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_사고 >
1.
“후우...”
꽤나 아슬아슬해 보이던 두 사람의 대치는 빌리가 먼저 한걸음 물러서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뭔가 문제를 일으키고 싶은 마음은 없어. 다만. 나는 미스터 강. 너와의 시합을 원한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살벌한 라무차의 눈빛에 가볍게 양 손을 들어 보이면서도 자신의 용건은 다 이야기 하는 빌리.
“그거 참 다행이군. 나도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애송이는 나와 먼저 선약이 있으니 차례를 기다리라고. 물론 그 차례가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한 발짝 물러선 빌리덕에 라무차도 살기를 누그러뜨렸다지만 그래도 그 기세는 어디가지 않았다.
‘이야기만 들었지 실제로 보니 정말 짐승 같은 놈이네.’
왜 닉네임이 ‘비스트’인지 단번에 이해가 됐달 까.
이성적인 논리나 이해관계보다는 감정과 본능에 충실하다는 느낌을 만난 지 채 몇분도 되지않아 여실히 느낄 정도였으니까.
“그건 미스터 강이 결정할 일이지. 애초에 그걸 우리가 결정할 수 있었다면 이 자리에 올 필요도 없었어.”
그에 반해 빌리는 오히려 차분했다.
내가 기억하는 빌리는 라무차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감정적이고 서투른. 한 가지 감정이 강해지면 그에 매몰되는 스타일이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잘못 봤던 것인지 아니면 그 사이 빌리가 내적으로 성장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니지. 난 너처럼 애송이에게 시합을 부탁하러 온 게 아니야.”
그리고 빌리의 이야기에 공감하지 않는 라무차.
시선을 내게로 돌리며 상당히 불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만약 저 애송이놈이 나와의 시합을 거부하고 라이트 헤비급 방어전을 선택한다면. 시합과 상관없이 지금 당장 저 얼굴을 땅바닥에 처박아주겠어.”
“... 그랬다간 헤비급 타이틀을 지키는 건 고사하고 교도소 신세를 지게 될 텐데?”
“무슨 상관이야. 거슬리는 놈이 있으면 쓰러뜨린다. 아주 간단한 명제잖아? 그리고 격투가 끼리의 시비. 크게 번질 일 없는 것 알고 있잖아?”
“...”
와우.
곰이 재주를 부리는 걸 보면 이런 심정일까?
이성과는 전혀 상관없이 성질머리대로 일을 처리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생각해두고 움직이는구나 싶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앞뒤 분간 못하는 곰새끼에게 족쇄 하나정도는 걸어둔 느낌이랄까.
“그러니 선택해. 난지. 아니면 저놈인지.”
이번에는 나를 향해 질문을 던지는 라무차.
“내가 만약 빌리를 선택하면 당장 여기서 한판 붙겠다?”
“말이 좀 통하는 군.”
“하아. 말이 안 통한다고 느끼는 건 나뿐인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빌리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것 참. 빌리가 내 심정을 공감해주는 순간이 올 줄이야.
“하나만 물어보자.”
“뭐지?”
“너. 나한테 뭐가 그렇게 불만인건데?”
사회적 지위도 체면도 내팽개치고 여기서 한판 붙고싶을만큼 내게 쌓인게 있나? 라무차가?
TWF31에서 나 때문에 헤드 코치를 박탈당한 거?
타이틀 샷을 가져갔으면서 복싱 이벤트 전을 먼저 잡은 거?
그것도 아니면 뭐가 있지? 지난 승리 인터뷰에서 라무차를 도발 한 거?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과거 시합들을 찾아보면 나보다 훨씬 심하게 도발했던 상대선수들에게도 이정도로 적개심을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대체 라무차는 왜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
“... 멍청한 질문을 하는군. TWF 코치든. 날 도발한 거든. 그런 건 아무상관 없는 게 당연하잖아?”
“그러면 대체 뭔데?”
“사자가 자기 영역에 들어온 다른 수컷 사자를 공격하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 단지 네놈이 내 영역에 들어왔고. 네가 사자라는 사실 하나면 충분하지.”
“...”
이 새끼. 생각보다 더 짐승 같은 새끼네.
“네 말은. 그냥 내가 헤비급이고 강하니까 싸우고 싶다. 그거야?”
“당연하지! 페드릭전을 봤다. 이제껏 상대했던 놈들보다 월등한 기량. 이제껏 하이에나 같은 놈들 밖에 만나지 못했는데 처음으로 같은 사자를 만난 기분이었지. 그런데 그 상대가 내 영역을 허락도 없이 활보하면서 나와의 싸움은 피한다고 생각해봐! 얼마나 화가 날지!”
“... 진짜 진지하게 생각해봤는데. 별로 화는 안 나는데?”
이건 사람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그냥 너무 감정에 충실해서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느낌이었다.
텔론 회장은 대체 이 짐승을 어떻게 컨트롤 하는 거야? 아니지. 제대로 컨트롤이 됐다면 이렇게 내 앞에 나타날 일도 없었으려나.
“그러니 빨리 선택해. 저 놈인지 나인지.”
“흠.”
빌리와의 방어전을 선택하면 라무차는 진짜 여기서 싸움을 걸 것 같은 놈이었고, 그렇다고 라무차를 선택하자니 협박 아닌 협박에 숙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선택은...”
“...”
“...”
빌리마저 내 입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하긴. 대답 여하에 따라서 WFC 헤비급 최강자 두 명의 길거리 싸움을 직관할 수도 있었으니 당연하겠지.
미안하지만 내 대답은
“지금은 선택 안 할래.”
보류다.
“······.뭐?”
“애초에 텔론 회장이 내게 준 기한은 복싱 이벤트 전까지라고. 그때까지 난 최대한 심각하게 고민해볼 거야.”
“지금 장난쳐?”
“장난같냐? 너 말고 빌리를 선택하면 당장 싸우겠다며. 그런데 난 빌리를 선택하지도 않았어. 보류일 뿐이지.”
“난 그런 말장난을 아주 싫어하지. 당장 붙어볼까?”
“이봐. 라무차. 내가 여기서 널 선택해도 복싱 이벤트전은 끝나야 매치 일정이 잡히겠지?”
“... 그렇지.”
“그러면 내가 복싱 이벤트 전 때 널 선택해도 지금 널 선택하는 것과 차이가 없잖아. 그렇지?”
“... 그런...가?”
“나한테 뭐라하지 말고 복싱 이벤트 전을 잡아온 텔론 회장한테 가서 뭐라 하라고. 그것만 아니었으면 복싱 이벤트 전 대신 빌리와 방어전을 치르고 라무차 너와의 타이틀전도 가졌을 테니까.”
“...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군.”
와.
단순한 놈이어서 다행이었다.
한자성어 중에 조삼모사라는 게 있는데 나중에 심심하면 한번쯤 찾아보렴. 라무차.
“좋아. 복싱 이벤트 전까지 기다려주지. 그때 가서 네가 날 선택하지 않으면 복싱 링에 올라가서 네놈이든 상대 복서든 모조리 때려눕혀주마.”
“걱정 말고. 용건 끝났으면 이만 가달라고. 갑자기 피곤해졌어.”
설마 아니겠지 싶었지만 혹시라도 저 짐승 같은 놈이 갑자기 달려들까봐 집중력을 은근히 끌어올려뒀더니 진짜 피로도가 올라간 느낌이었다.
“... 미스터 강. 넌 주먹보다 혀가 더 대단한 것 같아.”
라무차가 한 번 더 으르렁 거린 뒤 자리를 뜨자 조용히 기다리던 빌리가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그나저나. 넌 안가?”
“그래. 나도 일단 돌아가지. 다음 네 시합 때는 답을 알 수 있을 테니까.”
이렇게 순순히 돌아갈 거면 대체 왜 왔냐고 그러니까.
“절실함을 알리고 싶었을 뿐이야. 너와의 경기로 내 안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
“그건 네 마침표지.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애초에 내가 찍어주는 마침표가 어떻게 네 이야기의 끝이 된다는 거야.
스스로의 힘으로 마무리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잖아.
“...그럴지도 모르지. 이러니 저러니해도 결국 홀로서지 못하는 것일 수도. 어쨌든. 미스터 강 너와 싸우고싶은 마음은 진심이다. 그것만 알아둬.”
“알겠어.”
알겠으니 돌아가.
사랑과 관심은 아름이에게 받는 걸로 충분해. 심지어 땀내 나는 남자놈들의 구애는 영 취미가 아니라서 말이지.
어휴. 빨리 들어가서 아름이 보고 힐링이나 해야겠다.
*
라무차와 빌리가 찾아온 다음날.
WFC 293 시합 날 점심쯤이었다.
“헤이! 미스터 강!”
어제와 마찬가지로 땀내 나는 남자놈이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남자 놈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브라이언!”
브라이언 제프.
벤슨과 더불어 내가 ‘동료’라고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종업계 종사자.
그리고 지난 늦봄 나와 한차례 경기를 치르기도 했던 호적수이기도 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구나.”
어제 있었던 라무차와 빌리의 이야기를 해줬더니 별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여주는 브라이언.
“그런 일이 있었구나가 아니라니까? 단순히 강한 상대와 붙고싶다는 이유로 그런 짓을 한다는게 믿겨져?”
“음... 라무차라면 가능할지도.”
“뭐?”
“아. 아니야.”
어이없어하는 내 반문에 뭐라고 중얼거린 브라이언.
워낙 작게 중얼거려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는데 브라이언은 별것 아니라며 얼버무렸다.
“그보다. 미스터 최의 시합까지는 시간이 조금 있지?”
“응? 어. 시합은 저녁이니까.”
경기 자체는 저녁 늦게나 있을 예정이었다.
메인카드가 아니어서 마지막 경기순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해가 저물고 나서야 시합에 들어갈 터였다.
“오케이. 미스터 강.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부탁?”
어제 있었던 황당한 일을 말했을 때도 별 반응 없던 브라이언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며 꽤나 진지한 얼굴로 부탁을 언급했다.
무슨 거창한 부탁을 하려고 그러지?
“나랑 한번만 싸워줄래?”
“...엉?”
“가볍게 싸우는 게 아니라. 그래. 시합 같은 스파링이면 좋겠어.”
“...엉?”
갑자기 뭔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여?
2.
WFC 293.
플로리다 주 잭슨빌에서 치러지는 WFC의 넘버링 이벤트는 개최 전부터 꽤나 시끌시끌한 이슈사항이 넘쳐났었다.
그 중에는 WFC 흥행수익 탑이라고 할 수 있는 학센의 복귀전이자 리벤지전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WFC 293을 찾은 관람객 중 유명한 격투가 들이 많았던 이유도 있었다.
WFC 헤비급 챔피언 라무차.
WFC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이자 헤비급 타이틀 샷 보유자인 강해서.
WFC 라이트 헤비급 타이틀 샷을 가지고 있는 빌리.
현 WFC의 인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고해도 과언이 아닌 이들이 모인 WFC 293 이벤트는 그야말로 온갖 추측과 억측이 난무하는 경기가 되었다.
“미스터 강이야 미스터 최의 시합을 보러왔다 치지만. 라무차나 빌리는 분명 미스터 강을 보러 온 거겠지?”
“당연하지! 미스터 강의 다음 시합이 복싱 이벤트전이잖아! 그 다음 WFC 메인 매치의 상대를 정하기 위해 왔겠지!”
“어제 계체 이벤트가 끝나고 셋이서 부딪쳤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라무차가 두 사람을 모두 녹다운 시켰다더라고!”
“내가 들은 거랑 다른데? 난 미스터 강이 두 사람을 완전 무릎 꿇리곤 말도 안되는 요구를 했다고 들었어!”
WFC 293을 보기위해 모인 관중들도 이런저런 억측을 만들어내고 있는 시점.
‘미스터 강과 라무차라.’
고향인 마이애미에서 오늘 점심깨나 잭슨빌로 올라왔던 브라이언은 주변 관중들의 의미 없는 유언비어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체육관 중앙의 케이지만 내려다봤다.
아니. 정확히는 곧 시작될 최두호와 학센의 2차전 경기를 관객석 제일 앞줄에서 지켜보고 있는 강해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한마디 정도 충고를 해줄 수 있을까 했는데. 어림도 없었군.’
근 열흘 가까이 라무차와 스파링 메이트를 했던 브라이언.
마지막에는 메스 스파링이 아닌 전력 스파링까지 치르며 라무차의 괴물 같은 실력을 체감한 바 있었던 그다.
그리고 그런 라무차와의 경기를 준비할지도 모르는 강해서를 위해 최소한의 조언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요청했던 오늘 낮의 전력 스파링.
‘대체 어떻게 돼 먹은 괴물인거냐. 강해서.’
올 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어느 정도 호적수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WFC와 브로일러의 챔피언 전에서 브라이언이 조금만 침착했더라면 승리를 가져갔을 수도 있다는 전문가들의 평가도 상당히 많았었으니까. 물론 본인 또한 그렇게 생각했고.
하지만 지금 와서 브라이언은 그때 자신이 얼마나 침착했던 이길 수 없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반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그가 호적수라고 생각했던 강해서는 이미 말도 안 되는 까마득한 벽 위에 올라서 있었다.
‘처음 보는 빠른 스텝과 발 기술. 전보다 훨씬 정교해진 타격 메커니즘과 핸드 스피드. 라무차와 전력 스파링을 했을 때만큼이나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졌어.’
썩 내키지 않아하던 것과는 달리 스파링에 들어가자 눈빛이 달라졌던 강해서.
브라이언은 그런 강해서에게 제대로 된 타격이나 테이크 다운 기회를 잡기는커녕 시작부터 끝까지 압도당하다가 스파링을 종료하고 말았다.
“다 큰 괴물과 성장 중인 괴물이라. 중요한 건 성장 중인 괴물이 아직 다 크지 않았음에도 다 큰 괴물보다 더 클 것 같다는 거군.”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는 브라이언.
짧았지만 그의 파이터 인생에 호적수로 남았던. 그리고 지금은 아득한 격차를 보여주는 그의 친구를 내려다보며 조금은 씁쓸한 미소를 짓는 그였다.
*
-삐!
드디어 시합을 시작하는 알림이 울렸다.
“어떡해. 내가 다 긴장 돼.”
“괜찮아. 이길 거야.”
-꼬옥.
아름이는 긴장되는지 두호 형의 시합을 보며 불안에 떨었고 나는 그런 아름이의 손을 곡 잡아주었다.
-훙!
-휘익! 떡!
웰터급 때보다 확실히 몸집이 커진 두 사람.
두호 형과 학센은 1라운드 시작부터 탐색전 없이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학센의 슈퍼맨 펀치가 두호 형의 안면에 유효타로 들어갔고.
-쾅!
두호 형은 그런 학센에게 테이크 다운으로 받은 것을 되돌려줬다.
-쩌억!
테이크 다운에서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하고 다시 스탠딩으로 돌아간 두호 형이 먼저 학센의 허벅지에 로우킥을 한방.
-떠억!
곧이어 그의 종아리에 카프 킥을 한방 더 꽂아 넣으며 조금의 이득을 챙겼다.
‘당장 이득을 본 건 두호 형. 실력은... 우위를 가리기 어렵다. 먼저 실수를 하는 쪽이 지거나 조금 더 영리하게 움직이는 쪽이 이길 거야. 사고만 아니라면.’
학센 또한 베테랑이지만 두호 형은 말 그대로 백전노장. 경험과 격투 지능으로는 결코 밀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체력의 문제점이 있긴 하지만 웰터급보다 한 체급 높은 미들급인 만큼 그 부분도 일정부분은 보완이 되었을 거라 생각했다.
차근차근 풀어가다 보면 분명 승기는 분명 두호 형 쪽으로 기울 것이라고 아름이에게 말을 하려는 그 순간.
-떠어억!
-쿵!
사고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