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_복싱 훈련 >
1.
“흡! 흐-읍!”
무더운 여름의 열기도 한풀 꺾인 날씨.
그래도 한낮이면 뜨거운 공기가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형!”
조던 리와의 복싱 이벤트 전을 위해 복싱 체육관으로 훈련을 다녀오니 체육관엔 두호 형의 거친 숨소리가 가득 차 있었다.
“어. 해서 왔냐.”
“벌써 이렇게 무리해도 돼요?”
“네 말대로 벌써 며칠을 쉬었는데. 보충하려면 시간이 부족하지.”
“...”
짧은 민소매 운동복 사이로 꿈틀거리는 근육의 수축과 팽창.
누가 보더라도 건강 그 자체로 보이는 두호 형이었지만 내 눈엔 위태롭게만 보였다.
“토너먼트. 나가실 거예요?”
“무슨 소리야? 당연하지.”
“무리하지 않는 게 좋지 않아요?”
지금도 웰터급 챔피언인데 굳이 무리해서 미들급 토너먼트에 나가야 하냐는 뒷말이 목 언저리까지 올라왔지만 겨우 삼켜냈다.
“그래. 무리하지 않는 게 좋지.”
-쿵.
들고 있던 운동기구를 내려두며 허리를 바로 세우고는 땀을 닦는 두호 형.
“하지만. 필요할 때는 해야지. 아무리 무리하더라도.”
“기회가 이번만 있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또 나왔다.
두호 형의 단호한 눈빛.
절대 타협이나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
“하... 전 형의 그 강한 마음을 존경하지만... 이번은 아닌 것 같아요.”
마음의 강함 만큼 몸도 강하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깝게도 마음과 육체는 시간이 지날수록 괴리가 생긴다.
생각과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잘 변하지 않고 더욱더 단단하게 뭉치는 반면 육체는 시간과 함께 늙고 병든다.
“그러니까. 조금은. 조금은 더 유해져도 좋잖아요.”
“...”
내 말에 물끄러미 눈을 바라보는 두호 형.
“새끼. 많이 컸네.”
“뭐래요? 원래 키는 제가 더 컸거든요? 격투기 처음 할 때부터?”
“푸하하하.”
진지한 대화 중에 꽤나 웃겼는지 생각보다 크게 터져 나온 웃음.
“얌마. 나도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야.”
“...”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 잘 알지. 우리는 보통 사람과는 달리 평생 해온 게 몸을 단련하는 거잖아.”
뭐. 저야 이제 몇 년 안 됐지만. 어쨌든 계속해보세요.
“보통 사람들은 자기 몸에 대한 자가 체크를 객관적으로 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우리는 달라. 아니, 다른 사람들은 사실 잘 모르겠고. 나는 확실히 달라. 누구보다 내 몸 상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으니까.”
정말 수십 년이라는 세월을 매일같이 단련해왔던 두호 형.
몸의 자극을 느끼고. 움직임을 예측하고. 활동성을 체크했다.
그러니 스스로의 기량 변화에 누구보다 민감할 수밖에 없겠지.
“난 이제 내리막이야. 굳이 병원에 가지 않아도. 의사의 진단이 없어도. 이미 알고 있었어.”
“그러면 더 조심해야...”
“이번 토너먼트. 아마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할 확률이 높다.”
“그러니까요!”
굳이 가지지 못한 것에 더 목맬 필요가 있을까.
가지고 있는 것만 잘 수습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얌마. 미들급 토너먼트에서 좋은 성적을 못 내는데. 웰터급 방어전이라고 쉬울 것 같냐? 이젠 웰터급으로 다시 몸무게 낮추는 것도 무섭다.”
웰터급과 미들급. 종합격투기에서 한 체급을 오간다는 건 한창 젊은 나이대에도 몸에 무리가 갈 수 있는 행위였으니 충분히 이해는 되었다.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겠지만. 은퇴를 고려하고 있다.”
“... 암만 봐도 아직 한창이구먼. 성장 폭이 줄었단 거지 갑자기 퇴물이 된 건 아니잖아요.”
“퇴물 맞아 새끼야. 그리고 여기서 더 하다간 진짜 큰일 날 수도 있겠다 싶거든. 몸 성할 때 그만둬야지.”
“그러면 토너먼트를 안 나가야죠.”
“유종의 미는 거둬야지.”
거 참. 앞뒤가 안 맞는 말 아니에요?
“뻔히 질 거 아는데. 왜 나가요.”
“뭐?”
“토너먼트에서 좋은 성적 못 낼 거라는 거 알잖아요. 그런데 왜 무리하냐고요. 어차피 질 시합...”
“얌마. 세상에 확신을 가지고 하는 일이 얼마나 된다고 그런 말을 해? 그렇게 치면 떨어질 것 같은 시험은 응시도 안 하게?”
“...”
“때로는 결과를 알아도. 그게 설령 실패로 귀결되는 길이라도. 걸어야 할 때가 있는 법이야.”
“그게 뭐예요.”
“새끼.”
웃으며 내 머리를 마구 헝크는 두호 형.
“너도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다.”
“...뭐가요.”
“너도 결혼하고 애 낳아봐라.”
“유안이 생각하면 더 몸 사려야죠.”
“하하하하.”
나한테 맞았을 때도 유안이가 얼마나 울었는데. 다른 사람한테 맞고 오면 그땐 책임 못 집니다 저.
“유안이가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야. 벌써 10살이니까.”
벌써 그렇게 됐나?
내가 서른 살 때 6살인 유안이를 처음 봤고, 어느덧 내 나이가 서른넷이었다.
시간은 참 흐르는 물처럼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구나 싶었다.
“학교에서 한 번씩 친구들한테 이야기 하나 봐. 아빠가 격투기 선수라고. 이제는 유안이도 다 알만한 나이가 된 거지.”
“요즘 애들이 얼마나 빠른데요. 우리 열 살 때랑은 차원이 다르죠.”
“너랑 나도 같은 세대는 아니야 인마.”
“좋겠어요. 나이 많아서.”
-퍽!
거침없이 날아오는 투박한 손.
나름대로 대비하고 있었는데도 빠르고 강하며 정확했다.
이게 어딜 봐서 은퇴를 생각하는 아저씨의 움직임이야? 누가 봐도 현역이구만.
“어쨌든. 유안이가 어릴 때가 아니라. 지금. 혹은 조금 더 커서도 아빠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그런 시합을 가지고 싶다.”
“그러면 오히려 지는 시합을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이기지 못할 것 같다고 도망가는 모습부터 가르치고 싶지 않은 거야 인마.”
“...”
“살다 보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황이나 극복할 수 없어 보이는 일들이 무수하게 많을 거다. 그때마다 유안이가 패배자처럼 도망치는 아빠를 떠올리기보다는 부딪치고 깨지더라도 도전했던 아빠를 떠올렸으면 해.”
두호 형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 몰랐다.
예상도 못 했지. 난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었으니까.
“쩝. 그렇게까지 말하면 도저히 말릴 수는 없겠네요.”
멋진 아빠가 되고 싶다는데 거기다 대고 토너먼트 포기하고 웰터급에 박혀서 조금 더 뻐기다 은퇴하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지더라도 최대한 멋진 모습으로 져주세요. 그래야 유안이도 멋진 아빠로 기억하지. 얻어맞아서 쌍코피 흘리고 퉁퉁 부은 모습 보면 도망갈라.”
-빠악!
“말이 그렇다는 거지 토너먼트에서 질 생각 요만큼도 없다. 이 자식아!”
“아! 왜 자꾸 때려요! 말로 하면 되지!”
“넌 인마. 매를 부르는 뭐 그런 게 있어 인마.”
필승 형도 그렇고. 요즘은 아름이도 나한테 슬금슬금 손짓 발짓을 하는데 말이야. 나 세계 최강을 노리는 남자거든요?
“걱정 마라. 네가 놔두고 간 미들급 타이틀. 내가 챙겨 올 테니까. 토너먼트. 포기도 패배도 없을 거야.”
다시 한번 내 머리를 헝클이며 다짐을 내뱉는 두호 형.
그 손에 실린 힘이 예전 같지 않은 것 같아 조금은 서글픈 날이었다.
*
“종합격투기도 복싱과 마찬가지로 오른손잡이 왼손잡이의 스텐스가 다르지만, 복싱만큼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킥과 잡기라는 게 있는 만큼 종합격투기는 왼손잡이의 ‘거리’를 파고들 방법이 다양하지. 복싱은 오롯이 스텝과 펀치로만 사우스포의 영역을 무너뜨려야 한다.”
“왼손잡이는 오른손잡이와의 경기가 디폴트 값이기 때문에 익숙하지. 하지만 오른손잡이는 왼손잡이와 상대할 일이 적기 때문에 그 대처법이 미숙할 수밖에 없다.”
“왼손잡이에 대처하는 방법? 간단하지. 왼손잡이와 붙어보면 돼.”
요 며칠 외부 복싱 체육관으로 복싱 훈련을 다니며 들은 말들이었다.
중요한 건 국내에서는 나와 제대로 된 훈련 메이트를 해줄 만한 복서가 없다는 거였다. 심지어 왼손잡이의 고중량급 복서는 일종의 희귀종 같은 거였다.
물론 선수가 없다는 건 아니지만 나와 스파링 메이트를 해줄 정도의 기량을 갖춘 선수는 찾기가 어려웠다. 그것도 사우스포로.
만약 그런 선수가 국내에 있었다면 동양 태평양 챔피언을 조던 리가 가지고 있지 않았겠지.
-Rrrrrrrr
이게 맞나? 싶은 복싱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들어왔다. 누구지?
“여보세요?”
-여보세요? 혹시 강해서 선수 연락처 맞나요?
“맞는데... 누구시죠?”
그리 낯설지 않은듯한 여성의 목소리.
스팸 전화는 아닌 듯한데... 섭외 전화인가?
-맞구나! 저 슬혜에요. 최슬혜!
최슬혜?
최슬혜가 누구지...?
-... 설마 기억 못 하는 건 아니죠?
“하하. 그럴 리가. 어쩐 일...?”
-갑자기 말을 놓으시네.
“이세요? 아니 아니. 뭐 좀 한다구요. 말이 늘어졌네.”
목소리가 어려 보이고 내게 존대를 하길래 어미를 반말 비슷하게 얼버무렸더니 바로 지적질이 들어왔다.
서로 존대를 하는 사이의 젊은 여성이라. 진짜 누구지?
-거짓말. 후우. 저 식스 테이크 때 봤잖아요. 페더급 복싱 선수. 최슬혜에요.
“아! 아니지. 알고 있다니까요?”
-몰랐으면서. 방금 다 티 났거든요?
“하하. 전화 목소리랑 또 달라서 긴가민가했죠.”
-저 말고 최슬혜라는 지인이 또 있나 봐요? 헷갈리게.
쩝. 역시 여성 페더급 세계 챔피언. 물고 늘어지는 게 아주 집요했다.
-다른 게 아니라. 기사 보고 연락했어요.
“기사요?”
-조던 리랑 이벤트 전. 기사 났던데.
“아...”
그러고 보니 오늘쯤 기사가 나온다고 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작은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 했는데. 필요 없으면 말구요.
“작은 도움이요?”
-복싱 훈련. 잘 돼가요?
“엄...”
사실 빈말로도 그렇다고 하기가 어려웠다.
진짜 진지하게 해외로 훈련을 나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으니까.
-현 KPBF 헤비급 챔피언이 사우스포인 거. 알아요?
“어? 그래요?”
-그리고 저랑 같은 골든 글러브 소속인 것도 알아요?
“...전혀 모르죠.”
-우리 체육관 와서 훈련. 한번 해볼래요?
전혀 생각지 못한 타이밍에 들어온 제안.
한국 프로복싱 챔피언과 함께 할 수 있는 훈련이라.
“거절할 이유가 없죠.”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을 테니까.
**
-드디어 맞붙다! 동양 태평양 챔피언 조던 리 Vs. 무패의 신화를 써 내려가는 MMA 챔피언 강해서!
-WBC 회장. 복싱의 문은 열려있다. 누구든 자격이 된다면 타이틀전에 도전할 수 있어?
-조던 리와의 매치에서 승리하면 타이틀 도전권을 얻을 수 있다? 강해서. 그가 바라보는 미래는?
-WFC 헤비급 챔피언 라무차. ‘이건 말도 안 되는 처사다. 그는 나와의 시합을 우선시 해야 했다. 돈에 눈이 멀어 복싱 같은 허접한 경기에 시간을 쏟다니 그는 나와의 시합에서 크게 후회할 것이다.
-WFC 라이트 헤비급 탑 컨텐더가 된 빌리. ’내게 타이틀 샷을 달라!‘ 강해서를 향한 러브 콜!
-텔론 회장의 행복한 고민? 현 격투기계에 가장 핫한 선수인 강해서의 몸이 세 개라도 부족할 판!
-WFC 미들급 챔피언 토너먼트 개최! 첫 경기는 9월 마지막 주 주말?
-조던 리. 강해서와의 이벤트 전은 계단일 뿐? 다시 한번 카이서스에게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다!
미국 코네티컷주 한 체육관.
2미터가 넘어가는 거구의 몸에 근육이 꽉 들어찬 흑인이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며 얼굴 가득 미소 짓고 있었다.
“이런. 원더보이. 복싱계에 제대로 발을 들인 건가?”
맘모스. 혹은 매머드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MMA 타격 전문 코치.
본명은 용맹한 사자라는 뜻의 레오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전 브로일러 라이트 헤비급 선수였다.
그리고 그 이전에. 어깨 부상으로 은퇴하기 전까지는 세계 최정상을 노렸던 전형적인 사우스포 복서로서 이름을 날렸던 선수이기도 했다.
“이거. 도움이 될는지 모르겠구만.”
키 2미터 8센티.
리치 217센티의 전직 복서이자 현 세계적인 MMA 타격 코치인 맘모스가 몸을 풀며 스마트 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