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딱대격투천재의 탄생-130화 (130/203)

< 130화_결착의 순간 >

1.

5월의 둘째 주.

뉴욕에 온 지도 벌써 한 달을 살짝 넘긴 시기였다.

브라이언과의 이벤트 매치가 뉴욕에서 치러진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꽤나 들떴었다. 이제껏 대부분의 시합이 서부지역에 치우쳐 있었고 동부 쪽이라 해봐야 애틀랜타나 코네티컷 쪽이 다였으니까. 물론 코네티컷은 뉴욕과 가까웠고 오히려 뉴욕보다 더 동쪽이긴 했지만.

어쨌든 뉴욕에서의 시합은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뉴욕이라는 도시에 막연한 환상 같은 게 있었다.

미드나 미국 영화들을 보면 언제나 뉴욕이 나왔으니까. 우리의 이웃 거미 인간의 도시이기도 했으며 자유의 여신상이 있고 허드슨강이 흐르는 도시.

“이거. 또 멍 때리고 있네.”

체육관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으니 등 뒤에서 창섭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멍때리는게 아니라. 명상이요. 명상.”

“얼씨구. 안 코치님이 부르셔. 일어나.”

“넵!”

필승 형이었으면 이 새끼 저 새끼 하면서 뒤통수를 쳤을 텐데. 확실히 창섭 형은 필승 형보다는 조금 덜 매운 맛이란 말이야. 뭔가가 부족하네.

“... 너 지금 굉장히 그릇된 생각하지 않았냐?”

“네?”

“뭔가 변태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아서. 아니면 말고.”

“...”

뭐 신내림이라도 받으셨나.

그냥 필승 형이 보고 싶다는 말이었지 괴롭힘이 그립다는 말은 아니었다. 흠. 흠.

“코치님!”

“어. 해서 왔냐.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아요. 내일이면 베스트 컨디션이 될 것 같아요.”

“다행이네.”

참고로 몇 시간 후면 ‘WFC Vs. Broiler’의 계체 이벤트가 예정되어 있었다.

현재 체중은 92.5킬로그램.

“부담은 갖지 말되. 이겨라.”

“당연하죠.”

이번 브라이언과의 시합은 단순히 WFC와 브로일러의 대결이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사실 브라이언이 부상으로 리타이어한 후 브로일러로 이적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매치는 훨씬 이전에 성사되었을 테니까. 물론 라이트 헤비급이 아닌 미들급에서의 격돌이었겠지만 격투 팬들은 그런 걸 세세히 따지지 않을 거다.

만약 이번 시합에서 브라이언에게 패배하게 된다면 ‘브라이언이 부상만 안 당했어도 WFC 미들급과 라이트 헤비급의 챔피언은 브라이언이었겠네’ 와 같은 말이 나올 수도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충분히 준비했으니까.”

“그래. 아. 해서 널 부른 건 다름 아니라 헤비급 진출 관련이다.”

“헤비급이요?”

“그래.”

헤비급.

WFC에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였다.

93킬로에서 120킬로까지의 거인들이 사는 세상.

라이트 헤비급의 체중 제한이 83.9킬로에서 93킬로까지 약 9킬로 정도라는 걸 생각해보면 헤비급의 체중 제한은 27킬로라는 말도 안 되는 수치를 가지고 있었다.

같은 헤비급 안에서도 선수 개개인의 피지컬에 따라 몸집과 무게까지 어마어마한 차이를 보이는 말 그대로 ‘거인의 세상’

라이트 헤비급이 거인들의 세상 그 초목이라면 헤비급은 본격적인 괴물들의 세상이었다.

아직 나도 발을 내딛어보지 못한 미지의 땅. 과연 거기서도 내 피지컬이 통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알 수 없기에 더욱 두근거렸다.

“해서 네 몸은... 확실히 라이트 헤비급에 담기엔 부족하지만, 헤비급으로 보면... 뭐라 확실히 이야기하기 어렵다.”

“저도 알아요.”

키 2미터가 넘어가는 선수들이 득실거리는 체급.

120킬로 한계 체중을 꽉꽉 채워 몸을 만드는 괴물들이 존재하는 곳.

지금 내가 120킬로 한계 체중을 채우려면 근육이 아니라 살을 찌워야 할 테지.

“물론. 키가 크고 체중이 많이 나간다고 무조건 강한 건 아니다.”

“저도 안다니까요.”

“충분히 해볼 만해.”

“넵!”

“그 괴물 녀석만 아니라면 말이야.”

“...”

라무차.

WFC 헤비급 챔피언이자 종합격투기의 정점에 선 남자.

31전 31승.

무패의 기록을 가진 이 흑인 선수는 어떤 의미에서는 카이서스만큼이나 대단한 선수였다.

기본베이스 없음. 종합격투기를 통해 운동을 시작하며 이것저것 잡다하게 훈련했지만, 딱히 이렇다 할 특기 없음.

다만 압도적인 피지컬과 감각으로 언제나 예상치 못한 움직임들을 보여주며 압도적인 경기를 선보임.

통칭 ‘The Beast’

‘야수’라는 그의 닉네임이 말해주듯 라무차는 말 그대로 ‘인자강’의 표본이라고 할만한 선수였다.

게다가 그는 종종 인터뷰나 외부 매체에서 TWF31과 관련하여 나에게 꽤나 반감을 품은 모습을 보여주곤 했었는데, 내가 헤비급으로 체급을 올리면 아주 반가워하지 않을까 싶었다.

헤비급은 지금 모두 라무차의 눈치만 보며 타이틀 샷을 거부하는 상황이었으니까.

“라무차. 그놈은 테크니션이 부족하기 때문에 복싱에 진출하지 않았을 뿐이지 운동능력만 보자면 카이서스에 필적한다. 나는 그렇게 보고 있어.”

“음. 결은 다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비슷할지도 모르겠어요.”

카이서스는 확실히 나와 비슷한 부류일 가능성이 컸다.

그의 시합을 보면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으며 모든 상황을 자신의 통제하에 둔다는 느낌이 강했다.

말 그대로 ‘눈으로 보고 머리로 이해한 후 움직인다.’ 가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느낌.

라무차는 그와는 정반대로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냥 그렇게 움직였고, 결과적으로 그게 옳았다.’ 라는 느낌의 아주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경기들을 보여줬다.

카이서스나 라무차나 둘 다 괴물인 건 똑같다는 말.

라무차가 복싱의 섬세한 테크닉과 경기 운용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정말 재미있는 시합들이 가능했겠지.

“헤비급은 바로 타이틀 샷이 주어지진 않을 거야.”

“지금 타이틀 샷을 원하는 선수도 없지 않아요?”

“그렇긴 하지. 그래도 텔론 회장은 라무차와 네 시합을 사전 작업 없이 바로 붙이고 싶지 않나 봐.”

“흠...”

그래.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어쨌든 지금 나는 WFC에서 가장 잘 팔리는 카드 중 하나였다.

라무차 또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흥행수표 중 하나였고.

중요한 건 나와 라무차 모두 무패의 파이터라는 점.

만약 둘이 맞붙는다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1패라는 얼룩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그런 빅 매치라면 그 전에 사전 빌드업이야 충분히 할 수 있지.

“지금 헤비급에서 유일하게 타도 라무차를 외치는 선수가 있어.”

“어... 아! 패드릭! 패드릭 선수!”

“그래. 무서운 신예. 패드릭이다.”

패드릭.

헤비급 랭킹 8위.

랭킹으로 따지자면 그리 높지 않지만, 중요한 건 그가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재능 넘치는 어린 괴물이라는 점이었다.

뉴욕 뒷골목을 전전하다 10대 후반에 종합격투기를 접하게 되면서 단 몇 년 만에 WFC 헤비급 랭킹 8위에 오른 그의 이야기는 꽤나 유명했기에 나도 알고 있었다.

특히 나랑 종합격투기 경력이 비슷한 선수였기에 더욱 관심이 갔었고.

“일단 내일 있을 시합에서 이기는 게 중요해. 물론 공식전은 아니지만, 패배라는 글자가 새겨지는 순간 헤비급 타이틀전까지의 여정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럴 거면 패드릭 말고 대충 아무나 좀 붙여주지. 패드릭이면 너무 허들이 높은 거 아니에요? 완전 다음 세대의 최고 유망주인데.”

“너도 그에 못지않아. 엄살은.”

“하하하.”

안 코치님 말대로 절반쯤은 엄살이 맞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진심이었기도 했다.

벌써 서른셋. 두호 형을 생각하면 아직 한창인 시기였지만 패드릭과 같은 젊은 피들과 비교하면 벌써 한 세대 가까이 차이가 났다.

패드릭이 내 나이가 될 때 나는 지금의 두호 형보다도 나이가 많을 테니까.

‘뭐. 그때 가서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져 줄 생각이 없긴 하지.’

-짝!

한창 패드릭과 헤비급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려니 날카로운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자. 멍 때리지 말고. 슬슬 준비해. 계체 장으로 이동하자.”

“넵!”

그래. 일단은 눈앞의 시합부터 집중해야지.

가즈아!

*

뉴욕에 위치한 매디슨 스퀘어 가든.

흔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경기장’이라고도 불리는 곳으로 ‘WFC Vs. Broiler’의 이벤트 매치와 계체 이벤트가 치러질 예정인 곳이었다.

-찰칵. 찰칵.

-웅성. 웅성. 웅성.

이번 챔피언전은 WFC에서 단독으로 주최한 행사가 아닌 브로일러와 함께 공동주최한 첫 이벤트였다 보니 정말 제대로 신경 썼다는 티가 여기저기서 났다.

특히나 복싱 협회와 격투기 팬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 화려한 이벤트 구성과 무대 세팅 등은 선수인 나도 살짝 기가 눌릴 정도였다.

“텔론 회장이 아주 단단히 작정했나 보구나.”

“오스만 회장도 그렇겠죠. 이기든 지든 브로일러는 이번 이벤트로 명실상부한 2인자이자 큰 보폭으로 성장할 테니까요.”

따로 오픈 워크아웃을 가지지는 않았기 때문일까. 계체 장 안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경기장 한편에 마련된 계체 이벤트 무대와 경기전 기자회견을 위해 마련된 인터뷰 데스크들이 보였다.

“미스터 강!”

“여. 브로.”

계체 무대 뒤로 넘어가니 브라이언이 날 먼저 발견하고 반갑게 맞아줬다.

시합 전에 상대 선수와 이렇게 친근하게 인사를 나눈 적이 언제였더라. 두호 형이랑도 이렇게 편하게 얼굴을 마주 보진 못했던 것 같다.

“준비는 제대로 했어?”

“하하. 무슨 준비? 브라이언. 널 때려 줄 준비?”

“오. 노. 제발. 미안하지만 케이지 안에서의 나는 자비가 없을 거야.”

“역시 우리는 통하는 게 있어. 나도 마찬가지거든.”

“뭐? 하하하하.”

내일이면 서로 주먹을 나누어야 하는 상대였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동료’ 라는 느낌이랄까.

종합격투기에 입문하고 나서는 만나는 대부분이 ‘경쟁자’였다.

항상 싸우고. 얼굴 붉히고. 감정이 상했으며 시합 이후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그런 와중에 같은 팀의 선후배가 아닌 ‘같은 업계 동료’ 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친구는 브라이언 이 녀석이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잘 부탁해.”

“나야말로.”

아직 계체도 치르기 전인데 벌써부터 잘 부탁한다며 악수를 주고받은 나와 브라이언.

-메인 이벤트 선수들! 준비해주세요!

어느덧 바깥에서 우리의 계체 스탠바이를 알려왔다.

“자. 가볼까?”

“좋지.”

승패를 떠나. 이번 시합은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우리는 계체 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해서. 203.1 파운드. 계체 통과!

-브라이언 제프. 203.8 파운드. 계체 통과!

-우와아아아아아!!!

-찰칵찰칵.

-타탁. 타타타탁.

브라이언과 나는 계체량을 아무 문제 없이 순조롭게 통과하고는 텔론과 오스만의 리드하에 파이팅 포즈를 취하며 포토 타임을 가졌다.

그리고 이어진 시합 전 기자회견.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WFC와 브로일러는 시장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그 질의 차이는 크지 않다고. 내일이면 전 세계는 알게 될 겁니다. WFC가 세계 최대의 종합격투기 시장을 가진 데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요.”

“브로일러와 WFC의 차이는 그저 규모의 차이일 뿐입니다. 선수들의 복지. 파이트머니. 수준. 브로일러는 WFC에 모자랄 것이 전혀 없죠. 텔론의 말처럼 내일이면 알게 될 겁니다. 시장의 크기를 제외한 본질만 두고 봤을 때 브로일러가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우리는 내일 그것을 증명해낼 것입니다.”

정작 매치의 당사자인 브라이언과 나는 가만히 앉아있는데 텔론과 오스만 회장이 오히려 신나서 서로에게 으르렁거렸다.

-강해서 선수는 내일 시합을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어떤 준비를 하셨죠?

그리고 내게 돌아온 인터뷰 차례.

“예전에도 비슷한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의 답변을 다시 써야 할 것 같군요.”

-뭐였죠?

“저보다 강한 상대는 없습니다. 이제는 다들 제 이름을 아시죠? 전 강해서입니다. 영어로 제 소개를 하자면 Because I’m a strong 이라니까요?”

-아. 아! 하하하하. 그렇군요!

“예전에도 한번 말 한 적 있지만. 적어도 제 눈으로 직접 본 사람 중에는 저보다 강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브라이언은... 뭐. 휴게소 같은 친구죠.”

나는 마지막 맨트를 마치며 브라이언을 보며 씩 웃어줬다.

브라이언 또한 지금 인터뷰 내용이 지난 WFC 264 시합 전에 내가 했던 인터뷰 내용을 인용했다는 걸 알아챘는지 아주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무더운 텍사스의 5월이었지.

비록 2년의 시간을 돌아왔지만. 그때처럼 햇볕이 따가운 5월에 브라이언과 나는 이렇게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결착의 순간까지. 이제 꼭 하루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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