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화_마른 하늘에 날벼락 >
1.
“안녕하십니까! 스포츠온 TV 시청자 여러분! 화창한 일요일 오후에 이렇게 또 인사드립니다.”
“반갑습니다. 해설에 김국현입니다.”
WFC 292 시합의 경기중계를 위해 편성된 방송.
김국현 해설위원은 주말 오후를 반납해야했지만 기쁜 마음으로 스튜디오를 찾았다.
“오늘 경기. 김국현 해설께서는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에... 일단은 세상에 쉬운 경기는 없다. 그런 말씀부터 조금 드리고 싶습니다. 강해서 선수는 헤비급으로 체중을 올린 후 첫 시합이니만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본인의 페이스를 만들어가는게 중요하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강해서 선수가 본인의 페이스만 만들 수 있다면 오늘 시합은 이길 수 있다. 이렇게 예상하십니까?”
“페드릭 선수는 실력이 아주 뛰어난 선숩니다. 20대 초반에 WFC 랭킹 8위를 달성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다만 강해서 선수는 미들급부터 라이트헤비급까지 챔피언 벨트를 따낸 선수입니다. 충분히 이길 수 있어요.”
강해서의 시합이 시작되기 전 캐스터와 해설위원은 두 선수의 지난 영상들을 짚어보며 장점과 단점. 그리고 이번 시합에서 중점적으로 봐야 할 관전 포인트 등을 이야기했다.
┕솔직히 이번 시합은 당연히 강해서가 이기는 거 아니냐?
┕페드릭도 피지컬 무시못함. 그리고 헤비급은 그 아래 체급이랑은 아예 툴이 다름. 솔찌 어찌될지 모른다고 생각함 ㅇㅇ
┕갓-해서! 무조건 갓해서 응원이지! 가즈아아아!!!
┕이번엔 역배에 건다! 강해서도 한번쯤 고꾸라질때가 됐지!
┕현지 기사들 보니까 완전 강해서가 악역이던데 ㅋㅋㅋ 솔찌 불안요소가 좀 있는건 사실임
┕얼마전까지 예능나오고 너튜브 나오고 하더니. 훈련은 제대로 했으려나 ㅋㅋㅋㅋ
┕인류 최강이 죄고싶습니다. ㅇㅈㄹ 했는데 패드립한테 지면 ㅈㄴ 웃기긴 하겠다
┕치킨 시켰는데 왤케 안오누 ㅋㅋㅋ 시합보면서 닭다리 뜯어야되는데
┕ㅋㅋㅋㅋㅋㅋㅋ 너튜브에 올라온 시합전 기자회견 영상 봄? 강해서 계속 패드립 패드립 그러던데 ㅋㅋㅋㅋ 난 내가 잘못들은 줄
┕ㄹㅇㅋㅋㅋㅋ 페드릭 보고 패드립 패드립 거리는데 나도 잘못 들은건줄 알고 여러번 돌려봤자너ㅋㅋㅋㅋ
실시간으로 스포츠온 TV를 보며 채팅에 참여중인 시청자들.
강해서의 헤비급 첫 시합이니만큼 응원 반 걱정 반의 반응들이 나오고 있었다.
“시청자 여러분. 말씀드리는 순간 한국의 자랑! 강해서 선수가 입장하고 있습니다!”
“입장곡이 바뀌었네요. 지난 시합의 승리 인터뷰와 관계가 있겠죠?”
“그렇습니다. 강해서 선수의 입장 테마가 가수 손아름 씨의 노래로 바뀌었네요.”
지난해 말. 헨더슨과의 라이트 헤비급 타이틀전이 끝난 뒤 손아름과의 연애를 공개했던 강해서.
┕헐ㅋㅋㅋㅋㅋㅋㅋㅋ 입장테마곡 뭐얔ㅋㅋㅋㅋㅋ
┕그나마 손아름 노래 중에 제일 강렬한 음악이넼ㅋㅋㅋㅋ
┕찐이다 찐이야. 이게 외조라는건가
┕둘이 아직 잘 만나나보네... 슬프다
┕둘이 잘 안만나면ㅋㅋㅋㅋ 너랑 뭔 상관?
채팅창도 강해서의 입장과 함께 다시 불이 붙었다.
폭발하듯 쌓이는 채팅로그.
“강해서 선수와 페드릭 선수. 케이지에 입장했습니다. 어제 계체량에서도 그랬지만 두 선수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죠?”
“맞습니다. 지난 시합전 기자회견에서 두 선수 사이에 불꽃이 튀었는데 그 이후로 두 선수의 사이는 아주 냉랭했다고 합니다.”
“부디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냉철한 플레이를 보여줬으면 합니다. 강해서 선수.”
아무래도 적진에서 펼쳐지는 시합인데다 시합전부터 이런저런 외부적 요인들로 멘탈적인 압박감이 있었을 거라 에상한 김국현 해설위원은 걱정스런 말을 한마디 보탰다.
“자! 1라운드 시작합니다!”
캐스터는 1라운드 시작과 함께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멘트를 날렸고.
“강해서 선...”
하지만 그는 ‘강해서 선수 킥!’ 이라는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말을 줄여야 했다.
“스톱! 경기 끝났습니다! 강해서 선수! 1라운드 4초 만에 경기를 끝내버렸어요!!”
오히려 그의 옆에 앉아있던 김국현 해설위원이 흥분하며 캐스터의 역할을 대신해주고 있었다.
┕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뭘 본거임?
┕쩍 소리 ㅈㄴ 크게 났는데;;; 쟤 죽은거 아님?
┕미동이 없는데? 헐;;;
┕이렇게 빨리 끝난다곸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 아직 치킨 시킨거 오지도 않았는뎈ㅋㅋㅋㅋㅋㅋ
┕대박ㅋㅋㅋ 지금 WFC 최단경기 기록이 5초 아님? 오늘 갱신되겠넼ㅋㅋㅋ
┕ㄹㅈㄷ다 ㄹㅈㄷ 진짜
┕아. 시합 본다고 마누라한테 장보러 못간다 그랬는데 이렇게 빨리 끝나면 안된다고!!!
┕장이나 보러 꺼져 유부초밥
┕해설진도 벙쪘음 ㅋㅋㅋㅋㅋㅋㅋ ㅈㄴ웃기넼ㅋㅋㅋ
1라운드 4초 타격에 의한 KO.
스포츠 온 TV의 해설 진을 비롯한 강해서의 경기를 지켜보던 전 세계의 격투기 팬들은 이 경악할만한 경기 결과에 입을 다물지 못할 뿐이었다.
*
“제가 말씀 드렸을 겁니다. 앞으로 20년 정도만 기다리면 제가 은퇴할 테니 기다리라고요. 패드립은 체급을 조정하지 않는 이상 격투가로서 정상을 성취할 일이 없을 겁니다.”
시합 전까지만 해도 적진의 한복판이었던 경기장.
온통 적들로 가득찬 곳에서 그 대표 격인 선수를 압도적으로 때려눕힌 뒤 뱉는 승리 인터뷰는 승리의 순간만큼이나 짜릿했다.
-우와아아아아!!!
-미스터- 갓!
-갓! 갓! 갓! 갓!
하지만 체육관 분위기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내가 페드릭을 무시하며 이런 거만한 인터뷰를 했을 때 팬들의 야유부터 날아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날 향한 객석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Go! 라무차를 부숴줘!
-미스터 갓! 너라면 할 수 있어! 라무차를 몰아내자!
-고- 미스터 갓! 고!
-고- 미스터 갓! 고!
갑자기 라무차의 이름이 나오더니 내 성을 'god' 이라고 부르며 연호하는 관중들.
“많은 관중들이 미스터 강과 라무차의 시합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시합의 승리로 인해 라무차와의 헤비급 타이틀 샷을 가져가게 되었는데. 그에게 한마디 하시겠습니까?”
승리 인터뷰를 따러 올라 온 진행자도 한마디 거들며 라무차를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어. 길게 말 할 것도 없습니다. 저는 이 타이틀 샷을 손에 쥐고 묵혀둘 생각이 없으니까요. 그리 멀지않은 순간에 라무차는 저와 만날 것입니다. 그리고 제 상대 선수들이 모두 그랬듯 케이지 바닥에 누워 단 잠을 잘겁니다. 그에게 한마디 충고를 하자면, 잠은 내가 충분히 재워줄테니 지금은 잠잘 시간도 아껴서 열심히 훈련이나 열심히 해!”
마지막에 목소리를 높여 라무차에게 빡센 한마디를 던져주고는 케이지를 내려왔다.
페드릭도 어느새 정신을 차렸는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우리는 딱히 포옹을 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미친놈. 거기서 그렇게 큰 발차기를...”
“잘했다. 최고였어!”
라커룸으로 향하는데 필승 형과 창섭 형의 서로 다른 반응.
“에이. 저 다 보고 찼다니까요?”
만약 페드릭이 피했으면 그대로 회전을 실어 왼발로 뒤돌려 차기까지 할 준비를하고있었다.
다행히 킥이 제대로 들어가면서 한방 KO가 나오긴 했지만.
“태권도 발차기였지?”
“네. 응용한 거였죠.”
지난 너튜브 촬영이후 체육관에서 스트라이킹 훈련 때 태권도 발차기를 많이 연습했었다.
“이번은 확실히 좋았지만... 다음 시합에서는 진짜 자제하자.”
다음 시합.
WFC의 짐승이라 불리는 라무차와의 타이틀전을 말하는 듯 했다.
“내가 진짜 요즘 라무차 영상만 보고 있거든?”
“네.”
“걘 진짜 짐승이야. 그런 큰 동작 발차기는 안통할거다. 진짜로.”
“하하. 알겠어요. 라무차한테는 또 다른 전략을 짜야죠.”
‘비스트’라고 불릴 정도로 본능과 감각이 좋은 파이터.
분명 오늘과 같이 동작이 큰 기술들의 적중률은 낮을 거라고 생각했다.
뭐. 길고 짧은 건 붙어봐야 알겠지만 말이야.
암만 영상을 뒤져봐도 화면으로는 그의 무서움이 제대로 와 닿지 않았으니까.
-Rrrrrrr
“아. 형들. 먼저 들어가 계세요. 저 전화좀 받고 갈게요.”
“그래. 코치님한테 말해둘게.”
“감사합니다!”
시합이 끝나고 케이지를 내려오자마자 창섭 형에게 폰부터 전달받았었다.
기다리는 전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어. 아름아!”
바로 내 여자 친구의 전화.
-꺄아아아! 받았다! 받았다! 지금 전화 받을 수 있어?
“받을 수 있으니까 받았겠지?”
-고생했어! 오늘은 진짜 안 맞고 이겼네!
“맞지 말라며. 나 말 잘 듣는다니까?”
-헤헤. 우리 해서 착하네? 오면 상줘야겠다!
“상? 무슨 상?”
-그런 게 있어! 내가 상 줄 테니까 기대하구 있어!
“...”
뭔가 묘하게 불안한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옥 같은 피닉스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는데 갑자기 한국가기가 무서워졌다.
“어쨌든. 나도 시합 빨리 끝냈지? 봤지?”
-응?
“지난번에 나보고 시합 시간 이야기 했었잖아.”
-... 그걸 신경 쓰고 있었어?
당연하지.
누누이 말하지만 나정도면 정말 많이 안 맞고 시합도 빨리 끝내는편이라니까?
이제껏 판정까지 간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헤헤. 응. 내 남자친구 최고야. 완전 멋있어!
“흐흐...”
아름이의 칭찬은 들어도 들어도 기분 좋았다.
-그래도. 괜히 내가 한 말 때문에 무리하다가 네가 다치거나 시합이 힘들어졌으면 나 정말 속상했을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런 말 신경쓰지마.
“응? 아. 응.”
-나도 앞으로 조심할게. 내가 너무 무신경하게 말을 했나봐.
“아니야. 아니야. 무신경이라니.”
무신경한 건 오히려 이쪽이지.
강아지다 여우다 하지만. 일단 기본적으로 아름 이는 생각이 깊고 배려심이 많았다.
나랑 나이가 같지만 뭔가 훨씬 성숙한 느낌이랄까.
-아. 그리고... 음...
“응?”
-나 지금 집이거든.
방금 전까지 내 시합을 보고 있었으니 당연히 집이겠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지?
-아니. 본가라구. 아빠 엄마 집.
“아...”
아름이 부모님도 내 시합을 같이 보셨겠군...
-그... 한국 오면 말이야...
-우당탕탕!
“야! 해서야!”
아름이가 뭔가 말을 하려고 하는 찰라.
우당탕 거리는 소리와 함께 창섭 형이 날 찾으러 정신없이 뛰어왔다.
“네?”
“전화 끊고 빨리 라커룸으로! 급해!”
“네? 아. 넵!”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꽤나 다급한 모습이었다.
“미안해. 무슨 말 하려고 했었어?”
-괜찮아. 빨리 가봐. 한국 들어와서 이야기해도 돼.
아름이는 창섭 형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괜찮다며 이쪽 사정을 먼저 헤아려주었다.
“고마워! 다시 전화할게!”
그렇게 아름이와의 전화통화를 끊고는 창섭 형과 함께 도착한 라커룸.
“해서 왔냐.”
그곳의 분위기는 조금 이상했다.
조금 전까지 내 승리를 축하하던 코치진들의 분위기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고 꽤나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가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으니까.
“무슨 일 있어요?”
나는 필승 형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고 필승 형은 그저 고갯짓으로 안 코치님 쪽을 가르켰다.
“해서도 왔으니 다시 제대로 전달한다. 일단 내일 아침 제일 빠른 비행기로 먼저 몇 사람만 한국으로 바로 돌아 갈 거야.”
갑자기?
원래 시합이 끝나면 특별한 일정이 있지 않은 이상 체육관 정리 및 이런 저런 행정 처리 때문이라도 다음날 오후 늦게나 하루정도 현지 체류를 더 하고 이튿날 정도에 출국을 하는 게 보통이었다.
“두호가... 쓰러졌단다.”
그때. 안 코치님의 입에서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말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