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_조던 리 >
1.
“그래.”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잇는 안 코치님.
“그 외에 달리 세계 챔피언이 존재하지는 않으니까. 카이서스와의 타이틀전을 WBC 회장이 공식적으로 입에 담았다.”
“...”
The Oriental and Pacific Boxing Federation.
줄여서 OPBF.
흔히 동양태평양 복싱연맹이라고 불리는 이 기관은 세계복싱평의회(World Boxing Council. WBC)의 하부조직이었다.
그러니 동양 태평양 챔피언과의 시합에서 승리할 경우 카이서스와의 타이틀전을 성사시켜주겠다는 WBC 회장의 말이 허튼소리일 일은 없었다.
“조던 리라...”
예전부터 내 이름으로 기사를 검색하면 종종 눈에 띄던 이름이었다.
다만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생각이었기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정확히는 내 인기에 어떻게든 편승해보려는 무임승차자 같은 느낌이었달까.
그런데 과정이야 어쨌든 WBC 회장의 입에서 카이서스와의 타이틀전을 언급하게 만들다니. 꽤나 놀랐다.
“복싱계도 잡음이 많지.”
“네?”
“분명 돈은 되는데 그에 맞는 상대를 구하기가 어려우니까.”
복싱과 MMA의 큰 차이점 중 하나를 꼽아보라면 의무방어전이 빠질 수 없었다.
하나의 통일된 단체에서 모든 시합의 매칭과 프로모션을 책임지는 MMA 시장과 달리 복싱은 각각 독립된 프로모터들이 협회 아래 모여 시합을 개최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게 뭐냐면 ‘시합을 선수와 프로모터가 자체적으로 잡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특정 챔피언이 일부러 하위 랭커나 기량 차이가 크게 나는 선수와의 시합만을 매칭하며 챔피언 자리를 장기집권하려 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존재하는 게 지명 방어권이었다.
지명 방어전. 혹은 의무방어전이라고도 하는 이 시스템은 챔피언이 해당 복싱 협회에서 지명하는 도전자와 방어전을 치러야 한다는 제도였다.
만약 이를 거부할 시 챔피언은 해당 타이틀을 내놔야 할 정도로 중요한 시스템.
그리고 카이서스와의 시합은 분명 복싱 시합 중 가장 큰돈이 오가는 ‘값비싼’ 이벤트였기에 그와의 시합을 지망하는 선수들은 넘쳐났다.
중요한 건 랭킹 상위권 선수들 모두가 한 번쯤 카이서스를 거쳐 간 이력이 있으며, 그와의 경기에서 승리를 원한다기보다 그저 적당히 버티고 파이트 머니를 받아 가는 것에 만족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WBC 입장에서도 슬슬 새로운 도전자가 필요한 시점이었을 거야. 복싱 팬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긴장감 없는 쇼에 더 이상 돈을 투자하진 않을테니까.”
“복싱 팬들의 지갑을 열게 할 새로운 도전자로 낙점된 게 저라는 거죠?”
“그렇지. 무패의 종합격투기 챔피언. 비슷한 듯 다른 두 종목의 챔피언들이 맞붙는 이벤트는 언제나 흥미롭지. 그게 비인기 종목일지라도 화제성을 띠는데 하물며 복싱과 MMA라. 거기에 그저 그런 챔피언이 아닌 카이서스와 강해서. 이건 분명 협회도 프로모터도 눈독 들일만 한 이벤트가 맞아.”
안 코치님의 입으로 설명을 들으니 나도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매력적인 이벤트 매칭이긴 했다.
“중요한 건. 그전까지 제가 무패 행진을 해야 한다는 거네요? 일단 동양 태평양 챔피언과의 시합도 이겨야 하고?”
“...그렇지.”
하.
조던 리의 영상을 제대로 찾아보진 않았지만,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닐 거다.
일전에 이벤트 시합을 가졌던 블레이크는 프로 딱지를 붙이고 있었지만, 실상은 조금 잘 치는 아마추어 수준이었다. 그에 반면 조던 리는...
“조던 리. 뉴질랜드 출신 복서로 44선 42승 1무 1패. 신장 6피트 7인치. 그러니까, 키는 2미터에 리치가 211cm. 아주 괴물이군.”
상대 선수 프로필을 읽어주는 안 코치님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키 2미터에 리치가 211센티라니. 저런 피지컬로 고작 동양 태평양 챔피언이라니...
“동양태평양급 챔피언. 세계 랭킹 5위. 전형적인 사우스포 스타일의 베테랑 복서다. 흠... 이것만 보면 정말 피하고 싶은 상대긴 하군.”
심지어 사우스포라니.
난 이제껏 타격전을 왼손잡이와 해본 적 자체가 없었다.
그라운드도 없는 복싱에서 왼손잡이라니. 순간 예전에 읽었던 만화의 한 구절이 뇌리를 스쳤다. ‘왼쪽을 제압하는 자가 세계를 제압한다’ 였나?
“확실히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네?”
“MMA를 벗어나서. 정말 복싱에도 도전하고 싶은 건지. 그게 중요해.”
“어...”
사실 확실히 이렇게 하겠다. 라고 정해놓은 건 없었다.
다만 막연하게 뭐든지 다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을 뿐.
“정확히는. 카이서스와의 타이틀전을 갖고 싶냐는 거다.”
“그건... 네.”
나와 같은 세상을 사는 것으로 생각되는 선수.
절대자의 위치에서 혼자 고독한 척하는 그 양반과 한판 찐하게 어울려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만약 그와 맞붙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피해선 안 되겠지. 조던 리는 카이서스에게 도전해서 1라운드도 버티지 못했으니까.”
“네?”
“요즘 와서는 일 년에 한두 경기 할 정도로 뜸한 데다 상대 선수들도 시원찮아서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게 있는데. 조던 리가 사우스포라면 카이서스는 스위치 히터야.”
“스위치... 히터요?”
안 코치님. 제가 MMA는 이제 어느 정도 아는데 복싱 쪽 용어는 약해서요. 그게 뭡니까...
“한마디로. 양손잡이라는 거다. 마빈 해글러나 무하마드 알리 같은. 역사상 가장 완벽한 스위치 히터라는 평가가 있는 선수지.”
“...”
“최근에야 오소독스 스텐스만으로도 충분하기에 스위치 스타일을 구사하는 걸 볼 일이 없다지만... 카이서스의 전성기 영상을 보고 싶다면 한 5년쯤 전 영상을 한번 찾아봐라. 그가 왜 위대한 황제라 불리는지 알게 될 거야.”
스위치 히터. 양손잡이.
한마디로 오른손 스텐스와 왼손 스텐스를 자유자재로 스위칭하는 변칙적인 스타일이라는 거잖아.
딱 들어봐도 스위칭 타이밍을 잡는 것과 신체 밸런스의 문제 등이 그려졌지만 ‘나와 같은 세상’에 사는 카이서스에게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거다.
‘심지어 나와 스파링을 했을 때도 오소독스 스텐스였지.’
물론 카이서스에게는 정말 가벼운 스파링이었겠지만 당시 나는 꽤나 전력으로 부딪쳤었다. 그런데 그게 카이서스에게는 스텐스 변경도 필요 없을 정도로 아무 위협이 없었다니.
“이건 생각보다 훨씬 괴물이잖아?”
“응? 뭐라고?”
“아. 아니에요. 그. 동양 태평양 챔피언과의 이벤트 전. 할게요. 해보고 싶어졌어요.”
최근 들어 나 또한 카이서스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과연 내가 전력을 다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있을까 하는 의문의 감정.
하지만 그런 상대는 있었고, 한번 주먹을 맞대기도 했었다. 심지어 나는 그에게 별다른 위협도 되지 못한 듯했고.
“꼭. 성사시켜주세요.”
그러니 거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최강의 상대와의 승부를.
*
“한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외부 일정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차량 안.
텔론은 앞에 앉은 비서관에게서 한국에서의 연락 내용을 브리핑받았다.
“역시. 오케이 했군.”
“라무차 측에서도 여러 차례 연락이 왔습니다. 다음 방어전에 대해서.”
“끄응...”
텔론은 사실 지금 추진 중인 강해서와 조던 리의 복싱 이벤트 매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소중한 상품인 강해서가 라무차와의 빅 이벤트도 전에 흠집이라도 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일단... 하. 미스터 강의 이벤트 매치가 지난 후에나 방어전이 가능할 거라고 알려줘.”
어차피 이벤트 전에 관한 기사가 나가고 나면 모두가 알게 될 일. 미리 말해두는 게 낫다고 판단한 텔론이었다.
라무차는 그에게 MMA라는 기회를 주고 키워준 텔론에게 항상 고마운 마을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의 말을 꽤나 잘 듣는 편이었다.
‘다만 너무 생각이 단순하고 뒷일을 생각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지. 게다가 다혈질적이고.’
그래서 원하는 대로 컨트롤하기 쉬울 때도 있지만 반대로 전혀 컨트롤이 되지 않을 때도 있었기에 텔론은 골머리를 썩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통제가 되지 않는 범위에 속할 것 같았기 때문.
“대신. 그만큼 이득을 봐야겠지.”
전형적인 사업가인 텔론이 무턱대고 이번 이벤트를 수락한 건 아니었다.
카이서스의 프로모터인 켄달이 직접 찾아왔다고 해서. 텔론의 오랜 친우인 멜린 가의 가주가 직접 찾아왔다고 해서. 아무 이득도 없는 곳에 높은 리스크를 짊어지고 발을 들일 텔론이 아니었다.
‘이번을 계기로 다시 한번 도약한다.’
최근 우사다의 도입 등 여러 가지 제도적인 장치들이 추가되면서 예전보다 성장세가 꺾인 WFC와 MMA 시장.
거기에 복싱 협회와 미국 체육협회의 견제까지 추가되자 텔론은 점점 활동 반경이 줄어드는 것을 체감하고 있었다.
이번 복싱 이벤트에는 WBC 회장과 멜린 가에서 보증한 미 체육협회의 협조가 걸려있었다.
WFC가 더욱 뻗어나갈 수 있는 발판이 되어줄 수 있는 협조가.
‘미스터 강은 한 세대지만. 이번 발판만 잘 마련되면 WFC는 앞으로도 몇 세대는 더 뻗어나갈 수 있다. 그리고...’
강해서가 무조건 진다는 보장 또한 없었다.
오히려 텔론은 이득은 이득대로 취하면서 강해서가 이벤트 시합마저 승리하며 모든 걸 독식하는 그림을 기대하고 있었다.
물론 카이서스와의 이벤트 전은 솔직히 승률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카이서스와의 이벤트 전이면 한탕 제대로 벌기에 충분하지.”
텔론의 시나리오대로 강해서가 승승장구해 라무차까지 꺾고 카이서스와 이벤트 전을 가진다면, 승패를 떠나 그 자체로 충분한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라무차 선수 측으로 내용 전달했습니다.”
그때 앞자리에 앉은 비서관으로부터 올라온 보고.
라무차에게 다음 방어전 일정에 대해 전달했다는 내용이었다.
“별말 없었나?”
“...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습니다.”
“끄응...”
역시나. 이번 일은 텔론의 통제 범위 밖이었던 듯했다.
2.
-쾅! 쾅. 쾅!
마치 폭탄이 터지는 듯한 굉음.
한창 샌드백을 두드리고 있던 거구의 복서 조던 리는 그의 프로모터가 체육관에 들어오는 걸 확인하고는 펀칭을 멈추었다.
-끼익. 끼이익.
그제야 펀치 소리에 묻혀있던 샌드백의 신음이 체육관 가득 울려 퍼졌다.
“꽤나 밝은 얼굴인데?”
“당연하지.”
조던의 물음에 환한 웃음으로 답하는 그의 프로모터.
“켄달의 힘이 컸던 건지. 아니면 협회장의 조건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생각보다 빠르게 긍정적인 답변이 왔어.”
“어쩌면 내가. 아니, 복싱이 만만해 보였는지도 모르지.”
“그럴 수도 있지. 적어도 그의 재능은 가짜가 아니니까.”
조던도 그의 프로모터도. 강해서의 재능 자체는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너무 늦었고. 방향을 잘못 잡았지.”
복싱을 놔두고 MMA라니.
복싱 불모지인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게 정말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알지? 회장의 조건은 미스터 강에게도. 조던 네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거.”
“그럼.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달려온 건데.”
조던 리는 다시 한번 카이서스와의 시합을 갈망했다.
하지만 이미 허무한 패배를 겪은 바 있는 그에게 지명 방어전의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고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다.
때마침 옆 동네인 MMA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강해서라는 선수. 그리고 그런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듯한 카이서스 덕분에 다시 한번 이렇게 기회가 생겼음에 감사할 뿐이었다.
“말해두건대. 방심은 금물이야. 어찌 됐든 그 또한 세계 최정상의 선수. 복싱에 문외한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안 돼. 카이서스와의 시합이라 생각하고 임하라고.”
“당연하지.”
조던 리는 카이서스에게 도전했던 때와는 또 다른 수준의 복서가 되어 있었다.
지금이라면 예전처럼 그토록 허무하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정말 운이 좋다면. 정말 정말 운이 좋다면. 그에게 승리를 따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어볼 정도로 물이 올라있었다.
“그에게 보여주자고. 복싱의 반대편을 말이야.”
바야흐로 강해서와 조던 리의 이벤트 매치가 구체적으로 윤곽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작가의말
카이서스 스위치 히터...
실제로 복싱에서 양손잡이는 정말 보기 드뭅니다.
스위칭을 할 바에는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본인에게 익숙한 스타일이 유리하니까요.
하지만 정말 소설처럼 완벽한 밸런스와 숙련도를 가진 양손잡이라면... 생각만해도 사기같군요.... 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