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_결핍 >
1.
“...”
조금 전까지의 환호와 함성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아. 이제 말을 하기가 조금 편해졌군.
어느새 진행 측으로부터 마이크를 전달받은 카이서스의 목소리만이 체육관을 가득 채웠다.
-날 부르던데. 뭔가 할 말이 있나? 미스터 강?
이 상황이 아주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한 카이서스.
볼튼 피셜로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을 때 나온다던 그의 악동 같은 표정이었다.
“미스터 강. 여기.”
마침 내게도 전달 된 인터뷰용 마이크.
“아아. 카이서스?”
-말해. 미스터 강. 여기 있는 모두가 숨죽여 기다리고 있잖나.
나와 카이서스 둘만의 대화.
눈만 감으면 이곳 체육관에 몇 천 명의 관중과 관계자들이 모여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고요했다.
“WBC 회장이 분명히 인터뷰 했지. 이번 이벤트에서 승리하면 다음은 세계 타이틀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카이서스. 당신 생각은 어때?”
-... 아주 좋지. 미스터 강 자네와 같은 최고의 도전자를 맞이한다는 건 언제나 기꺼운 일이니까. 다음 방어전은 나도 꽤나 땀을 흘리겠다 싶어.
내 질문에 가벼운 어깻짓과 장난스런 웃음을 보태어 대답하는 카이서스
-와아아아아아!!!!
-대박! 진짜 저 카이서스와 미스터 강이 붙는 거야?
-실현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미쳤어!
-휘익! 휘이익!
-카이서스가 경기 관람을 하러 왔을 때부터 혹시나 했지만!
-이건 정말 레전드라고!!!
그리고 그런 카이서스의 공식적인 답변이 체육관에 울려 퍼지자 조금 전까지의 고요함은 한순간에 관중들의 흥분 속으로 찢겨 사라졌다.
-아아. 원래라면 승리 인터뷰를 진행해야 하는데, 이렇게 된 이상 카이서스에게도 질문을 던져도 될까요?
관중들의 흥분이 한차례 진정 되고나자 아까전부터 링 위에 올라서 승리 인터뷰를 준비 중이던 진행자가 입을 뗐다.
-우선. 오늘 이벤트 게임의 승리자인 미스터 강. 오늘 시합은 사실 주 종목이 아닌 복싱 이벤트이니만큼 많은 부담과 걱정이 있었을텐데요. 혹시 오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훈련이나 전략이 있을까요?
“카이서스의 체육관에서 훈련을 했습니다. 그의 체육관에서 수많은 복싱 선수들과 교류하며 훈련했죠. 그게 오늘 승리의 키포인트였습니다.”
-오늘 시합에서 오소독스와 사우스포를 오가는 스위치히터의 모습에 스워머와 슬러거 스타일을 변칙적으로 활용하는 모습까지 보여주었습니다. 마치 전성기의 카이서스를 보는 듯 했는데요. 의도하신 부분이 있습니까?
“그와의 매치를 산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뛰어넘기 위해서 우선 그의 스타일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뭐. 생각보다 쉽던데요?”
-와아!!
-건방지다! 그래도 최고다!!
-미스터-갓!!!
여기저기서 날 향해 날아드는 환호성과 위트 있는 응원들.
나는 그저 입가에 미소를 띠고는 진행자의 다음 질문을 기다렸다.
-카이서스. 위대한 황제를 뛰어넘기 위해 그의 스타일을 먼저 알아야 한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카이서스는?
이번에는 카이서스에게 돌아간 질문.
-미스터 강은 아주 대단한 선수야. 어떻게 저런 선수가 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뛰어나지. 만약 그가 나와 동시대를 살았다면 나는 살리에르의 심정을 이해했을지도 몰라. 안타까운 건 그에겐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거야.
-그 말은. 아직 미스터 강의 숙련도나 테크닉은 카이서스에게 미치지 못한다. 그 말인가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게 결여되어 있지. 미스터 강?
대답을 하다말고 날 지목해서 부르는 카이서스.
“말해.”
-자네는 너무 뛰어나. 그렇지만 그게 독이 되는 걸 느끼게 될 거야. 자네는 나와 출발선상이 달라. 그게 유감이야.
“뜬구름 잡는 소리만 계속 하는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자네에게 결핍된 것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자넨 날 이길 수 없을 거야. 아! 그래도 이것 하나는 장담하지. 나와의 시합은 아주 재미있는 시합이 될 거고. 승리는 내 몫일 것이며. 그 끝에서 자네는 스스로에게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거야.
“...”
도발인지 아닌지 애매한 발언이었다.
내게 부족하고 결핍된 게 있다는데 도대체 그게 뭐냐고.
-인터뷰가 과열되는 것 같군요. 카이서스와 미스터 강의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이들의 시합이 무사히 치러지기를 기도하세요. 아! 물론 저부터 기도하겠습니다.
진행자의 적절한 커트로 마무리 된 승리 인터뷰.
-와아아아!!!!
-휘유!!!
-지금 바로 붙어라!! 데미지도 없잖아!!!
-카이서스! 카이서스!
-황제! 황제!
-미스터-갓! 미스터-갓!
2라운드 56초 KO.
내 생에 두 번째 복싱 이벤트 매치는 동양태평양 챔피언을 상대로 3분 56초 만에 KO로 시합을 끝내며 막이 내렸다.
“잘 했다. 고생했어.”
이번에는 정말 전혀 긴장도 걱정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편한 얼굴로 어깨를 두드리는 안 코치님
“텔론 회장이 와 있다.”
“...네?”
“놀라기는. 여긴 라스베이거스야. WFC 본사와 이곳 체육관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지.”
“뭐. 그렇긴 한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렇죠.
뭐. 이번 복싱 이벤트 매치도 텔론 회장의 공동 기획이긴 하지만 이제껏 코빼기도 보기 힘들었던 만큼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올줄은 몰랐으니까.
“오! 미스터 강!”
간단하게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찾은 경기장의 접객실.
텔론과 그의 비서진이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회장님.”
“하하하. 나도 반가워. 너무 반가워.”
뭐가 그리 좋은지 입이 찢어져라 함박웃음을 짓는 텔론.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내 선수 얼굴 내가 보러 오는데 특별한 일이 있어야 하나? 하하하. 그냥 보고 싶어서 오는거지.”
그렇다기엔 이제껏 얼굴 뵌 횟수가 너무 적어서 말이죠.
그것도 항상 용건이 있을 때만 나타나셔서.
“자네. 기억하나?”
“...네?”
뜬금없는 기억하냐는 텔론의 물음.
뭘 기억하냐는 걸까 싶었다.
“자네가 처음 WFC와 계약할 때 말이야. 브로일러를 떠나서.”
“아. 네.”
“그때. 자네가 했던 말이 떠오르는 군.. 아직 신출내기였던 자네가 언젠가는 위대한 선수들을 뛰어넘을 거라고 호언했던게.”
“하하...”
생각해보니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다.
겁도 없이 오스만 회장과 텔론 회장을 불러놓고 딜을 하려고 했었지.
종합격투기계에 발을 붙인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인이나 마찬가지였던 처지에 말이야.
“그리고 그때. 자네는 카이서스와의 스파링을 이야기하며 그와 같은 세상에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지.”
“분명...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네요.”
“사실. 그때 그 이야기. 난 믿지 않았어.”
“...네?”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에 나는 너무 노회한 사업가고, 자네는 신출내기 파이터였으니까 말이야.”
“하하...”
그러면 대체 왜 날 받아줬던거야?
사실 내가 생각해도 그 당시 내가 했던 발언들은 지금 와서는 이불킥을 할 만한 것들이었다.
카이서스와 비견되는 재능을 가진 내가 종합격투기로서 복싱에 한방 먹여주겠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진짜 현실이 되었어.”
“...”
“자네는 데뷔 이후 무패행진을 이어오며 스스로의 상품 가치를 입증했고. 그 카이서스가 자네를 의식하게 만들었으며. 벌써 복싱 계에는 한방이 아닌 두세방치의 펀치를 날려줬어.”
“하하...”
진짜. 왜 온 거지 이 양반.
너무 좋은 말만 해주니까 괜히 불안하네.
“오늘 온 건 정말 별 뜻이 있어서가 아니야. 그냥. 단순히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왔네.”
“어우. 고맙다뇨. 저는 계약을 맺고 시합 뛰었을 뿐인데요.”
“그래도. 그래도 고마워.”
오 마이 갓.
결국 텔론 저 양반이 슬쩍 눈물까지 보이려는 것 같았다.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젊은 여자도 아니고 다 늙은 남자의 눈물 같은 건 보고싶지 않으니까.
“하하. 이거. 주책이었구만.”
다행히 텔론은 빠르게 감정을 추스르는 듯 했고 다시 활기찬 목소리를 되찾았다.
“다음은 정말로 카이서스와의 경기야. 머지않아. 내년 안에는 매치가 성사되겠지.”
“특별한 일이 없다면요?”
지금이 11월 초였으니까. 라무차와의 시합을 치르고 나서 카이서스와의 복싱 이벤트를 치른다 해도 내년 하반기에는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전 세계가 열광할거야.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겠지. 그 무대는 내가 책임지고 만들어주겠네.”
“...”
“더 큰 세계. 더 큰 무대에 서고 싶다고 했지? 내가 지상 최대의 무대를 만들어주지. 그게 내가 자네에게 해줄 수 있는 보답인 것 같아.”
“감사합니다.”
“단!”
이것 봐.
사람 좋게 칭찬만 하다가 갑자기 정색하며 날 바라보는 텔론.
역시나 그의 방문에 아무 목적이 없을 리가 없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자네의 상품성을 떨어뜨리지 마.”
“...네?”
“카이서스와의 시합 이전에. 자네에겐 선결과제가 있어. 잊지는 않았겠지?”
“아. 라무차?”
라무차. 그와의 헤비급 타이틀전이 남아있었지.
당연히 잊은 적 없었다..
“나는 자네도. 라무차의 편도 아니야. 둘 다 내 선수니까. 누구를 응원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입장이지.”
“그렇죠.”
“다만. 자네가 라무차에게 진다면... 카이서스와의 대결은 무산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하하. 걱정 마세요.”
솔직히. 지금 심정 같아서는 카이서스를 제외하고는 세상 누구와 붙어도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미들급 챔피언이었던 미첼도.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헨더슨도.
그들보다 더 뛰어났던 브라이언도.
사실 어렵다거나 힘들다고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힘들고 어려웠던 건 훈련과 감량.
헤비급으로 체급을 올린 이상 이제는 정말 거리낄 것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잘못생각하고 있어.”
“...네?”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을 텔론은 정면에서 반박했다.
“미스터 강. 자네 실력이 뛰어난 것도. 재능이 찬란한 것도 인정하네. 놀라워. 어떻게 자네 같은 재능이 존재할 수 있는지. 늦은 나이에 시작해서 세계 최정상급의 선수들을 별 어려움 없이 그리 간단히 이겨낼 수 있는지. 내 눈으로 보지 못했다면 소설이라고 해도 믿었을 거야.”
“하하. 감사합니다.”
“하지만!”
“...”
“세상은 넓어. 자네와 같이 소설 같은 일도 아주 없는 건 아니란 말이야.”
진지한 얼굴로 한차례 뜸을 들이는 텔론 회장.
“내가 살면서 본 세계 최고의 실력은 카이서스네.”
“...네.”
“그리고. 내가 살면서 본 세계 최고의 재능은... 라무차야.”
“...?!”
“정형화된 테크닉과 반복적인 훈련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단점이 있다지만. 그 재능만으로 본다면 나는 라무차를 카이서스보다도 위로 올려두고 있네. 만약 그가 복싱을 성실히 배울 수만 있었다면 지금의 무패황제 카이서스는 존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만큼.”
순간적으로 반발심이 튀어나왔다.
최고의 재능은 나야.
텔론 회장. 당신은 아직 내 실력의 끝을 본 적도 없어.
나는 아직 단 한 번도 진심으로 경기에 임해본 적이 없어.
위기감을 느껴본 적 없어.
당신이 본 건 내 실력의 일각일 뿐이고, 그렇기에 당신이 잘못 생각한 거야.
이런 종류의 반발심들이.
하지만 그런 감정들은 끝내 말이 되어 뱉어지진 못했고
“너무 낙관하지 말게. 난 라무차도. 강해서 자네도. 누구의 편도 아니지만... 자네와 카이서스의 시합을 기대하는 또 한명의 복싱 팬으로서 하는 말이야.”
나는 그저 텔론 회장의 말을 그저 묵묵히 들을 뿐이었다.
*
“이것 참. 카이서스. 자네가 그런 도발을 하다니.”
카이서스의 프로모터 켄달.
그는 오늘 카이서스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듯 했다.
카이서스가 시합에 앞서 상대 선수에게 도발을 할 줄도 아는 선수였던가? 하는.
“도발이라니. 난 진실만 이야기했어.”
“... 진실이라. 미스터 강에게 결핍된 게 있다는 말이 그냥 한 말이 아니었다고?”
“당연하지.”
“그렇다면 그게 뭐야? 그에게 부족한 거라니?”
“...뭐. 간단하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카이서스는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을 바라보며 켄달에게 대답했다.
“그에겐 투쟁심이 없어. 간절함도. 그에겐 모두 쉬운 일이었겠지. 한국은 평화로운 나라지? 그는 평생을 통틀어 목숨을 걸고 무언가를 얻기 위해 갈구해본적이 없어.”
“...”
“그의 실력은 나와 비교해도 그리 차이나지 않을지 몰라. 아. 물론 내가 뒤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 한... 내 80%정도?”
“하하하. 그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카이서스.”
“중요한 건. 그에게선 치열함을 느낄 수 없었어. 그게 아쉬워. 단 한 번의 고전도. 패배도 겪지 못했다는 게. 그래서 조던에게 최선을 다해달라고 개인적으로 부탁까지 했지만... 그의 역량으로 미스터 강에게 치열함을 끌어내기엔 부족했지.”
카이서스는 아프리카 국가에서 태어나 복싱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하루하루를 죽음을 벗 삼아 살았다.
돈이 없어서. 힘이 없어서. 작고 나약해서. 환경이 좋지 않아서.
하루를 버텨낸다는 것 자체가. 살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치열했던 카이서스의 유년시절.
복싱을 시작하고 미국의 거대 가문에서 메세나를 받기 전까지. 그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었다.
“만약. 그가 끝까지 그걸 깨닫지 못한다면... 내가 알려줘야겠지.”
사람 좋게 웃어 보이는 카이서스.
언론에서도 황제라 칭하며 그의 젠틀함을 이야기하지만, 실상 그의 속에는 나태함에 가리어진 투쟁심에 불타는 야수가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