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_식스 테이크 >
1.
결국, 최창우 선수를 팔아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래? 그러면 최창우 선수랑 너튜브 찍는 거야?
“음. 일단 최창우 선수 너튜브 채널에서 찍긴 하는데. 지금은 체급 차이가 크게 나서 최창우 선수랑 뭔가 할지는 모르겠어. 아마 헤비급이나 라이트 헤비급 선수들과 찍지 않을까?”
유나랑 오래 통화했다고 하기에는 뭔가 죽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파이터로서의 동물 같은 감각이랄까?
“난 너튜브를 안 하니까. 아마 다른 너튜브 쪽을 통해서 나가거나 할 것 같아.”
-응? 그냥 그 최창우라는 분 너튜브에 출연하면 되는 거 아냐?
“그... 콜라보 형식이랄까...”
-응? 나 잘 이해가 안 되는데?
망했네.
개인적으로라면 내가 최창우 선수의 너튜브에 출연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럴만한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었고.
그래서 최창우도 유나를 통해 날 섭외하고 콜라보 형식으로 제의를 했던 거고.
다만 아름이한테는 그 이해관계를 설명하자면 유나가 끼어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어... 그. 어...”
-그 뭐?
“그... 최창우 선수랑 나랑 그... 사이가 별로 좋진 않잖아?”
-그래? 왜?
“기억 안 나? 우리 두 번째 만났을 때. 최창우 선수랑 시합 끝나고 만났었잖아?”
-아... 그 수타라면...
“그래! 그때!”
최창우와의 시합보다는 맛없는 수타 라면으로 기억되는 우리의 두 번째 만남.
“그때 최창우 선수랑 서로 사이가 안 좋았이거든. 최창우 선수는 상대 선수들한테 조금 험한 말을 하는 거로 유명해서...”
-그렇구나... 대충 알겠어. 그러면 그냥 너튜브를 안 나가면 되지 않아? 굳이 불편한 사람이랑...
“그... 나는 격투기 선수로서 경력이랄까 저변이 약하니까. 한국에서 활동하는 동체급 선수들과의 교류가 전혀 없거든. 이번 기회에 나도 다른 격투기 선수들이랑 인맥을 조금 쌓아볼까 싶어서.”
-아아... 그렇겠다. 그 부분을 간과한 것 같아. 미안해.
“에이. 미안하기는. 그럴 수도 있지 뭐.”
다행히 잘 넘어간 것 같았다.
거짓은 진실 속에 숨기라 했던가.
최창우 선수와 사이가 안 좋은 것도 맞았고 국내 격투기 선수들과의 교류를 갖고 싶었던 것도 진실이었으니 통하지 않았다 싶었다.
갑자기 지난 ‘스트리트 파이트 시즌3’ 때 해운대 오디션에 깜짝 게스트로 출연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보다 수련 기간이 훨씬 긴 선수들도 하나같이 내게 존중의 태도를 보여줬던 게 강렬하게 남아있었다.
-그러면 다른 너튜브 누구? 아는 너튜버가 있어?
“어? 어. 있기야 하지.”
-그 유나라는 분?
“...”
-이야기 좀 할까? 네가 올래? 내가 갈까?
“...”
지금 전화로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나 이제 막 한국 와서 시차 적응 해야 하는데요.
*
-쉬잉
“저 왔습니다아...”
이제는 슬슬 낯섦은 물러서고 익숙함이라는 놈이 생겨나기 시작한 새로운 체육관.
자동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서자 예전의 ‘새것’ 냄새는 어느새 사라지고 약간의 땀 냄새와 방향제 냄새가 뒤섞인 익숙한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어? 어제 못 잤냐? 애가 퀭하네?”
가장 먼저 날 반겨준 건 필승 형.
“어? 너 시차 때문에 그래? 평소엔 시차 적응 그렇게 잘하더니. 컨디션 안 좋은 거 아냐?”
두 번째는 창섭 형이었다.
창섭 형은 날 오래 봐왔던 만큼 꽤나 걱정스런 표정이었는데, 내가 해외 원정을 다녀와서 이렇게 피곤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일 거다.
“하하. 아니에요. 그냥 잠을 좀 못 자서 그런 거니... 괜찮아질 거예요.”
“시차 때문에 잠 못 잤나 보네. 안 코치님만 보고 들어가서 쉬어. 이번 주는 체육관 안 나와도 될 거야.”
“네엡.”
시차 때문인지 아름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겐 잠이 필요했다.
-똑똑
“코치님. 저 해서에요.”
-들어와.
꽤나 무거운 발걸음으로 들어선 익숙한 사무실.
“너...? 하긴. 최근에 조금 무리하긴 했지.”
안 코치님마저 내 안색을 살펴보더니 며칠은 체육관 나오지 말고 쉬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제가 체육관 안 나오는 걸 아름이에게는 알리지 말아주실래요 그러면...
“피곤할 테니 스케줄 관련 전달만 듣고 가라.”
“넵!”
안 코치님과의 매니지 계약은 방송 출연에 관한 수입은 쉐어하지않는게 기본이었다.
정확히는 ‘격투기’와 관련 없는 수익에 대한 지분 요구를 하지 않는달까.
복싱이나 며칠 전 있었던 챔피언전 같은 경우는 매니지 계약을 통해 수익을 분배했지만 방송 출연이나 인터뷰, 광고와 관련된 수익은 일절 언급도 하지 않으시고 손도 대지 않으셨다.
“네가 말했던 식스 테이크 쪽 출연제안서다. 우리 편할 때 피디와 작가가 와서 프로그램 및 출연 에피소드 설명과 계약을 진행한다고 하니 참고하고.”
“넵!”
“그 외에도 국내 기업 중에 광고 제의가 들어온 게...”
짧게 끝내고 얼른 집에 가서 쉬라고는 하셨지만, 생각보다 안 코치님과의 미팅은 오래 걸렸다.
인천국제공항에서부터 어렴풋이 느꼈지만 이번에 내 앞으로 들어온 방송 출연제안서와 광고제안서는 과장 조금 보태서 ‘탑’ 수준으로 쌓여있었다.
TV 광고부터 시작해서 SNS 광고와 잡지 광고 및 브랜드 광고.
시사 채널부터 예능과 인터넷 방송 출연 제의까지.
하지만 그 무엇보다 안 코치님과의 미팅 시간을 많이 잡아먹은 건은 따로 있었다.
“복싱이요?”
“그래.”
복싱 단체에서 들어온 컨펌이 아니라 WFC를 통해서. 정확히는 텔론을 통해서 들어온 복싱 이벤트 매치 제안.
“어쩐 일이래요? 블레이크랑의 이벤트 매치로 재미 들린 건 아닐 테고.”
“그래. 거기다 브로일러와의 챔피언전이 끝난 지도 얼마 안 됐지.”
“상대는요?”
“조던 리. WBC 산하 뉴질랜드계 동양 태평양 헤비급 챔피언이다.”
“아아.”
조던 리.
내 이름으로 스포츠 뉴스란을 검색하면 간간히 눈에 띄던 이름이었다.
이제까지는 그냥 떡고물 좀 얻어 먹어보려는 관종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이름을 듣게 되니 느낌이 또 달랐다.
뭔가 있는 놈인가?
“그보다는. 페드릭과의 매치업이 먼저 아닌가요?”
“당연히 먼저 요구했다. 만약 페드릭과의 매치업이나 헤비급 타이틀 샷에 관한 약속이 없다면 이벤트 매치도 없을 거야.”
“흐음.”
복싱이라.
복싱은 종합격투기랑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스포츠였다.
이벤트 매치를 한번 가졌었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된 프로라고 볼 수 없는 블레이크와 벌였던 시합이었기에 조금은 아쉬운 감이 있었는데... 동양 태평양 챔피언이면 갑자기 수준차이가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싶었다.
“일단 이런 제안이 들어왔다는 정도만 알아둬라.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WFC에서의 본 시합이야. 페드릭을 잡고 라무차까지. 그것만 생각하자 일단.”
“넵!”
일단 머릿속에 저장만 해두겠습니다.
조던 리.
**
“이런 형식으로 진행되구요. 촬영 시간은 저희가 정확히 얼마가 걸린다. 라고는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비슷한 플롯의 촬영을 했을 때 보통 12시간에서 플러스마이너스 두 시간 정도 진행됐습니다.”
“12시간에서 플러스마이너스 두 시간이요? 와... 혹시 마이너스 두 시간이었던 적도 있나요?”
“...”
없구만. 없어.
예능 촬영이 정말 쉽지 않구나.
스위치 온 같은 경우에는 관찰카메라에 가까운 예능이라 기본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시간 분배도 편했고.
중간중간 인터뷰 시간이 있긴 했지만, 그 외에는 딱히 방송촬영이라는 걸 의식하지 못할 정도였달까.
그리고 이번에 출연 계약서를 쓰고 있는 ‘식스 테이크’는 촬영장에 카메라 및 제작 스테프만 60여 명 가까이가 상주하는 대형 예능이었고 촬영 예상 시간은 총 12시간 이상 걸릴 것 같다고 했다.
엄청 빡빡한 일정이구만... 아름이는 이런 힘든 일정들을 소화해내고 있었구나 싶었다.
“한번 촬영하면 최소 2주. 길면 3주까지 휴식이 주어지니까요. 1회 촬영으로 2주 혹은 3주 분량이 빠집니다. 이번 커플 올림픽 같은 경우는 최대 2주 반 정도 분량이 나올 것을 기대하고 있구요.”
“아. 그래요?”
아름이의 방송 스케줄에 관해서는 따로 관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는 알지 못했었다.
그냥 이번 주는 언제 언제 쉰다. 언제 시간 된다. 정도만 머릿속에 입력해뒀기 때문이다. 분명 아름이는 말해줬을 텐데 나는 기억을 못 한달까.
“그러면 여기 사인하면 되나요?”
“아. 네. 여기랑. 또. 여기. 그리고 여기도...”
어쨌든 아름이와 같이 출연하기로 한 거 재미있게 촬영했으면 싶었다.
“그러면 촬영 날 뵙겠습니다. 그 전에 작가 팀을 통해서 사전 인터뷰와 촬영 안내 연락이 갈 거예요.”
“넵.”
식스 테이크의 촬영 안내와 출연 계약을 위해 체육관을 찾았던 제작진들이 떠나고 나니 저 멀리서 누군가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왜요?”
“방송국 사람들이지?”
“네.”
“흠. 흠.”
이미 알고 있었을 내용을 물어보더니 뜬금없이 헛기침을 뱉으며 다가오는 필승 형.
“너. 창우랑 너튜브 콜라보 한다며?”
“네? 아. 네. 아마도요?”
“창우랑 별로 친하지도 않으면서. 창우 방송에만 출연하고. 치사하다?”
“...네?”
“나도 있는데 말이야?”
“...어....”
필승 형이 너튜브를 했었나? 전혀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아니. 나 방송 출연 중이잖아. 스트리트 파이트.”
“아아...”
“거기에 창우도 나오는 거 알지?”
“알죠.”
방송에서도 여전히 막말 퍼레이드를 펼치고 계시더만.
도전자들에게 팩트라는 포장지로 감싼 무례한 말들을 내뱉는 걸 너튜브로 봤었지.
물론 실제로는 그런 성격이 아니라고 들었지만 어쨌든 내가 보고 판단하는 건 방송의 모습일 수밖에 없었으니 뭐.
“그래도 우린 같은 체육관인데. 창우 말고 날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냐?”
“... 뭔 말이에요 대체?”
“스트리트 파이트. 출연 좀 해주라.”
“네?”
“나도 네 덕 좀 보자. 우리 팀 특별 코치로 나와줘!”
“...”
대체 뭐라는 거야?
출연하면. 형은 저한테 뭐 해주실 건데요?
2.
-오프닝은 방송국 로비에서 진행합니다! 다들 대기실에서 콜 기다려주세요!
지난주 ‘식스 테이크’의 출연 계약서를 쓰고 난 뒤 본 촬영 일정은 조금 갑작스럽게 조정이 되었다.
출연 게스트들이 유명한 스포츠 선수거나 전직 레전드라고 불리는 운동 선수들이었다 보니 스케줄을 맞추기 위해 부득불 원 촬영 일자가 아닌 다른 날짜에 촬영하게 된 것.
다행히 나는 빨리 찍고 치우는 게 편했기에 오케이를 외쳤고 그 결과 지금 나는 SBC 방송국 대기실에 앉아있었다.
“뭐 좀 마실래?”
“어? 아. 아니.”
그리고 대기실에는 나 혼자 있지 않았다.
오늘 나와 커플로 활동할 파트너. 그리고 현실 연인이기도 한 아름이가 함께 했다.
“긴장돼?”
“에이. 설마. 나 강해서야. WFC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이 정도로 긴장될 것 같아?”
“근데 다리는 왜 떨어?”
“... 다리를 떠는 게 다리 지방을 태우고 칼로리 소모가...”
“됐거든?”
“...”
사실 아까 들어오면서 다른 출연진들 이름들을 봤는데 하나같이 쟁쟁하신 분들이었다.
물론 현역이 아니신 분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내 평생 인연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스포츠 스타들과 함께하는 자리였다.
아름이와 커플로 출연하는데 못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는 강박이 조금 생겼달까?
솔직히 조금 긴장되긴 했다.
-오프닝 들어가겠습니다! 식스 테이크 멤버분들 스탠바이 해주시구요! 게스트분들도 게스트 대기실로 이동하겠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본방 촬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