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_마이애미 >
1.
WFC 293 시합이 끝나고도 우리 일행은 잭슨빌에 며칠 더 머물러야했다.
메디컬 룸에서는 최소한의 응급처치만 가능했기에 병원에서 두호 형의 제대로 된 검사와 치료를 해야 했기 때문.
“어서와. 브로.”
두호 형의 치료 덕분에 얻게 된 며칠의 휴가를 이용해 나와 아름이는 브라이언의 고향을 찾았다.
“오랜만... 이라고 하기엔 너무 며칠 전에 봤지?”
“아직 너한테 맞은 곳이 다 낫지도 않았다고.”
“하하하.”
그러게 누가 스파링 신청하래?
뜬금없이 스파링 신청을 해서 얼마나 난감했는데.
일단 아름이랑 같이 온 일정이었기 때문에 스파링이고 뭐고 내 마음대로 스케줄을 잡을 수 없다는 것도 컸다.
하도 진지하게 요청하기에 아름이한테 사정사정해서 스파링 일정을 잡긴 했지만 조금쯤 짜증이 났던 것도 사실.
마침 브라이언이 전력 스파링을 요구해와서 꽤나 신나게 두드렸다.
“사람을 그렇게 패놓고 여행 가이드를 부탁하다니. 너도 참 염치가 없구나.”
“우리가 하는 일이 그건데 뭐.”
“여행가이드?”
“사람 때리는 거 인마.”
브라이언 얘는 되게 진지한 것 같다가도 뜬금없는 타이밍에 엉뚱한 소리를 하더라. 진심 재미없는 타이밍에 재미없는 농담을 던지는 스타일이랄까.
“어쨌든. 환영해. 마이애미에 온 걸.”
“고맙다.”
마이애미.
한번쯤은 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CSI 마이애미를 너무 재미있게 봤었거든.
“와! 바다다!”
일정이 그리 여유롭지 않기에 가장 먼저 들렀던 마이애미 비치.
아름이는 마이애미 비치의 탁 트인 수평선을 바라보며 말 그대로 10월의 하늘같은 미소를 지었다.
“바다 들어가고 싶다... 그러고 보니 올 여름은 물놀이를 한번도 못 갔네?”
“어... 그러게?”
사실 ‘올 여름에는’ 이라고 하기엔 물놀이 자체를 가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지난번 부산 갔을 때도 해수욕은 하지 않았으니까.
그나마 가장 최근에 물에 들어간 거라면... 훈련 때문에 실내 수영장을 이용했던 것 밖에 없었던 것 같다.
“다음에 우리 물놀이가자! 계곡이나 아니면 워터파크?”
“계곡은 지금 들어가면 얼어 죽을 것 같고. 워터파크는 사람 엄청 많을 텐데 괜찮겠니?”
“뭐 어때? 어차피 우리 사귀는 거 사람들 다 아는데.”
“아니. 아니. 수영복 입고 있는 거 사람들이 엄청 찍어댈걸?”
“아...”
그건 생각 못했는지 순간 말문이 막힌 아름이.
“괜찮아! 조끼 입으면 되지! 그리고 어차피 무대 위에서 짧은 옷 입나 수영복이나. 뭐.”
하지만 이내 정신승리해버렸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두호 형도 그렇고 아름이도 그렇고. 나와는 달리 멘탈이 참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준현이나 다른 애들도 비슷하네. 나 빼곤 다 멘탈이 좋은 것 같았다.
“바다를 들어가는 건 상관없는데. 조심하라고. 여기는 마이애미 비치니까?”
그때 우리의 대화를 듣던 브라이언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런데 우리 한국어로 대화하고 있었는데 넌 어떻게 알아들은 거냐?
“바다 보면서 할 말이 대충 그것밖에 없지. 바다다. 바다 들어가고 싶다. 아냐?”
“...맞긴 한데. 너무 작위적이네. 마치 작가의 말로 당근을 외치는 작가처럼.”
“... 그게 무슨 말이지?”
“그런 게 있어. 그나저나. 마이애미 비치니 조심하라는 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마이애미 비치는 버뮤다 삼각지대와 맞붙어있는만큼 언제나 알 수 없는 사건 사고들이 넘치거든.”
“...?”
갑자기 여기서 버뮤다 삼각지대가 왜 나와?
“몰랐어? 버뮤다 삼각지대는 버뮤다 섬과 푸에르토리코. 그리고 이곳 마이애미를 꼭짓점으로 하는 트라이앵글이라고.”
“아?”
버뮤다 삼각지대라는 건 들어봤는데 그 삼각형의 꼭짓점에 마이애미가 들어가는 줄은 몰랐다.
“헐! 진짜? 그럼 저 바다가 버뮤다 삼각지대야?”
아름이도 몰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까와는 조금 다른 눈빛으로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하하. 뭐. 실제로는 더 먼 바다로 나가야 하겠지만. 맞아. 그러니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어디선가 난파된 배나 시공간을 초월한 비행기가 나타나는 걸 볼 수도 있으니.”
보기 드물게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을 이어가는 브라이언.
목석같고 진지 충이었던 브라이언도 자신의 고향에 오니 이런 모습이 되는구나 싶었다.
“헤이!”
그렇게 마이애미 비치를 걸으며 브라이언에게 이런저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던 도중.
뒤에서 짜증이 날 정도로 큰 목소리가 들렸다.
“헤이!!”
우리를 부르는 목소리는 아닐 거라 생각해 그냥 자리를 옮기려는데.
“브라이언! 미스터 강!”
그 짜증나게 큰 목소리가 이번에는 확실하게 우리 이름을 불렀다.
“... 라무차?”
대체 누군가 싶어 뒤를 돌아봤더니 웃통을 까고 엊그제보다 조금 더 까매진 것 같은 피부를 자랑하고 있는 라무차가 있었다.
“브라이언! 한참 찾았다고! 여. 애송이. 여기서 또 보는 군?”
라무차 이 자식. 나랑 브라이언을 대하는 온도가 심하게 차이 나잖아?
“브라이언. 라무차랑 아는 사이야?”
“어? 음... 그렇지?”
브라이언이 라무차와 아는사이라는게 신기해서 물어봤는데 대답이 약간 애매했지만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나보다 경력이 오래된 두 사람이니만큼 언제 어디서 접점이 있었을 수도 있으니.
“친구. 얼굴 보러 여기까지 왔는데 연락이 안돼서 섭섭했다고.”
“내일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하하. 그런 사소한 걸 신경 쓰면 안되지. 여긴 마이애미 비치라고!”
... 난 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라무차도 브라이언을 만나러 마이애미에 온 듯 했다.
약속보다 하루 일찍 오는 바람에 지금과 같은 만남이 일어난 거고.
“그나저나. 브라이언과 연락이 안됐다면서 우리는 어떻게 찾은 거야?”
“이런. 이런. 역시 애송이군. 감이지. 감. 파이터로서의 번뜩이는 감!”
...쟤 짐승이 아니라 개였나?
이 넓은 마이애미에서 어떻게 감으로 사람을 찾아?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본격적으로 해수욕 하시던 것 같은데?”
“이건 마이애미 비치에 대한 예의라고? 당연히 비치웨어를 입어줘야지!”
“그 예의. 우리한테도 좀 지켜주지?”
“하하하. 또 사소한 걸 신경 쓰는 군. 애송이.”
“하아...”
라무차 얘는 단순한 만큼 사는 게 참 즐거워보여서 부럽네.
“그나저나. 오늘은 하루 종일 애송이와 붙어 다니느라 연락이 안됐나 보군? 브라이언?”
“아아. 폰 배터리가 다 나가서 말이야. 미안하게 됐어.”
“뭐. 그럴 수도 있지. 어차피 우리 약속은 내일이었으니까.”
브라이언의 등을 팡팡 치며 웃어대는 라무차.
“불청객은 여기서 빠져주지. 아! 브라이언.”
“응?”
“애송이 친구에게 우리 스파링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겁먹고 도망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스파링?
스파링 이야기를 하기에 엊그제 나와 브라이언의 스파링 이야기를 하나 했는데 그게 아니라 라무차와 브라이언의 스파링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이런. 애송이는 몰랐던 것 같군. 브라이언은 내 스파링 메이트거든.”
“물론. 지금은 아니야.”
내게 자랑하듯이 말 하는 라무차. 마치 초딩이 ‘내가 얘랑 더 친해!’ 라고 으스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라무차의 말에 칼같이 대응하는 브라이언. 말은 칼 같았지만 꽤나 난감한 듯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된 거 였구만?
어떤 사정으로 라무차와 스파링 메이트를 하게 된 건지는 몰라도, 브라이언은 스파링을 통해 그의 실력을 알게 됐을 거다.
“엊그제 스파링은 그래서 제안했던 거였어. 그치? 브라이언?”
“...”
“오! 브라이언과 스파링을 했었어? 이거. 내 전력을 노출시킨 건 아니겠지? 뭐. 상관은 없지만 말이야. 하하하!”
“...”
역시나 난감한 표정의 브라이언.
라무차가 말했던 것처럼 반대로 나와의 스파링을 통해 이쪽 전력을 라무차에게 발설했을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해두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브라이언이었으니까.
“이거. 본의 아니게 걱정을 끼쳤나보네.”
브라이언이 내게 스파링 신청을 했던 걸로 미루어보아 그가 느꼈던 나와 라무차 사이의 실력차이는 꽤 컸던 것 같았다.
만약 나와 라무차의 실력이 비슷하다고 느꼈다면 굳이 날 걱정해서 스파링 신청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이봐. 라무차.”
“뭐냐. 애송이.”
“다음 복싱 이벤트전 때 답을 주려고 했는데. 여기서 만난 김에 정확하게 답을 주지.”
“뭐?”
“내 다음 WFC 매치는 헤비급 타이틀전이 될 거야. 변명의 여지없도록 준비해두라고.”
“...”
두호 형이 말 했던 대로. 난 아직 앞으로 나아갈 것만 생각할 때였다.
그 끝에 벽이 있다면 벽을 부수고. 부술 수 없다면 넘고. 그래도 길이 없다면 그때쯤은 뒤를 돌아보며 내가 걸어왔던 길을 회상해보겠지.
지금은 지난 길을 돌아보기엔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일단은 헤비급 타이틀 획득. WFC 제패가 먼저였다.
“으하하하하! 이거! 브라이언을 만나러 왔다가 이런 좋은 소식을 얻게 되는 군!”
사람들이 많은 해변에서 이렇게 크게 웃으며 소리치다니.
넌 수치심이라는 게 없니?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
그나마 아름이는 라무차와 마주친 순간부터 저 멀리 카페의 차양막 아래로 피신해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좋아. 애송이. 변명의 여지없도록. 확실하게 물어뜯어주마.”
조금 전까지 미친 듯이 웃어대던 라무차는 갑자기 내게 얼굴을 들이밀며 으르렁거리듯 위압감을 조성했다.
아프면 병원을 가. 병원을. 아무리 봐도 넌 정상이 아니야.
“좋아. 기분이 좋으니 이만 불청객은 빠져주지. 브라이언. 연락하라고.”
“오케이. 들어가.”
그러더니 갑자기 브라이언에게 인사를 하고는 사라지는 라무차.
상체 근육을 씰룩거리며 인파를 헤집고 사라지는 모습이 정말 짐승 같았다.
어쩜 저렇게 감정에 솔직하게 행동할 수 있는지. 어떤 면에선 부럽기도 했다.
“헤비급 타이틀전이라.”
라무차가 사라지고 난 뒤.
브라이언은 헤비급 타이틀전을 입에 담았다.
“왜. 안될 것 같아?”
“음... 아니. 솔직히 누가 이길지는 모르겠어. 다만, 아주 재미있는 경기가 펼쳐질 것 같긴 하군.”
라무차와의 스파링이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물어볼 마음도 없었고 말해줄 브라이언도 아닐 테니까.
다만 엊그제 나와의 스파링에서 일방적으로 밀렸던 브라이언임에도 승패를 알 수 없다고 하는 걸로 보아 라무차 또한 만만하지는 않다는 뜻이겠지.
“해서야! 끝났어?”
“아. 어. 미안해.”
라무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쪼르르 옆으로 달려온 아름이.
“저 흑인 아저씨 너무 무서워. 엊그제도 갑자기 막 막 나타나고!”
“하하...”
계체량 때도 갑자기 나타났었지. 빌리와 함께.
“아저씨라니. 라무차 우리보다 어려.”
“응?”
“우리보다 한 살 어리다고.”
“...거짓말...”
“아! 참고로 여기 있는 브라이언도 우리보다 어려. 라무차랑 동갑.”
“...”
“야. 브라이언. 누나. 해봐. 누. 나.”
“...누...ㄴ나?"
"악! 악악!!“
영문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따라하는 브라이언.
그리고 그에게 누나라는 말을 듣고는 뭔가 혼란에 빠진 듯한 아름이였다.
*
-팡! 팡 빵!
태평양 남서부에 위치한 섬나라. 뉴질랜드.
수도 웰링턴의 한 체육관에서는 한창 미트를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봐. 조던!”
미트 소리의 주인은 동양태평양 챔피언인 조던 리.
“무슨 일이야? 훈련 중이잖나?”
그는 자신의 훈련을 방해받는 걸 극도로 꺼리는 스타일이었다.
특히 다음 매치가 잡힌 상태에서 시합모드로 훈련 중일 때는 웬만해선 그의 훈련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이곳 체육관의 불문율이었다.
“미안해. 중요한 전화가 왔어.”
“... 중요한 전화?”
아무리 중요해도 그렇지. 고작 전화 때문에 자신의 훈련 흐름을 끊다니. 조던은 어이가 없었는지 당장 화를 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중요한 전화야. 너도 이해할걸?”
“누구에게 온 전화 길래 그래?”
“황제. 카이서스에게 전화가 왔어.”
“뭐?!”
조금 전까지 화를 냈다는 것도 잊고 황급히 스텝이 건네는 전화기를 받아드는 조던 리. 복싱 글러브를 벗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아주 불편한 자세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 조던? 나 카이서스야.
조던이 이번 이벤트 매치를 치르는 이유.
꼭 넘고 싶은 벽이자 한번이라도 더 마주하고 싶은 선수.
카이서스였다.
-다음 시합을 보러 갈까 하는데 말이지. 그 전에 부탁할 게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