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딱대격투천재의 탄생-145화 (145/203)

< 145화_페드릭 END. >

1.

미친듯한 더위.

피닉스의 8월은 그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었다.

사막 도시인 라스베이거스만 한 열기는 또다시 없을 줄 알았는데 언제나 삶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괜히 도시 이름이 피닉스겠냐.”

“진짜요...”

불사조. 혹은 불새라고도 불리는 피닉스라는 이름에 걸맞은 날씨의 연속.

거기다 올해는 뉴스에 나올 정도로 기록적인 폭염을 기록하고 있었는데 한낮 최고 온도가 40도를 훌쩍 넘어가는 건 당연한 듯했다.

하루 중 최저기온마저 30도 밑으로 떨어지는 일이 없었으니 에어컨 없이는 잠을 청할 수도 없을 정도의 더위였다.

“뜨거움! 여름! 열정! 아닙니까 선배님들!”

“...”

태양이 저놈은 이름값을 하는지 더위에 강했다.

체육관을 한 발짝만 벗어나면 금세 쓰러질듯한 날씨에도 잘도 돌아 다녀댔다.

“빨리 시합 끝내고 한국 가고 싶네.”

“태양이 저 새낀 버리고 가자.”

“어? 전 콜이요.”

창섭 형과 필승 형은 얼른 한국으로 돌아가고픈 마음뿐인 듯했다.

뭐.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긴 했지만.

“그건 그렇고. 오픈 워크아웃은 빼도 되는데. 굳이 나가려고?”

이제 시합이 일주일도 남지 않은 시점.

고강도 훈련은 줄여나가는 시점이라 컨디션을 유지할 정도의 가벼운 운동만 하고 있었기에 일과에 여유가 있어 잡담 시간이 늘어났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얼굴들은 한번 봐야죠.”

“별로 좋을 거 없을 거 같은데...”

이번에는 창섭 형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한마디 거들었다.

-아시아의 신예 페드릭에 도전하다!

-페드릭! 강해서라는 선수의 유통기한은 지났다? 판정승은 없다. 오로지 KO뿐!

-강해서의 도핑 의혹? 그 진실은?

-상대 선수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없는 파이터 강해서? 페드릭은 개의치 않아.

WFC 292가 다가오자 이런 종류의 기사들이 수도 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페드릭이 딱히 공식적인 어떤 발언을 하지 않아도 언론에서 알아서 날 까주고 있달까.

이번에서야 확실히 느꼈지만,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나는 이방인일 뿐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악역이 될 수밖에 없는 태생.

“그래서 더 가보려고요. 절 싫어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전투력이 오를 것 같아서.”

“... 야. 이 새끼 중2병 아니냐?”

“왼손의 흑염룡. 뭐 그런 거 꺼낼 것 같은데요?”

이 형님들이 진짜.

적이 많을수록 불타오르는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시네.

난 좀 아싸기질이라 믿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은 좀 부담스럽고, 불신하고 실패하길 바라는 사람이 많을수록 힘이 나는 편이거든요.

*

-그러면 페드릭 선수에게 질문하겠습니다.

-프로 종합격투기 선수로서 데뷔한지 5년 만에 WFC라는 세계 최고의 무대를 밟았고 또, 앞으로 한걸음이면 타이틀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의 심정을 듣고 싶군요.

계체량이 이틀 남은 시점.

오픈 워크아웃과 시합 전 기자회견이 있는 날이었다.

-우선,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건 물론 저의 노력과 땀. 그리고 재능 덕분일 겁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건 저를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많은 분 덕분입니다. 저는 케이지에 오를 때면 언제나 다짐합니다. 미국의 프라이드를 지키기 위해 결코 쓰러지지 않겠다구요.

-와!!!

-짝짝짝짝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는 재미있는 쇼가 펼쳐지고 있었다.

오픈 워크아웃 때도 내 차례의 공개 훈련에는 반응 및 관계자 참석이 아주 저조했는데 시합 전 기자회견에서도 비슷한 일이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나도 데뷔 5년 찬데 말이야.’

정확히는 종합격투기를 접한 게 5년째지. 페드릭은 데뷔가 5년 차고.

-이번 강해서 선수와의 시합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게 있나요? 페드릭 선수?

-특별한 걸 준비하지는 않았습니다. 특별한 게 어울릴 만큼 스페셜한 상대는 아니니까요. 그는 지난 브라이언과의 이벤트 시합에서 그의 밑천을 모두 드러냈습니다. 혹시라도 그에게 뭔가 기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미안하지만, 그 기대를 거두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이번 시합에서 패배 외에는 어떤 것도 얻을 수 없을 테니까요.

흠.

대체 내 질문은 언제쯤 돌아오는 걸까.

WFC에서 공식적으로 진행하는 기자회견이었지만 프레스 질문 타임에 대부분의 기자들이 페드릭에게만 질문을 던졌기에 나는 그냥 망부석처럼 앉아있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페드릭 선수에게만 질문이 너무 집중되었군요. 다음은 강해서 선수 질문만 받겠습니다.

마침 적절한 타이밍에 장내를 정리하는 기자회견 진행자.

나는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감사를 표했다.

-그러면 강해서 선수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아시아에서는 이제껏 중량급 이상에서 활약을 펼쳤던 선수를 보기가 드물었습니다. 하지만 강해서 선수는 활약을 넘어서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을 달성하기까지 했죠. 일각에서는 이에 대해 많은 추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음...

페드릭한테 했던 질문이랑은 결이 너무 다른 거 아니냐.

대놓고 도핑 혹은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냐고 물어보는 수준이잖아.

“글쎄요. 저는 다른 선수들의 사정은 잘 모르니까요. 저는 종합격투기를 접한 지가 이제 겨우 5년 차입니다. 패드립 선수처럼 프로 데뷔가 아니라 종합격투기라는 종목을 접한 게 5년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죠. 반대로 물어보고 싶네요. 이 쉬운 걸 왜 못하죠? 많은 추측? 도핑? 혹은 다른 부정한 방법? 그런 걸 쓸 필요를 느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게 안타깝네요.”

-...

내 답변이 예상외였는지 질문자는 추가적인 발언을 하지 못하고 진행 측에 의해 자리에 앉아야 했다.

-다음 질문도 강해서 선수의 질문을 받아보죠. 네. 거기 기자님.

-피닉스 데일리의 기자입니다. 강해서 선수. 솔직히 말해 페드릭 선수는 미국의 자랑. 혹은 미국의 자부심이라고도 불리는 선수인데 이번 시합을 준비하면서 부담감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실력적으로든 환경적으로든 어떤 방식으로라도요.

음.

이번 질문은 꽤나 솔직한 질문이었다.

대놓고 ‘사방이 적군인 경기인데 부담되지 않느냐’ 라는 질문이었으니까.

“부담이라. 사실 낯설기는 합니다. 수많은 미국 격투기 팬들이 저기 앉아있는 패드립 선수를 지지한다는 게. 뭐. 부담감은 없었습니다. 결국, 제가 상대해야 할 건 패드립 선수 하나뿐이니까요. 다만 많은 미국의 격투기 팬들에게 실망을 안겨드릴까 봐 걱정이 앞서긴 하는군요.”

-그 말씀은. 이번 시합에서의 승리를 확신하시는 겁니까?

“케이지 안에서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고들 하죠. 사자가 고양이한테 물리는 일도 일어날 수는 있죠. 그렇다고 고양이가 사자에게 이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패드립은 종합격투기의 다음 세대를 책임질 선수라고들 하죠. 그러면 다음 세대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면 됩니다. 제가 한 20년 정도 해 먹고 넘겨줄 테니까. 그는 젊으니 마흔쯤 되면 챔피언에 도전해볼 기회가 생길 겁니다.”

-...

이번에도 추가적인 발언을 하지 못하고 자리에 앉는 질문자.

답변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보니 페드릭은 잘생긴 얼굴이 빨갛게 닳아 올라 있었다.

-일단. 이런 공식 자리에서는 본인 발음이 좋지 못하면 통역이라도 쓰는 게 어때? 내 이름은 페드릭이야. 미스터 캉.

“나야말로 미스터 캉이 아니라 미스터 강이야. 패드립.”

-...나이 많은 늙은이라 적당히 해주려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군. 이런 식의 어그로가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진 않을 거야. 이번 주말을 기대하라고.

“안 그래도 기대 중이야. 얼른 시합을 끝내고 시원한 곳에서 쉬고 싶으니까 말이야. 웬만하면 최대한 빨리 좀 쓰러져달라고.”

-쾅!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페드릭.

아무래도 나이가 어린 만큼 스스로에 대한 프라이드도 강하고 혈기도 왕성한 듯했다. 겨우 이 정도 도발도 못 견디다니.

내가 미국에 와서 겪은 차별대우만 해도 얼마인데 이것 가지고 급발진을 하고 그래?

-자. 두 분 선수들. 본격적인 싸움은 이번 주 토요일 경기장에서 이어주시구요. 다음으로...

분위기가 과열되었다고 생각했는지 교통정리를 하는 진행자.

이후로는 가벼운 질문 몇 가지가 오고 간 후 오픈 워크아웃&시합 전 기자회견은 끝이 났다.

그리고 이틀 뒤 계체량 이벤트에서도 특별한 일은 없었다.

이미 언론에서는 기자회견에서 내가 했던 발언들이 2차 3차 재생산되어 미국 전역으로 퍼졌고 리딧을 비롯한 커뮤니티에서는 이번 WFC292 시합에 관한 많은 글이 올라오고 있었다.

물론 그 대부분은 내 발언들을 지적하는 글들이었고 나머지는 페드릭을 응원하는 글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계체량은 나와 페드릭 둘 다 서로를 본 체도 하지 않았고, 그 냉랭한 공기에는 8월 피닉스의 열기도 식어버리는 듯했다.

그리고 드디어 밝은 토요일.

WFC 292.

헤비급 타이틀 샷이 걸린 페드릭과의 시합날이 다가왔다.

*

-그럼 이제 시합 들어가겠네?

“어. 다음 시합이니까 이젠 진짜 준비해야지.”

-많이 맞지 말고. 져도 좋으니까 후회 남지 않게 힘내!

아놔. 나 정도면 진짜 많이 안 맞는 편이라니까.

내가 이번에는 확실히 보여준다 진짜.

-현장 응원은 못 하지만 본방 챙겨볼 거니까. 알지?

“고마워. 걱정 마. 나 강해서야.”

아름이는 오늘 내 시합을 챙겨보기 위해 일요일 스케줄도 다 빼뒀다고 했다.

피닉스 현지 시각으로 오후 11시가 다 돼가는 시점.

한국은 이제 일요일 오후 3시를 향해가고 있을 시간이었다.

“이제 진짜 끊는다. 나 준비해야 돼.”

-파이팅! 사랑해!

“...어. 어... 나도!”

-그게 아니...

-뚝.

“...”

전화를 끊고 나니 주변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이제 곧 시합인데 아주 살판났다? 그지?”

“야. 너도 사랑한다고 한마디 해주지 인마.”

선수 대기실에는 벌써 코치진들이 모두 들어차 있었는데, 아름이와의 전화 통화를 기다려준다고 모두 목소리를 낮추고 있었다. 그리고 아름이의 마지막 인사 목소리는 꽤나 컸기에 모두가 들은 듯했다.

“선배님! 역시! 크으... 저도 손아름 님 팬이었는데 이제 형수님이시니 깔끔하게 포기했습니다!”

“...넌 저기 가서 벽 보고 서 있어 인마.”

“네?”

“어디서 감히.”

포기했다 하더라도 우리 아름이를 마음에 뒀었다니. 넌 당분간 요주의 인물로 체크다.

“시끄럽고. 이제 입장할 시간이다. 다들 준비해.”

“넵!”

안 코치님의 한마디에 다들 긴장의 끈을 조이며 다시 시합 모드로 돌아갔다.

‘긴장이 많이 풀렸다.’

아무리 이길 자신이 있는 시합이라지만 사람인 이상 조금의 긴장도 하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필승 형과 창섭 형의 장난으로 그나마 조금 있던 긴장까지 싹 풀리며 아주 베스트 컨디션이 되었다.

“케이지 안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 방심하지 말고.”

“넵!”

“천천히. 급할 필요 없다. 알지?”

“넵!”

입장 통로를 지나 케이지 밖에서 옷을 벗고 마우스피스를 끼는 동안에도 안 코치님은 시합 전 주의사항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셨다.

-우우!

-꺼져라! 오늘의 승자는 페드릭이다!

-헤비급은 너 같은 아시안이 넘볼 곳이 아니야!

그리고 케이지와 가장 가까운 객석에서 날아드는 거슬리는 소음들.

전투력 빡 올라가게 계속 도와주네.

-철컹.

가볍게 몸을 흔들며 들어선 케이지.

맞은편에는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잘생긴 백인 놈. 페드릭이 보였다.

‘진짜 딱 미국 하이틴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생겼네.’

차이점이라면 약간의 거만함과 싸가지없음이 표정에 장착되어있는 정도랄까.

심판의 진행하에 케이지 중앙에서 가벼운 글러브 터치를 하고는 다시 케이지 양 끝으로 떨어진 페드릭과 나.

“흐읍!”

다시 케이지 중앙에서 글러브 터치를 할 생각은 없다는 듯 시합 시작과 함께 페드릭은 날 향해 전력으로 달려왔다.

“...”

시작부터 집중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페드릭의 움직임 하나하나.

날 향해 달려오는 그의 모든 움직임이.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흔들리는 그의 근육과 시선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보였다.

-퉁. 퉁. 퉁.

나 또한 피하지 않고 페드릭을 향해 마주 달리며 집중력을 유지한 채 몸을 살짝 띄우며 왼발을 살짝 앞으로 차올렸다.

“...!”

순간 살짝 당황한 듯 레프트 킥을 피해 왼쪽으로 상체를 움직이는 페드릭.

집중 모드 속에서 그의 움직임을 선명하게 보고 있던 나는 그대로 왼발이 아닌 오른발을 그의 관자놀이를 향해 뻗었다.

-쒜에엑

느려진 세상에서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뻗어나가는 오른발.

무게중심과 회전력까지 완벽하게 실린 태권도의 나래차기를 응용한 킥이었다.

-뻐어억!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내게 달려오다가 라이트 킥을 맞고 내 왼쪽으로 상체부터 철푸덕 쓰러지는 페드릭.

-스탑! 스탑!

내가 추가적인 타격 자세를 잡기도 전에 심판이 온몸을 날리며 스탑을 외쳐댔다.

-...

아주 잠시.

이 넓은 힐라 리버 아레나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강해서 승리. 1라운드 4초.

“으와아아아아앗!!!”

다만 믿기 힘든 승리 기록과 내가 내뱉는 포효가 체육관을 울리자.

-우와아아아아!!!

-뭐야? 방금 뭐야?

-벌써 끝난 거야?

그제서야 체육관을 폭발시킬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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