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_선택과 집중 >
1.
“조던 리가 미스터 강에게 꽤나 강도 높은 도발을 하고 있는 모양이야.”
“그래?”
카이서스는 오랜만에 체육관을 찾은 켄달의 말에 무심한 듯 대답했다.
“그래서?”
하지만 추가적으로 들어오는 그의 물음에서 켄달은 역시나 싶은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번 건도 한번 추진해볼까 싶어. 복싱 동양태평양 챔피언과 MMA 챔피언의 대결. 그림 나오잖아? 한 가지 우려는 미스터 강이 조던 리에게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패하진 않을까 하는 거지.”
“... 조던은 훌륭한 선수지. 하지만 미스터 강에겐 안 돼. 그는 나와 같은 종류의 사람이고 지금도 성장중이니까.”
“그렇지?”
카이서스의 대답에 미소를 숨기지 못하는 켄달.
이미 이런 카이서스의 대답을 기대하고 던졌던 질문이지만 막상 원하는 대답이 나오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역시. 카이서스를 움직이려면 미스터 강. 그 친구를 사용하는 수밖에 없어.’
지난 블레이크전 이후 카이서스는 몇 년 만에 ‘제대로된 훈련’이라는 걸 시작했다.
이미 압도적인 기량을 보여주는 그가 한 발짝이라도 더 나아가기 위해 땀을 흘리기 시작한 것.
하지만 몇 달 전 방어전을 기점으로 또다시 그 열정이 사그라들었다.
복싱은 MMA와는 달리 의무방어전 기간이라는 게 있어서 챔피언으로서 일정기간 안에 한 번씩은 꼭 타이틀 방어전을 치러야 했다.
4대 단체 통합 챔피언인 카이서스는 각 단체에서 지정한 도전자와 지명 방어전들을 치러야만 했는데 그 방어전에서 예전보다 월등한 기량으로 역대 최고라 불렸던 도전자를 1라운드 17초 만에 KO로 무너뜨림으로서 복싱의 황제는 카이서스라는 걸 뭇 대중들에게 다시 한 번 각인시켰다.
하지만 정작 카이서스는 그토록 싱거운 시합에 공허함을 느꼈으며, 그의 훈련에는 다시 나태한 일상이 묻기 시작했다.
“이번 조던 리와의 매치 업은 그가 더욱 복싱에 빠져들 수 있는 기회가 되겠지. 카이서스. 내가 그를 꼭 자네 앞으로 데려다 줄 테니 나만 믿으라고.”
“...”
오랜만에 켄달을 보며 씩 웃는 카이서스.
“켄달. 자네는 뭇 복싱 팬들에게 질타를 맞을 거야.”
“왜 그렇지?”
“미스터 강. 그를 맞이하기 위해선 나도 쉬지 않고 훈련해야 하거든. 그는 아직도 폭발적인 성장기인 괴물이니까. 그리고 그 때문에 나와 상대해야할 선수들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시련을 겪어야 할 거야.”
“하하하. 이제부터는 타이틀 방어전이 더 싱거워 질 것이다? 그래서 복싱 팬들에게 질타를 맞을 거다?”
꽤나 유쾌하게 웃어대는 켄달.
“그 말은 틀렸어. 카이서스. 복싱 팬들은 모두 내게 감사하게 될 거야. 나는 역대 최고의 복싱 매치를 성사시킨 프로모터로 기억 될 테고.”
복싱황제 카이서스.
그리고 지금도 시간을 먹어치우며 성장 중인 미스터 강.
언젠가 저 좁은 사각 링에서 그 둘을 마주보게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등골이 오싹오싹한 켄달이었다.
“우선. 조던 리부터 제대로 엮어봐야겠지.”
강해서가 브라이언과의 챔피언 전을 준비하기 시작한 그때.
켄달은 강해서와 동양태평양 챔피언의 이벤트 매치를 성사시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쾅! 꽝!
-삐걱. 삐걱.
“야. 야. 살살 좀 쳐라. 새 샌드백 헌드백 되겠다.”
“...으. 노잼.”
브라이언과의 이벤트 매치는 아직 한창 조율 중이었다.
아무래도 텔론과 오스만 사이의 의견 조율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거겠지.
챔피언전이라고 해서 브라이언과 내 시합만으로 이벤트 매치를 채울 수는 없었다.
우리 시합 외에도 다른 경기들을 매치시켜야 했고 이벤트 매치의 슬로건 자체가 ‘WFC Vs. Broiler’ 였기에 두 단체의 다양한 선수들을 밸런스 있게 매치업 시키는데서 꽤나 긴 시간이 걸리는 듯 했다.
그래도 꽤나 구체적인 가이드는 나왔는데, 5월 달 안에 이벤트 매치가 성사될 거라는 점이었다.
물망에 오른 선수들의 스케줄을 조율하고 경기장 일정을 맞추는 등 세부적인 내용만 남았을 뿐 가장 중요한 나와 브라이언의 의지가 확고했기에 일은 꽤나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해서야. 잠시 이쪽으로.”
“넵!”
훈련을 지켜보시던 안 코치님이 스트렝스 코치와 뭔가 이야기를 하더니 날 부르셨다.
“일단 지금 네 몸은 확실히 궤도에 오른 것 같다.”
“네?”
“라이트 헤비급에 어울리는 몸이 됐다는 거다.”
“아아.”
안 코치님 뒤쪽 벽에 붙어있는 전신 거울들을 통해 내 몸이 비춰졌다.
그리 우락부락하지는 않지만 정말 군살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근육질 몸매.
지금 내 몸무게가 100킬로를 살짝 상회하는 정도인데 이게 최초 ‘스트리트 파이트 시즌 2’에 참가했던 내 몸무게랑 비슷하다는 걸 생각하면 새삼 놀랍기만 했다.
그 당시 내 몸은 둥글둥글하고 부피가 컸었는데. 지금은 같은 몸무게라도 오히려 몸이 훨씬 슬림해졌으니까.
“중요한 건. 이 상태에서 정말 미들급 방어전을 치러낼 수 있느냐 하는 부분이지.”
안 코치님의 걱정스런 물음에 며칠 전 대화가 떠올랐다.
WFC에서 미들급 방어전을 최대한 올해 안에 해줬으면 한다는 요구. 그게 불가능 할 것 같으면 미들급 토너먼트를 위해 미리 말해주면 고맙겠다는 전달까지.
“어... 사실. 진짜 한번쯤은 방어전을 치르고 싶긴 해요.”
“강해서 선수. 지난번 미첼과의 타이틀전에서 힘들었던 것. 기억하죠?”
“네? 네.”
방어전을 치르고싶다는 말에 훅 치고 들어오는 스트렝스 코치.
미첼 전 부터 함께했던 내 전담 스트렝스&컨디셔닝 코치였다.
“만약 미들급 방어전을 치르겠다 마음먹었다면. 이번 감량은 지난번 미첼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울겁니다. 아니. 아마 어쩌면 감량 자체를 실패할 수도 있어요.”
“...”
사실 나도 어렴풋이 생각하고는 있었다.
미첼 전에서의 나는 일부러 근력운동을 자제하면서도 평체가 90키로 중반정도를 기록했었는데, 그래도 감량은 지옥 같았고 기량에도 많은 문제가 생겼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근육 량을 몇킬로는 늘린 상태에서 평체도 100킬로를 넘겼다.
‘어렵게 만든 근육을 다시 빼면서 감량을 시도한다 하더라도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 지옥 같은 시간을 감내하면서까지 미들급 방어전을 치를 필요가 있을까? 난 라이트 헤비급 벨트를 가졌는데?’
이런 생각들이 며칠 전 안 코치님과의 대화 이후 불쑥 불쑥 떠오르곤 했다.
“올해 안에 미들급 방어전을 치르려면. 브라이언과의 매치는 포기해야 합니다. 5월 달에 라이트 헤비급으로 그와의 시합을 가지고 겨우 반년만에 미들급에 맞는 몸으로 돌아가기 어려워요. 돌아간다 해도 리스크가 크고.”
“...”
“해서야. 잘 생각해야한다. 아래만 볼 게 아니라. 넌 더 위를 보고 있잖아.”
“...”
스트렝스 코치와 안 코치님이 말씀하시는 방향은 모두 한 방향이었다.
미들급 타이틀 포기.
“해서 네가 헤비급을 노리고 있지 않다면. 난 미들급과 라이트헤비급 두 체급을 모두 챙기라고 할 거다. 하지만 넌 충분히 위를 노릴 자격이 있어. 만약 두 개의 벨트를 선택해야한다면 나는 미들급과 라이트 헤비급 보다는 라이트 헤비급과 헤비급 벨트를 선택하겠어.”
“그건... 그렇죠.”
물론 나도 미들급 타이틀을 죽을 때까지 손에 쥐고있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한번 정도는 방어전을 치르고 싶었다.
브로일러에서도 미들급 타이틀을 획득한 후 단 한 번의 방어전도 치르지 않은채 WFC로 이적했었다.
그리고 WFC에서 쟁취한 생에 두 번째 타이틀. 그마저도 한 번의 방어전을 치를 수 없겠다 생각하니 조금 기분이 묘하긴 했다.
난 방어전이랑은 인연이 없나 싶기도 했고.
“방어전은 라이트 헤비급에서도 충분히 치를 수 있다. 잊지 마. 넌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이기도 해.”
“그렇죠.”
“아쉬워도 놓을 건 놓을 줄 알아야 해. 그래야 다음 사람에게도 기회가 돌아가지.”
다음 사람이라.
-힐끗
마침 체육관 반대편에서 한창 패드 트레이닝중인 두호 형이 보였다.
두호 형은 미들급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했으니 3월 웰터급 방어전 이후 미들급에 다시 도전하려나.
“후. 알겠어요. 일단 미들급은... 안 코치님이 잘 말해주세요. 대신. 5월 브라이언과의 이벤트 매치 이후 라이트 헤비급 방어전은 최대한 올해 안에 치르고싶다고도 말해주세요.”
“걱정마라. 텔론 입장에서도 너처럼 잘 팔리는 선수를 오래도록 놀게 놔두진 않을 테니.”
우려와 걱정이 가셨다는 듯 꽤나 상쾌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두드리고는 사무실로 돌아가시는 안 코치님.
“자. 해서 씨는 하던 훈련 계속 하죠. 다음 훈련은...”
결국 미들급을 내려놓기로 마음먹어서일까.
어떤 의미로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대신 라이트 헤비급과 헤비급에서는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더욱 단단한 결심도 생겼고.
“흐-으압!”
“하나 더!”
“악!”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으로서 내딛는 첫발. 브라이언과의 챔피언 전을 통해 세계에 증명하고 싶었다. 내가 어떤 선수인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2.
“... 이걸 내가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는 건가?”
텔론은 지금이 최근 들어 가장 불쾌한 순간일거라 생각했다.
“가져가시게. 우리는 그에 응할 생각이 없어.”
“하하. 텔론. 그를 복싱 계에 뺏기고 싶지는 않잖아?”
“뭐?”
그런 텔론의 신경을 살살 긁고 있는 켄달.
그는 복싱 동양태평양 챔피언인 조던 리와 강해서의 복싱 이벤트 매치를 제안하기 위해 텔론과 독대 중이었다.
“애초에 그는 우리 WFC의 선수이고. 그 전에 종합격투기 선수야. 복싱 계에 뺏긴다니. 망상이 과하군.”
“그는 언제든 복싱계로 전향할 수 있지. 그에겐 재능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 재능을 높이 사는 곳은 아무래도 WFC보다는 복싱계가 될 테고.”
“나도 그의 재능을 충분히 높이 사고 있어.”
“그게 얼마큼이지?”
“...”
“우리 모두가 알잖아. 이 바닥에서 높이 산다는 건 결국 돈이야. 그래서. 그의 지난 타이틀전은 얼마짜리 매치였지?”
“...”
파이트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텔론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최상급 선수의 파이트머니를 따지고들면 MMA는 복싱에 비비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를 복싱계에서 독점할 생각이 없어. 협회의 늙은이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뭐?”
“미스터 강. 그의 재능을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지. 난 그를 위해 미스터 강이 필요할 뿐이야.”
“대체 무슨 말이야?”
“위대한 황제.”
“... 카이서스 말인가?”
“그래. 나는 미스터 강이 그의 새로운 활력소가 되길 원해. 또한 복싱 계와 종합격투기 계의 화합의 장이 될 수도 있겠지.”
“화합?”
“내 제안을 수락하면. 절대 미스터 강이 복싱계로 전향하는 일은 없도록 책임지고 마크해주지. 적어도 MMA를 버리고 복싱을 선택하는 일은 없도록 해주겠단 말이야..”
“그건 자네 생각일 뿐이지.”
텔론은 켄달의 협박 같지도 않은 협박과 말도 안 되는 제안을 수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득은 크지 않으며 위험 리스크만 높은 독이든 사과와 같은 제안이었으니까.
-삐
-회장님. 방문 신청이 있습니다.
그때 바깥에서 들어온 손님의 방문 알림.
한창 켄달과의 미팅중인 걸 알면서도 손님이 왔다는 전달을 했을 정도면 평범한 방문자는 아닐 듯싶었다.
-멜린가의 가주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텔론의 오랜 친구이자 WFC 초창기에 많은 도움을 줬던 멜린가의 가주.
레이첼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가 오랜만에 텔론을 보기위해 WFC 본사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