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_너튜브 촬영 >
1.
서연태는 올림픽 남자 80킬로급 이상 체급의 금메달리스트였다.
키 184cm.
몸무게 91kg.
대학부 때부터 87킬로급 이상 체급에서 다수 우승을 거머쥔 현세대 한국 태권도를 대표하는 선수 중 하나였다..
“후우. 강해서...”
그런 그가 얼마 전 출연했던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기 좋게 물을 먹었다.
그것도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손아름 앞에서.
“야. 뭘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냐?”
“아. 최대호 선배님!”
현 태권도 국가대표는 상시운영체제로 일 년에 한 번씩 국가대표 선발전을 거쳐 선수촌에서 강화훈련을 진행했다.
최대호는 2000년대 초중반을 휩쓸었던 태권도 메달리스트이자 현재는 태권도 강화훈련 코칭스태프로 대한태권도협회(KTA) 소속의 코치였다.
“지난번에 말 한 거 생각해봤냐?”
“아. 그 종합격투기 선수 너튜브 출연이요?”
“그래.”
최대호는 최창우와 사촌 관계였다.
그는 사촌 동생인 최창우가 국내 각 종목의 중량급 이상 선수들을 모아 콘텐츠를 제작하고 싶다는 말에 자신이 맡고있는 태권도 및 다른 종목의 국가대표 선수들도 한번 모아보겠다고 호언을 내뱉은 바 있었다.
대한 체육회에도 인맥이 있는 최대호였기에 가능한 발언이었다.
“저는 정말 안 내킵니다. 선배님...”
멀쩡한 태권도 놔두고 뭐하러 해본적도 없는 종합격투기 콘텐츠에 출연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입식 타격이 기본인 태권도 선수에게 그라운드가 가미된 종합격투기는 결코 유리한 스텐스가 아니었다.
“너 이럴래?”
“아니. 선배님...”
세상 무서운 것 없는 서연태도 최대호는 어려웠다.
일단 자신의 앞 세대에서 80킬로급 이상을 씹어먹었던 전설적인 선수이기도 했으며 현재는 KTA에서 끗발을 날리는 신진세력에 속해있었기 때문.
국가대표 선발에도, 그리고 은퇴 이후 지도자 활동에서도 KTA에 밉보여서는 좋을 게 없었다.
“그리고. 그쪽에서 연태 너 지목 들어왔어. 내 체면 좀 세워줘라.”
“지목이요?”
“그래. 내가 명단을 넘겼었거든.”
대한 체육회 쪽 지인을 통해 취합한 명단과 자신이 섭외 가능한 선수들을 추려서 넘긴 명단.
거기서 최창우는 서연태를 콕 찝어 출연 가능한지 물어왔던 것이다.
“아... 선배님...”
“너. 올해까지 국가대표하고 그만둘 거야?”
“...아닙니다.”
“좋은 게 좋은 거잖아. 당장 큰 시합도 없고. 이럴 때 다른 종목이랑 교류도 하면서 새로운 자극도 받고 하는 거지.”
“...알겠습니다.”
최대호의 협박 아닌 협박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서연태.
“아! 그. 다른 너튜버랑 콜라보 촬영한다더라. 그 뭐냐. 무슨 여자 너튜버였는데. 어쨌든 그쪽에서는 강해서 선수 데리고 온다니까 알아두고.”
“강해서요? WFC?”
“그래. 그런 애가 태권도를 했어야 하는데. 아주 괴물이더만.”
“...”
최대호는 서연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강해서에 대해 극찬을 쏟아냈고, 서연태는 마지못해 나가려 했던 마음가짐을 꽤나 진심으로 고쳐먹었다.
“그래서. 촬영이 언제라고 하셨죠?”
“아. 이번 주말이야. 일요일. 괜찮지?”
“그럼요. 당연하죠.”
조금 전과는 대답의 목소리가 달라진 서연태.
지난 식스 테이크에서의 굴욕을 말끔히 씻어버리겠다 다짐하는 그였다.
*
-WFC 미들급.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강해서! 식스 테이크 출격?
-공개 연애 중인 손아름과의 달달한 캐미! 식스 테이크!
-레전드들이 모였다! 레전드 중의 레전드는 누구? 토요일 예능 시청률 1위를 찍은 식스 테이크!
-식스 테이크! 강해서와 손아름 현실 커플 파워로 우승 차지!
-강해서! 최슬혜 선수를 물에 빠뜨리다? 최종 우승 강해서 커플!
└아... 이걸 웃어야하나 울어야하나... 갓해서 나오는 건 좋은데 손아름이랑 꽁냥대는 건 보기싫음ㅠㅠㅠㅠ
└손아름이 철창 탈출해서 강해서한테 안기는 장면만 지금 백번쯤 돌려본 것 같다... ㅈㄴ 한품에 쏙이지 않냐? 저런 남자 어디 없나
└근데 강해서랑 서연태는 뭔 일 있었음?ㅋㅋㅋㅋ 강해서가 서연태만 엿먹이는 것 같넼ㅋㅋㅋㅋ
└팩트:커플 결정전때 서연태가 손아름한테 들이댐. 서연태는 이상형으로 꾸준히 손아름을 말해왔음
└암만 이상형이라도 그렇지 ㅋㅋㅋㅋ 남자친구가 눈앞에 있는데 저건 선 넘었짘ㅋㅋㅋ
└강해서한테 어깨빵맞고 꼴찌함ㅋㅋㅋㅋ 개웃곀ㅋㅋㅋ 마지막에 밀가루 범벅이랑 소리 지르는것까지 완-벽
└강해서가 진짜 운동신경이 쩔긴하네. 저 덩치에 어떻게 저런 속도가 나오지?
└ㅇㄱㄹㅇ 겉으로 보면 완전 근육남인데 순발력 무엇? ㅈㄴ압도적이네. 저게 월드 클래스인가?
└팩트 : 이번화에 나온 선수들 모두 월드클래스임
“뭐봐? 기사 봐?”
“어? 아. 어.”
오늘은 즐거운 토요일.
오전에 체육관 나가서 간단히 몸만 풀고는 바로 아름이네 집으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방송 끝난 지 얼마 됐다고.”
“하하. 신기하잖아. 이런 예능은 나가본 적이 없어서.”
아름이와 나는 지난주에 이어서 이번 주까지 식스 테이크의 본방을 사수했다.
마지막 종목이 끝나고 벌칙 장면까지 어떤 식으로 편집될지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장면들이 멋지게 나온 것 같아 다행이었다.
“지난주에 해서 너 춤 출 때가 대박이었는데.”
“엄... 그건...”
내가 그것 때문에 지난주에는 기사를 안 찾아봤지.
그래도 귀신같이 기사와 춤추는 장면들을 따온 친구 놈들 때문에 강제로 보긴 했지만.
“그래도 잘했어.”
내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며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아름이.
그런 그녀 뒤로 ‘식스 테이크’에서 상품으로 받은 금메달이 장식장에 진열되어있는 게 보였다.
‘괜히 뿌듯하네.’
사실 종합격투기 선수는 메달이라는 걸 목에 걸 일이 없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복싱의 최슬혜 선수도 아마 시절에는 메달을 꽤 많이 땄던 거로 아는데 나는 저 메달이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 메달이 될 것이었다.
예능에서 받은 게 뭐가 중요하겠어. 어떤 사람들과 경쟁했는지가 중요하지.
“참. 내일이라 그랬지?”
“엉?”
“너튜브 촬영.”
“아아. 어. 맞아요.”
유나 TV와 최창우의 너튜브 채널이 콜라보 촬영을 하는 날.
국내 라이트 헤비급 및 헤비급 선수들과 교류를 가질 수 있는 기회라고 해서 오케이를 했었는데, 그 헤비급에는 종합격투기뿐만 아니라 다른 다양한 종목의 선수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태권도나 레슬링. 유도. 복싱 같은.
최창우 선수가 생각보다 인맥이 좋은 듯했다.
“흐음. 나도 보고 싶은데.”
“에이. 미안해. 내일은 나도 불편한 자리라서.”
“치이...”
아름이는 참관을 하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 본인도 내일은 스케줄이 꽉 찼다고 했다.
그리고 만약 아름이가 스케줄이 없었더라도 내일은 함께 갈 생각이 없었다.
서연태가 만약 내일 출연을 한다면 아름이가 현장에 있어서 좋을 게 없었으니까.
“알겠어. 대신 오늘은 하루종일 나랑 놀아줘야 해.”
“...”
지금 시간이 벌써 저녁 10시 가까이 됐다.
오전에만 잠깐 체육관 다녀오고 지금까지 같이 있었는데 이제 와서 하루종일 놀아달라니... 이제 저도 집에 가서 자야죠...
“여기서 자고 가면 되지.”
“... 안 재우잖아.”
“뭐래. 벌써 자고 싶어? 재워줄까? 코 잘래?”
“... 영화나 한 편 보자. 이번에 잭 감독이 새로 편집한 정의의 리그가 네 시간짜리였던가... 보다가 졸리면 먼저 자.”
“너는 나랑 같이 있는데 영화가 눈에 들어오니?”
“...”
완전 잘 들어오는데.
이 집중력으로 공부를 했으면 서울대를 갔을 거야.
“우리 이야기 좀 하자.”
“응?”
“방으로 들어와.”
... 이야기하자면서 왜 씻으러 가는 건데요...
저 내일 너튜브 촬영 있다니까요...
2.
“오빠!”
“어어. 유나야.”
일요일 늦은 아침.
아름이는 일찍부터 스케줄 때문에 먼저 집을 나섰고 나는 늦게 잠든 만큼 늦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지각이에요. 지각! 왜 이렇게 늦었... 오빠 괜찮아요?”
“어? 어. 괜찮아. 잠을 좀 설쳐서.”
“다크써클 장난 아닌데... 일단 타요.”
유나와는 홍대에서 만나 강남까지 함께 넘어가기로 했었다.
유나 TV의 촬영 스텝들까지 함께 움직여야 해서 승합차를 타고 이동하는 유나네에 동승하기로 했는데 지각을 한 상황.
-드르륵
“늦어서 죄송합니다. 읏차.”
“아니에요. 강해서 선수 되게 피곤하신 것 같은데. 이쪽으로 앉으세요.”
승합차 뒷자리에 타고 있던 유나 TV의 피디가 자리를 비켜줬다. 고맙기도 하지.
“강남까지 조금 걸릴 거에요. 눈 좀 붙여요. 오빠.”
“쌩유...”
거절하지 않을게.
내가 이래 봬도 헤모글로빈이 많아서 체력 회복이 강점이거든... 조금만 자면 괜찮아질 거야...
그렇게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잠깐 눈을 감았다 떴는데.
“오빠! 도착했어요!”
“어?”
“내립시다!”
“...어...”
눈만 감았다 떴는데 벌써 강남이라니.
홍대에서 강남이 이렇게 가까웠냐?
“좀 괜찮아요?”
“어. 훨씬 나아. 괜찮아. 괜찮아.”
말은 눈만 감았다 떴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꽤나 피로를 회복했다.
이 정도면 만전은 아니라도 충분한 컨디션은 된달까.
“들어가요!”
“그래.”
어느덧 한낮의 태양이 따가운 계절이었다.
검은색 민소매 블라우스에 짧은 검은색 반바지. 똑 단발에 고양이 같은 유나의 표정은 처음 만났을 때와 거의 변함이 없었다.
아무래도 너튜버니까 관리를 엄청나게 하겠지?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별 영양가 없는 생각을 이어가며 무지성으로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최창우의 체육관에 도착했다.
“여! 해서 동생!”
멀리서 날 보자 환하게 웃으며 양팔 벌려 걸어오는 최창우.
이걸 받아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깐 고민이 들었지만 어쨌든 오늘 하루같이 촬영해야 하는 사이였으니 적당히 받아주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꽤나 거리가 느껴지는 인사와 함께 그의 포옹을 받아줬다.
“오랜만이야. 오랜만. 그런데 필승 형한테 하도 얘기를 들어서 그런지 별로 오랜만인 것 같지도 않네.”
“하하.”
필승 형은 언제 한번 날 잡고 입을 꼬매야 할 것 같았다.
다 좋은데 사람이 말이 너무 많아.
“유나씨도 안녕하세요? 전화로만 연락 드렸었죠. 최창웁니다.”
“안녕하세요! 유나 TV의 유나입니다!”
유나와는 멀쩡하게 인사하는 최창우.
진짜 오랜만이긴 했다. 내가 처음 종합격투기를 접했을 때 만나고 이번이 처음 만나는 거였으니까.
“늦었지만 챔피언 축하한다.”
“고마워요.”
“넌 될 줄 알았어. 내가 한눈에 알아봤지. 여러분. 제 동생 강해서 선수입니다. 다들 잘 아시죠? 전 브로일러 미들급 챔피언. WFC 미들급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이자 브로일러와 챔피언전에서도 승리를 거머쥔 캡틴 코리아!”
“하하하.”
뭔가 했더니 최창우 선수는 우리가 체육관에 들어올 때부터 촬영 중이었다.
“편하게 해. 편하게. 일단 찍어두고 이상한 건 다 편집할 거니까.”
“네.”
트래쉬 토크와 어그로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친화력도 좋은 사람이었네.
“오빠. 우리도 카메라 세팅하고 촬영 들어갈게요.”
유나 TV의 스텝들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최창우 쪽 스텝들과 이미 논의가 되어있었는지 정해진 위치에 카메라들을 세팅하더니 유나의 활기찬 목소리로 오프닝 영상을 촬영에 돌입했다.
“오늘은 유나 TV에 대단한 지분이 있으신 최대주주이자 특별게스트인 강해서 선수를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강해섭니다.”
“와아아아!”
내 인사 맨트에 밝게 환호하며 박수치는 유나.
“오늘은 콘텐츠는 토크가 아닙니다! 뒤를 보면 아시겠지만, 오늘은 강해서 선수와 함께하는 훈련 콘텐츠인데요! 당연히 저는 격투기를 할 줄 모르니 이쪽 계통의 전문가분과 함께 콜라보를 진행합니다!”
“안녕하세요. 조선 협객 TV의 최창우입니다. 반갑습니다.”
최창우 선수의 너튜브 이름은 처음 듣는다.
조선 협객...? 뭔가 여러 의미로 거부감을 주는 채널명이구만.
“오늘은 제가 모신 여러 투기 종목에서 국내 최정상급에 계신 중량급 선수들과 함께 재미있는 콘텐츠를 찍어볼까 합니다. 바로 초대해보죠!”
메인 카메라는 함께 사용했기 때문에 둘의 진행은 막힘없이 매끄러웠다.
그리고 최창우의 초대 맨트와 함께 체육관 안으로 들어서는 누가 봐도 ‘운동 선수다’ 싶은 덩치 좋은 남자 6명.
“오늘 콘텐츠를 위해서 스트릿 FC 헤비급 챔피언부터 현직 국가대표 선수들까지. 어마어마한 라인업을 꾸려봤습니다!”
최창우 선수의 소개대로 너튜브 촬영이라기에는 꽤나 화려한 선수진들.
그런데 내 눈에는 일단 딱 한 명만 들어왔다.
서연태.
롱 타임 노 씨다. 오늘 콘텐츠가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너는 절대 편하게 보내지 않을 테니 기대해도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