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_조던 리 END. >
1.
-꾸욱. 꾸욱.
오랜만에 자신의 경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시합을 보기 위해 체육관을 찾은 카이서스.
이제 곧 펼쳐질 복싱 이벤트는 카이서스에게는 메인디쉬 이전에 즐기는 일종의 전채요리. 애피타이저에 가까웠다.
메인 디쉬 이전에 맛보는 애피타이저는 식욕을 돋우며, 전채요리의 수준에 따라 주요리의 기대감 또한 높아지거나 낮아지게 만든다.
‘이미 기대치는 한계 이상으로 높아졌지만 말이야.’
지난 한 달.
카이서스는 그의 체육관에서 현지 훈련을 진행하는 강해서를 지켜보며 그의 가파른 성장을 누구보다 제대로 인지했다.
요리 과정을 보면 맛을 보지 않아도 대충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 수 있는 것처럼 카이서스는 강해서의 훈련을 엿보며 그의 재능에 감탄하고 기대하게 되었다.
“응? 뭐라고?”
카이서스의 혼잣말에 그와 동행한 프로모터 켄달이 되물었다.
“아아. 아니야. 그나저나. 이벤트 매치 치고는 조금 화려함이 부족한 듯하군.”
“이번 이벤트 시합은 그렇지. 그래도 이 정도면 준수한 거야.”
“다음 이벤트 매치는. 가장 화려한 무대가 되었으면 좋겠어.”
다음 이벤트 매치.
카이서스가 기대하는 것은 이번 시합에서 강해서가 이기고 올라와 자신과 정상에서 맞붙는 그림이었다.
가장 화려하고 성대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시합.
“...걱정 말라고. 내 경력을 걸고 향후 백 년간 나올 수 없는 가장 화려한 무대를 만들어줄 테니까.”
그리고 그런 카이서스의 의지를 파악한 켄달은 살짝 몸까지 떨어가며 대답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복싱에도 매치에도 흥미를 잃었던 카이서스. 제대로 된 훈련조차 이행하지 않던 그가 다시 성실히 훈련을 시작했다는 것도 고무적인 일이었는데 이번에는 다음 시합의 규모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체육관에 연락해서 다음 주부터 훈련 양을 늘릴 거라고 전해줘.”
“... 훈련양을? 얼마나?”
“지난 1년은 재활 훈련 같은 거였어. 오래 쉬었으니까 말이지.”
“그러면...”
“이젠 제대로 두드려야지. 가장 치열했던 때의 훈련으로 돌아가야겠어.”
“...”
켄달은 이토록 열의를 불태우는 카이서스를 감격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봤고, 카이서스는 저 멀리 입장로를 들어서는 붉은 복싱 팬츠를 입은 강해서를 바라봤다.
‘맛있는 음식은 가장 배고플 때 먹어야지.’
복싱은 지구력, 강도, 힘, 민첩성, 스피드, 내구력, 유연성, 담대함, 손-눈 협응력, 분석 능력 등 스포츠에 필요한 10가지 요소들을 수치화시켰을 때 가장 고된 운동 랭킹 1위에 기록된 적도 있었다.
차순위로 아이스하키와 미식축구, 농구, 레슬링, 격투기 등이 2위부터 6위까지 랭크 되었던 걸 생각하면 복싱이 얼마나 고된 운동인지. 그리고 그간 카이서스가 쉬었던 시간이 얼마나 독으로 작용했을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스스로가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배가 부를 때는 제대로 된 맛을 느낄 수 없는 법.
카이서스는 그리 머지않은 시간에 다가올 강해서와의 시합을 기대하며 스스로를 더욱 결핍되고 굶주리게 만들 생각이었다.
“오! 시작하는군!”
그런 카이서스의 상념을 깨는 켄달의 목소리.
드디어 그가 기대하고 고대하던 강해서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부디 조던이 그의 많은 부분을 이끌어 내줄 수 있기를...’
카이서스가 걱정하는 것은 경기의 승패를 떠난 조던 리의 분발일 뿐이었다.
*
‘... 무슨 몸이...’
6 평방미터 내외의 작은 사각 링.
그곳에서 강해서를 마주한 조던 리의 첫 느낌은 ‘압도’ 였다.
딱히 리바운드랄게 없는 헤비급 시합이니만큼 전날 계체에서 봤던 모습과 다를 바는 없었지만, 본격적인 시합태세를 갖춘 강해서에게서는 전날과 다른 위압감이라는 게 풍겼다.
‘그래 봐야 애송이야.’
조던은 인정했다.
눈앞의 애송이는 이러든 저러든 한 분야의 최정점에 오른 사내였다.
MMA에서 누구도 쉽게 평가하지 못할 정도의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는 선수.
링 위에서 이 정도 위압감과 압박감은 줄 수 있었다.
-퉁. 퉁.
하지만 그건 MMA 한정이었다.
복싱은 종합격투기와는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는 스포츠였다.
어설픈 수준에서는 인간 자체의 강함으로 비벼볼 수 있겠지만 세계 최정상급 선수들에게는 그런 게 통할 리 없었다.
오늘 밤. 조던 리는 눈앞의 애송이 복서에게 그 사실을 제대로 알려 줄 생각이었다.
“후우. 후우.”
사각 링의 꼭짓점 맞은편에 서서 서로를 바라보는 조던 리와 강해서.
-땡!
1라운드 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림과 동시에 링 중앙에서 심판이 몸을 빼는 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거리를 좁혀나갔다.
‘... 인파이팅?’
현대 복싱에서 파이팅 스타일을 고전적으로 나누는 건 별 의미가 없다지만 굳이 따지면 조던은 슬러거 스타일에 가까웠다.
발바닥을 링에 붙이고 상체를 세워 긴 리치와 파워로 상대를 압박하는 스타일.
그런데 강해서가 꺼내든 스타일은 상체를 웅크리고 가드를 단단히 굳힌 채 언제든 앞으로 튀어나올 수 있도록 전진 지향의 스텐스였다.
‘벤과의 시합에서는 이도 저도 아닌 모습이었는데. 날 생대로 꺼내든 게 전형적인 스워머 스타일이라고?’
조던은 어이가 없었다.
스워머 스타일은 슬러거 스타일의 복서에게 약하다는 건 동네 복싱 체육관만 가도. 아니, 인터넷으로 몇 분만 검색해도 알 수 있다.
물론 선수 간의 실력 차이가 크다면 그 또한 무색한 말이겠지만
‘날 도발하는 건가?’
조던 자신이 강해서보다 실력이 떨어질 리가 없었다.
오히려 강해서의 파이팅 포즈가 함정이거나 도발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합리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툭. 퉁!
강해서보다 10센치는 큰 키. 그리고 리치.
조던 리는 그 ‘거리’의 차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멀리서 강해서를 향해 펀치를 툭 툭 뻗으며 견제를 시작했다.
-스슥. 슥.
그런 조던의 펀치를 단단한 가드로 막아내며 슬금슬금 앞으로 다리를 옮기는 강해서.
-툭.
하지만 그의 전진은 강해서의 왼쪽으로 돌며 잽을 날리는 조던에 의해 막혔다.
왼손잡이인 조던의 오른발이 강해서의 오른발 진로를 방해하며 접근 및 방향 전환을 막아섰다.
-툭. 스팟!
강해서의 왼손을 자신의 오른손으로 쳐내며 그대로 강해서의 왼쪽 안면을 노리고 뻗은 조던의 오른손 잽.
하지만 강해서의 회피로 잽은 스치는 것으로 끝났다.
‘반응이 좋군.’
사우스포와의 시합이 익숙하지 못한 오소독스는 서로의 앞 손과 앞발이 걸리는 것을 불편해한다.
앞 손을 쳐내고 바디 샷이나 안면 샷을 날리고 뒤로 빠지거나 상대 선수의 왼손 쪽으로 돌아나가면 오른손잡이는 제대로 된 반응을 하기가 어려웠으니까.
-스윽.
결국, 다시 뒤로 거리를 벌리며 물러서는 강해서.
‘그러면 그렇지.’
파고들지 못하는 인파이터는 더 볼 것도 없었다.
자신의 거리를 잡지 못하고 뒤로 물러선 순간 이번 시합의 승패는 결정 난 것과 다름없었다.
-퉁. 퉁.
그때 묘하게 달라진 강해서의 스텝 리듬.
그리고는 다시 물러섰던 거리 이상으로 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퉁. 퍽!
이번에도 강해서의 왼쪽으로 돌며 그의 앞 손인 오른손을 쳐내려는데
‘... 없어?’
응당 있어야 할 오른손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강해서의 몸통.
‘미친...’
묘하게 리듬이 달라졌다 했더니 어느새 강해서는 오소독스가 아닌 사우스포의 파이팅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조던과 같은 오른발과 오른손이 앞으로 나와 있는 상태.
-휘익
-뻐억!
순간 당황한 조던은 강해서의 오른손 잽에 안면을 제대로 내주고 말았다.
‘큭! 무슨 힘이...’
스텐스만 사우스포 스타일이지 오른손잡이인 강해서의 라이트 잽은 여타 선수들의 라이트 스트레이트와 같은 파괴력을 보여줬다.
가벼운 잽이라기에는 너무나도 묵직한 펀치에 황급히 뒤로 물러선 조던 리.
‘스위칭이라고? 스위치 히터?’
얼마나 복싱을 만만하게 보면 스위치 히터를 흉내 낸단 말인가.
순간 지난날 카이서스의 전화 내용이 뇌리를 스친 조던은 분노가 치미는 것 같았다.
“흡...!”
오소독스건 사우스포건. 그게 어쨌단 말인가.
동양 태평양 챔프에 오르기까지. 세계랭킹 5위에 이르기까지. 그는 수많은 복서들과의 시합을 거쳤고 그중에는 날고 긴다는 오소독스와 사우스포 선수들이 있었다.
겨우 스위치 히터를 흉내 내는 애송이에게 당황하기에는 지난날 자신의 상대 선수들에게 면목이 없는 일이었다.
-휙. 휙.
-퍽!
-투퉁.
긴 리치를 이용해 안면 잽으로 가드를 유도한 뒤 바디 샷을 찔러넣고는 뒤로 물러서며 반시계방향으로 돌아나가는 조던 리.
강해서는 그런 그를 상체를 웅크리며 잡아먹을 듯 노려볼 뿐이었다.
‘껍질 안의 거북이는 무서울 게 없지.’
시합이 지루하고 재미없어지는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조던은 이번 시합을 철저하게 ‘승리’를 위해 운영할 생각이었다.
-휘익.
-후웅!
강해서가 본격적으로 전진 스탭을 밟으며 달려들기 전까지는.
**
흠.
확실히 최정상급 사우스포 슬러거는 이런 느낌이구나 싶었다.
카이서스의 체육관에서 조던 리와 비슷한 스타일의 선수들과 스파링도 가져봤고, 뒤늦게 합류한 맘모스 코치와도 충분한 연습을 했다지만 실전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어느덧 시합은 1라운드가 끝나고 2라운드로 진입한 상황.
강해서가 굳이 인파이팅 스타일로 1라운드를 지지부진하게 움직였던 건 ‘세계 최정상급 사우스포 슬러거’ 라는 경험치를 쌓기 위해서였다.
이미 사우스포 슬러거의 파이팅 스타일은 충분히 파악하고 있는 상태. 거기서 심화 과정을 카피해내는 데는 1라운드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퉁. 퉁.
‘카피를 했으면. 이젠 숙달을 시켜야지.’
조던 리가 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1라운드 내내 유지했던 인파이팅 스타일을 벗어내고 2라운드는 시작부터 조던과 같은 사우스포 슬러거의 스타일로 파이팅 포즈를 잡았다.
-와락.
조던의 표정이 구겨지는 게 보였다.
굳이 도발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꽤나 기분이 나빴나 보다.
미안한데 나도 나름 절실하거든. 네가 아니라 네 다음에 기다리고 있을 괴물 같은 선수 때문에 말이야.
-퉁. 퉁!
나는 조던과 마찬가지로 상체를 세운 상태로 빠르게 그의 타격권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신장이나 리치나 내가 불리한 부분이 많았기에 거리 싸움에서는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휙. 휙.
날 향해 빠르게 날아드는 오른손 잽.
하지만 집중력을 끌어올린 내게는
-휘이이익. 휘이이이이익.
너무 느리게. 조금의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는 펀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이 시간 속에서는 내 움직임도 만만치 않게 느려진다지만 움직임의 효율 자체가 다른 상황.
-휙 휙. 툭. 휙. 휘익. 휙.
조던의 앞에서 가드를 내리고 바디 샷들은 손으로 쳐내며 안면 샷들은 상체 움직임만으로 모두 피해냈다.
짧은 순간.
굳이 세보자면 5초 정도나 되었을까?
조던의 펀치 컴비네이션을 스무 번은 넘게 피하고 커트해낸 것 같았다.
“...”
발바닥을 링에 붙인 상태에서 스탭도 없이 상체 움직임과 커트만으로 모든 펀치를 받아내니 순간 조던의 표정이 아주 볼만하게 일그러졌다.
“다 했으면. 이제 내 차례지?‘
마우스피스를 끼고 있어 제대로 들렸을지 모르겠다.
무슨 상관이야. 이제는 내 차롄데.
-휙. 휘익. 툭. 펑!
조던의 타격 거리에서 반보 더 들어가 내 타격 거리를 잡고는 오른손 잽부터 천천히 셋업을 시작했다.
라이트 잽을 커트하느라 비어버린 조던의 가슴팍에 가볍게 레프트를 꽂아주고는 몸이 흔들리는 그에게 상체를 숙이며 라이트 바디 샷을 날려줬다.
”큽!“
그리고는 다시 반보 전진.
이번 반보 전진에는 뒷발이었던 왼발을 앞으로 당기며 다시 오소독스 자세로 돌아갔다. 조던의 앞발인 오른발은 어느새 뒤로 살짝 물러서 있었고 그는 날 향해 정면으로 선 상태가 되어있었다.
-휙. 휘익.
안쪽에서 바깥으로 뻗는 레프트 잽은 조던의 오른손 가드를 날려버렸고, 조던은 순간 비어있는 상체로 날아들 펀치를 예측하고 왼손 뒤로 상체를 숙였다.
-슥
하지만 내가 노린 건 그의 비어있는 오른쪽 바디.
-뿌득. 뿌드득.
축발이 되는 왼발의 발목부터 끌어올린 회전력과 뒷발인 오른발 발목과 무릎에서 시작된 앞으로 밀어주는 회전력. 그걸 허리에서 받아내 가슴근육을 조이고 등 근육을 밀어내며 그대로 왼손 주먹으로 모든 힘을 집중시켰다.
-쒜에엑! 뻐어억!
그대로 그의 갈비뼈에 꽂히는 레프트 보디블로.
”커억!“
작정하고 때린 보디블로에 조던은 억눌린 신음소리를 내뱉었고 그의 왼손은 제자리를 지키지 못한 채 밑으로 떨어졌다.
-뿌득. 뿌드드득.
보디블로를 날리느라 한 방향으로 회전된 채 멈춰선 근육을 억지로 반대로 돌리며 그 반동을 이용한 더 큰 회전력을 만들었다.
느려진 세상 속에서 단련된 내 근육들의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뻐어어억!
그리고 그대로 휘둘러진 라이트 훅은 어느새 가드가 사라진 조던의 왼쪽 안면을 돌려버렸고.
-쿵!
그대로 조던은 사각의 링 위에 뻗어버렸다.
-스탑! 스탑!
카운트를 셀 것도 없다는 듯이 경기 종료를 알리는 심판.
”으아아아아아!!!“
아직 채 집중력이 다 풀리지 않았을 때.
사각 링 사방으로 승리의 포효를 내뱉는데 저 멀리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카이서스!!!“
채 풀리지 않은 집중력과 텐션 때문일까.
카이서스의 얼굴을 보자마자 마이크도 없이 그의 이름을 크게 불러버렸다.
-...
내 승리에 환호하던 관객들에게마저 순간적인 침묵을 종용한 순간.
”...미스터 강?“
이윽고 카이서스의 입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