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_WFC 293 END. >
1.
“꺅! 어떡해!”
아름이의 놀란듯한 목소리와 함께 차가운 철창 안에서 바닥으로 쓰러지는 두호 형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
비유적인 표현으로서의 슬로우 모션이 아닌, 무의식중에 집중력이 올라가며 말 그대로 쓰러지는 두호 형의 모습이 느리게 보였던 것이다.
“어떻게 해 해서야...”
“...”
사고는 1라운드가 채 몇 분 남기지 않고 일어났다.
레그킥으로 학센의 다리를 묶어둔 뒤 그의 상체를 앞으로 빼내는 데 성공한 두호 형이 라이트 펀치를 날리다 제대로 카운터를 맞고 쓰러진 것이다.
-퍽. 퍽. 뻐억.
제대로 꽂힌 카운터에 다운을 당했지만, 그 와중에도 팔을 올려 파운딩 디펜스를 하는 두호 형.
그리고 그런 두호 형을 확실히 끝내기 위해 상위 포지션을 잡고 도끼 찍듯 계속해서 파운딩을 내리꽂는 학센.
-삐!
다행히도 몇 초 남지 않았던 1라운드가 끝나며 당장의 위기는 넘겼지만, 빈말로도 긍정적인 말을 꺼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떡해. 두호 오빠 못 일어나는데...”
“...일어날 거야.”
1라운드가 종료되었지만, 케이지 바닥에 웅크리고 머리를 가드하고 있던 두호 형은 당장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심판이 두호 형에게 다가가 상태 체크를 하려고 하자 그제야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두호 형.
멀리서 봐도 상태가 정상이 아닌 걸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데미지가 큰 듯했다.
“언니랑 유안이도 보고 있을 텐데. 괜찮으실까?”
“괜찮으실 거야.”
유안이는 몰라도 형수님은 여장부였다.
종합격투기 선수의 연인에서 부인까지. 십수 년을 지내온 만큼 웬만한 상황에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강인한 마음을 가진 분이었으니까.
중요한 건 지금 두호 형의 상태였다.
멀리서도 눈에 띌 정도로 출혈이 있었는데, 두호 형이 웅크리고 있었던 바닥은 핏물이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을 정도였다.
거기다 세컨 석으로 이동하면서도 비틀거리는 게 당장 1분의 휴식 시간으로 해소할 수 있을 정도의 데미지가 아닐 듯했다.
“스탑... 하려나.”
“응?”
“두호 형. 데미지가 커 보여서. 그만 중지 시켜야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그 정도야?”
“...”
사실 나는 저 정도로 데미지를 입어본적도. 저렇게 핀치에 몰려본 적도 없었기에 판단을 내릴만한 근거가 부족했다.
다만 내가 저 상태면 계속 시합을 재개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던져볼 뿐이었다.
‘힘들겠지.’
더이상 시합을 재개해봤자 상황만 암울해질 것 같았다.
상대는 레그킥에 기동력을 조금 잃기는 했다지만 그 외에는 큰 데미지를 입지 않았고 체력도 쌩쌩했다.
포인트를 많이 벌어뒀다기엔 겨우 1라운드가 끝났을 뿐이라 판정을 노리기도 어려웠다. 포인트를 벌기도 어려울뿐더러 버텨야 할 라운드가 너무 많이 남았으니까.
그렇다고 일발 역전을 노릴 만큼 만만한 상대인 것도, 내 상태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나라면... 글쎄. 아마도 포기하지 않을까.’
괜히 고집을 부리다 더 큰 데미지를 입고 차후 시합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면 오히려 손해가 아닐까.
물론 저 상황이 돼보면 또 다른 판단을 내릴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생각해봤을 때 내가 두호 형 입장이라면 시합을 포기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볼 것 같았다.
-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짧은 라운드 간 휴식 시간이 끝났고.
-퉁. 퉁.
-스윽.
가벼운 스텝으로 나서는 학센과 발바닥을 바닥에 붙인 채 천천히 나서는 두호 형이 2라운드의 시작을 알렸다.
“시작했다.”
“그러게.”
결국, 시합을 계속하기로 했나 보다.
아니. 어쩌면 두호 형은 나와 달리 시합을 포기하는 것을 애초에 고민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꼬옥.
말없이 내 손을 강하게 잡는 아름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이 시합을 끝까지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휘익.
-퍽.
-철컹
-퍽. 퍽
시작과 함께 가벼운 스텝으로 두호 형에게 달려드는 학센.
1라운드 레그킥의 데미지는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걸 과시하려는 듯 더욱 활발한 움직임이었다.
순식간에 케이지까지 밀린 두호 형.
두호 형은 가드를 단단하게 굳히고 스탠딩 상태로 몸을 웅크린 채 수세에 몰렸고, 학센은 그런 두호 형의 전신을 펀치와 니킥 등으로 신나게 두드렸다.
-텁!
-철컹 철컹!
가드 위로 던지는 타격은 효율이 높지 않다는 판단이었는지 그대로 달라붙어 테이크다운을 시도하는 학센.
두호 형은 케이지를 이용해 어떻게든 테이크다운을 당하지 않으려고 애썼고 그렇게 몇 번의 위기를 버텨냈다.
-삐
한 시간 같았던 2라운드의 종료를 알리는 알림.
두호 형은 2라운드 내내 허우적거렸을 뿐 제대로 된 펀치를 뻗어내지 못하고 케이지에 몰려 학센의 타격 세례를 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다행히 테이크다운까지 넘어가진 않았지만 언제 쓰러질지 몰라 조마조마했던 순간들.
“어떡해... 못 보겠어 해서야...”
“괜찮아. 정 그러면 잠시 눈 좀 감고 있어.”
적어도 나는 이 시합의 끝이 어떻게 쓰여지든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봐야 할 의무가 있었으니까.
의자에 앉으면 다시 일어설 수 없다는 듯 휴식 시간 내내 케이지에 기대서 있던 두호 형.
출혈은 어느 정도 멎은 듯했지만, 결코 희망적인 상황은 아닌 듯했다.
-삐
3라운드 시작을 알리는 알림음.
-퉁. 퉁.
학센은 허세가 아니라 정말 모든 데미지를 회복한 듯 가벼운 스텝으로 링을 가로질렀다.
-저벅. 저벅.
두호 형도 꽤나 체력과 데미지가 회복되었는지 2라운드와는 달리 걸음걸이가 안정되어 있었다.
“...”
집중력으로 인지능력이 올라간 내게 두호 형의 눈빛이 날아오듯 박혔다.
결코 포기를 생각하는 눈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두호 형과 학센의 경기는 결코 3라운드를 넘기지 않을 거라는 걸.
-휘익!
-휙!
2라운드 내내 케이지에 밀려 가드를 굳히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링 중앙에서 공방을 펼치는 두호 형.
-휘익.
-퍽.
-뻐억!
학센의 타격을 모두 피해내지는 못하고 타격을 허용했지만, 그에 마주해 펀치를 날리며 응수해나갔다.
-비틀.
똑같이 펀치를 주고받았지만, 두호 형의 밸런스가 무너지는 게 더 빨랐다.
-퍼억!
그 틈을 노리지 않고 다시 뻗어오는 학센의 펀치.
미처 다 피하지 못하고 스치듯 유효타를 허용한 두호 형은
-쩌억!
그 와중에도 오른발 카프 킥으로 학센의 종아리를 가격했다.
-휘청!
학센도 순간 휘청거릴 만큼 제대로 들어간 카프 킥.
-쩌억!
하지만 두호 형은 후속타를 날리지 못했고 학센에게 로우킥을 허용해야 했다.
“...”
비효율적이다.
내가 보기엔 정말 비효율적인 경기였다.
저렇게 맞불 작전으로 붙으면 상대적으로 데미지를 더 많이 입고 체력도 떨어진 두호 형이 불리했다.
물론 그걸 잘 알고 있는 학센은 그런 두호 형의 대응을 적극적으로 받아주고 있었다.
-휘익. 퍽.
-쉬익. 뻐억.
-쩌억!
-떠억!
두 선수 모두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타격전.
타격의 회피를 위해 스텝은 밟았지만, 결코 물러서지는 않았다.
“아우... 저거 괜찮은 거 맞지 해서야?”
“... 괜찮을 거야.”
아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지만, 나도 잘 모르겠다.
사실 괜찮을 것 같지 않았다.
정타를 너무 많이 허용했다.
이미 예전에 쓰러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쒜에엑
그때 크게 휘둘러지는 학센의 라이트 펀치.
딱 느낌이 왔다.
저걸 맞으면 아무리 두호 형이라도 서 있지 못할 거라는 게.
-쉬이익
그리고 그 펀치에 마주 뻗어지는 두호 형의 펀치.
-떠어어억!
3라운드 중반을 훌쩍 넘긴 시간.
이번 경기의 승패를 가를 펀치가 마이크가 없음에도 생생히 들릴 만큼 큰 소리를 내며 적중되었다.
-쿠웅!
-스탑! 스탑!!!
턱에 제대로 들어간 라이트 카운터.
쓰러진 건 학센이었다.
*
“쓰, 쓰러졌습니다! 학센! 다운입니다! 스탑! 심판의 스탑 사인이 떨어졌습니다! 한국의 히어로! 최두호 선수가 또다시 학센을 상대로 승리를 거머쥐었습니다!”
스포츠온 TV의 캐스터는 믿을 수 없는 역전극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에... 이건 정말 대단한 결과입니다. 최두호 선수.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태에서 손해를 보면서도 카프 킥과 로우킥 셋업을 쌓았고, 그 결과 이런 라이트 카운터를 성공시킬 수가 있었어요.”
김국현 해설위원은 캐스터만큼이나 흥분된 상태에서도 차분하게 이번 경기의 역전 요인을 잡아내며 해설을 이어갔다.
“학센 선수의 파이트 스타일은 언제든 앞뒤 양옆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상체를 세워 뒤로 빼두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무게중심도 뒷발에 두는 편이죠.”
학센의 지난 경기들과 1라운드 초반의 모습을 자료화면으로 띄우는 김국현 해설.
“하지만 이번 시합은 1라운드부터 최두호 선수의 레그킥에 집요하게 노려지면서 하체를 뒤로 빼고 무게중심을 앞발에 두면서 반대로 상체를 앞으로 뺐습니다.”
이번에는 2라운드와 3라운드에 학센의 파이팅 포즈를 자료화면으로 띄웠다.
“보시면 이렇게 상체가 나와 있죠? 이 작은 차이가 마지막 두 선수의 승패를 나누었어요. 상대적으로 앞으로 나와 있던 학센의 얼굴에 최두호 선수의 라이트가 먼저 적중된 겁니다.”
└와... 이걸 이기네
└백퍼 질 줄 알았는데
└2라운드까지 상황 보면 그냥 진 거였음. 사실 1라운드가 1분만 더 있었어도 그냥 끝나는 거였음
└2라운드 내내 맞으면서도 체력 회복한게 크지않았나 싶다.
└오늘 시합 지렸다 진짜. 최두호 맷집 ㅈㄴ좋네
└저건 맷집이라기보다는 진짜 정신력이다 정신력
└크으... 웅장이 가슴해진다
└레전드다 레전드. 이거 이러다 최두호가 미들급 벨트까지 따오는 거 아니냐?
스포츠온 TV의 실시간 채팅 반응도 캐스터의 반응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채팅 로그를 채 읽기도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쌓이는 글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채팅 글이 거의 쌓이지 않을 정도로 회의적인 분위기였던 걸 생각하면 정말 극적인 반전이었다.
└승리 인터뷰한다! 와... 최두호 얼굴봐
└으... 저 상태로 어떻게 싸운거야? 진심 존경스럽네
승리 인터뷰를 위해 카메라 앞에 선 최두호.
그 얼굴은 찢어지고 터져 원래의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결코, 적지않은 비용을 지불하고 얻어낸 값진 승리.
최두호는 승리 인터뷰를 끝내고 케이지를 내려가는 그 순간까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시종일관 당당한 모습이었다.
**
“미련한 놈!”
안 코치님이 보기 드물게 흥분한 채 화를 내고 있었다.
“그걸 왜 고집을 부려! 필승이 넌 그걸 왜 안 말려!”
“...죄송합니다.”
시합이 끝나고 찾은 라커룸.
두호 형의 승리에도 분위기가 썩 긍정적이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에요?”
나는 조용히 옆에 있던 창섭 형에게 상황을 물었다.
“두호 형 지금 메디컬 룸에 있는데. 갈비뼈가 나갔대. 2라운드 니킥 때 나간 것 같은데...”
“헐...”
“그 상태로 무리하게 움직여서 완전 아작난 것 같아.”
“...”
갈비뼈는 사람 몸에서도 유독 약한 뼈에 속했다.
어디에 부딪히지 않고, 큰 힘을 썼을 때 흉곽 부근 근육의 압박에도 금이 가는 경우가 있을 만큼.
그런데 늑골골절이 있는 상태에서 3라운드에 그렇게 무리해서 펀치를 날려댔으니 금이 갔던 뼈가 부러졌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 끝까지 부축 안 받겠다고 고집부렸나 봐.”
“두호 형이요?”
“어. 그래서 인터뷰하고 라커룸 들어올 때까지도 아무도 몰랐어.”
대체 그런 고집은 왜 부리는 건지.
이겼으면 내려올 때는 부축 조금 받아도 괜찮잖아.
“안 코치님도 그냥 답답해서 저러시는 걸 거야. 필승 형도 몰랐을 텐데 뭐.”
“그러네요.”
두호 형이 부축을 거절하고 혼자서도 잘 걸었으니 필승 형은 알겠다고 했을 뿐이었겠지.
나는 무거운 분위기의 라커룸을 뒤로하고 메디컬 롬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라커룸에서 멀지 않은 메디컬 룸.
유안이와 형수님은 아름이와 함께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해서 씨.”
“아. 형수님. 유안아. 안녕?”
“...우웅.”
유안이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안 건드리는 게 상책이겠지.
“들어가서 그이 좀 봐줄래요? 저는 유안이 때문에...”
“...네.”
유안이 때문이라고 하지만 형수님도 낯빛이 하얬다. 손끝과 어깨도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게 강한 척 하시지만 분명 적잖이 충격을 받으신 듯했다.
“아름아. 잠깐 들어갔다 올게.”
“응. 다녀와.”
-끼익
사람들을 뒤로하고 메디컬 룸으로 들어가니 상반신에 붕대를 두르고 안면 치료를 받고 있는 두호 형이 보였다.
“해서냐?”
“... 미련한 아저씨. 왜 그렇게 무리를 해요?”
“하하하. 나도 이렇게 뚝 부러진 줄은 몰랐지.”
바깥 분위기도 모르고 혼자 밝게 웃는 두호 형.
내가 말한 미련과 무리는 2라운드부터의 시합을 포함했다.
나였으면 아마 포기했을 테니까.
결과적으로 승리했다지만 리스크가 큰 건 사실이었다.
“유안이가 보고 있는데. 도저히 부축받아서 내려오진 못하겠더라. 시합에서도 많이 맞았는데.”
“형 얼굴 보면 유안이가 괴물인 줄 알고 도망갈 거에요.”
“하하. 가면이라도 하나 써야 하나.”
이런 멘탈하나는 존경스러웠다. 진짜.
“해서야.”
“...네.”
“너무 머리로만 생각하지 마. 앞으로 나아갈 때는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봐야 하는 순간도 있는 거야.”
“... 그러다 그 앞이 막다른 길이면요?”
“그러면 미련 없이 뒤돌아서 다른 길을 갈 수 있지. 막다른 길이라는 걸 확인하지 못하면 미련이 남잖아.”
“...”
“앞만 보고 가라. 넌 더 멀리. 더 높이 오를 수 있어.”
“제 걱정 말고 형 걱정이나 해요. 나가는 순간 형수님이랑 유안이가 가만 안 놔둘 거니까. 그전에 안 코치님 잔소리도 기대하시고.”
“하하하.”
끝까지 혼자만 웃는 두호 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