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_레오 벤투라 >
1.
“먼저 가 있는다.”
해가지면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은 계절
9월의 초입에 두호 형은 전담 코치들과 함께 체육관을 떠났다.
두호 형의 WFC 미들급 토너먼트 1차전의 상대는 운명의 장난인지 학센으로 결정되었다.
웰터급 타이틀전에서 붙은 이후 학센과의 2차전.
웰터급과는 달리 한 체급 높은 미들급 시합이었기에 승부의 행방을 예측하기는 더욱더 어려웠다.
플로리다 주 잭슨빌에 위치한 잭슨빌 배터런스 메모리얼 아레나에서 펼쳐지는 WFC 293.
최고의 흥행카드 중 하나인 학센과의 시합이어서인지, 아니면 챔피언 토너먼트 1차전이어서인지는 몰라도 코메인 이벤트로 매칭된 시합은 벌써부터 뭇 격투기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전 WFC 미들급 챔피언이자 내게 타이틀을 넘겨줘야만 했던 미첼의 경우 현 미들급 랭킹 1위와의 토너먼트 1차전을 이변 없이 승리하며 WFC293의 승자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
“적응 잘 하고 있으세요. 응원하러 갈 테니까.”
두호 형은 시합을 한 달여 남겨두고 현지 적응을 위해 플로리다로 먼저 이동해야했고, 나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만간 성사될 복싱 이벤트 매치를 위해 훈련을 해야 했기에 한국에 남을 수 밖에 없었다.
“굳이 안와도 된다니까.”
“에헤이. 어차피 저도 아직 이벤트 잡힌 것도 아닌데요 뭐.”
일전에 은퇴를 언급했다지만 두호 형이 앞으로 얼마나 더 선수생활을 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다음 시합이 마지막 시합이 될 수도 있다지만 어쩌면 앞으로 몇 년은 더 현역으로 뛸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니 내가 이렇게 매치를 보러 미국까지 가겠다는 건 꽤나 극성 적으로 보일수도 있지만... 그냥 이건 내 나름대로의 의리를 지키는 행위였다.
내가 봤을 때 두호 형의 현역 경기는 앞으로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김재우 선수가 십몇 년이 지났어도 맘모스 코치의 영상을 아직도 찾아보고, 그 이름만 들어도 아이처럼 반응하는 것처럼. 나도 두호 형의 시합과 플레이를 좋아하니까 직접 보고싶은거였다.
적어도 시간이 지나서 ‘그때 직관하러 갈걸.’ 하고 후회하는 일은 생기지 않도록.
“짜식. 어쨌든 너도 준비 잘 하고. 일정에 무리겠다 싶으면 안와도 돼. 알겠냐?”
“넵!”
“그럼 진짜 간다. 이제 탑승해야해.”
공항에서의 짧은 배웅을 끝으로 출국 게이트 너머로 사라지는 두호 형 일행.
“갔네.”
“그러게요.”
전직 미들급 파이터와 현 미들급 파이터인 필승 형과 태양이는 당연하게도 두호 형의 스텝으로 이번 미국 일정에 함께 따라갔다.
내 옆에 남은 건 창섭 형 뿐.
“커피 한잔 마실래?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 될 텐데.”
“같이 가죠.”
“됐다. 괜히 피곤해지지. 여기 있어.”
두호 형 일행을 보내고 한 시간.
우연히도 두호 형의 출국과 맘모스 코치의 입국이 같은 날짜였다.
심지어 맘모스 코치의 한국 도착 시간이 두호 형의 비행기 시간과 별 차이가 나지도 않았기에 두호 형을 배웅하며 맘모스 코치를 마중하기로 했었다.
“여! 원더 보이!”
“맘모스!”
창섭 형이 근처 카페에서 테이크아웃 해온 커피를 한잔 마시며 시간을 죽이고 있자니 저 멀리서도 눈에 띄는 거구의 흑인 하나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걸어왔다.
“찾기가 너무 어렵잖아. 이거 마중 맞아?”
“하하. 미안해요.”
나와 창섭 형이 앉아 있는 곳은 인천 공항 내에서도 사람이 잘 오지 않는 안쪽 외진 곳이었다.
배웅과 마중을 위해 공항에 나오긴 했지만 사람이 많은 곳을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니기에는 내가 너무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어딜 가나 사람들이 알아보고 사진이나 사인을 요청하곤 했는데, 선글라스나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보아도 덩치 자체가 컸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하하. 괜찮아. 농담이야. 그나저나. 오랜만인데? 몸이 더 좋아졌군?”
“고마워요. 지난 도핑 관련 검사 때 이후 처음이네요.”
내 등을 팡팡 두드리며 반갑게 웃어주는 맘모스 코치.
이 양반은 나보다도 키가 더 큰데다 흑인이기까지 하니 걸어 다니는 토템마냥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면 당연히 내 쪽으로도 시선이 분산되고, 귀찮은 일이 생길 수 있었다.
“뒤쪽으로 해서 나가죠.”
그러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빨리 차에 타는 게 최선일 수밖에.
“그나저나. 내 올드팬이 있다고?”
“네. 그것도 한국의 복싱 챔프에요. 오늘 오기로 했는데. 괜찮죠?”
“오우. 팬의 방문은 언제나 환영이지.”
한국에서 보는 맘모스 코치의 리액션은 또 색다른 느낌이 있었다.
예전 두호 형의 타격 코치로 왔을 때는 훈련을 받기는 했지만 이렇게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을 정도로 가깝지 않았으니까. 물론 그때는 통역도 안됐고.
“원더보이 친구는 어디 있어?”
“친구요?”
“그 통통한 친구 있잖아?”
“아! 준현이! 하하. 나중에 시간되면 오라고 할게요. 반가워 할 거예요.”
“굿. 굿.”
그러고 보니 준현이가 유독 맘모스 코치와 벤슨과 잘 지냈었지.
준현이는 지난 회사를 그만두고 한동안 날 따라다니며 해외 통역일을 하다가 지금은 아예 우리 ‘팀 피스트’ 와 계약을 하고 전문적인 통역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물론 영은씨와 연애도 잘 하고 있고.
“도착했네요. 들어와요.”
맘모스 코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도착한 체육관.
지난 코네티컷 방문 때는 도핑 의혹에 반박할 검사가 목적이었기에 일정이 타이트했어서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었다.
“오우! 체육관이 완전 멋있어졌잖아? 크고 새거야!”
“하하. 그러고 보니 새 체육관에는 처음 와보죠?”
맘모스 코치는 맞은편의 옛날 체육관 시절에만 와봤으니 색다를 법도 했다.
“아주 좋아. 돈 많이 벌었나봐? 원더 보이?”
“이건 다 안 코치님이 투자하신 건데요 뭐.”
“이런 부러운 친구 같으니.”
안 코치님의 이야기가 나오자 또다시 얼굴에 미소가 퍼지는 맘모스 코치.
생긴 건 무섭게 생겼지만 참 착하고 정이 많은 분이란 말이지.
하긴, 그러니까 이 먼 한국 땅까지 복싱 훈련을 위해 발걸음 해준 거겠지만.
어쨌든 새로운 체육관의 구경보다는 빨리 안 코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맘모스를 체육관 제일 안쪽 사무실로 안내해줬고, ‘뎀! 여긴 하나도 변하질 않았잖아! 최고라고!’ 라는 말을 뒤로한 채 방을 빠져나왔다.
나이를 떠난 우정을 나누는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해서야!”
“네. 창섭 형.”
사무실에서 나오는 날 부르는 창섭 형.
“손님 오셨다. 너랑 오늘 보기로 했다던데? 김재우 선수 같아.”
“아! 오케이. 고마워요!”
시계를 힐끔 쳐다보니 어느새 약속한 시간이 다 돼 갔다.
“김재우 선수!”
나는 한달음에 체육관 입구 쪽에서 서성이는 김재우 선수를 향해 뛰어갔다.
“아! 강해서 형님!”
나는 아직 존칭으로 부르지만 김재우 선수는 넉살 좋게도 지난 훈련 이후 내게 형님이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
“하하. 거리가 꽤 되다보니 일찍 출발했는데.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은 몰랐네요.”
“...”
아까도 말했지만, ‘약속한 시간이 다 돼 갔다.’는 건 아직 약속 시간이 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웃고 서 있는 김재우 선수를 위 아래로 힐끔 훑어보니 이것저것 눈에 띄는 부분들이 있었다.
“... 김재우 선수. 대중교통 타고 왔어요?”
“네? 하하. 네. 제가 차가 없어서,”
“...”
9월 초.
해가지면 선선해진다고는 하지만 아직 한낮의 햇볕은 따가운 계절이었다.
이마며 상의 티셔츠며.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게 계속 눈에 밟혔다.
우리 체육관은 지하철에서 걸어서 20분은 걸어야 했을 텐데. 버스타고 왔나?
“일단 들어와서 땀 좀 식혀요. 맘모스 코치는 이제 막 도착해서 우리 코치님이랑 이야기 중이니 시간 좀 걸릴 거예요.”
“오! 레오 선수님 도착하셨나요? 와...”
맘모스 코치의 이야기가 나오자 또 다시 아이처럼 반색하는 김재우 선수.
이걸 참... 단순하다 해야 할지. 순수하다 해야할지 모르겠다.
“아! 지난번에는... 그... 죄송했어요. 형수님이랑은 어떻게 잘 푸셨는지...”
“네? 아. 네. 당연하죠.”
지난번 김재우 선수와의 훈련 날.
최슬혜 선수와 친분이 있었던 아름이는 나름 깜짝 서프라이즈로 동부 복싱클럽을 찾았었다. 최슬혜 선수가 내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나 했더니 범인은 바로 아름이였던 것.
어쨌든 최슬혜 선수와 체육관에 도착하자마자 보게 된 게 나와 김재우 선수가 땀을 흘린 상태에서 껴안고 있는 모습이었으니 당황할 수밖에.
다행히 별 오해는 없었지만 그 일로 한동안 놀림을 당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하. 걱정 말라고. 적어도 사우스포 슬러거에는 진절머리 나도록 익숙해지게 만들어 줄테니까.”
김재우 선수의 땀이 어느 정도 말랐을 즈음.
맘모스 코치의 목소리가 사무실이 아닌 체육관 쪽으로 울리며 들려왔다.
“맘모스!”
“오! 원더보이! 많이 기다렸지?”
안 코치님과 체육관 안쪽 복도에서 나오는 맘모스 코치.
“헐...”
김재우 선수는 얼빠진 얼굴로 조심한 리액션을 펼치고 있었다.
“코치님. 여기가 아까 말 했던 올드 팬. 김재우 선수에요. KPBF 헤비급 챔피언.”
“오! 반가워요. 레오라고 합니다.”
맘모스 코치는 내 소개를 듣더니 만면에 반가운 미소를 장착하고는 그 크고 두터운 손을 내밀었다.
“아. 어! 그. 김재우라고 합니다! 레오 벤투라 선수의 빅 팬입니다! 레오 선수를 보고 복싱을 시작했어요! 저도 사우스포입니다!”
꽤나 얼어붙은 모양새로 할 말은 다 하는 김재우 선수. 그나저나 영어를 되게 잘 하네. 요즘은 영어가 기본 장착이라 그런가?
어쨌든 맘모스 코치는 그런 그가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한동안 스타와 팬의 입장에서 신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면. 일단 점검부터 한번 해볼까?”
그리고는 스타와 팬 모드는 끝났는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 테스트를 언급하는 맘모스 코치.
“스트레칭은 충분히 했겠지? 바로 들어가도 되나?”
“스트레칭을 해야 할 건 제가 아니라 맘모스일걸요.”
나는 오전까지 훈련 스케줄을 소화하고 잠깐 공항을 다녀온 참이었다.
다시 체육관 도착해서도 맘모스 코치를 기다리며 몸을 충분히 풀어줬고.
“헤이. 빅 팬. 자네는?”
“네?”
맘모스 코치의 언급에 화들짝 놀라는 김재우 선수.
“자네는 같이 운동 안 해?”
“어... 저도 같이 하나요?”
금시초문이라는 듯 맘모스 코치와 날 돌아보는 김재우 선수.
사실 이 부분은 이야기 된 게 없었다.
귀한 시간 내서 오는 맘모스 코치에게 나 외의 다른 선수도 봐달라는 요청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당연한 걸 왜 물어? 운동복 없어?”
“있습니다!”
맘모스 코치의 질문에 빠릿하게 대답하며 백팩에서 운동복을 꺼내는 김재우 선수.
“워밍업은?”
“충분합니다! 지하철에서 여기까지 뛰어왔거든요!”
어쩐지. 땀이 많이 났더라 싶더니 이 더운 날씨에 도보 20분 거리를 뛰어왔구먼.
그것도 청바지에 백팩을 메고.
“오케이. 그러면 훈련 준비해서 다시 집합까지 5분!”
“넵!”
“넵!”
나는 공항을 다녀오느라 외출복을 입고 있었기에 김재우 선수를 데리고 탈의실로 들어가 빠르게 운동복으로 환복 해야 했다.
“좋아. 일단 원더보이부터. 테스트를 먼저 봐야겠지?”
“네?”
“사우스포 적응훈련은 조금 했다며?”
“어... 네.”
KBF 소속 선수와도 했었고 김재우 선수와도 했었다. 사우스포 적응 훈련은.
“그러면 바로 한번 보자고.”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전혀 느낌이 달랐다.
나보다 10센티는 더 큰 키. 한눈에 보기에도 확연히 차이 나는 팔 길이.
“들어와봐.”
복싱 파이팅 자세를 취한 맘모스 코치는 MMA 타격 코칭 때와는 또 다른 압박감이 있었다.
-퉁. 퉁.
가볍게 복싱 스텝을 밟으며
-스윽. 휘익.
그간 훈련했던 대로 사우스포의 거리를 제압하기 위해 오른쪽으로 스탠스를 옮기며 전진 스텝을 밟았다.
-턱.
-후웅
-턱!
내 스텝을 오른손으로 막아내면서 몸을 돌리더니 내 왼쪽 바디에 가볍게 갖다 대지는 맘모스 코치의 왼손 글러브.
“이건 뭐. 아예 왼손잡이를 상대할 기본이 안 돼 있구만.”
집중력이고 뭐고 아예 알아차리질 못했다.
시야의 사각을 노린 절묘한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스슥.
다시 몸을 떨어뜨린 후 이번에는 집중력을 적당히 끌어올린 뒤 정면으로 사각을 만들지 않으며 전진 스텝을 밟았다.
-휙. 휘익.
-퉁!
-슥. 툭.
견제용 오른손 잽을 날린 맘모스 코치는 뒤로 몸을 빼 내며 다시 한 번 오른 손 잽을 뻗었고, 그 펀치를 피해내는 내 안면으로 왼손 스트레이트가 날아와 가볍게 얼굴을 터치했다.
“...”
나보다 긴 리치를 이용해 거리를 벌리며 오른손 견제 잽을 날리고, 앞발인 오른발을 이용해 내 스텝의 진행 방향을 강제시킨 맘모스 코치.
스텝이 엉키지 않게 움직이는 아주 짧은 순간에 생긴 사각으로 또 다시 그의 레프트 스트레이트가 내게 유효한 타격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사실 나는 맘모스 코치를 조금 얕잡아 본 경향이 없잖아 있었던 것 같았다.
종합격투기 입문 초기에 그와의 테스트에서 아무리 그가 봐줬다지만 한 번의 다운을 뺏은 적이 있었기 때문.
하지만 다시 잘 생각해보니 난 맘모스 코치와 제대로 타격 훈련을 해본 적이 없었다.
입문 초기에는 정말 기초만 배웠고, 첫 코네티컷 훈련에서는 주짓수 위주의 훈련을. 두 번째는 타격보다는 몸을 만드는데 집중했었으니까.
“아직 시합 일정 안 잡혔다 그랬지? 최대한 뒤로 미뤄봐. 이 대로면 원더보이 너. 지고 말거니까.”
씨익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 하는 맘모스 코치.
어쩌면 나는 세계 최정상급 MMA 타격 코치라는 맘모스 코치를 옆에 두고도 제대로 활용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게 아닐까 싶었다.
-빡!
“넵!”
나는 내 얼굴을 글러브로 강하게 내려치며 대답했다.
아주 단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쪽쪽 빨아들여 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