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_스파링 >
1.
“조심히 가세요!”
“다들 한국 가서 연락하고.”
“넵!”
두호 형의 응급치료가 끝나는 대로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행들.
덕분에 아름이와 며칠의 짧은 여름휴가를 보낼 수 있어 나름 뜻 깊었던 일정이었지만 나는 다음 복싱 이벤트전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온 만큼 한국으로 가는 일행에 합류하지 않았다.
“형. 몸조리 잘 해요.”
“내 걱정 말고 너 시합준비나 잘 해. 나 때문에 며칠이나 날려먹어서 괜히 걱정된다.”
“하하. 바로 라스베이거스로 넘어갈 거니까요. 저도.”
“난 보다시피 몸이 이래서. 응원은 못갈 것 같다. 멀리서나마 응원할게.”
“넵!”
그렇게 두호 형과 한국행 스태프들을 마중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
“이제 진짜 휴가 끝이구나.”
아름이는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게.”
정말 우연한 계기로 접하게 된 종합격투기.
본격적으로 이쪽 세계에 발을 들이고부터 내 인생은 갑자기 ‘장르’가 바뀌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급격히 변해갔다.
한 달을 하루같이 방구석에만 박혀있던 처지에서 집은 잠만 자는 용도로 전락해버렸고, 하루의 대부분을 체육관에서 보내게 되었다.
해외라곤 준현이를 만나러 미국을 한번 갔던 게 전부였었던 30년 인생이었는데 지금은 일 년의 절반도 한국에 없을 때가 많았다.
그리고...
“응? 왜 그렇게 쳐다봐?”
아름이.
전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방구석 칩거를 선택했던 시절. 스마트 폰이나 티비 등으로 그저 바라만 보기만 했던 아이돌 출신의 파워 연예인이 내 여자 친구가 되어 있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최근 몇 년 사이 일어난 일들.
잭슨빌의 지는 노을을 배경으로 그림처럼 날 향해 돌아서는 아름이를 보자 순간 현실감각이 모호해졌다.
“이거. 꿈 아니지?”
“...뭐래? 해서 너 아직 잠 덜 깼어?”
살짝 볼을 부풀리며 대꾸하는 아름이.
저 표정은 약간 심통 났을 때 나오는 표정이었는데, 내 뜬금없는 질문이 자신을 놀리려고 던진 것이라 오해를 했나보다.
“아아. 농담이 아니라. 순간 진짜 현실감각이 없어져서. 이게 왜 진짜야? 이런 느낌이랄까?”
“현실 감각이 없어? 내가?”
“지금 이 순간이 모두.”
“후움...”
그림처럼 돌아섰던 그녀가 그림처럼 내게 다가왔다.
-쪽
그리고는 볼에 가벼운 입맞춤.
“그런 식으로 넘어가면 안 되는 거 알지? 부모님이랑 일정 상의해본다?”
“...어?”
순간 노을이고 뭐고 와장창 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 가면 부모님 뵙기로 했잖아?”
“어? 어. 어. 그렇지.”
아주 제대로 현실감각 돌아왔습니다.
즉효약이네요. 어휴. 그래. 결혼은 현실이지. 암.
*
“자. 빠진 것 없이 다 챙겼지?”
“네!”
두호 형과 한국행 스텝들을 보내고 난 다음날.
안 코치님과 필승 형을 비롯해 라스베이거스로 넘어갈 스텝들은 다시 한 번 공항으로 모였다.
이번에는 우리가 비행기를 탈 차례.
“아름이는 잘 보내주고 왔냐?”
“당연하죠.”
비행기 시간까지 앉아 쉬고 있는데 필승 형이 옆자리에 풀썩 앉았다.
“아름씨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라스베이거스.”
“아름이도 스케줄이 많잖아요. 이번에도 꽤나 무리했던 거고.”
인기 연예인인 아름이는 고정 예능 프로그램이 있었던 만큼 시간 빼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2주에 한번 촬영하는 프로그램이라 두호 형의 시합과 약간의 말미는 얻을 수 있었지만 함께 라스베이거스를 넘어갈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하긴. 거의 한 달을 있어야 하니.”
“하하. 메인 시합도 아니잖아요. 이벤트 매치인데요 뭐.”
시합 당일이라도 라스베이거스로 온다는 걸 극구 말렸다.
서울에서 부산도 아니고, 라스베이거스까지 응원 올 필요는 없었으니까.
나중에 라무차와의 헤비급 타이틀전이면 몰라도 이런 이벤트 전까지 현장응원해달라는 건 무리였다.
“그거 들었냐?”
“네?”
“라스베이거스 현지 체육관. 어디 잡았는지.”
“글쎄요?”
이런 건 안 코치님이나 필승 형이 알아서 하시니 난 아는 바가 없었다.
WFC 본사가 있고 종합격투기 아레나가 몇 개나 있을 만큼 종합격투기의 메카라 불리는 라스베이거스. 그런 만큼 체육관들도 많았고 우리와 인연을 맺은 체육관도 한둘이 아니었다.
나와 두호 형 때문에 현지 체육관을 섭외한 것만 벌써 몇 번이나 되니까.
“방금 결정 났다.”
“어딘데요? 전에 갔던 데에요?”
“음. 너는 갔던 덴데. 나는 가본 적 없는데다.”
“...아. 뭐에요? 스무고개 하는 것도 아니고.”
“가 보면 알거야.”
“...”
이럴 거면 말을 왜 꺼낸 건지.
“비행기 시간 됐다! 다들 모여!”
필승 형에게 뭔가 한마디 하려는데 때마침 비행기 시간이 되어 안 코치님의 호출이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짐 체크하고.”
“네!”
어쨌든.
두호 형의 시합이 끝나고 이제는 내가 주인공인 시간이 왔다.
동양챔피언이고 뭐고. 조던 리. 딱 대.
2.
-쾅! 쾅. 쾅!
평소보다 격한 느낌의 샌드백 소리.
“...이봐. 조던. 진정하라고.”
“진정하게 생겼어?”
네덜란드 웰링턴. 조던 리의 복싱 체육관은 여느 때와 달리 무거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날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팡!
조던은 샌드백을 치다말고 글러브를 벗어 체육관 바닥에 냅다 내팽개쳤다.
“...실력으로. 결과로 말 하면 될 일이야.”
“누가 그걸 몰라?”
“좋게 생각해. 미스터 강이 그런 평가를 받고 있는 만큼 승리했을 때 카이서스가 널 보는 시선이 바뀔 수도 있지않겠어?”
“... 후우...”
지금의 분위기를 만든 건 얼마 전 걸려온 카이서스의 전화 한통이었다.
조던 리와 강해서의 복싱 이벤트 전을 보러오겠다던 카이서스가 조던 리에게 처음으로 부탁이라는 단어를 꺼내며 했던 말.
-최대한 강해서를 위협해서 그의 모든 걸 끌어내 달라.
복싱 매치에서 조던 리의 승리를 응원한다거나 힘내라는 말도 아닌, 상대 선수의 기량을 최대한 끌어내달라는 말이었다.
“카이서스는 내가 이기는 건 고사하고 그의 기량을 모두 끌어내지도 못할까봐 불안해하는 목소리였다고.”
조던은 동경의 대상이자 목표인 카이서스에게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신이 아니야. 위대한 챔프? 웃기는 소리지. 그도 우리와 같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야. 나이가 들면 늙고, 움직이지 않으면 퇴화하는. 그의 시대도 이제 한 물 갔어.”
“...”
“그 증거가 바로 지금이지. 그는 선수를 보는 눈이 없어. 아무리 잘 나간다지만 MMA 선수인 미스터 강과 조던 너를 비교하며 그런 말을 하다니. 난 이해할 수가 없다고. 카이서스가 노망이라도 난 게 아니라면 말이지.”
그리고 그런 조던을 캐어하는 게 그의 코치 제이미였다.
“어찌됐든 좋은 일이야. 이번 매치는 우리가 승리할 거고. 다음은 카이서스야. 그가 널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든. 아니면 그가 노망이 났든. 어쨌든 우리에게 좋은 일이잖아. 그렇지 않아?”
“... 그렇지. 카이서스는 미스터 강이 아닌 날 보게 될 거고. 난 그의 앞에 다시 서게 될거야.”
바닥에 떨어져 있던 글러브를 주워드는 제이미.
“그러니. 우리가 일차적으로 해야 할 일은 미스터 강. 그에게 제대로 된 복싱을 보여주는 거지.”
“오케이. 고마워.”
제이미가 건넨 글러브를 다시 손에 끼며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조던 리.
그런 그를 보며 제이미는 조던이 알면 또 화를 낼만한 소식을 가지고 왔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굳이 알릴 필요는 없겠지. 미스터 강. 그가 카이서스의 체육관에서 현지 훈련을 한다는 건.’
조금 전 알게 된 소식.
조던 리의 상대 선수인 강해서가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카이서스의 체육관에서 현지 훈련을 한다는 것이었다.
*
“헤이! 미스터 강!”
“볼튼!”
필승 형이 떡밥만 던져두고 알려주지 않았던 현지 체육관의 정체는 바로 카이서스의 체육관이었다.
확실히 여기라면 난 와본적이 있지만 필승 형은 와본적이 없는 체육관이 맞았다.
“와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몸이 너무 좋아졌는데?”
“하하. 오랜만에 보지?”
볼튼과 복싱 스파링을 처음 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몇 년이나 시간이 흘렀다.
그때 나는 브로일러에서 미들급 원-나잇 토너먼트를 준비하고 있었고, 지금은 WFC 헤비급 타이틀전을 앞둔 현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이 되어 있었다.
“오랜만이라니! 나는 미스터 강 네 시합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챙겨봤다고!”
그러면서 스마트 폰으로 뭔가를 켜서 내게 보여주는 볼튼.
“봐! 네 팬클럽에도 가입해 있어! 오늘 같이 사진 찍어서 올려야지!”
“...어... 그래...”
저게 내 팬클럽이야?
한국에도 있긴 있다던데 제대로 찾아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미국에도 내 팬클럽이 있다니. 놀라운 일이네. 심지어 거기에 볼튼이 가입되어 있다니.
“이제는 너랑 스파링 했다는 걸 내가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녀야 해. 크으... 이번에는 조던과 붙는다며?”
“어? 어. 그렇지.”
그러고 보니 볼튼은 WBC 헤비급 복서였다.
엄밀히 말하면 조던과 같은 협회 소속의 같은 체급 선수였으니 타 종목인 MMA에서 넘어 온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길수도 있겠다 싶어서 대답을 하기가 조심스러워졌다.
“역시! 대단해! 조던이면 지금 세계 랭킹 5위였나? 기억이 잘 안 나네. 여튼 대단하잖아! 거기다 이번에 이기면...”
다행히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 없이 밝게 이야기하던 볼튼.
하지만 말의 마지막엔 목소리를 낮추더니 주변을 한번 슥슥 눈으로 훑으며 경계를 하는 듯 했다.
“그... 카이서스랑 붙는다며?”
그리고 이어진 마지막 말은 내게만 겨우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임이었다.
“하하. 일단 WBC 측에서는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
이건 진짜였다.
WBC 회장의 발언은 팩트였지만 카이서스의 의중이나 현실적인 여러 가지 부분들을 생각하면 과연 그런 빅 이벤트가 이루어질지는 미지수였으니까.
“흐음. 미스터 강.”
“응?”
“주변을 둘러봐.”
“주변?”
뜬금없는 볼튼의 말에 체육관 내부를 둘러봤다.
“뭐가 있어?”
“뭐가 있지.”
뭐가 있지? 아무것도 없는데?
복싱 체육관. 운동 기구. 사람. 또 뭐가 있다는 거야?
“사람이 있잖아. 사람.”
“... 체육관에 사람이 있는 게 이상한거야?”
“네가 지난번에 왔을 때와 비교해봐.”
“응?”
그러고 보니...
-휙. 휙.
주변을 둘러보니 넓은 카이서스의 체육관 내부로 운동하는 사람들이 빡빡할 정도로 꽉 차 있었다.
볼튼이 카이서스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목소리를 낮춰야 할 정도로.
예전 볼튼과 스파링을 하러 왔을 때는 이렇게 사람이 많지 않았었다.
카이서스의 이름을 내걸고 운영되는 체육관 치고는 꽤나 널널하다는 느낌이었달까.
“이 많은 사람들이 왜 모였는지 알아?”
“...글쎄?”
“곧 있으면 알게 될 거야. 이제 슬슬 시간이 됐으니까.”
“무슨 말이야 대체?”
필승 형도 그렇고. 볼튼도 그렇고. 그냥 할 말이 있으면 시원하게 하면 되지 왜 이렇게 퀴즈를 좋아해?
-웅성. 웅성.
그때 체육관 저쪽부터 들리는 작은 웅성거림.
작았던 그 목소리들은 어느새 크게 퍼져나갔고 곧 내 주변에서도 들리기 시작했다.
“카이서스야?”
“어. 오늘도 정확한 시간에 나왔어.”
“크으. 이거 보러 내가 여기 등록한 거지.”
“카이서스가 훈련 할 때는 근처로 가지도 못하는데 뭐.”
“그래도 황제의 훈련을 멀리서나마 볼 수 있잖아?”
주변의 웅성거림은 모두 카이서스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볼튼?”
“맞아.”
볼튼은 저 멀리서 체육관의 인파를 바다 가르듯 발걸음을 옮기는 한명의 사내를 보며 말을 이었다.
“평소 체육관에 잘 나오지 않던 카이서스가 다시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한지 이제 일 년 정도 됐지.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카이서스를 보기 위해 모인거야.”
“...”
“난 미스터 강. 네 팬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카이서스의 열렬한 추종자였지. 그런 내가 단언하건데. 카이서스의 전성기는 과거에 있지 않아.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있어.”
“...”
카이서스.
몇 년 전 볼튼의 스파링을 봐 준 대가로 아주 잠깐의 스파링을 가졌었던 복싱계의 위대한 챔피언.
이때 나는 세가지 사실로 인해 충격을 받았는데 그때의 카이서스가 몇 년간 제대로 훈련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는 게 일차 충격이었고, 그가 최근 일 년간 다시 훈련을 행하면서 폼을 완벽히 끌어올렸다는 게 이차 충격이었다.
그리고 삼차 충격은.
“오? 미스터 강? 오랜만이야?”
“아. 카이서스. 오랜만이에요.”
“간만에. 어때?”
그 카이서스가 날 알아보며 으쓱이는 어깨 짓으로 사각 링을 가리켰다는 거다.
“스파링 한번. 괜찮겠어?”
몇 년의 시간을 넘어. 다시 복싱 황제와의 스파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