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딱대격투천재의 탄생-124화 (124/203)

< 124화_반전? >

1.

“아프진 않아?”

WFC 283시합이 끝난 직후.

나는 지난 몇 개월간 경험했던 투박하고 거친 손과는 차원이 다른 부드러운 손길을 경험하고 있었다.

“많이 안맞은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네.”

“하하. 아무리 그래도 격투기를 하는데 안 맞을 수는 없지.”

내가 아무리 잘 본다고 하더라도 물리적으로 피할 수 없는 공격이라는 것들이 있었다.

뭐. 그런 종류의 공격들은 대부분 막아내기 때문에 유효타는 거의 없었지만 몸에 상처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맨몸에 글러브가 강하게 스치고 지나가며 살갗이 찢어지는 경우들도 있었으니 이정도면 양호한 편이었다.

“아프겠다...”

“보기만 그렇지 별로 아프진 않아.”

아름이는 퍼렇게 멍이든 팔다리와 조금은 붓고 쓸린 자국이 있는 몸 여기저기를 쓰다듬고 있었고 우리는 첫 연말을 함께하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진짜 괜찮으려나.”

“또. 또.”

짐짓 엄격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아름이.

암만 그래도 걱정되는 걸 어떡하나? 원래 이런 공개 연애는 상대적으로 여자 쪽의 피해가 훨씬 큰 법인데.

거기다 본업도 난 연애와 상관없는 격투기고 아름이는 연예인이었으니 걱정이 안되는 게 이상했다.

-지이이잉

-톡! 톡!

“어후. 전화, 문자, 톡. 아주 쏟아지는구만.”

“풉. 그래서 읽지도 않고 있어?”

“한번 확인하기 시작하면 개미지옥이 될 것 같아서.”

승리 인터뷰가 끝나고 도핑까지 마친 후 숙소에 도착한 지금은 자정을 훌쩍 넘겨 월요일 새벽.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제 일요일 오후일 뿐이었다.

당연히 승리 인터뷰에서 아름이 와의 공개 연애를 밝힌 걸로 무수한 연락이 오고 있겠지. 과연 내 타이틀 축하 연락과 아름이와의 연애관련 연락중 어느 쪽이 더 비중 높을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나도 소속사랑 이야기는 했어. 그... 갑자기 무대에서 그렇게 밝힐 줄은 몰랐지만.”

꽤나 붉어진 표정으로 후다닥 말을 끝맺는 아름이.

“응? 뭘 밝혀?”

“... 그, 그거.”

“그거 뭐? 브라이언이랑의 매치?”

“그거 말구...”

“그럼 뭐?”

“...”

빙글빙글 웃으며 아름이를 바라보자 그녀는 이제 목덜미까지 분홍빛이 되어 있었다.

아. 왤케 귀엽냐. 세상 인생 선배 같다가도 이런 부분은 의외로 엄청 부끄러워하는구나 싶었다. 아이돌 활동도 하고 솔로가수에 배우까지 하는 애가 이런 데는 내성이 없다니.

“나빴어.”

“아야!”

내가 놀린다는 걸 확실히 눈치 챘는지 팔뚝을 꼬집는 아름이. 근데 생각보다 너무 세게 꼬집는데? 격투기 선수는 통각이 없는 거라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여자 친구가 있다고 말한 거 말이야. 그리고 나라고 소개해주고.”

흠. 흠. 놀린다고 몰아세우긴 했지만 막상 아름이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들으니 살짝 낯간지러움이 있었다.

“사실. 태어나서 처음이었어. 누가 나를 여자 친구라고 다른 사람한테 소개해준거. 물론 그 다른 사람이 너무나도 전세계적이어서 놀랐지만. 헤헤.”

아...

그러고 보니 아름이는 이제껏 남자친구를 한 번도 사겨본 적이 없다고 했었다.

저 나이에 저 외모에 저 끼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진짜였다.

10대 후반부터 연습생 생활. 20대 초중반은 아이돌로서 숙소생활을 했고 이미지 관리 덕분에 연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아이돌 그룹이 해체된 뒤에는 솔로로 활동하며 연기자 활동을 지속했지만 그놈의 첫사랑 덕분에 연예인과의 연애는 생각지도 않았다고.

‘그러고 보니 뭔가 열 받네. 첫사랑이라니.’

전 여자 친구도 있고 몇 번의 연애경험이 있는 내가 아름이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그냥 감정적으로 그렇다는 거다. 감정적으로.

“그... 기분 좋았어.”

“응?”

“사실. 어려서부터 만인의 연인같은 자리에서 항상 모두에게 사랑받는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살아왔거든.”

“...”

“그런데 해서 네가 인터뷰에서 날 여자 친구라고 소개하는 순간. 묘한 느낌이었어. 이제껏 날 지지해주고 사랑해주던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 이제껏 자유로웠던 내 행동 반경이 너라는 존재에 의해 좁아질 수도 있겠다는 구속감.”

아니. 뭘 그렇게 까지나... 어차피 나와 사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연예인이 연애한다고 해서 싫어하는 건 좀 정상이 아니지 않나?

물론 나도 예전에는 좋아하던 연예인의 열애설이 뜨면 배신감을 느끼곤 했지만. 흠. 흠.

“그런데. 그것보다도 눈으로 보이고 온전한 내 편이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게 든든하고 기분 좋았어. 구속이라는 건 어떻게 보면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이기도 하니까. 헤헤.”

역시나 이런 종류의 말을 내뱉는 게 익숙하지 않은지 눈을 딴 곳으로 돌리며 헤헤 하는 웃음으로 끝을 흐지부지 날려버리는 아름이.

아. 왤케 귀엽냐.

오늘 시합 끝나서 최대한 휴식을 취해야 하는데 말이지.

“아름아!”

“꺅!”

아무리 라스베이거스라도 12월은 추우니까 말이지.

서로의 체온으로 따뜻하게 자야한다고.

*

“헤모글로빈 수치요?”

“그래.”

이거 비슷한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데?

에리스... 뭐시기 하는?

“안 그래도 맘모스에게 연락이 왔더라. 해서 너는 일단 코네티컷으로 날아가.”

“갑자기요?”

“이런 논란은 미리미리 잡아두는게 좋지. 너. 약물 사용한 적 없잖아?”

“... 안 코치님이 제일 잘 알면서.”

안 코치님은 옛날 사람이기 때문에 약물 사용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으신 분이라고 들었다.

실제로 2010년대 이후 USADA가 도입되고 나서야 금지약물에 대한 제재가 심해진 거지 그 전에는 바보 아니면 모두 도핑을 했던 약물의 시대가 있었으니까. 안 코치님은 그 시대를 살아오셨던 분이고.

“그러니까. 어차피 EPO관련은 의혹만 제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마저도 털어버리면 그만이고. 다행히 예전에 예일대학교에 네가 예전에 받았던 검사 기록이 있다하니 이번 기회에 다시는 비슷한 논란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게 좋겠지.”

“넵.”

이제 기억났다.

예전에 코네티컷으로 첫 훈련을 갔을 때 맘모스 코치를 따라 무슨 대학교 연구실에서 이것저것 검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만약. 네가 조금만 많이 두드려 맞는 타입의 선수였다면. 나는 네게도 도핑을 권했을지 모른다.”

“...네?”

“브로일러가 WFC보다 여건이 나은 점은 딱 한가지지. 도핑에 그나마 관대하다는 것. 도핑은 선수의 경기력 향상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부상률을 줄여준다. 안면 펀치가 많은 투기종목에서 몸의 내구성을 높여준다는 건 어마어마한 메리트야. 부상의 리스크를 줄이고 시합에 나갈 수 있다는 거니까.”

“...”

실제로 WFC 소속 선수들 중 몇몇은 USADA 도입 이후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브로일러나 다른 단체로 이적을 하는 사례들이 있었다.

약물 사용으로 근력과 내구성을 키우면 시합에서의 위험성도 낮출 수 있고 조금 더 자주 시합을 치를 수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런 약물들이 금지되면서 부상의 두려움과 시합 기피 현상들이 일어나고 실제로 내구성이 확연히 떨어져 커리어가 망가진 선수들도 많았다.

“그리고. 텔론 회장의 인터뷰는 봤지?”

“아. 네.”

데릭 헨더슨에게 1년간 출전금지처분을 내렸다는 기사를 오늘 아침 읽었다.

헨더슨은 그 처분에 반발하며 SNS로 격투기 팬들에게 뭔가 호소하고 있는 듯 했는데 여기에 내가 낄 부분은 없으니 그냥 조용히 어떻게 사태가 흘러가는지 관망해야겠다 싶었다.

“WFC측에서 연락이 왔었다.”

“네?”

“이번 네 테스트가. 흠. 뭔가 석연찮은 부분이 있다고 말이야. 아직 WFC에서도 확신은 못하는 것 같은데. 다행히 네가 약물이 걸리지 않아서 이런 연락이나마 준 것 같다.”

이건 또 무슨 소린지. 시합중 도핑 테스트를 받은 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말 같았다.

“... 어쩌면 누군가가 해서 네 약물을 의심... 아니. 어쩌면 확신을 가졌을 수도 있지. 어쨌든 그런 마음을 가지고 도핑 테스트를 유도한 것 같다.”

“애초에 도핑 테스트가 도핑 의심이 가는 선수들을 대상으로 하는 건데. 뭐가 문제에요?”

“그게 USADA 내부에서 나온 의심이라기보다는 외부의 누군가의 입김일 수 있다는 거지. 게다가 시합 전부터 대놓고 도핑테스트를 하겠다고 어슬렁 거리는건 확실히 이상해.”

하긴. 그건 그랬다.

원래 시합중 도핑 테스트도 무작위로 선정되는 거라 시합이 끝나고 나서야 본인이 테스트 대상자로 선정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지난 시합에서는 대놓고 USADA 직원들이 우리쪽 대기실을 기웃거렸었지.

“물론 우리는 떳떳했고. 너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만약 우리가 캥기는게 있고 네가 도핑 테스트에 불안함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경기력으로 나타날 수 있는 부분이었어.”

“아...”

그런 식으로는 전혀 생각을 못해봤네.

난 그냥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외부 입김. 헨더슨 쪽에서 불어온 것일 수도 있다는 의심이 있나봐.”

“헨더슨이요?”

“그래. 그래서 텔론이 조심스럽게 움직인 듯 하고. 아마 둘의 트러블은 꽤나 깊어질 수도 있겠다.”

“흐음...”

USADA는 WFC에서 도핑관련 업무를 위탁한 단체지 WFC산하의 기관이 아니었다.

WFC 뿐만 아니라 미국 내 많은 스포츠 협회와 시합. 선수들을 대상으로 움직이는 USADA는 어떤 의혹이나 비리가 있더라도 외부인인 텔론이 밝혀내긴 어려울 수 있었다.

일단 내가 해야 할 최우선 순위는 도핑 의혹에서 확실히 벗어나는 것이겠다.

그래야 둘의 싸움에 괜히 한쪽 다리라도 휘말리는 일이 생기지 않을 테니까.

“코치님. 저 다녀올게요. 코네티컷.”

오랜만에 맘모스 코치도 벤슨도 보고 싶었으니까.

**

“... 확실해?”

“그래. 금지약물 소견은 전혀 없음으로 떴다.”

“이런 망할.”

헨더슨은 오늘 오후 두 개의 기사가 뜨기 전부터 심기가 좋지 않았다.

바로 전날 WFC측으로부터 1년간의 출전 정지 징계를 받은 바 있었고 오늘 아침에는 강해서의 도핑 테스트 결과를 미리 받아볼 수 있었으니까.

“헤모글로빈 수치가 높다며?”

“... 알잖아. 자가 수혈이나 다른 편법이 의심되긴 한데... 확실하게 잡아낼 수 있는 건덕지가 없어.”

“주변 체크는 해봤어?”

“당연하지.”

자가 수혈이란 시합 몇 주 전부터 본인의 피를 미리 뽑아뒀다가 계체 이후 다시 수혈하는 방식의 도핑이었다. 물론 WFC에서는 이 방법 또한 금지하고 있었고.

중요한건 자가 수혈이라는 게 말처럼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것이었다.

일단 혈액을 뽑아야하고 그걸 몇 주간 안전하게 보관을 해야했다.

그리고 계체 이후 다시 그걸 수혈 받아야했고.

선수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방식의 도핑이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고 의료시설이 받쳐줘야 가능한 도핑 방법이라는 뜻이었다.

“후우. 텔론 쪽은 어때?”

“일단 징계 통보만 내려둔 상태야. 언론 쪽으로도 영상이나 증겨자료를 푼 건 아니고 그저 영상을 입수했다는 정도만 언론에 밝힌 상태야. 정확히 어떤 영상인지 어떤 내용인지의 언급은 일체 없어.”

“...”

헨더슨은 지금도 욱씬거리는 왼쪽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시합 전부터 강해서를 흔들기 위해 섭외했던 USADA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거기에 더해 실제 테스트 결과에서도 금지약물의 반응은 없었다. 그저 헤모글로빈 수치가 높다는 정도가 다였기에 의혹을 제기한 게 전부.

거기에 텔론은 강해서의 승리인터뷰를 의식한 탓인지 자신에게 1년의 경기 출전 정지를 명령했다.

중요한건 계체 이벤트 때 말 했던 텔론의 발언과 이번 인터뷰 내용이었다.

“... 텔론이.”

그 내용들을 곱씹던 헨더슨은. 한 가지 가정을 생각해봤다.

“만약 텔론이.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계체 이벤트때 했던 말이나. 이번 인터뷰에서 언급한 증거 영상이. 만약 텔론의 블러핑이라면 어떨까 하는 가정을.

“생각해봐. 나와 브라이언의 대화가 찍힌 영상이 진짜 있었다면. 텔론은 그에 관한 언급을 조금이라도 했어야 하지 않을까?”

“...”

“정확히 어떤 말을. 어디서 했는지도 모르는 것 같지 않아? 그저 증거 있으니까 조심해. 증거 있으니까 1년간 출전하지 마. 이런 식의 협박으로 들리는데 나는. 그런데 정작 증거가 있다는 걸 본 사람은 없단 말이지.”

“... 확실히 일리가 있어.”

그런 헨더슨의 의견을 그의 매니저 또한 허투루 넘기지는 않았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으니까.

텔론은 노회한 사업가이자 모략꾼이었고 패자에게는 가혹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결정적인 증거를 쥐고도 헨더슨을 완전히 자르는 게 아니라 이런 애매한 징계를 내린다?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이대로 그냥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겠지. 일단. 텔론 쪽으로는 계속 억울하다는 식으로 어필해주고. 언론에는 텔론이 말한 증거가 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기사들을 내보내줘. 아! 강해서에 관한 기사도. EPO나 자가 수혈에 관련된 기사들과 그로 인한 부정적인 사례들을 들면 좋겠어. 어차피 이런 의혹은 이쪽에서도 밝히기 어렵지만 저쪽에서도 깨끗하다는 증명을 하기 어려우니까.”

어떻게든 WFC 283 시합을 이기고자 했던 헨더슨.

지금은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으나 마지막 반전을 노려보는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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