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_피닉스로 >
1.
“후욱... 후욱...”
7월 중순의 날씨는 운동하기에 그리 좋은 날씨가 아니었다.
그냥 덥기만 한 게 아니라 후덥지근한 습기까지 괴롭혀댔으니까.
거기다 더운 날씨가 기초체온까지 높여버리기 때문에 땀은 비 오듯 나오지만 대사량을 늘리기에 그리 좋지도 않았다.
-툭
“할 만하냐?”
“아. 두호 형.”
지금 팀 피스트에 예정된 큰 이벤트는 두 개였다.
8월 말에 있을 내 헤비급 데뷔전이자 타이틀 샷이 걸린 페드릭과의 시합.
그리고 9월 말부터 시작되는 미들급 챔피언 토너먼트에 출전하는 두호 형.
챔피언 토너먼트는 4강부터 시작하는데, 총 4명의 미들급 탑 컨텐더들이 토너먼트 식으로 경기를 치러 그 중 최종 우승자가 미들급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는 형식이었다.
예전에 내가 했었던 원-나잇 토너먼트처럼 하루 만에 끝나는 토너먼트와는 달리 4강전에서 이긴 두 명의 승자가 미들급 타이틀을 걸고 타이틀전을 벌이는 형식이었다.
어쨌든 두 번의 경기와 승리만 거머쥐면 미들급 벨트를 쥘 수 있는 기회였다.
“9월에 4강전 하면. 타이틀전은 12월 쯤 하겠죠?”
“그렇겠지. 일단은 1차전부터 생각하고 있어. 결승전부터 생각하기에 피에르토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까.”
“그렇죠.”
피에르토.
퍼스트 FC에 혜성처럼 등장해 미들급을 씹어 먹고 WFC로 이적한 이후 4전 4승을 달리고 있는 선수였다.
나와는 동체급 활동시기가 별로 겹치지 않아 인연이 없었지만 상당한 실력을 가진 선수인건 부정할 수 없었다.
챔피언 벨트를 감았던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WFC 미들급은 종합격투기 시장에서 가장 수준이 높은 체급 중 하나였다.
선수 풀도 가장 컸고 선수들의 기량 또한 출중했다.
“저쪽은. 학센이 올라오면 좋겠네요. 그래도 한번 이겼던 상대니까.”
“글쎄. 지난번엔 어떻게 내가 한번 이겼다지만 그걸로 내가 학센보다 강하다고 할 수는 없어. 그래도 뭐. 학센이 올라온다면 조금 편하기는 하겠어.”
웃으며 이야기를 하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던 두호 형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보다. 너무 빨리 잡은 거 아냐? 시합?”
“네? 아. 하하하.”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른다지만. 난 좀 걱정 되네.”
“하하.”
확실히 8월 말 시합은 조금 급하게 잡은 감이 있었다.
WFC 측으로부터 시합 제안을 받은 게 7월 초였으니까 시합 대비 훈련을 할 수 있는 기간이 채 두 달도 되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정식 시합을 가지는 건 작년 말 헨더슨과의 라이트 헤비급 타이틀 전 이후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가져보는 반년이 넘는 시합의 공백.
물론 지난봄에 브라이언과의 이벤트 매치를 가진 바 있다지만 그건 말 그대로 이벤트 매치였다. 그것도 라이트 헤비급의.
“웃을 일이 아니야. 내가 이 바닥에 있으면서 여러 유형의 선수들을 봤지만... 빛나는 재능을 가진 선수들이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돌부리에 넘어지는 걸 많이 봐왔다.”
“...”
“물론 해서 네가 그들과 같지는 않겠지만. 너무 조급해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너 아직 젊어. 나도 아직 현역인데 네가 뭐가 그렇게 조급한 거야?”
두호 형의 말이 맞았다.
사실 내가 조급해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아직 성장세가 멈추거나 더뎌진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하루하루 성장하고 있다는 걸 온몸으로 체감할 정도였다. 아직 내 전성기는 오지 않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고마워요.”
그렇기 때문에 시합을 빨리 잡았던 거다.
“형이 무슨 말 하시는지 알아요. 안 코치님도 비슷한 말 하셨으니까.”
상대적인 강함의 문제가 아니라. 나 스스로 빨리 성장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다.
스스로를 조금 더 몰아붙이고 성장속도를 높이고 싶었다.
페드릭을 무시하거나 스스로를 높이는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이번 시합은 그저 내게 적당한 자극제. 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 뭐. 알아서 잘할 거라는 건 안다. 그냥 나이가 드니까 걱정이 많아졌나보다.”
“하하. 자기 입으로 아직 현역이라고 해놓고 약한 모습은.”
괜히 쑥스러운지 헛기침을 내뱉고는 다시 본인 훈련을 위해 돌아서는 두호 형.
‘페드릭이라.’
종합격투기 시장을 이끌어갈 다음 세대의 주역이라 평가 받는 선수.
빛나는 재능.
미국의 자랑.
여러 가지 별명이 있지만 그 뜻은 모두 비슷했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는 것.
“거기다 전형적인 미국인의 모습이지.”
금발에 벽안이 신비롭게 빛나는 백인 선수.
흑인. 그 중에서도 비율로 따지면 가장 적다고 할 수 있는 아프리카계 흑인이 랭킹의 상위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게 현 MMA의 현실이었다. 그 외에도 라티노 선수들과 미국계 백인과 흑인 선수들도 꽤나 선전하고 있다지만 압도적인 선수층에 비해 상위권에 랭크된 선수들의 숫자는 처참한 수준.
그런 상황에서 전형적인 미국계 백인에 얼굴도 잘생기고 재능도 뛰어난 선수가 나타났으니 미국인 입장에서는 환호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안녕하십니까! 강해서 선배님!”
앉은 김에 잠시 숨을 돌리며 페드릭에 관해 생각하고 있는데 날 향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어. 태양아.”
체육관의 새로운 피. 정태양이었다.
“오늘도 열심히십니다!”
“그래. 그래. 목소리 좀 낮춰라. 다른 사람들 운동하는데.”
“넵!”
날 향해 부담스럽게 눈을 반짝이는 빨강머리.
인사 다 했으면 안 가냐? 왜 계속 앞에 서 있는데?
“선배님. 이거. 보셨습니까?”
“엉?”
스마트 폰을 꺼내 뭔갈 검색하는 듯하더니 내게 보여주는 태양이.
-페드릭. 라무차의 벨트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강해서에게 감사한다?
-헤비급은 아시안 에게는 허락된 적 없는 영역. 타이틀 샷을 준다는 것 자체도 치욕?
-라이트 헤비급과 헤비급은 단 한 체급이지만 그 수준이 달라. 강해서에게 헤비급의 벽을 느끼게 해주겠다.
-페드릭. ‘나는 언급하지 않고 라무차를 언급한 강해서는 무례한 선수. 케이지 안에서 버르장머리를 고쳐줄 것.’
“페드릭이 SNS로 글을 좀 싸지른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러네.”
정식 인터뷰도 아닌 SNS에 올린 글 몇 개가 기사화되어 인터넷에 올라와 있었다.
아무래도 미국의 사랑을 받는 선수다보니 SNS의 간단한 글 하나로도 이정도 파급력을 가져오는구나 싶었다.
“그래도 이정도면 양호하네.”
뭐 딱히 패드립을 한 것도 아니고. 심각한 도발을 한 것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내가 너튜브 인터뷰에서 당장 눈앞의 상대인 페드릭은 언급하지 않고 라무차만 언급해서 삐졌나보네.
“바로 다음 주지 말입니다?”
“어? 어.”
8월 말.
페드릭과 시합을 가지는 곳은 힐라 리버 아레나(Gila River Arena)로 애리조나 주 피닉스에 위치한 곳이었다.
8월의 피닉스는 평균 최저기온이 26도에 평균 최고기온 40도에 달하는 지옥 같은 곳이라고 들었다.
현지 적응을 위해선 한달 정도는 현지에서 훈련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바로 다음주에 출국예정이었다.
“그나저나. 너. 그 말투 좀 어떻게 못하냐?”
“어떤 거 말입니까?”
“다나까 쓰는 거. 뭔 군대도 아니고.”
“죄송합니다! 고치겠습니다!”
“... 됐다.”
생긴 건 양삘 나게 빨강머리에 몸 여기저기 타투도 많은 놈이. 하는 건 꼭 이등병처럼 행동한단 말이지.
“그나저나. 일정. 괜찮지?”
“당연하지 말입니다!”
이번 페드릭과의 시합. WFC 292 메인 매치에는 태양이도 함께 할 예정이었다.
예전 두호 형의 세컨으로 처음 WFC 시합을 접했던 것처럼. 나도 태양이에게 WFC라는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너무 기대됩니다! WFC 헤비급 시합을 눈앞에서 직관하다니!”
“...그래. 그래. 나 이제 훈련 좀 하게 저리로 가줄래?”
“네! 알겠습니다!”
참. 말은 잘 듣는데 뭔가 불편한 놈이야.
*
“챙길 건 다 챙겼어?”
훈련을 끝마치고 에어컨 아래에서 오랜만의 휴식을 즐기고 있자니 아름이가 꽤나 뾰로통하게 입을 열었다.
“응?”
“내일 바로 출국이잖아.”
“아아.”
이미 다 챙겨놨지.
사실 내가 챙길 건 별로 없었다. 다 체육관에서 준비해주니까.
이러려고 매니지 계약을 한 거 아니겠어.
“다 챙겼으면 나랑 놀아.”
“...엉?”
“오랜만에 보잖아아-”
“...”
여름은 여러모로 바쁜 계절이었다.
나는 페드릭과의 시합을. 아니, 헤비급에 맞는 몸을 만들기 위해 하루하루를 분 초 단위로 쪼개가며 살아야 했고 아름이 또한 여름은 가장 바쁜 시기 중 하나였다.
고정 예능에 새로 나온 앨범으로 음악방송 및 여기저기 행사들도 다녀야 했으니까.
“엄... 며칠 전에도 봤는데?”
“뭐?”
“지난 주말에도 봤고...”
“...”
그렇다고 우리가 전혀 못 본건 아니었다.
집이 가까운 만큼 잠깐 잠깐씩 얼굴은 봤으니까.
“아! 엊그제도 잠깐... 아!”
그리고 그걸 하나하나 열거하자니 아름이가 옆구리를 꼬집어 왔다.
“이씽... 살도 별로 없어서 내 손톱이 더 아팡...”
더 아프다니... 내 고통이 어느 정돈지 아는 거냐?
“어쨌든 이렇게 제대로 보는 건 진짜 오랜만이잖아!”
“어어. 그, 그렇지.”
“그리고 또 한동안은 아예 못 볼 거 아냐...”
꼬리 쳐진 강아지처럼 시무룩하게 말하는 아름이.
확실히 집 앞에서 잠깐 잠깐 얼굴 보는 것 말고 이렇게 오래 같이 있는 건 오랜만이었다.
“내가 잘못했네. 그럼 뭐하고 놀까?”
나는 아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다행인건(?) 시합 준비 중에는 아름이도 조심(?)을 해준다는 거였다.
그러니 뭔가 밤새도록(?) 체력을 쓸 일(?)은 없을 거였기에 이렇게 편하게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헤헤. 내가 지난번에 춤 가르쳐 준댔잖아?”
“어?”
“춤 가르쳐줄까?”
“... 갑자기?”
하루 종일 운동하다 와서 뭔가 더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없는뎁쇼...
에어컨 시원한데 굳이 일어나서 몸을 움직여야 하나요...
“알았어. 그러면 일단 내가 먼저 보여줄게! 일단 보고 판단해줘!”
“어? 어. 어.”
눈을 반짝거리며 뭔가 결연하게 말을 뱉는 아름이.
그러고는 방으로 휙 사라졌다.
‘춤 보여준다면서 방엔 왜 들어가지.’
바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몇 분이나 지나서야 다시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 나야 그 시간만큼 터치 안 받고 푹 쉴 수 있었기에 별다른 의문을 갖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빼꼼
그리고 방문 틈새로 얼굴을 살짝 내미는 아름이.
쟤가 뭐하나 싶었는데
-휘익
“헤헤. 어때?”
“...”
어디서 난 건지 노출이 상당한... 저걸 옷이라 부를 수 있는지 싶은 옷을 입고 나왔다.
“이상해?”
“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나마 입고 있는 부분은 몸에 착 달라붙어서 몸매를 다 드러냈고, 그 외에는 노출이 많은...
-살랑 살랑
그런 옷을 입고는 음악을 튼 채 살랑 살랑 춤을 추는 아름이.
참자. 참아야한다.
이건 함정이다.
아름이가 먼저 건드리지 못하니 내가 먼저 건드리게 만들려는 여우의 함정이다.
집중!
심박 수를 낮추고 차분함을 가지기 위해 집중력까지 끌어올렸다.
“...”
이런.
집중력을 끌어올렸더니 아름이의 춤이 느리게 보이며 더 섹시하게 보였다. 그리고는 강제적으로 풀려버리는 집중력.
망할. 진짜 더 운동하고 싶은 마음 없었는데.
내가 장담하는데 이걸 버텨낼 수 있는 남자 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다.
**
“... 강해서 너는 또 얼굴이 왜 그래? 어제 일찍 들어갔잖아.”
출국을 위해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길.
창섭 형은 내 얼굴을 보더니 걱정스레 한마디 했다.
“강해서 선배님 비행기에서 주무시려고 안 주무신 거 아닙니까?”
“어? 어. 어...”
“역시! 시차를 생각해서 출국 전날부터 관리하시는 프로페셔널한 모습! 존경스럽습니다!”
“...그래...”
다행히 태양이 놈의 착각 덕분에 다른 사람들도 별 말 없이 넘어갔다.
피닉스 공항까지는 최단시간으로 가도 1회 경유에 14시간이 넘게 소요되었으니까 비행기에서 잘 수 있다면 자는 게 나쁘지는 않았다.
물론 난 지금 머리만 대면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 같이 밤을 샜는데 아름이는 오히려 피부에 광이 나는 느낌이고 왜 나는 이렇게 푸석푸석 죽어가는건지.
어쩌면 나는 재능충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현지에 도착하면 바로 WFC 취재단과 스케줄이 있을 거다.”
“네?”
공항까지 이동시간에 잠깐 눈을 붙이려는데 안 코치님이 입을 열었다.
“이번 페드릭과의 시합. 생각보다 많은 이목이 집중되어 있어. 그리고 이번엔... 아마도 우리가 악당 포지션일거다. 인터뷰 조심해라.”
“...”
이제껏 적지 않은 시합을 뛰고 미국 활동을 해왔지만 의외로 인종차별이나 악의적인 대우를 받아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시합은 뭐랄까. 시작부터 미움을 받고 시작할 것 같았다.
인터넷 반응부터 조금 싸했는데 안 코치님이 이렇게 말 하실 정도라니.
‘차라리 대놓고 악당으로 만들어 줬으면 좋겠네.’
그러면 대놓고 날뛰어 줄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생각보다 반골 기질과 관종 기질이 있어서 가만있는데 누가 악당 취급하면 일부러라도 더 악당처럼 행동하고 싶어지는 편이라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