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화_WFC 293 >
1.
-여. 브로. 무슨 일이야?
강해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막상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브라이언.
“음. 그냥. 잘 지내나 싶어서?”
-하하. 싱겁긴. 나야 잘 지내지. 너도 잘 지내지?
“흠... 그렇지? 뭐. 조금 특이할만한 일이 있긴 했지만.”
-응? 뭐라고?
“아니다. 9월 말. 미스터 최의 토너먼트 때 미국 오나?”
-아마도?
라무차와의 스파링에 관해서 이야기해볼까도 싶었지만 ‘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무차가 다 성장한 괴물 같은 느낌이라면 강해서는 성장 중인 괴물의 느낌이었으니까. 그것도 압도적인 성장세를 가지고 있으며 그 성장한계치가 어디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
“그래. 그럼 그때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지.”
-어? 브라이언 너도 오게?
“내 고향이 마이애미지. 잭슨빌은 그리 먼 곳이 아니야. 그것도 친구 얼굴 보러 가기엔 말야.”
브라이언의 연고지는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였지만 그의 고향이자 가족들이 사는 곳은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였다. 잭슨빌과는 꽤나 거리가 있기는 했지만 같은 플로리다주에 묶인 해안 도시.
-나야 좋지! 오랜만에 보겠네.
“...오랜만은. 불과 몇 달 전에 봐놓고.”
그것도 케이지 안에서. 라는 말은 속으로 삼키는 브라이언이었다.
“어쨌든. 그때 보자고.”
그렇게 브라이언 제프가 곧 있을 WFC 293에서 강해서와의 만남을 기약할 때. 강해서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플로리다 행을 준비하는 또 다른 선수가 있었다.
“그 건방진 동양인 놈. 분명 참석하겠지?”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지. 그가 가장 신뢰하는 선수의 시합이니까.”
자신의 매니저와 강해서의 플로리다 행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라무차.
“그러면 가보자고. 건방지게 타이틀 샷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선순위에서 날 젖혀둔 건방진 얼굴을 보러.”
타이틀전보다 복싱 이벤트 매치를 우선시했고, 이번엔 라이트 헤비급 방어전과 헤비급 타이틀전을 두고 저울질 중인 건방진 동양인 선수를 보기 위해 친히 발걸음을 마음먹은 WFC 헤비급 챔피언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
라스베이거스 내 어느 교도소의 면회실에서 그의 형을 만나고 있는 선수가 있었다.
“이번에 미스터 강. 그 친구를 만나기 위해 잭슨빌을 방문할 것 같아.”
“...”
길거리 폭행으로 교도소에 수감 중인 전 WFC 라이트 헤비급 선수 클락과 그의 동생 빌리.
“난 괜찮아. 빌리.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내 잘못 때문이지 그의 탓이 아니야.”
“/..알아. 나도 그에게 악감정은 없어. 다만... 부딪쳐보고 싶은 거야. 어쨌든 그는 형을 제압했던 사람이니까.”
소심한 자신을 위해 항상 듬직한 방패가 되어줬던 클락.
빌리에게 클락은 믿음직한 형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런 그의 뒤를 따르고 싶어 종합격투기를 시작했을 정도로.
하지만 빌리에게 클락은 믿고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방패이기도 했지만, 결코 넘을 수 없는. 넘고 싶지 않은 벽과도 같았다.
“형과 경쟁하고 싶지 않아서 미들급을 갔지. 하지만 이번에 체급을 올리고 나서 느꼈어.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라는 걸.”
“...”
“그래서. 그와 싸워보고 싶어. 형과 싸울 수는 없으니까. 형이 패배했던 선수들은 이미 모두 꺾었어.”
라이트 헤비급의 수문장이라 불리는 선수들.
랭킹 1위의 탑 컨텐더.
클락도 넘어서지 못했던 상대들을 모두를 꺾어낸 빌리였다.
“승패는 상관없어. 다만 그와 승부를 내야 뭔가 내 안에 마침표가 찍힐 것 같달까. 그런 거야.”
“... 이제 겁쟁이 빌리라고 부를 수가 없겠구만.”
“하하. 당연하지. WFC 라이트 헤비급 랭커이자 탑 컨텐더라고. 세계 최강을 노린다는 사내에게 도전할.”
빌리는 전에 없던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형을 바라봤고, 클락은 그런 동생을 보며 마주 웃어주었다.
조금 늦었지만, 한명의 사내로서 바로 서려는 동생을 응원하는 그런 웃음을.
*
“후움. 나도 미국 갈까?”
“응?”
“이번 여름도 거의 떨어져 있었잖아. 잭슨 빌은 아직 덥겠지?”
라이트 헤비급 방어전과 헤비급 타이틀전 사이에서 아직 결정을 못 내린 상태로 시간은 흘렀고, 내일이면 두호 형의 미들급 토너먼트 시합을 보기 위해 출국을 해야 하는 날짜가 다가왔다.
“그러게. 아무래도 여름이랑 연말이 가장 큰 시장이니까.”
“그래두. 다른 선수들도 다 그 시기에 시합 가지는 건 아니잖아.”
“하하.”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WFC PPV 흥행 순위를 보면 내 이름이 가장 위쪽 4칸 안에 들어갔다.
한마디로 내 시합은 가장 잘 팔리는 시합 중 하나라는 것.
그러다보니 가장 핫하고 뜨거운. 빅 이벤트에 내 시합들이 배치되곤 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부분 휴가철. 가장 뜨거울 때와 가장 추울 때 모여있었다.
“아니면... 다음 복싱 이벤트 때 같이 가자.”
“또 라스베이거스?”
“음... 좀 그런가.”
그러고 보니 아름이와 라스베이거스만 몇 번을 갔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그래. 가자. 플로리다.”
올여름도 페드릭과의 경기 때문에 제대로 함께하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이번 미국행이 끝나면 복싱 이벤트 전 때문에 당분간 또 바쁜 일정들을 보내야 할 테니까.
“... 헤헤. 그러면 나도 빨리 따라 나갈게! 잭슨빌은 나도 처음 가보는데 뭐 볼 게 있으려나?”
함께 가자는 말에 즉시 반응하는 아름이.
만약 아름이가 강아지였다면 지금 꼬리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을 것 같았다.
“아!”
그러더니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한 아름이.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평소와는 달리 조금 주저하는 듯했다.
“무슨 일인데?”
“음... 이번에 미국 다녀와서.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시간?”
평소에는 서로 시간이 될 때 만나는 편이었던 아름이와 나.
그런데 이렇게 시간을 내달라고 따로 이야기하다니 순간 무슨 의미인가 의문이 들었다.
“지난번에 본가에서 네 경기 봤잖아...”
“아. 페드릭 전?”
“응.”
그러고 보니 그때 아름이와 통화할 때 분명 본가에서 보고 있다고 했었지.
아름이 부모님도 내 시합을 보셨겠구나 싶었고.
“아무래도... 공개 연애도 하고 있고. 나도 나이도 있고 하니까...”
“...응?”
“아빠랑 엄마가. 해서 너 한번 보고 싶다는데...”
“...”
헐. 갑작스런 여자친구 부모님께 인사드리기 이벤트라니.
이런 큰 이벤트를 이렇게 갑자기 말하기 있음?
“너무 부담되면 다음에 봐도 되구!”
조금 전까지 꼬리 흔드는 기분 좋은 강아지 같았다면 지금은 귀가 축 처진 강아지 같은 모습의 아름이.
“아냐. 부담은. 뭐. 어차피 언젠가는 찾아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진짜?”
“당연하지.”
마냥 연애만 하기에는 나도 아름이도 적지 않은 나이.
거기다 두 사람 모두 한국에서 이름만 말해도 알 정도의 유명세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사람이 사귀다 헤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적어도 나는 아름이와 함께하는 미래를 그려보곤 했다. 다만 아름이도 나와 같은 마음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을 뿐.
그런데 아름이 쪽에서 먼저 이런 말을 먼저 꺼내주니 오히려 고마운 감정도 생겼다.
‘우리 부모님도 좋아하시겠네.’
아름이와의 연애를 공개한 이후 가장 좋아했던 사람이 우리 부모님이었다.
아버지는 내 기사뿐만 아니라 아름이의 기사도 스크랩하는 취미가 하나 더 생기셨다던가.
“헤헤. 헤헤. 헤헤헤.”
뭔가 안도되었는지 내 품을 파고드는 아름이.
언제 귀가 쳐졌냐는 듯 다시 꼬리가 보이는 듯했다.
“해서야.”
“응?”
“사랑해.”
“...”
이건 빌드업이 좋지 않았다.
이 시간. 이 분위기. 옳지 않았다.
다시 보이는 꼬리가 강아지 꼬리가 아니라 여우 꼬리였다니...
“...대답은?”
“나도 사랑하지.”
“헤헤. 잠시만 기다려. 나 씻고 올게.”
“... 아까 집 들어와서 씻었지 않아?”
“에이. 그거랑 다르잖아. 기다려?”
“... 우리나라 물 부족 국가잖아. 물 낭비에 세제 낭비에...”
“기.다.려?”
“...네.”
하아.
잭슨빌까지 총 16시간 정도 걸리던가.
내일도 비행기에서 자야 할 듯했다.
2.
-최두호! 미들급 챔피언 토너먼트 출격! 상대는 또다시 학센!
-학센. 최두호의 기량은 이미 하락세? 전과 같은 결과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것?
-WFC 293 계체량 이벤트에 나타난 얼굴들! 미첼 코너와 강해서. 라무차와 빌리까지? 그들이 잭슨빌을 찾은 이유!
-동양 태평양 챔피언 조던 리. ‘강해서. 느긋하게 잭슨빌을 방문할 시간에 한 방울의 땀이라도 더 흘려야 링에서 조금이라도 덜 맞을 것?
-강해서가 떠난 인천 공항. 바로 다음 날 출국하는 손아름. 그녀의 행선지는 연인이 기다리는 플로리다? 손아름의 공항 패션을 알아보자!
-미첼 코너. 다음 시합 상대가 누가 되든 걱정 없다. 누가 올라오든 미들급 챔피언의 자리는 나의 것!
-최두호. 184파운드로 계체량 이벤트 퍼펙트 클리어! 이제는 본 시합만 남았다! 한번 이긴 선수에게 지는 일은 없을 것.
└최두호 이제 나이 마흔다섯 아님? 그냥 웰터급 챔피언 자리만 잘 갖고 있다 은퇴하지 왤케 무리함?
└그래도 학센한테는 한번 이겼었는데 이번에도 승산 있지 않음?
└ㄴㄴ 최두호 너무 늙음. 이제는 진짜 기량 하락하지 않으면 감사합니다 해야 할 나이임. 학센은 아직 현역임
└ㅋㅋㅋㅋ 기량 아무리 하락해도 너보단 잘 침ㅋㅋ 최두호 몸 못봄?
└나보다 잘 쳐서 어따 쓰게? 학센보다 잘 쳐야지. 난 학센한테 토토 걸러 감
└극혐 토토충 ㄲㅈ
└학센도 흥행순위 떨어져서 이번 토너먼트에 목숨 걸 듯. 결과야 어찌됐든 둘 다 큰 부상 없었으면.
└이 와중에 강해서는 손아름이랑 최두호 경기 관람겸 여행갔누?
└조던 리 개빡침 ㅋㅋㅋ SNS로 강해서 ㅈㄴ 저격하고있음. 11월 초에 이벤트전 아님?
└맞음 ㅋㅋㅋ 오피셜 포스터도 뜸ㅋㅋㅋ 근데 강해서는 지금 잭슨빌이죸ㅋㅋㅋ
└조던 리 쯤은 안중에도 없는건지. 아니면 이벤트전이라 신경도 안쓰는건지ㅋㅋㅋ
계체량이 끝난 직후.
기사와 댓글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었는데 그 내용에서 알 수 있듯 WFC 293 계체량 이벤트는 별 탈 없이 지나갔다.
나와 아름이는 이벤트전을 며칠 앞두고 잭슨빌에 도착했으며 계체량 이벤트도 함께 참관했었고 지금은 두호 형을 기다리며 체육관 근처 벤치에 필승 형과 함께 앉아 있었다.
“한국 아니라고 아주 대놓고 같이 다니네?”
그런 우리가 부러운지 결국 한마디 해주는 우리 필승 형.
“한국에서도 대놓고 다니는데요? 어차피 공개 연앤데 뭐.”
이번에 한국 들어가면 아름이 부모님도 찾아뵐 예정이었다.
사람들이 몰리는 게 귀찮아서. 그리고 정말 시간이 없어서 사람 많은 곳에 안 나갈 뿐이지, 딱히 숨어서 만나거나 사람 없는 곳만 골라 다니지는 않았다.
“나쁜 새끼. 그나저나. 라무차랑 빌리. 둘 다 계체량에 얼굴 비췄다던데. 못 만나봤지?”
“네? 아. 네.”
그 둘이 잭슨빌을 찾은 건 나도 기사로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계체장 안에서는 사람도 많고 해서 엇갈렸지 않나 싶었다.
그들이 WFC 293을 찾을 이유는 나밖에 없었으니까. 분명 날 찾겠지.
“자기야. 자기 친구도 이번 경기 보러 온다고 하지 않았어?”
“아. 브라이언? 브라이언은 아마 내일 낮에 올 거야. 고향인 마이애미의 부모님 집에 들렀다가 온다고 했거든.”
아름이의 질문에 별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나니 필승 형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자기?”
아름이의 자기라는 호칭이 귀에 박혔나 보다.
“연인끼리 자기라고 부르는 게 뭐가 어때서요?”
“... 창섭이가 보고 싶다...”
“창섭 형 아까 여자친구분이랑 영상통화하고 있던데.”
“시부럴.”
우리 필승 형.
내가 우리 필승 형 장가가는 건 꼭 봐야 하는데 말이지.
진지하게 아름이한테 주변에 소개해줄 만한 사람 없나 한번 물어봐야겠다.
필승 형이 아름이한테 워낙 안 좋은 이미지로 찍혀있어서 말도 못 꺼내 봤었는데 말이지.
“헤이. 미스터 강.”
그때 뒤에서 들리는 날 부르는 목소리.
“... 라무차?”
계체 장 안에서는 만나지 못했던 그가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우리 앞에 나타났다.
“드디어 만나는군. 건방진 애송이.”
맘모스 코치와는 또 다른 느낌의 위압감을 풍기는 거구의 흑인.
차분한 느낌의 맘모스 코치와는 달리 당장이라도 터져나갈 것 같은 야성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미스터 강. 여기 있었...”
그리고 날 찾아온 또 한명의 사내.
“빌리?”
빌리였다.
“... 해서야. 난 먼저 들어간다. 두호 형 챙기러. 아름 씨도 유안이 보러 갈래요?”
“어... 네. 유안이 보고 싶네? 해서야. 먼저 들어갈게?”
... 와. 치사하게 나만 두고 둘 다 그냥 그렇게 간다고?
“우린 이야기 할 게 좀 있을 것 같군.”
“내가 먼저 왔어. 그러니 off-brand는 좀 꺼져봐.”
아름이와 필승 형이 순식간에 자리를 뜨고 난 뒤.
빌리와 라무차는 날 사이에 두고 서로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
두 사람이 용무가 있는 거면 나도 좀 빠져도 될까? 나도 갑자기 유안이가 보고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