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_시동 >
1.
“수고하셨습니다!”
점심쯤 시작해 해가 질 무렵에서야 끝이 난 너튜브 촬영.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다 보니 생각보다 체력소모가 컸다. 뭔가 진이 빠진달까.
“오빠! 고생하셨어요!”
“유나도 고생 많았어.”
“인터뷰는 어떻게. 뭐라도 좀 드시고 할래요? 아니면 지금 바로?”
어느덧 한낮의 창밖으로는 햇볕에 달궈진 아스팔트의 냄새가 올라오는 계절이 되었다.
해 질 무렵이라고는 해도 저녁보다는 밤에 가까운 시간대.
“저녁 먹고 이래저래 하면 너무 늦어질 것 같은데? 유나랑 창우 형만 괜찮으면 그냥 바로 했으면 싶어.”
“저는 괜찮아요!”
“나도 문제없지.”
꽤나 허기지기는 했지만 여기서 더 늦어지면 안 될 것 같았다.
아침부터 촬영에 들어갔던 아름이의 스케줄이 곧 끝날 시간이었으니까.
“그럼 옷만 갈아입고 상담실에서 모일게요.”
“네!”
오늘 촬영했던 스파링 콘텐츠와 겹치지 않도록 미리 갈아입을 의상을 가져와달라는 전달을 받았었기에 미리 챙겨온 옷을 들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오늘 고맙다.”
탈의실에는 먼저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 온 최창우가 있었다.
“하하. 뭘요.”
최창우랑 둘만 있으려니 뭔가 어색했다.
촬영 중에는 스탭도 많았고 출연자들도 많았기에 최창우와 이렇게 단둘이 이야기를 할 상황 자체가 없었으니까.
“불편하지?”
“네?”
“이거. 순서가 조금 엉망이 되어버렸지만.”
옷을 갈아입다 말고 영문모를 소리를 하더니 날 향해 몸을 바로 세우는 최창우.
“미안했다.”
내게 고개를 숙이며 뜬금없는 사과를 던졌다.
“일의 전후야 어쨌든. 결과야 어쨌든. 해서 너한테 비겁한 짓을 한 건 부정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최창우는 예전 스트리트 파이트 시즌2 때. 내가 처음 종합격투기를 접했을 때 내게 했던 언행들에 대해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아. 절대 오해는 하지 마. 네가 떴다거나 성공했기 때문에 사과하는 건 아니야. 그 정도로 기회주의자는 아니니까.”
필승 형에게서 여러 차례 듣기는 했었다.
최창우라는 선수가 실제로는 예의도 바르고 선후배에게 잘하기로 유명하다고.
다만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격투기 선수로 활동하기 위해서. 한 단체를 대표하는 선수라는 위치에서. 어쩔 수 없이 본인의 성향이나 의지와는 다르게 움직여야 했던 부분들이 있다고.
물론 나도 이제 이쪽 업계 짬밥이 조금 찬 관계로 그게 무슨 말인지는 충분히 이해됐다.
다만, 이해가 된 것과는 별개로 내게 최창우는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남의 평가야 어찌 됐든 나와 엮인 부분에서는 긍정적으로 바라볼만한 부분이 전혀 없었으니까.
“먼저 사과를 하고. 그 뒤에 이런 촬영 협조라던지 부탁을 해야 했는데. 너무 엉망이 되었네. 어쨌든. 나한테 여러 가지 불편한 게 많았을 텐데도 오늘 나와줘서 다시 한번 고맙다.”
“에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렇게 깔끔하게 고개 숙여 사과하면 또 이야기가 달랐다.
어쨌든 최창우와의 이벤트 경기는 내가 브로일러라는 세계적인 단체에 발을 딛게 해준 계기가 되기도 했으니까.
그러니까. 조금은. 아주 조금쯤은.
“나가죠. 창우 형.”
진심을 담아 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러면 강해서 선수의 앞으로 목표나 비전은 어떻게 될까요?”
근 한 시간에 가까웠던 인터뷰의 막바지.
“음. 일단 가장 앞에 두고 있는 목표는 역시 헤비급 타이틀입니다.”
“WFC 헤비급 챔피언이면 라무차 선수죠?”
“와. 여러분. 라무차 선수에 대해 잘 모르실까봐 제가 조금 설명해 드리자면. 말 그대로 그냥 짐승입니다. 짐승. 지금 괜히 WFC 헤비급에 타이틀 샷을 외치는 선수가 없는 게 아니거든요.”
유나와 창우 형의 텐션 높은 부가 설명으로 내가 따로 이야기할 게 별로 없었다.
“가장 앞에 두고 있는 목표가 헤비급 타이틀이라면. 조금 더 먼. 혹은 최종적으로 생각하시는 목표가 따로 있으실까요?”
“조금 더 먼 목표라. 일단 격투기 선수로서 활동하는 만큼. 최강이라는 타이틀을 이 두손 안에 넣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종합격투기 최장의 선수. 이런 건가요?”
“하하. 비슷하죠.”
눈을 동그랗게 뜨는 유나를 보며 잠깐 고민했다.
이 발언을 뱉을 건지 말 건지.
“그냥. 종합격투기라던지 이런 수식어 다 떼고. 그냥 최강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어보고 싶어요. 전 세계 어디를 가든. 어떤 인종의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든. 누가 제일 쎌까? 라는 질문에 별 이견 없이 제 이름이 나왔으면 좋겠다. 정도가 되겠네요. 적어도 제가 현역으로 있는 동안은.”
“...”
“...”
조금 유치하거나 허황된 목표라서 그럴까.
유나도 창우 형도 순간 리액션을 잃은 듯했다.
“하하. 조금 허황되죠? 꿈이랄까. 목표랄까. 뭐 그렇습니다.”
나는 분위기를 풀기 위해 가볍게 웃으며 질문을 넘기려 했다.
“아아 아니에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사이즈가 달라서 순간 말이 안 나왔네요!”
“인류 최강! 영장류 최강을 꿈꾼다! 뭐 그런 거죠? MMA의 라무차 선수나 복싱의 카이서스 선수처럼 한 종목을 대표하는 선수가 아니라. 그냥 인류 대표 최강자가 되겠다!”
“하하. 뭐 그렇게 거창하게까지는.”
“여러분. 남자가 이 정도 그릇은 돼야 합니다. 보세요. 강해서 선수는 데뷔 4년 차에 3체급 제패를 현실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면서 앞으로는 인류 최강이 되겠다고 합니다. 저랑은 그릇이 달라요. 그릇이.”
창우 형은 호들갑을 떨어대며 내 답변을 열심히 포장해줬다.
그리고 이때는 나도. 유나도. 창우 형도. 이번 인터뷰의 여파가 어떤 식으로 나타날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2.
-스릉
“저 왔어요!”
주말을 푹 쉬고 찾은 체육관.
토요일 오전에도 정말 잠깐 들렀을 뿐이어서 꽤나 오랜만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합! 하압!
-팡! 파파팡! 팡팡!
문을 열고 들어와 인사를 했는데도 반겨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봤더니 체육관 안쪽에서 기합 소리와 함께 미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해서야. 왔냐.”
소리가 나는 곳으로 이동하니, 창섭 형이 가장 먼저 날 발견하고 맞아주었다.
“무슨 일 있어요?”
“무슨 일은. 신입 관원 테스트지.”
“신입 관원이요?”
하긴.
우리 체육관도 신입 관원을 상시모집했다.
유독 빡빡한 경기 일정들로 일 년에 절반 이상을 해외에 있었기에 한번도 관원 모집 테스트를 직접 본 적이 없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온 애가 좀 특이하긴 하지.”
“특이해요?”
“직접 봐라.”
슬쩍 몸을 비켜주는 창섭 형.
나는 다른 체육관 사람들과도 인사하며 그들을 비집고 들어가 한창 테스트 중인 현장으로 향했다.
“더 빨리. 멈추지 말고!”
“으압!”
테스트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내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건 불타는 듯한 빨간 머리카락이었다.
-팡! 파파팡! 팡팡팡!
그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필승 형.
관원 테스트는 필승 형이 맡아서 하고 있었는데 그의 패드워크는 역시나 훌륭했다.
그리고 더 훌륭했던 건
‘와. 핸드 스피드 엄청 빠르네.’
테스트를 보고 있는 빨강머리의 실력이었다.
키는 나랑 비슷하려나. 190 언저리 정도 되는 것 같았는데 몸은 나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마른 편이었다.
중요한 건 스피드.
테스트를 쭉 지켜보니 핸드 스피드뿐만 아니라 몸놀림 자체가 아주 재빨랐다.
저 정도 덩치에서 저런 속도가 나온다는 게 신기할 정도.
‘집중력을 끌어 올려서 효율적인 동선을 사용하면 충분히 커버 되긴 하겠지만...’
빨강머리는 동선 낭비가 꽤나 있었음에도 속도 자체가 빨랐다.
내가 집중력을 끌어올렸을 때 주변에 대한 압도적인 인지력이 생기는 것과는 별개로 내 몸의 운동능력이 변하는 것은 없었다.
주변이 느려지는 만큼 내가 움직이는 속도도 느려지는 게 당연했다.
그럼에도 집중력을 끌어올렸을 때 다른 선수들을 압도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동작에 ‘낭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인지력으로 상대방의 움직임을 꿰뚫고 내가 움직여야 할 방법을 빠르게 찾아내니 비슷한 핸드스피드나 몸놀림이라도 상대방들을 압도할 수 있었던 거다.
“자. 여기까지.”
“고생하셨습니다!!”
필승 형의 종료 선언과 함께 숨이 거친 상황에서도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하는 빨강머리.
생각보다 예의가 바른 사람인 듯싶었다.
역시 머리 색깔이나 외향으로만 사람을 판단하면 안 돼.
“어. 해서야. 왔냐.”
“네. 필승 형. 안녕하세요?”
나는 필승 형에게 살짝 손을 들어준 후 아직도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빨강 머리를 향해 인사했다.
“어어...! 가, 강해서 님! 반갑습니다!!!!”
조금 전 테스트가 끝나고 필승 형에게 했던 인사보다 몇 배는 더 큰 목소리로 거의 폴더폰처럼 허리 숙여 인사하는 빨강머리.
“어. 아. 어... 네. 반가워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하긴 했지만, 적당히 인사를 받아줬다.
“정태양이라고 합니다! 강해서 선배님을 존경해서 팀 피스트 신입 관원 테스트에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아. 네...”
뭔가 눈동자가 이글거린다고 할까.
열정 뿜뿜하는 눈빛으로 날 존경한다고 하니 꽤나 기분이 좋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고 그랬다.
사실 ‘팀 피스트’는 지금 국내에서는 가장 알아주는 격투팀이었다.
일단 두호 형과 내가 있었으니 그 하나만으로도 우리 팀의 인지도는 거의 천상계였다.
다만 지금 우리 체육관은 일반적인 취미나 다이어트 목적의 수강생들과 ‘전문적인’ 격투기 선수인 관원들의 관리를 철저히 분리하고 있었다.
운동 시간대도 선수들에게 지장이 가지 않는 시간대에만 일반인들 수강생들에게 체육관을 오픈했고.
어쨌든, 그런 만큼 우리 팀 피스트의 체육관에 오는 건 쉽지만 정식 관원으로 뽑히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단순 격투기 지망생보다는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조금만 다듬으면 바로 프로로 데뷔해도 좋을 정도의 다듬어진 선수들을 원했으니까.
실제로 이미 프로로 데뷔한 현역 선수들의 입관 문의도 차고 넘쳤기에 굳이 생초짜를 키워야 할 필요도 없었다.
“저는 강해서 선배님처럼 WFC 최정상에 서는 게 목표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한마디로 이 빨강머리 열정남은 충분한 재능과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다시 보니...’
아까는 조금 말랐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나와 비교해서 그런 거였고, 객관적으로 보면 잘 만들어진 근육에 슬림한 체격인 게 한마디로 잘빠진 늘씬한 몸매였다.
‘거기다 얼굴도 잘생겼네.’
나이는 20대 초중반쯤?
우리 체육관에서는 보기 드문 젊음의 기운을 마구 뿜어대고 있었다.
“저 친구. 재능이 대단해.”
“아. 두호 형.”
필승 형과 정태양이 땀을 씻으러 자리를 비우자 테스트를 구경하던 사람들도 모두 자리를 떴다.
“모르긴 몰라도. 국내에 썩을 재능은 아니야. 본인이 말했던 대로 세계에 도전할만한 충분한 실력과 재능이 있어 보여.”
“두호 형이 그렇게 칭찬할 정도면 진짜 유망주인가 보네요. 드디어 우리 체육관에도 유망주가 생겼네요.”
“필승이가 신났더라. 필승이 들어오고 나서 자기 체급으로 들어온 첫 정식 관원이니까.”
“아. 미들급이에요?”
내 물음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두호 형.
“슬림해보인다싶긴 했는데. 저 키에 저 리치에 저 스피드. 거기에 미들급이면 진짜 축복받은 재능이네요.”
거기에 어리고 얼굴까지 잘생겼다니. 이거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닌가?
“...네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냐?”
“네?”
“저 친구보다 몇 배는 더 불합리한 놈이 불공평을 운운하니 어이가 없어서 그런다.”
“하하... 에이. 뭘 또 그렇게까지.”
그래도 어리고 잘생긴 건 부러운 게 맞습니다.
“이제 체육관도 다시 바빠지겠구나.”
“네?”
“형석이 형이 너 오면 바로 사무실로 오라더라. 가봐라.”
“아. 넵!”
앞에 했던 말이 신경 쓰였지만 일단 사무실로 이동했다.
꼭 알아야 할 이야기라면 어련히 알아서 해주는 사람이니까 두호 형은.
“코치님! 저 왔습니다!”
노크와 함께 기운차게 문을 열고 들어간 사무실.
“해서 왔냐.”
“넵!”
우리 체육관 사람들은 어쩜 이렇게 인사가 똑같을까.
복붙한 것처럼 인사가 ‘해서 왔냐’였다.
“앉아봐라.”
“네.”
소파에 앉으니 두툼한 종이 뭉치를 들고 맞은편에 앉는 안 코치님.
“이제 충분히 쉬었지? 이제 슬슬 움직여 봐야지.”
“두호는 WFC 미들급 토너먼트에. 그리고 해서 너는 패드릭과의 시합 제안서가 들어왔다.”
아까 두호 형이 말했던 체육관이 다시 바빠지겠다는 말.
왜 굳이 설명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됐다.
“저야 바로 다음 달도 좋아요. 사실 몸이 조금 근질거리던 참이었거든요.”
한동안 풀려있긴 했지.
충분히 쉰 만큼. 이제 다시 달려볼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