 떠올려보았다.
라무차와의 스파링들. 그리고 가장 최근 강해서와의 스파링까지.
“내가 겪었던 것으로만 판단하자면... 아무래도 라무차겠지.”
“라무차?”
브라이언의 코치는 예상외의 대답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최근 미스터 강과의 스파링에서... 이런 말 하기 조금 그렇지만. 일방적으로 밀렸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
“그래도 라무차... 인가?”
“아무래도 그렇군.”
강해서. 그와의 스파링은 일방적이었지만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볼 수 있을 듯했다.
수학으로 치면 아주 어려운 문제이지만 정형화된 틀을 가지고 있었기에 방법을 찾아볼 만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라무차는... Impossible. 불가해였어.”
어떤 경로로. 어떤 셋업에서 어떤 공격이 나올지. 습관도 형식도 없는 공격과 방어.
분명 맞았다고 생각했던 펀치가 빗나가고, 피했다고 생각했던 펀치를 맞아야 했다.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스타일.
문제도 식도 없기에 어디서부터 어떻게 방법을 찾아야 할지 모르겠는 느낌이었다.
“그렇군. 미스터 강의 패배라. 충격적이겠어. 이거 이거. 나도 카이서스와 미스터 강의 복싱 이벤트는 기대하고 있었는데... 불발이 날지도 모르겠군.”
브라이언의 코치는 브라이언의 판단을 신뢰하는지 이미 강해서의 패배를 기정사실인 양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만...”
그러나 마지막에 덧붙여지는 브라이언의 한마디.
“강해서. 그의 성장 속도는... 그것 또한 이해의 영역을 넘어섰지. 그가 라무차와의 시합까지 얼마나 더 성장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다음 시합의 키가 있다면 그건 그의 성장일 거야.”
단 몇 달 만에 자신을 압도할 정도의 경이로운 성장력.
격투기 입문 몇 년만의 세계 최정상에 서도록 만들었던 그의 재능.
라무차의 패배 불안 요소라고 한다면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브라이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