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_1라운드 >
1.
“야. 아직 시작 안 했냐?”
토요일 저녁.
5월의 마지막 주말을 마무리하고 있던 최창우는 오랜만에 친한 형인 박필승과 체육관 티비 앞에 앉아있었다.
“어. 이제 곧 시작할 것 같아.”
“크으. 저걸 직접 눈앞에서 봤어야 하는데.”
박필승은 ‘스트리트 파이트 시즌 5’의 촬영 일정 때문에 강해서의 이벤트 매치에 함께하지 못한 걸 아쉬워하며 방금 냉장고에서 꺼내온 시원한 맥주 하나를 최창우에게 건넸다.
“햐. 그때 그 애송이가 WFC 챔피언에. 이런 규모의 이벤트 매치라니.”
“얌마. 말은 똑바로 해야지. 쟤는 애송이 시절에도 너보단 잘 쳤잖아.”
“에이. 그때는 내가...”
“네가 봐줬다고? 퍽이나.”
강해서가 스트리트 파이트 시즌2 출연으로 종합격투기를 접한 지 몇 개월 채 되지 않았을 때 스트릿 FC의 미들급 챔피언이던 최창우는 그와 이벤트 매치를 가진 적이 있었다.
“쩝. 그때부터 난 놈 이긴 난 놈이었지.”
그리고 당시 최창우는 갓 MMA에 입문했던 강해서에게 패배하며 그의 격투기 커리어 시작에 함께했었다.
“한국이라는 그릇에 담길 놈은 아니지. 확실히.”
“어? 지금 한국 시장 비하하는 거야? 이 형 안 되겠네?”
“안되기는. 솔직히 지금 종합격투기 붐도 해서랑 두호 형. 둘이서 다 일으킨 거지.”
“...쩝.”
최창우도 나름 한국 종합격투기 시장을 살리기 위해 애써왔다.
여론의 뭇매를 맞아가면서도. 대중들의 조롱을 받아 가면서도 많은 논쟁을 만들었고 다수의 선수에게 어그로를 끌기도 했다.
국내 격투기 리그의 챔피언이라는 위치에 어울리지 않게 가볍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어쨌든 그럴 때마다 종합격투기는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그게 한국 격투기를 살리는 방법의 하나라 생각했다.
“물론 네가 틀렸다는 건 아니야. 어찌 됐건 네가 그렇게 튀는 행동들을 했고. 그 과정에서 스트리트 파이트라는 프로그램이 생겨나면서 해서 같은 선수가 탄생했으니까.”
“... 그치?”
“그래 인마. 어떤 일이든지 그 시작은 미약하고 미미해 보이는 거야.”
그리고 필승은 그런 최창우의 노력을 알고 있었다.
가끔은 그 정도가 지나쳐 미움을 받거나 욕을 먹기도 했지만 어쨌든 최창우는 한국 종합격투기를 위해 스스로 많은 것을 포기했다는 것을.
그리고 실상 만나보면 사람이 그리 나쁜 것도 아니었다. 인터넷이나 언론에서는 위아래 없이 모두에게 시비 걸고 다니지만 실제로는 선배에게 깍듯하고 후배에게 선을 지키는 정말 열심히 운동하는 동생이었다.
“쓸데없는 이야기 하지 말고. 남들은 인정해주지 않아도 난 인정해. 네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한국 격투기의 숨을 붙여놨기 때문에 지금의 영광이 있는 거라는 걸.”
“...행님...”
“역겨우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말고. 네가 지켜온 한국 격투기로부터 시작된 저놈이 앞으로 얼마나 더 뻗어나갈지. 그거나 지켜봐. 또 쓸데없이 입 털지말고.”
“예!”
국내 격투기 커뮤니티에서도 조리돌림 당하지만, 의외로 그 주변의 선수들에게는 후한 평가를 받는 최창우는 박필승의 진심을 가슴 깊이 새기며 살짝 촉촉해진 눈으로 시선을 티비로 돌렸다.
티비 화면에선 어느새 강해서와 브라이언의 경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이벤트 매치라는 것. 잊지 마.”
“넵!”
“최선을 다하되. 다치면 안 된다. 부상 위험 있거나 어디 불편하면 바로 말해.”
“넵!”
케이지에 오르기 직전.
코치진과 마지막 컨디션 체크를 하며 시합 전 주의사항들을 새겨들었다.
아무래도 이번 브라이언과의 챔피언전은 WFC 본 시합이 아닌 이벤트 매치다 보니 파이트머니나 흥행성은 높더라도 커리어 적인 부분에서 중요도가 떨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부상의 징후가 있거나 시합 중에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즉각적으로 말하라는 안 코치님과 코치진의 당부.
물론 다치거나 많이 맞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조금 다치거나 맞는다고 시합을 그만둘 생각도 없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이겨라.”
“넵!”
어떻게 보면 종합격투기를 시작한 후 처음 사귄 ‘동료’와의 시합.
어떤 식으로든 후회가 남지 않는 경기가 되었으면 했다.
-철컹
한달음에 케이지로 뛰어 들어가니 반대편엔 브라이언이 먼저 입장해 있었다.
우리 둘 사이에는 카메라 몇 대와 진행요원. 그리고 심판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한 바퀴 카메라 무빙 후 철창 밖으로 빠져나가고 브라이언과 나 사이에는 심판만이 서 있었다.
-툭.
심판의 시합 중 주의사항들을 들은 후 가벼운 글러브 터치.
사실, 이 순간이 내겐 어떤 ‘스위치’ 같은 느낌이 있었다.
케이지에 들어와서도.
상대 선수를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시합이 시작되었다’라는 느낌은 그리 와닿지 않았달까.
하지만 이렇게 상대 선수와의 글러브 터치를 하고 나면 ‘아. 시작됐구나.’라는 실감이 났다.
내 주먹과 맞닿은 상대 선수를 전심전력으로 쓰러뜨려야 한다는 실감이.
“후우...”
글러브 터치 후 케이지 양 끝으로 물러섰던 브라이언과 나는 천천히 거리를 좁혀 케이지 중간 어디쯤에서 양팔간격을 유지한 채 대치를 시작했다.
“...”
“...”
뭐야.
왜 안 들어와?
나는 브라이언의 타격 거리를 가늠하며 그 선을 아슬아슬하게 왔다 갔다 해봤지만, 그에게선 어떤 반응도 없었다.
“...”
어쩔 수 없네.
-스슥.
나는 암묵적으로 유지 중이던 양판 간격을 부수고는 타격 거리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이제껏 상대했던 선수들은 하나같이 먼저 공격적으로 나오거나, 최소한 먼저 타격 거리 안으로 들어와 줬었다.
브라이언처럼 시합 시작 후에 거리를 유지하며 기다리는 상대는 처음이어서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고민했었다.
-휘익!
하지만 고민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타격권 안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팔을 뻗어 견제 펀치를 날랐고.
-툭.
내 왼손은 훌륭히 그 역할을 수행해 브라이언의 오른 팔뚝을 스치듯 때리고 지나갔지만
-휘익. 스팟!
왼손 견제 펀치를 뻗느라 조금 무너진 균형. 그리고 아주 살짝 드러난 빈틈을 정확히 노리고 날아온 브라이언의 펀치는 정말 아슬아슬했다.
만약 내가 꽤나 집중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첫 공방부터 손해를 볼 뻔했으니까.
-퉁!
-후웅. 툭. 퍽. 턱!
서로 딱히 이득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거리는 좁혀졌다.
나는 브라이언의 왼손이 회수되는 타이밍에 오른손을 뻗어 그의 빈틈을 노려봤지만, 브라이언은 그대로 상체를 앞으로 숙여 몸싸움을 걸어왔다.
그 상태에서 이어진 초근접 펀치와 내 팔뚝에 충격을 가하는 바디 니킥.
이 거리는 내게 썩 유리하지 않았다.
일단 아무리 집중해도 물리적 한계 때문에 보이지 않는 사각이 너무 많았다.
서로를 부둥켜안은 것 같은 모양새에서 내 몸을 두들기는 브라이언의 펀치와 무릎 차기는 꽤나 성가신 부분이 있었다.
“크읍! 흐압!”
다행히 근력은 내가 우위라 브라이언을 그리 어렵지 않게 떼 낼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브라이언이 딱히 힘 뺄 생각이 없는지 순순히 물러났다고 보아야 할까.
-퉁. 퉁.
복싱과는 다르지만, 독자적인 리듬을 가진 스텝을 밟으며 브라이언의 주변을 반 바퀴 정도 돌며 주먹들을 뻗어냈다.
하지만 브라이언은 철저히 본인이 반응할 수 있는 주먹에만 반응하며 그 대응법이라고 하는 것 또한 교과서에 실린 정석과 같았다.
그렇다고 너무 뻔한 반응이라 카운터를 치기 좋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꽤나 변칙적이면서도 차분한 파이팅 스타일.
확실히 텔론 회장이 썩 좋아할 스타일은 아니었다. 성격도 파이팅 스타일도.
화끈한 타격이 터져 나올만한 경기 운영은 아니었으니까.
“큽!”
그리고 문제는 이거였다.
-철컹!
어느 정도 손해를 보더라도 어떻게든 그라운드로 끌고 가려는 브라이언의 의지가 느껴지는 움직임.
일단 그라운드로 들어가면 불리할 게 불 보듯 뻔했기에 어떻게든 디펜스를 했고, 그 결과 1라운드에만 몇 번은 케이지까지 밀려났다.
그리고 1라운드가 채 1분도 남지 않았던 시점.
-쿵!
처음으로 더블레그 테이크다운을 허용하며 그라운드로 들어갔다.
**
“아! 강해서 선수! 첫 테이크다운입니다!”
“강해서 선수가 저렇게 깔끔하게 테이크 다운을 당하는 것도 보기 드문 일이죠. 그만큼 브라이언 제프 선수의 기량이 출중하다.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저녁 늦은 시간에 중계되는 종합격투기 경기.
스포츠온 TV의 캐스터와 김국현 해설위원은 강해서와 브라이언의 이벤트 매치에 순수한 한명의 격투기 팬으로서 몰입하고 있었다.
“우선 브라이언 선수는 확실히 밸런스가 좋은 선수입니다. 그리고 테크니션이 어느 한 곳도 빠짐이 없어요. 빈틈이 없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빈틈이 없다라. 올라운더 파이팅 스타일이며 상대 선수에 맞게 경기를 유연하게 운영할 수 있다는 말씀이시죠?”
“맞습니다. 강해서 선수는 확실히 그라운드보다는 타격이 월등히 뛰어난 선수인데, 1라운드 내내 타격으로 큰 재미를 보지 못했어요. 적어도 브라이언 선수의 타격 방어가 그리 낮은 수준이 아니라는 뜻이죠.”
“아! 말씀드리는 순간 강해서 선수! 그라운드를 빠져나오기 위해 포지션 변경을 시도합니다!”
테이크 다운으로 그라운드 싸움에 돌입한 강해서와 브라이언.
강해서는 오랜만에 꽤나 막막한 심정을 느끼고 있었다.
시야가 한정되어있는 그라운드 자세에서는 경험치가 절대적인 법이었다.
상대방의 움직임을 빠르게 캐치하고 그에 맞는 자세를 선택해 방어하며 반대로 상대의 약점을 노려 공격을 들어가야 했다.
여기서 강해서는 ‘상대방의 움직임을 빠르게 캐치하고’는 어느 정도 가능했다.
적어도 눈으로 보이는 브라이언의 동작에 대해서는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의 움직임과, 눈으로 보았더라도 적절한 대처를 빠르게 선별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라운드 싸움에서는 브라이언의 경험치가 압도적이었기에 버튼을 누르면 결과물이 나오는 것 같이 움직이는 그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것만으로도 강해서의 시간은 빠듯했기 때문이다.
브라이언은 강해서가 따라오기는 하기는 하지만 조금씩이나마 반응이 늦는 걸 보며 그라운드에서 승부를 봐야겠다는 심정으로 그를 압박해 나갔다.
힘에서는 강해서에게 꽤나 밀리는 브라이언이었지만 유리한 포지션을 잡고 있다는 이점으로 힘의 차이를 상쇄시킨 채 야금야금 체력을 빼먹으며 이득을 보고 있었다.
“아아. 강해서 선수. 브라이언 선수를 쉽게 떼내지 못합니다.”
“브라이언 선수가 아주 조금씩 유리한 포지션을 잡아갑니다. 강해서 선수의 그라운드 방어도 몰라볼 정도로 성장했지만, 브라이언 선수의 영리한 움직임에 계속 손해를 보고 있습니다.”
“그라운드의 스페셜리스트라는 선수들도 넘지 못했던 강해서 선수의 아성을 브라이언 선수가 이렇게 공략할 줄은 몰랐습니다!”
“브라이언 선수는 강해서 선수의 타격을 받아내며 그라운드로 끌고 갈 만큼 밸런스가 뛰어났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제껏 많은 선수들이 강해서 선수를 그라운드로 끌고 가려다 타격으로 무너졌죠.”
“아! 말씀드리는 순간! 1라운드가 종료되었습니다!”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지막에는 강해서 선수의 집중력이 풀렸는지 큰 실수를 하면서 거의 풀 마운트를 내줄 뻔했거든요? 시간이 더 있었다면 위험했을 수도 있습니다.”
항상 호쾌한 모습만 보여주던 강해서의 경기.
하지만 처음으로 1라운드 내내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오히려 마지막에는 위험한 모습까지 보여준 그의 경기에 스포츠온 TV 중계석은 꽤나 차가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WFC Vs. Broiler
강해서와 브라이언의 경기 첫 라운드가 끝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